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히 죽은 주의는ㅡ사람들의 마음을 의미 있게 사로잡지 못하는 주의들은ㅡ그러한 적개심을 불러일으킬 수 없다. 그들은 단지 무시될 따름이다. … 그렇지만 자유주의에 대해서는 좌우 모두에서 공격하는 수고를 감수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자유주의가 공격할 혹은 방어할 가치가 충분히 있을 만큼 살아있다는 것임에 틀림없다.”(<서구 자유주의의 융성과 쇠퇴> 중)
위 글은 내 제자 담벼락에서 옮겼다. 이 아이는 지금 대학생이다. 이 아이 보기에 우리 ‘좌파’는 ‘죽은 주의’에 사로잡힌 세력일 뿐이다. 이 친구가 모든 젊은이를 대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친구는 이른바 명문대 다니면서 누구나 ‘운동권’ 자락이라 인정하는 데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도서 평론을 좌파 매체에 싣고 있는 동아리다.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짐작하시리라. 우리 든든한 지원군이어야 할 친구들조차 우리가 섬기는 이념을 죽었다고 여긴다는 거다. 일반화하려는 게 아니다. 가령 내 큰놈의 경우, 가장 왼쪽에서 열심히 뛰고 있으니까. 불행히도 큰놈은 지 학교에서 열명도 채 되지 않는 절대적 소수자다.
왜 이런 말을 하는가. 젊은이를 잃은 세력은 어떤 경우에도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는 말을 하려는 거다. 한마디로 몰락했다는 말이다. 이걸 인정하지 않는 한, 어떤 실마리도 찾지 못한다.
울산에 평택에 또 어디어디에 하늘로 오른 노동자들이 있다. ‘희망버스’ 타고 거기를 향하는 물결이 있다. 나는 고백한다. 그렇게 버스 타고 백날 가봤자 바뀌는 건 없다고. 그건 버스 타는 분들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인정을 못할 뿐. 인정하는 것 자체가 죄짓는 느낌이다. 우리는 그저 이 죄책감에 얹혀서 근근히 생존하고 있다.
‘노동 중심’을 열심히 외친다. 이 구호 자체에도 그리 동의하지 않거니와, 중심이어야 할 ‘민주노총’은 대기업 중심이다. 이것이라도 밑천 삼아 뭔가 하자고 한다. 그런데 이들이 비정규직 위에 군림하고 있다. 영세상인들이 몰락하고 있다. 이른바 ‘불안노동’ 또는 ‘배제된 자’들. 이들은 전혀 조직화되어 있지 않다. 조직된 노동을 재정비할 것인가, 조직되지 않은 불안노동을 조직화할 것인가, 이 둘의 연대를 이끌 것인가? 당연히 ‘연대’가 답일 테지만, 어느 누구도 그걸 해내지 못한다.
마르크스가 옳았다. 자본가가 노동자와 노동자의 경쟁을 부추겨 제 배를 불린다는 바로 그 말, <공산당 선언> 말이다. 눈 빤히 뜨고 우리는 이 꼴을 바라만 보고 있다.
그 와중에 맞이한 대선에서 우리는 어떠했나. 전혀 다른 색깔의 심상정과 이정희가 공히 “진보적 정권교체’라는 공허하기 짝이 없는 깃발을 들었다. ‘부유세’를 내걸어 ‘국민 여러분, 행복하십니까’로 개콘에마저 올랐던 그 시절은 잊혔다.
우리 것을 박근혜에게 빼앗겼고, 붉은 색깔마저 빼앗겼다. 유명무실한 진보신당은 ‘한 구호 두 후보’ 사이에서 갈팡질팡이었고.
뒷받침해줄 젊은이도 없고, 중심이어야 할 세력조차 ‘노노경쟁’에 휩쓸려 있으며, 진보정당’들’이 난무하는 게 바로 지금 우리 ‘진보좌파’의 꼴이다. 이것을 직시하는 데서 출발하자.
어떤 깃발을 내걸 건가
EAI(동아시아연구원)의 선거 직후 정당별 지지도 조사에서 ‘진보정당들’의 지지도는 다 합쳐서 3.7%(통진당 1.8%, 정의당 1.9%)다. 절망적인 수준이다. 그러나 무당파는 37.7%고, 이 중 20대와 30대는 각각 59.5%와 44.7%다. 현실은 절망적이지만,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는 것이다.
진보? 좌파? 사회주의? 사민주의? 무지개좌파? 녹색좌파?
어떤 걸 내걸어도 들어줄 귀는 그리 많지 않다. 아무 깃발이라도 들자. 단, 그것이 우리 몸에 가장 가까운 것, 즉 ‘불안’을 겨냥하지 못하는 한 되살아나지 못한다.
젊은이의 불안은 안철수를 향했고, 나이든 사람들의 불안은 박근혜를 지지했다.
젊은이의 불안을 다룬 민환기 감독의 다큐멘터리 '불안'(2012년)의 장면
바로 여기가 우리 눈을 겨눌 지점이다. 이들이 부모 자식 관계라는 사실에 주목하자는 것이다.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먼 사이. 가장 가까운 걸 건져서 우리 걸로 삼자는 거다. ‘노동 중심’이 겨눌 과녁도 정확히 여기다.
지금 젊은이들은 얼마 안 가 불안한 ‘노동자’가 될 수밖에 없다. 이들의 부모세대들은 조만간 불안한 노후를 맞이할 것이다.
‘노동중심’이 향해야 할 방향이 보인다. 연금, 교육, 보육, 의료, 주택, 결혼과 관련한 우리의 ‘좌파적’ 구호들이 연상된다. 이 모두를 한꺼번에 헝크러뜨린 것은 다름아닌 ‘불공정’이다. 실마리가 여기에 있지 않나. 자유주의적 견해라고만 타박마시라. 이걸 해낼 수 있다면 한 걸음 내딛을 수 있다. 불가능을 향하여 가능성에 주목하자는 거다.
이후 ‘진보좌파’의 구호는 ‘아이 행복’이었으면 싶다.
아이가 제 진로를 저 스스로 선택하지 못하는 것은 세상이 불공정하기 때문이다.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받지 못하는데 누가 아이의 선택권을 존중할 수 있는가. 그래서 못하는 공부를 강요하는 것이다.
무엇이든 저 하고픈 걸 할 수 있도록 하자면, 그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그것이 ‘공정성’이다. ‘공정성’은 불평등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최소한 자기 노동의 대가만큼은 지불한다. 교육, 의료, 주택이라는 기본적인 조건이 보장될 때 아이는 자기 선택을 할 수 있다.
‘비정규직’은 고용자가 제 필요에 따라 구매한 노동력인 만큼 정규직보다 더 많은 시급을 지불해야 한다. 그렇게 불안정노동 문제를 대해야 한다. 그러면 아이들이 기꺼이 제 실력을 발휘하면서도 자기 시간을 계획해서 쓸 수 있다. 연금도 그렇다. 낸 만큼의 연금을 받아서 ‘돈 안되는 일을 하면서 세상에 보탬되는 일’을 노후로 설계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구체적이고 몸에 와닿는 걸로 세상에 나가자.
(좀 시적인 전개인 듯하지만, 나는 우리 깃발 색깔이 ‘파랑’이었으면 싶다. 저들이 버린 색, 오방색 가운데 ‘봄’에 해당하는 색, 자연을 상징할 수 있는 색, 무엇으로도 바뀔 무한한 가능성의 색깔. 생동하는 젊음으로 다시 나서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