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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서 죽는 '임오화변(영조 38년,1762)' 의 참상을 직접 목격한 정조가,
사도세자의 墓를 처음으로 성묘한 것은 화변이 있은지 12년이 지난 영조 50년(1774)이었다.楊州의
拜峰山 자락에 묻힌 사도의 무덤인 '永祐園' 은 세자의 비운 만큼이나 옹색한 모습이었다.주변은 비
좁고 원침(봉분)은 초라했다.이를 본 왕세손이던 정조는 왕위에 오르면 반드시 吉地를 잡아 아버지
의 산소를 옮기리라 다짐했다.그로 부터 2년이 지난 1776년 3월에 할아버지를 이어 정조가 왕으로
즉위했다.그러나 복잡한 여러일 들을 처리 하느라 눈깜짝 할 사이에 13년이란 세월이 흘렀다.특히
왕권 강화와 탕평의 걸림돌이 되던 외척의 제거는 생각처럼 쉬운일이 아니였다.
그동안 정조는 탕평과 개혁을 추진하여 왕권을 강화하는 동시에 민생을 구제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정무를 처리 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한 분주한 세월을 보내 아버지 묘의 이장은 상당히 지연될수 밖에
없었다.여기서 우리가 전체 역사를 좀더 알기 위해 알아둬야 할 사안이 있다.上國(천자)으로 부터 정삭
(년호사용)과 직위를 책봉을 받고,정기적으로 조공을 바치면서 배움을 청했던 제후국이자 蕃國의 번왕
들은 왕이 죽은후 받거나 사용하는 廟號의 끝에 '祖나 宗' 을 쓸수가 없다.현 중국에서 관할지역을 책봉
받아 반도보다 더 넓은 지역을 통치했던 수많은 책봉의 번왕들도 사후 '祖나 宗' 을 쓰지 못했다.
2, 이러다 정조 13년(1789) 7월 錦城尉 朴明源의 건의를 받아들여 思悼의 영우원 이장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이장지는 수원의 '花山' 으로 결정 되었다.정조가 직접 선택했다는 이장지 花山의 설명을 따
르면 주변에 '무려 800 여개의 산봉우리가 하나의 산(花山)을 동그랗게 에워싸며 보호하고 있어,마치
그 형세가 마치 꽃송이 같다고 해서 붙여진 화산' 이라 했다고 한다.지형적으로 볼때 사도세자의 새로
운 이장지 화산은 반도의 수원과는 전혀 인연이 없다.물론 이장전의 배봉산의 楊州도 반도의 양주는
아니다.한자의 花가 華와 통하고 변환된다 해도 반도의 양주와 수원은 사도세자와 정조시대의 양주와
수원과는 인연이 없다.반도의 수원은 현상이나 풍수지리로 볼때 800여 산봉우리가 하나의 花山을 향
해 들러싸는 형승이 있을수 없다.있다면 반도에 조선사를 해설해야 하는 권력자들의 욕심만 있다.
따라서 800여 산봉우리에 둘러쌓인 화산은 대륙의 섬서성 華山,하남성 崇山,안휘성의 黃山,강서성의
廬山,호남성 衡山의 중심이라면 몰라도,주변에 800 여 산봉우리가 에워싼 화산은 반도의 수원에는 당
치도 않다.또한 역사서의 어디에도 양주의 배봉산이나 수원의 花山 기록은 없다.아무튼 사도세자의 산
소는 알수없는 비좁은 양주의 배봉산에서 '龍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형승인 수원의 花山' 으로 옮겨지게
된다고 한다.정조가 보기에 더할 나위 없는 새로운 '伏龍大地' 에서 원침의 규모와 양식은 왕릉에 버금
가는 수준으로 치장 되었다고 한다.타당성의 군소리를 듣기 싫어 좋은 문장들만 사용했다.
3, 명칭도 영우원에서 '顯父(죽은 아버지)를 융성하게 받든다(높인다)' 는 의미의 ' 顯隆園' 으로 바꿨다.
이어 정조는 사도세자의 행장인 '顯隆園 行狀' 까지 손수지어 아버지의 덕행과 학문을 찬양하고 자신의
정치적 포부를 진솔하게 토로했다.여기서 '園' 은 왕릉을 보다 높혀 칭하는 황제(천자)국의 황릉에 대한
존칭으로 번국에서는 쓰일수 없다.때문에 어디서든 정삭을 받고 책봉과 함게 조공을 바쳤다는 하급의
제후국에서는 묘지에 '園' 호칭을 쓰지 않는다.써봐야 겨우 '陵,寢,墓' 정도다.정조가 아버지 사도를 이장
했다는 정사서의 수원과 반도 현실의 수원은 과연 어떻게 다른가?물론 현재의 수원에 멋지고 새롭게 조
성되어 화성으로 불리는 新유적이란 것은 문화와 자본의 위력에 의해서며 역사의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
또 유적지 내에 있는 正祖 동상도 세종로의 세종 동상처럼 상상의 인물 동상으로 고증은 당연히 없다.또
한 고증 할수도 없다.단지 문화 권력과 협력한 이름있는 화가와 조각가의 작품일 뿐이다.물론 정사서에
기록된 수원과 현실의 수원은 명칭을 제외하고는 최소의 기록조차 일치하지 않는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수원에는 수원의 토산물(土地所産의 특산물)로 '백옥(玉),소금,蘇魚(벤뎅이),
兵魚,洪魚,조기(石首魚),참조기(黃石首魚),농어,民魚,白魚(벵어),秀魚(숭어),眞魚(청어),烏賊魚(오징어),
好獨魚(꼴뚜기),조개,새우,굴,낙지,김,게' 등 수많은 해산물이 특산으로 나는 곳이 수원이라고 기록하고
있다.더하여 이장전의 楊州 토산물 로는 '잣과 송이,은어(銀口魚)'정도가 모두였다.따라서 정조가 말한 화
성의 수원과 현 반도의 수원은 아주 다른 것이다.사도세자가 이장된 현륭원과 장용외영의 수원(화성)이
있어야 할곳은 최소한 소금과 많은 해산물을 생산해 낼수있고,바다와 인접하면서 낙지의 갯벌을 끼고 있
는 곳에 있어야 적당한 것이다.이런곳에 과연 800여 산봉우리가 둘러싸고 있는 용이 여의주를 물고 희롱
하는 복룡대지의 花山이 있을까? 란 생각도 해본다.
4, 당초 신료들은 현륭원 이장에 별다른 의구심을 갖지 않았다.그저 효심의 발로 정도로 생각했다.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정조는 임오화변(1762)시 당시 사도세자를 변호하다 화를 당한 대사헌 韓光肇(한광조)
에게 '忠貞' 이란 시호를 내렸다.이는 사도세자가 정당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표명한 것이다.이에 노론과
소론들은 떨었다.이는 곧 정조 치세의 전환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이어 정조는 '華城 축조와 경영' 에
본심을 두기 시작했다.정조는 화성을 친위지역( 現王의 직할지)으로 조성하여 개혁의 본산으로 삼으려 했
던 것이다.즉 제2의 왕궁과 도성을 만들려 했던 것이다.당시 정조는 김치인(노론),이성원(소론),채제공(남
인)으로 3정승을 임명하면서 노론,소론,남인들이 두루 등용된 것이다.당파가 생긴 이래 처음있는 일이라고
자찬할 정도로 정조는 탕평을 통한 왕권강화에 대한 자신감을 표출했다.따라서 현륭원 이장은 이러한 정조
의 자신감인 동시에 화성경영에 대한 가능성을 타진하는 과정 이었다.
정조의 정치적 의도는 구체화 되어 장용외영(왕의 친위대)의 설치와 화성축조를 통해 본색을 드러내게 되
었다.기존의 궁과 정부 편성군을 제외하고 왕의 친위대를 별도로 내영(한성)과 외영(수원)에 둔다는 것은
다른 목적이 있음을 의미했다.특히 이쯤에서 알아둬야 할것은 역사의 漢城府의 옛 명칭이 楊州 였으며 곧
南京,南平壤,廣陵 이였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이는 정사서들의 기록이다.양자강 하류지역의 강소성에
남경이 있고,동쪽 지역에 楊州와 廣陵 있으며,이 동쪽의 남북이 모두 역사의 楊州였다.양자강을 기준으로
북쪽이 楊州,남쪽이 南楊州 였다는 것도 알아두자.이것을 반도의 서울동쪽 지역에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
다.楊子江의 원 뜻도 楊州의 중앙을 관통하여 흐르는 강이란 뜻이다.여기서 子는 핵심이자 사물의 씨가 있
는 內,中央의 뜻이다.아마 정조는 노론들과 외척들이 판을 치는 지금의 한성(화성)을 떠나 사도세자를 핑
게로 수원의 화성에 새로운 왕도를 만들려는 계획이었을 것이다.
5, 정치의 본질은 권력의 행사에 있다.그러나 권력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軍權이 전제 되어야 한다.
권력은 군권과 함수 관계에 있는 것이다.군권은 군주가 일괄 통제해야 한다는 것이 정조의 기본적인 생각이
었다.즉 군권은 왕권 강화에 필수적인 요건이기도 하다.정조시대에 대표적인 군영인 '莊勇營' 은 왕의 군권
친위대로 정조 12년(1788)에 설치 되었다.'奎章閣' 이 정조의 문과적 친위세력을 양성하기 위해 설치된 기관
이라면,장용영은 정조의 정권유지,강화를 위한 武力的 기반으로 설치된 기관이다.세손때나 왕위에 있을 때
도 정조는 친위군의 필요성을 절감했다.이유는 병권의 대부분을 외척들이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언제나
쿠테타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즉위 초반 정조는 숙위 체제(경호)를 강화하는 차원에서 宿衛所를 설치했고,친위 측근인 홍국영이 숙위대
장을 맡았었다.숙위소는 궁궐의 숙위는 물론 도성을 수비하고 정부의 5군영까지 총괄하는 기구로 부상했
으며,병조나 오위도총부에 소속되어 있지 않았다.즉 숙위소는 군주 직할의 독자적 친위군 기구 였다고 할
수 있었다.그러나 이 숙위소는 정조 3년(1779) 9월 홍국영의 퇴진과 함께 운명을 같이 했으며,그자리는 장
용영이 차지했다.
6, 宿衛所(숙위소)는 정조 1년(1777)11월에 설치한 왕의 직할 경호부대다.숙위 대장은 대궐안의 경비와
군사에 관한 일은 물론 '금위영,어영청,훈련도감등 3영의 업무까지 관장하는 등 막대한 권력을 휘둘렀다.
그러나 숙위소를 혁파한 정조는 숙위 체제를 개선하여 '莊勇衛' 를 신설했다.정조 6년(1782)에 무예와 통
솔력을 지닌 엘리트 무관 30명으로 출발한 장용위는 정조 11년(1787)에 50명으로 인원이 보강 되면서
莊勇廳으로 승격 되었다.그리고 이듬해(1788) 장용청이 장용영으로 개칭 되면서 '장용영시대' 가 열리게
되는 것이다.정조의 보호하에 꾸준히 발전하던 장용영은 정조 17년(1793)에 이르면 장용 內營과 外營으
로 완비 되기에 이른다.그 후로도 장용영은 계속 보강되었지만 당초의 계획이었던 5천명 규모로 편성되
지는 못했다.
문제는 돈이였다.극도의 소비를 요구하는 군대 창설과 확대에는 많은 비용이 들어가기 때문이다.내영은
수도방위를 위해 '漢城府(楊州,南京)' 에 설치 되었다.정조는 내영보다 外營(수원)의 육성에 중점을 뒀다.
외영은 사도세자의 이장 묘역인 '현륭원과 행궁(왕의 임시거처)' 이 위치한 華城에 두었는데,장용외영의
설치 명분을 현륭원을 호위하고 행궁(화성)을 수호하는데 있다고 했으나 이면 명분은 왕권강화 였다.
7, 그러나 이는 표면적인 이유에 불과하고 사실상의 외영은 왕의 또다른 권력부로 왕위를 물려주고(傳位)
난 이후를 대비한 친위 군영이며,무력의 본산이었던 것이다.어찌보면 왕의 직할私兵 군단이나 다름 없었
다.즉 현실적으로 왕의 상왕국,또는 나라 밖의 강한 또 다른 나라를 의미하는 장용외영 이었던 것이다.여
기서 역사기록을 통한 '華城' 이란 지명의 활용과 쓰임의 진실을 찾아보면,화성은 '華甸,華州,華府,華邑,華
都' 와 상통하는 지명으로 '황제나 천자가 군림하면서 정사를 펴는 곳' 으로 정리된다.즉 '京畿와 畿甸' 과도
통한다.천자가 정사를 펴던 도회지 京都는 '京師와 京兆' 로 동의로 표현되며,'京邑,京中' 과도 통용된다.여
기서 경조의 '兆' 는 많은 사람들이 사는 곳,경사의 '師' 는 대중을 의미한다.즉 도회지 성격의 都와 兆와 師
는 같은 뜻이다.또한 경사의 京은 '크다의 大'를 의미한다.따라서 경사,경도,경조는 대중이 많이 살고 있고,
왕의 궁성이 있는 큰 고을의 뜻이다.따라서 화성을 2개(한성부 남경,수원의 화성)나 가진 정조는 일개의
반도 번국왕이 아니라 중원의 황제이자 천자라야 가능한 일이다.
천자(황제)의 華城이 자리하고 있는 경기와 畿甸,華甸의 범위는 궁성으로 부터 사방 500리의 직할지를 가
진다.이미 기존의 화성(한성부=양주)을 두고있던 정조가 또 다른 화성을 축조했다는 기록은 반도의 한성부
를 떠나 수원의 화성이 아니여도 정조는 얼마든지 화성을 조성할수 있었다.정조는 역사서상 이미 恭宣大王
으로 일인지하,만인지상의 황제이자 천자였기에 내일을 위한 별도의 華城을 축조경영 할수가 있었다.단지
반도의 정조가 아니라는 점이다.또다른 화성 축조를 왕권 강화및 유지와 연계시키기 위해 '현륭원을 호위하
고 행궁인 화성을 수호한다' 는 핑게를 만들었다.왕권의 위용과 행렬은 후대의 모작이지만 '화성능행도' 가
잘 말해준다.
8, 더 상세히 말한다면 정조에 있어 수원은 이성계의 함흥과 같은 곳이다.비운에 죽은 아버지의 산소가 여기
에 있으니 漢고조 유방이 말한 '豊沛之鄕(왕조의 발상지)' 과 같은 곳 이었다.정조 17년(1793) 수원으로 행차
한 정조는 수원의 명칭을 '華城' 으로 변경케 하고 留守府로 승격시켰으며,그런 다음 장용외영 설치를 명했다
고 했으나 후에 교정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수원과 화산의 현륭원 기록은 없다.외영은 3천명의 상비군과
비상시에 동원되는 守城軍으로 구성되었다.이른바 한성부의 內營을 월등히 능가하는 규모였다.나아가 外營
의 기병은 친군위로 호칭되어 왕의 친위군영 성격을 분명하게 드러냈다.외영을 설치한후 정조의 수원행차 때
는 군사들은 물론이고 정조도 군복을 착용했다.군사들의 호위행렬은 일사 불란했고 정조의 모습도 근엄,당당
했다고 역사는 쓴다.정조가 이런 행렬을 통해 왕의 위엄을 보인 이유는 많은 私兵들을 거느린 토호 군벌들과
각 당파및 외척들에게 왕권의 강력한 위용과 무력을 알림으로서 다른 마음을 품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였다.
9, 수원에 도착한 정조는 군사훈련과 사열을 통해 친위군영에 대한 큰 관심을 표현했다.장용영의 친위 군영의
이미지를 강화하고,수원의 친위 지역화를 향한 열정은 마침내 정조18년(1794) 벽두에 '華城築造' 를 발표하게
한다.이때가 바로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가 六旬이 되는 해였다.이에 앞서 정조는 민생개혁을 위해 재위15년
(1791)에 좌의정 채제공의 의견을 전폭적으로 수렴하여 六矣廛(으뜸의 6개 시전포)을 제외한 모든 시전의 전
매특권(禁亂廛權)을 풀어 개인 상인들의 자유로운 상행위를 보장하는 '辛亥通共' 을 실시케 했다.이로서 시전
의 기존상인들과 전매특권을 가진 상인들의 전횡과 독점 폐단을 없에 모두가 평등한 위치에서 상행위를 하도
록 했다.이런 실용주의 정책들은 대부분 채제공을 비롯한 남인들의 입안으로 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이다.결국
신해통공은 소상인 보호와 물가안정을 목표로 하는 한편,기득권을 가진 노론을 견제하고 수원의 화성을 육성
하기 위한 정치적 의도가 들어가 있었다.
10, 1794년 1월 13일 현륭원을 참배한 정조는 신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사도세자의 재실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세우며,비명에 죽은 아버지를 애도했다.다음날 행궁으로 돌아온 정조는 신하들을 이끌고 八達山에 올랐다.바
로 이자리에서 화성축조의 대강령을 내렸다.수원을 친위 지역화 하려는 정조의 포부는 마침내 실현단계에 접어
들었다.현륭원의 이장에 이어 장용외영 설치는 바로 화성축조를 위한 예비작업 이었다.화성축조 논의가 최초로
제기된 때는 정조 14년(1790) 6월 이었다.당시 수원부사 였던 姜游가 수원이 총융청의 외영이며 현륭원이 있는
곳이라는 이유로 매우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며 축성을 건의했다.그러나 실제로 화성축조의 계기를 주선한 인
물은 당시 남인으로 영의정(獨相)의 자리에 있던 정조의 측근 蔡濟恭(1720~1799)이었다.
그는 정조 17년(1793) 수원유수를 자청해 수원을 직접 살펴본후 그해 5월 축성방안을 본격적으로 건의했다.즉
당시의 실세였던 체재공을 비롯해 西學(천주교)을 통해 습득한 실용주의 남인들이 노론들을 견제하면서 정조의
비위를 적절하게 맞춘 것이다.화성의 축성과 관련해서는 이미 정조 16년(1792)丁若鏞이 올린 城制 또한 채제공
과 무관한 것이 아니였다.채제공과 정약용은 남인의 핵심세력으로서 평소 교류가 깊었던 관계였다.따라서 화성
축조란 대역사는 남인들에 의해 비로소 현실화 될수 있었다.노론,소론들은 위엄에 눌려 추이만 살피고 있었다.
11, 당초 화성의 축조는 10년 계획으로 추진 되었다.이유는 정조는 향후 10년 동안 왕권의 기틀을 확실하게 다
진 다음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줄 생각 이었다.그때 화성이 완성되면 상왕으로 화성에 머물러 있을 예정이었다.
축조 낙성시기는 1804년 갑자년 이었다.정조 자신은 사도세자를 추승하여 한을 달래고 싶었지만 '나의 처분을
지키라' 는 할아버지 영조의 부탁을 저버릴 수도 없었다.은혜와 의리의 기로에 서있던 정조는 대안으로 전위를
생각한 것이다.즉 新王의 손으로 사도세자를 추승한다면 모든 혐의는 반감될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화성은
당초 예상과는 달리 공사가 급속도로 진행되어 2년 6개월 만인 정조 20년(1796)에 완공되었다.성곽의 둘레는
약 6킬로미터 였다.모두 37만명의 인력이 동원되어 약 90만 냥의 경비가 지출된 대역사였다.
현륭원으로 사도세자를 이장 한후 7년만의 축성 이었다.이해 10월 16일 정조는 성대한 낙성연을 개최하여 기념
하는 한편,신민들과 기쁨을 같이 했다.일각에서는 화성축조의 본의를 의심하는 빛이 뚜렸했다.현륭원을 호위하
고 행궁을 보호 한다는 명분치고는 華城의 축조는 무모할 정도로 거대하고 화려한 공사였기 때문이다.그런대도
정조가 여유를 부릴수 있었던 것은 언제나 수족처럼 그를 보호하는 '장용영과 행궁이 건재' 했기 때문이다.
첫댓글 고맙습니다
교과서에는 장용영이 처음에 50명에서 출발해서 2만명까지 확대되었다고 하는데,
대동여지도에는 서울 인구 수가 1만8천명이라고 돼 있습니다.
임금님 보디가드가 수도 전체 인구보다 많다는 것도 웃기지만,
삼청동에 있는 경복궁 세트장에 2만명이 비집고 들어가면 발 뻗고 드러누울 자리는 있나 모르겠습니다.
감사 합니다.고종실록을 보면 광무란 년호를 사용하는 1897년 부터 기록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 합니다.아마 그 이전의 기록들은 대륙조선 것을 옮겨다 놓고 해설 권력자들에 의해 반도로 한정힌 것이지요.그러다 보니 규모나 스케일이 맞지 않습니다.이후 1910년 까지의 기록들도 동아시아 역사 질서와 맞지 않게 횡설수설이 난무 합니다.정조의 친위대인 장용내영과 외영이 자리할 곳은 지금의 강소성 남경 일대로 규정하면 오류가 적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