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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된 우리나라 현실은 남과 북 경계인 휴전선이 있습니다. 육지는 남북 2km씩 비무장지대가 있지만, 바다 한강구역은 경계선을 둘 수 없어 중립지역으로 정해졌는데 이 곳을 '강 위의 비무장지대'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 곳은 서해 갯벌지대로 조수간만의 차가 커서 북한주민이 물이 빠진 시간을 이용해 쉽게 남쪽으로 넘어오는데 지난 8월 8일 인천 강화군 교동도 중립지역으로 북한 주민 1명이 귀순한 것입니다.
목숨 걸고 자유를 위해 탈출한 북한 주민이 해마다 늘어나는데 2022년 6월 기준 한국으로 입국한 탈북자의 수는 3만 3천명으로 사망자, 이민자 등을 제외하면 2022년 한국에서 실제 거주 중인 탈북민은 2만 7천여명으로 추산된다고 합니다. 북한 주민이 목숨 걸고 남한으로 넘어온 탈북이유가 있겠지만 그래도 소중한 자유가 그리워서입니다.
1990년 동, 서독이 완전통일을 이루웠는데 통일이 이루기전 한 동독 청년이 베를린 장벽을 기어 올라갔습니다. 목격한 동독 군인들이 청년을 향해 총을 겨누며 내려오면 살려준다고 외쳤습니다. 장벽만 넘으면 서독 땅이니 아랑곳하지 않고 올라가는 청년을 향해 군인들이 총을 쏩니다. 결국, 청년은 총에 맞아 장벽 밑으로 떨어졌는데 그의 마지막 말은 ‘프라이하이트(Freiheit:자유)!’라고 외치고 죽었습니다. 자유를 위해 죽은 것입니다.
하늘을 나는 새는 어디서나 자유롭게 왕래합니다. 지금도 남북을 오고가며 자유롭게 날고 있습니다. 물고기가 물 속에서 남북을 오가며 바다를 자기 집으로 삼고 행복하게 왕래 하며 살고 있습니다.
이런 자유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셨는데 진정한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오고 오는 인류의 역사는 지금까지 자유를 위해 피나는 투쟁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계지도를 볼 때마다 인접한 일본이란 나라를 보게 됩니다. 가까우면서도 멀게만 느껴지는 나라 맑은 날에는 부산에서 대마도가 훤히 보인다고 합니다. 이렇게 지리적으로 가까운 일본이 우리나라를 36년간 나라를 빼앗고 자유도 빼앗아갔습니다. 한 마디로 남의 집에 와서 주인 행세를 한 것입니다..... 우리 선조들이 이런 아픔을 안고 살았습니다.
우리나라를 빼앗은 일본의 잔악상은 아시아를 넘어 세계를 정복하고 자 하는 헛된 야망을 가졌습니다. 일본이 저지른 만행은 우리가 밥을 떠먹는 숟가락까지 빼앗고 빼앗은 손가락을 녹여 군함을 만드는 전쟁도구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교회를 향한 핍박도 적지 않았는데 놋쇠로 만든 교회 종을 가져갔고 교회에서 찬송을 부르는데 일본 말로 찬송을 부르게 했고 찬송가를 조사하여 “하나님” 가사가 있으면 부르지 말라고 하고 찬송가에서 아예! 떼어 버렸고 만약 조사해서 찢어버리지 않았다면 찬송가를 들고 예배당에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고 합니다.
공출이란 명목으로 쌀을 빼앗아 갖고, 지원병제도를 두어 젊은 사람들을 강제로 군대에 보내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 민족은 자유가 없는 36년 일본이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빼앗아 갔습니다.
일본은 그랬을 것입니다. 우리나라를 발판으로 삼고 대륙으로 뻣어 나가지 않으면 우리가 살길이 없다 이렇게 생각하고 우리민족을 영원히 지배 할려고 한 것 입니다.
그러나 일본 마음대로 됩니까?..... 역사의 주관자가 되신 하나님은 1945년 815 해방의 기쁨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해방의 감격 만세소리 그날의 함성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해방의 기쁨은 곧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알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3일 전 8.15 광복절 79주년 보냈습니다...... 광복이란 빛이 되돌아왔다는 뜻으로 1945년 8월 15일 일본으로부터 국권을 되찾는 날로 국경일입니다. 그러나 올해 광복절은 반쪽짜리 행사로 국민의 마음이 분열되었습니다. 대통령 멧세지 한마디가 국민을 대변하는데 일본을 향해 뻐 있는 한마디가 없고 고통 받는 북녘 땅까지 자유를 확산시켜야 한다며 '자유'란 말을 50번이나 언급한 것으로 경축사가 끝났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의 메시지가 아쉽지만 자유만큼은 어느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인간이 누리는 최고의 가치인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는 왜 이처럼 자유를 갈망할까요?....... 자유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인간에게 주신 가장 큰 축복의 선물이요 사람이 존재하는 기본적인 욕구이기 때문입니다.
C.S.루이스는 자유에 대해 “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가장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면 자유의지를 부여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진정한 자유를 주신 창조주 하나님을 인간이 배반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아주 심오한 말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후 인간에게 모든 것을 위임했습니다. 그러나 너는 나를 의지하고 사는 존재’라 말씀하시고 그 의지의 표시로 선악과나무를 주시면서 ‘이것 하나만 먹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교만하여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모든 것이 허용됐지만 단 하나, 먹지 말라고 하신 열매를 자기 의지로 먹었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위반한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 법안에서 자유를 만끽하지 못한 인간에게 죄가 들어 왔고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결정적인 결과가 오게 된 것입니다. (롬6:23)
그렇습니다........ 죄인인 저와 여러분은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을 떠난 비참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비참한 인간을 위해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를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 인간의 죄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시므로 인류에게 속죄의 은총을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누가 무슨 말을 하면 첫 마디를 통해 그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 이 땅에 오셔서 30년은 육신의 아버지 요셉 곁에서 수종들며 지내셨습니다. 그 후 예수님은 영적훈련소 광야에서 40일 금식하시고 하나님 나라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그 시작점이 어디였는가 하면 유대인들이 예배드리기 위해 모이는 회당에서 말씀을 펼쳐 선포 하시고 시작하셨습니다..... 공생애 시작 첫 설교 그 외침은 어떤 말씀이었을까요?
눅 4:18-19....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예수님이 선포하신 이 말씀은 이사야 61:1-2 말씀을 그대로 유대인들에게 적용하신 것입니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
그렇습니다..... 예수님 첫 번째 외침은 유대인들에게는 꿈같은 희망이요 위로와 소망이 담겨진 말씀입니다. 구원자 메시야가 오시면 우리를 자유하게 해 주실 것이다 라는 위로이기에 자나 깨나 메시야를 기다리며 살았습니다. 그만큼 자유를 갈망 할 수밖에 없는 것은 로마의 식민지 아래 진정한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혜성처럼 나타난 예수님께서 저들에게 그렇게 갈망하고 기다리는 그 자유를 말씀하신 겁니다. 그래서 무리들이 예수님이 읽은 그 말씀을 주목했고 깜짝 놀랐어요 저 청년이 도대체 누구인가?~~~
그렇습니다...... 예수님 사역의 가치는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눌린 자에게 자유롭게 하고.....예수님은 자유가 핵심 가치였습니다.
포로 된 자나 눌린 자는 어떠 모습입니까? 자유가 없습니다. 자유가 없으면 먹고 싶어도 먹을 수 없고, 먹기 싫어도 주는 것을 먹어야 하고 가고 싶어도 갈 수 없고, 가기 싫어도 가라하면 가야 하는 것이 포로 된 자에게 나타난 비극 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말씀 갈5: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다고 바울은 외치고 있습니다.
바울이나 저와 여러분은 지금 몸은 포승줄로 묶이지 않았습니다. 얼마든지 자유롭습니다. 그런데 내가 아무리 선하게 살고 싶어도 선하게 살아지지 않습니다. 내 의지로는 선하고 싶은데 결과는 죄를 짓고 있는 겁니다. 내 의지는 천국을 향해야지... 하는데 내 몸은, 내 입술은 죄를 짓고 있는 겁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면서도 여전히 종의 멍에를 매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도 그리스도안에서 자유함을 누리지 못하는 것 때문에 고민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영적 갈등 영적고민으로 끝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자유케 하셨으니 굳건하게 서서 종의 멍에를 매지 말라고 외친 것입니다.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주님 안에서 자유를 흔들리지 말고 굳건하게 지키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내가 가지고 있는 소중한 것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으면 결국엔 빼앗기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에 히틀러에게 학살당한 600만 유대인을 추모하는 기념관이 있습니다. 그 이름은 “야드바심”으로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기념관에는 이런 글이 있습니다. “ 용서하라 그러나 과거를 잊지 말라” 이스라엘 민족은 고통스러운 과거를 잊지 않고 후손에게 교육하며 아픈 고난을 마음 판에 새기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학교교육현장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초등학교 선생님이 안중근 의사에 대해 가르치는데 철수가 졸았습니다. ” 철수야 졸지마라! 깜짝 놀라 잠을 깬 철수가 “ 선생임 저 안 졸았어요 그래 선생님이 물었습니다. ”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하는데 앞장선 사람이 이토 히로부미인데 누가 죽였니 당황한 철수가 선생님 제가 안 죽었는데요 하고 울어버렸습니다.
선생님은 어이가 없어서 다음날 어머니를 모셔오라고 했습니다. 학교에 온 어머니가 선생님께 말합니다. “ 선생님 우리 철수가 사람을 죽일 만큼 나쁜 애가 아닙니다. 믿어주세요 아버지가 퇴근하여 아들 이야기를 듣고 철수를 불렀습니다. 철수야 솔직해야 한다. 괜찮아!~~ 네가 ”이토인가 누구인가 하는 일본사람을 죽인 거 아니야 너는 일본에 가본 적도 없지 않니~~~
요즘 우리나라와 일본 사이가 좋아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조금도 변한 것이 없습니다. 여전히 독도를 일본해로 표기해 놓고 자기 땅이라고 우깁니다. 우리나라를 식민지하며 삼았다며 잘못된 과거를 통렬히 무릎 꿇고 사죄하는 진정성을 언제 볼 수 있을까요!
우리는 즉시 해야 합니다 일본의 자세가 강팍하면 할수록 소중한 자유를 위해 용사들처럼 빼앗으려고 드는 세력 앞에 ‘굳건하게 흔들리지 말고 서야 할 것입니다.
다음.... 주님이 주신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라고 했습니다.
갈5:13 다시 읽습니다.....“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를 주시기 위해 은혜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자유가 도를 넘어 방종이 되는 어리석은 행위가 우리 사회 곳곳에 만연되고 있는 슬픔입니다. ...... 바울은 은혜로 주신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바꾸면 안 됩니까?.......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사용하면 의의 종이 아니라 죄의 종이 되기 때문입니다.
간혹 가출하는 자녀들이 있습니다. 부모님의 통제를 벗어나서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량한 아이들과 어울립니다. 자유롭게 자신들의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합니다. 결국 범죄의 소굴로 들어갑니다. 누가 지적해 주지를 않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감옥에 갑니다. 집 나가는 것이 자유인 것 같지만 통제된 감옥으로 들어가는 철없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영적인 삶이 그렇습니다. 신앙생활, 믿음 생활을 의무나 속박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처음 교회 등록하신 교인이 그런 말을 합니다. “목사님! 교회를 매 주일 나가야 합니까?” 무슨 뜻이 담겨 있습니까? 그만큼 교회 나가는 것이 부담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고백은 복음 안에서 자유를 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 부르심으로 소중한 자유를 입었습니다. 이 자유는 방종이 아닙니다. 우리의 욕망대로 살아가는 자유가 아닙니다. 이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삼는 것도 아닙니다.
왜 예수 믿는 성도가 죄 된 자리, 오만한 자리에 가지 않아야 합니까? 그 자리에 있으면 육체에 기회를 주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왜 술을 금합니까? 성경에 술 취하지 말라고 했으니까 조금 먹어도 된다고 말한 교인이 있습니다. 술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닙니다. 건강을 위해 포도주를 쓸 수 있다고 성경은 말씀 했어요 그러나 술이 술을 먹고 취하면 죄를 범할 수 밖에 없고 육체에게 기회를 줘서 방탕의 기회로 삼을 수 밖에 없는 상황까지 오게 됩니다.
이 때 가장 반가워 하는 쪽은 누구일까요?........ 거짓 영 마귀입니다. 마귀는 우리의 행위를 보고 마음껏 박수 치며 잘 한다고 속삭입니다.
바울도 이 사실을 깨닫고 회개하기를 로마서 7:24.....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영적인 자신의 곤고함을 회개 했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주신 자유를 마음껏 누리지만 죄를 짓게 만든 육체에 기회를 주는 일이 없도록 깨어 있는 성도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다음.....갈 5 : 13 하반절 보세요 자유로 부르심을 입었기에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자유하시며 모든 사람에게 사랑으로 종 노릇 하며 사셨습니다. 우리 예수님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신 것은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셨다고 성경 빌립보서 2장 7절에 말씀 했습니다.
우리 예수님 천국 사역을 하실 때 가는 곳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따라 다녔는데 이들은 죄인들과 거리를 두었습니다. 자기들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기에 죄인들과 같이 있는 것은 죄를 짓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면서 청년 예수가 어떻게 하는가 엿 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점에서 너무나 자유 하셨습니다. 간음했던 여인이 죄를 지었다며 현장에서 너도 나도 돌로 쳐 죽일려고 할 때 예수님은 죄인인 여인 곁에 있었습니다.
수군거리며 죄인이라고 여겼던 삭개오의 집에 유하며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누웠습니다. 장애인이나 병자 소외 당하는 자들에게 손을 내미셨고 그들을 돌보아주셨습니다. 누구든 자유하시며 만나셨고 소통했습니다.
그렇습니다......우리가 주님이 주신 자유를 입었다면 서로 사랑으로 종노릇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신 자유가 없을 때는 서로 서로 마주 본 상태가 아니였습니다. 주인과 종의 관계로 주인은 명령하고 종은 고개 쳐 박고 무조건 복종하는 수직적 관계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십자가로 구원받고 죄에서 해방되어 자유 함을 얻는 순간 서로 서로 마주 보는 것이 자연스러움으로 다가옵니다....... 서로 눈치 보는 것이 없습니다.....그리고 서로 서로 바라보며 손을 잡게 합니다.... 안아주게 됩니다...... 주인이 종을 종이 주인을 섬기는 아름다운 모습 그대로 보여 주었습니다.
김제 금산리에 ‘ㄱ자 교회’로 알려진 금산교회가 있습니다. 이 교회에 전해지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구한말 레위스 테이드 선교사님이 이곳에 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 때 그 고장에서 가장 큰 부자인 조덕삼이라는 사람의 집에 머물게 됐습니다. 이분이 예수를 믿기로 하고 사랑채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 집에는 종인 이자익이라는 청년이 일하고 있었습니다. 종인 이자익도 주인 조덕삼을 따라 예수를 믿게 됐습니다. 교회가 부흥되어 장로를 세워야 했습니다. 공교롭게도 주인인 조덕삼과 마부인 이자익이 경쟁을 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주인 조덕삼은 떨어지고 마부인 청년 이자익이 장로로 피택 됐습니다. 이 때 주인 조덕삼은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교회에서 자기 집 마부를 장로로 깍듯이 받들었습니다.
물론 집에 오면 이자익은 마부로 성실하게 일했습니다. 조덕삼은 주일날 선교사님이 오지 못할 때 이자익 청년으로 하여금 설교하게 했고, 자기는 마루에 꿇어앉아 설교를 들었습니다. 많은 은혜를 받은 조덕삼은 종인 이자익을 평양신학교로 보내서 공부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는 금산교회 2대 장로가 되어 교회를 섬겼습니다. 이자익 청년이 신학공부가 끝나자 다시 교회로 청빙하여 목사로 목회하게 했습니다.
조덕삼 장로는 최선을 다해 이자익 목사를 뒷바라지 했습니다. 마침내 이자익 목사님은 조선 기독교를 이끄는 총회장이 됐고, 그것도 세 번이나 다시 총회장으로 세움 받게 되었습니다.
이자익 목사님은 조덕삼 장로님이 없었다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조덕삼 장로님의 사랑의 뒷바라지가 있었기에 총회장이 되어 큰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서로 서로 사랑으로 종노릇하는 아름다운 모습이 다시 소개해도 은혜가 됩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라고 부른 페트릭 헨리(Patrick Henry, 1736–1799)는 세인트 존스 교회에서 연설할 때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이 연설이 미국 독립운동에 불씨를 당겼습니다.
연설 중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내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유산으로 준다고 할지라도 예수 신앙을 주지 못하면 아무것도 주지 않은 것이고, 내가 아무것도 주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저들에게 바른 하나님의 신앙을 주었다면 모든 것을 준 것이다.” 페트릭 헨리가 남긴 위대한 유산 “자유와 신앙”이 오늘 미국을 있게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 대한민국 1945년 해방이후 79년을 맞는 광복절 자유민주주의라는 꽃을 피우며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며칠 전 한 방송채널 아나운서가 광복절을 맞아 우리나라를 소개하는데 해방이후 원조 받는 나라에서 선진국이 된 나라는 대한민국 밖에 없다고 외신이 전한다며 당찬 뉴스를 소개했습니다.
그러나 선진국이란 말을 들을 때 나쁘지는 않지만 책임감이 큽니다....... 지금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우리와 후손의 삶이 영향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른 나라를 위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우리 자녀들에게는 확실한 믿음을 심어 주어야 합니다....... 우리 나라를 위해서는 진정한 자유민주주의가 정착되고 평등의 나라가 되어야합니다.......모든 사람이 거리낌 없이서로 사랑하며 사는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북녘 동포들까지 이 사랑 안에 끌어들이는 통일 한국의 꿈을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자녀로 부름 받은 우리가 진정한 자유인으로써 삶의 자리에서 흔들리지 말고 주어진 자리에 복음의 깃발을 높이 드는 성도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