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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오병이어 이적과 그에 따른 논쟁(요 6:1-59)
오병이어 이적은 요한복음의 이적 보도 중에서 공관복음에도 등장하는 거의 유일한 이적 보도입니다1). 이렇게 보도가 중복된다는 것은, 이 사건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 이적의 중요성은 이적 자체보다는 이 이적이 주는 메시지입니다. 예수님의 이적은 항상 중요한 의미를 주므로 요한은 이것을 특별히 표적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표적이 무엇인지를 찾아내야 하고 그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 이적에 상당히 많고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 있으므로, 우리는 이 사건을 다각적으로 깊이 연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사건이 빚어낸 비극은, 유대인이 이 이적을 잘못 이해하여 예수님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이기적인 표적을 찾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리와 예수님 간의 길고 괴로운 논쟁이 진행됩니다. 그 결과 거의 모든 유대인이 실망하여 예수님을 떠납니다. 그분을 따르는 제자들도 떠나고 단지 열두 사도만 남습니다. 다른 사람은 예수님께 실망했지만, 진리를 찾는 이 사도들은 이 대화를 통해 예수님이 영생의 말씀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더욱 깊이 깨닫고 새롭게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계기가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분명한 계시는 교회까지도 분리합니다. 떠날 사람은 떠나고 남을 사람은 더욱 분명해져서 예수님께 단단히 붙어 있어 열매를 맺게 됩니다. 15장 말씀이 이러한 의미입니다.
오늘날 은사 운동이 영생의 복음을 더럽히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이 한국과 남미에 극심합니다. 본문은 이것이 왜 문제가 되는지를 잘 설명해줍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자기 피와 살을 주시고자 합니다. 그러나 무리는 은사, 즉 썩어지는 양식인 빵을 원합니다. 결국 예수님이 주시고자 하는 은사인 예수님 자신은 무리에 의해 거절됩니다.
오늘날에도 교회에서 말씀 영접을 통한 진정한 삶과 영생을 가르치면 인기가 없고, 귀를 간지럽게 하는 거짓 약속, 기쁨, 평안, 안락함 등을 설교해야 사람이 모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하멜의 소설에 나오는 „피리부는 사람“의 피리에 취해 모두 바다에 빠져 죽은 사람과 같습니다.
우리는 생명의 말씀을 갈구하고 다음과 같이 고백하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주여,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겠나이까? 당신은 영생의 말씀을 가지고 있나이다“(6:68).
7.1.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시다(1-13)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13)
1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2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음이러라
3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4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5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6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7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8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9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시니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가 오천 명쯤 되더라
11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12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13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이 보도는 공관복음서의 보도와는 상당히 다른 측면에서 보도하므로 내용에 차이가 있습니다. 그곳에서 생략한 것들이 이곳에서 기술되므로 본문은 공관복음에 좋은 보충이 됩니다.
1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5장 끝에서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계신 것으로 보도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갑자기 갈릴리에서 나타나셨습니다. 이것은 요한이 많은 사건을 의도적으로 생략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다른 복음서를 보충하려고 했으므로 일어난 사건을 모두 보도하려는 의도가 없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후에“라는 말이 어떤 때를 말하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5:1의 명절이 9월에 있는 장막절이므로, 5장과 6장 사건 사이에 약 6개월이 지났습니다. 왜냐하면 6장 사건은 유월절이 가까운 때, 대략 3월 말에 일어났기 때문입니다(4).
예수님이 서쪽 해안에서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셨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오병이어 이야기는 게네사렛 호수 동쪽 해안에서 일어났습니다. 또한 17 이하 구절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서쪽 해안에 있는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셨다고 합니다. 공관복음서 기록자들도 오천 명 급식이 동쪽 해안에서 일어났다고 합니다(참조: 마 14:13 이하, 34; 막 6:45 이하).
디베랴라는 이름이 단지 요한복음에만 나타나는 것이 눈에 띕니다(6:1,23; 21:1). 다른 복음서 기자들은 이 이름을 좋아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 도시는 헤롯 안디바가 17-22년 사이에 건축했습니다. 당시 로마를 다스리던 황제 디베랴(14-37; 참조: 눅 3:1)의 호의를 얻고자 그곳을 디베랴라고 명명했으며, 그곳을 자기가 거주하는 수도로 삼았습니다. 갈릴리 수도는 원래 세포리스였는데, 그곳은 산악지대에 있었으므로 너무 서늘해서, 기후가 매우 좋은 디베랴에 도시를 신축하여 수도를 천거한 것입니다.
그런데 디베랴의 한 부분이 공동묘지 위에 세워졌으므로, 그곳에 들어가는 유대인은 칠 일간 부정하게 됩니다. 아마도 이러한 이유로 예수님은 그곳에 들어가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2세기 말에는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그 유명한 얌니아 랍비 학교가 디베랴로 이주하여 이곳이 가장 학식이 높은 탈무드 학교가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랍비의 제왕이라고 불리는 예후다 하-나지가 3세기에 탈무드의 근간이 되는 미쉬나를 모았습니다. 디베랴는 예루살렘, 헤브론, 사페드와 함께 후기 유대교에서 가장 거룩한 도시 중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히브리 구약성경도 디베랴의 랍비 학교의 도움을 받아 편찬된 것입니다. 요한이 디베랴 호수라는 말을 사용하는 이유는, 요한이 복음서를 기록할 당시에는 이미 디베랴가 부정한 도시라는 악명을 벗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갈릴리는 이방에 디베랴로 더 잘 알려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2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음이러라
„따르다“, „보다“, „행하다“라는 말은 그리스어에서 계속되거나 반복되는 것을 나타내는 시제(반과거)가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기간에 예수님이 반복적으로 이적을 행하시고 많은 사람이 그분을 따랐음을 나타냅니다. 요한은 이 한 구절로 그 긴 기간 동안 갈릴리에서 있었던 다양한 예수님의 사역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 같습니다. 공관복음에서 이것을 자세히 보도하지 않으므로 요한은 이것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큰 무리“라는 말은 지금 예수님이 갈릴리 사역 정상에 계셨음을 알려줍니다. 이 상태를 학자들은 „갈릴리의 봄“이라고 합니다(참조: 마 4:25; 14:14). 그런데 바로 오병이어 사건이 기화가 되어 예수님의 인기는 서서히 감소합니다. 공관복음서에 따르면, 몇 달 후에 칠병이어 사건이 따릅니다(막 8:1-13; 마 15:32-39). 그때는 약 사천 명이 모였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제자들의 메시아 고백이 나옵니다(막 8:27이하와 병행 구절). 그런데 요한은 이 긴 기간을 압축해서 6장에서 모두 다룹니다.
서쪽 해안에서 예수님이 타고 가시는 배가 어느 방향을 향하는지를 보면, 그분이 어디에 정박하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그분을 쫓아갈 수 있었습니다. 공관복음 기록자들은 이들이 걸어서 그분께 갔다고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호수의 북쪽 끝으로 가서 다시 남쪽으로 내려와야 합니다. 그곳까지 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오천 명이 모였다는 것은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얼마나 큰 관심을 가졌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런데 무리를 사로잡은 것은 이들이 본 „표적“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적을 통해 예수님께 관심을 갖게 된 것을 단지 부정적으로만 볼 수 없습니다. 이들이 외적 관심을 통해 온전한 믿음으로 들어와, 더는 이적을 체험하지 못할지라도 믿음을 계속 유지해야 합니다. 이점에서 이들이 큰 실패를 합니다.
3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산“이란 게네사렛 동쪽에 있는 산맥을 말합니다. 대부분 사람이 이것을 „산“(단수)으로 번역하는데, 이 그리스어 단어에는 하나의 산뿐만 아니라 산맥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이곳에서 어떤 한 산을 의미한 것이 아니므로 „산맥“으로 번역하는 것이 정확하다고 봅니다. 마 14:13과 막 6:32에서 „외딴 곳“이라고 한 것은 이러한 산맥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에서 „산“과 „외딴 곳“ 및 „광야“는 대체로 모두 같은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라는 말은 그분이 교사로서 가르치려고 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참조: 마 5:1; 15:29). 유대인의 교사는 앉아서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왜 예수님은 그곳으로 가셨을까요? 사람이 몰려들지 않는 조용한 곳에서 집중적으로 제자들을 가르치시고자 그곳으로 가셨을 것입니다. 동시에 진지하게 자기를 좇는 자들을, 대단한 흥미는 가지지만 외적으로만 관심이 있는 자들로부터 격리하려고 하셨을 것입니다(참조: 마 5:1). 그러나 이 기대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4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요 2:13과 11:55에도 이와 매우 비슷한 표현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요한은 예수님이 공생애 동안 맞이하신 세 번의 유월절을 언급했습니다. 6:4에서 언급한 것은 이중 둘째 유월절이며,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일 년 전입니다.
이 구절이 먼저 연대를 밝힌 것은, 요한은 우리에게 지금 일어난 사건이 언제 있었는지를 알리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공관복음에 기록된 오천 명 급식 사건이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일년 전에 일어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은 „유월절“을 매년 니산 14일에 지냈습니다. 니산은 유대인 달력으로 첫 달(에스더 3:7)이며, 우리 달력으로는 대략 3월 중순부터 4월 중순에 있습니다. 이때쯤이면 여름에는 건조한 동쪽 해안에도 풀이 납니다. 그러므로 막 6:39에서 „푸른 잔디“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요한이 그때가 유월절이 가까웠다고 한 것에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그는 오병이어 사건을 유월절 사건과 연관 짓습니다. 그러므로 요한 보도의 초점은 공관보도와는 다른 것입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애굽의 노예 신분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이 바빌론 포로 생활이라는 큰 고난을 거치면서 갈수록 메시아 대망이 커져서 특히 유월절에 메시아 대망이 팽배하게 됩니다. 조상이 모세라는 민족의 영웅을 통해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된 것과 같이, 당시 유대인이 모세보다 더 큰 영웅인 메시아를 통해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꿈꾸는 것은 당연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병이어 이적을 체험한 무리가 예수님을 강제로 메시아로 만들려고 한 것을 인간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6:15).
그러나 예수님은 유월절과 메시아의 오심을 연결하시되, 메시아가 그의 백성을 노예 상태, 즉 정치적 압제에서가 아니라, 영적 노예 상태에서 해방하신다는 것을 가르치려고 하셨습니다. 그분은 이들에게 생명의 떡을 주시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메시아의 이적은 받아들이되 그에 따른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이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열두 제자는 이 메시지를 영접하여 이것이 영생의 말씀을 주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으로 이어졌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귀한 고백을 하는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5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6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7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이 단락을 공관복음서와 비교하면, 3절과 5절 사이에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오는 자를 친절하게 영접하시고 가르치시고 병든 자를 치료하셨으며, 그 사이에 저녁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참조: 마 14:14-15; 막 6:34-35; 눅 9:11-12). 그런데 막 6:33을 보면, 이들이 예수님 일행보다 그곳에 먼저 도착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이들은 호수를 둘러서 걸어왔으므로 훨씬 늦게 도착해야 합니다. 아마도 예수님 일행은 바다에서 거센 역풍을 만났으므로 상당히 지체된 것 같습니다. 그리고 무리는 배가 가는 방향을 보고 예수님이 가시는 곳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그곳에 가서 미리 기다린 것입니다.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공관복음서를 보면, 먼저 제자들이 „큰 무리“를 먹이는 문제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동쪽 해안에는 민가가 별로 없었으므로(참조: 막 6:35; 눅 6:12) 그것이 문제가 됩니다. 또한 동쪽 해안에는 그리스 사람이 많이 살므로 그들 음식은 대부분 유대인 정결 예식에 맞지 않기 때문에 더욱 어려웠을 것입니다. 외국에 사는 유대인과 모슬렘들은 오늘날까지도 일반 음식점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이것을 생략하고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라는 예수님의 질문으로 보도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하필 빌립에게 질문하셨을까요? 우리는 그 이유를 단지 추측할 수밖에 없는데, 그는 그의 그리스 이름을 보아서 알듯이, 그리스어를 잘하고, 그곳에서 약 10킬로미터 떨어진 유대 도시인 벳세다(1:44)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는 그곳 지리를 가장 잘 알고 있으므로 „어디서“ 떡을 살 수 있는지 알아보기도 쉬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질문은 빌립과 다른 제자들을 „시험하고자“ 하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질문은 소위 교육적인 질문입니다. 무엇을 시험하려고 하셨을까요? 우선 그의 대답을 보겠습니다: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이 대답은 우리에게는 „우리가 그만한 돈이 없으므로 어렵겠습니다! 선생님의 계획을 포기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들립니다. 모두가 먹을 빵을 사려면 „이백 데나리온“이상 있어야 하는데, 그들에게 그만한 돈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오천 명에게 이천 원짜리 김밥 한 줄씩만 사준다고 할지라도 천만 원이 듭니다.
그의 대답은 명석하고 현실적이었지만, 이것은 예수님이 원하신 대답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그는 시험에 불합격했습니다. 그가 이스라엘의 목자요 사도가 되려면 반드시 두 가지를 갖추어야 합니다. 먼저 목자의 마음입니다. 마가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이 이들을 보시고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라고 합니다(6:34). 예수님은 이들을 보시고 마음을 아파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을 온종일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병도 치료하셨습니다. 이제 이들에게 먹을 것이 없어 배가 고프므로, 육신적으로도 먹이시려고 하십니다! 그러나 빌립을 위시한 제자들은 바로 이러한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목자는 양의 사정을 알고 마음을 아파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이러한 마음이 없었고, 또한 예수님 마음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예수님의 시험에 합격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그런 마음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돈이 없었으므로 실행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무리를 빨리 해산하자고 제안했던 것입니다(막 막 6:35-36). 여기에서 그들이 생각지 못했던 것은 예수님이 이적을 행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무리를 먹이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고서도 그러한 생각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아직 예수님을 너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을 온전히 신뢰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목자가 되려는 자는 목자의 마음과 믿음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6) 아셨습니다. 즉 제자들로부터 도움을 구하고자 질문하신 것이 아니라, 이적을 통해 무리를 먹이실 계획을 이미 가지고 계셨습니다. 왜 이들을 먹이려고 하셨을까요? 물론 일차적으로는 긍휼하신 하나님께서 곤궁한 자기 백성을 돌보시려고 하십니다(마 6:30 이하: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나오는 논쟁에도 나옵니다.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또 다른 목적은, 자신을 메시아로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특히 유월절에 유대인들은 메시아에 대한 기대가 커집니다. 출애굽 시에 광야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주신다고 약속하시고 그대로 실행하셨습니다(출 16:4 이하). 그런데 예수님이 이와 비슷한 일을 하신다면, 즉 아무것도 없는 광야와 같은 지역에서 오천 명에게 먹을 것을 주신다면, 그분은 하나님과 같은 전권이 있는 분이시며 이스라엘을 구하실 메시아시라는 것이 분명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실제로 유대인은 이 사건을 통해 그분을 메시아로 이해하고 영접했습니다. 예수님의 의도가 전달되었습니다. 그러나 비극은 그들이 메시아를 „빵을 주는 왕“으로 오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도 나중에 자세히 언급하게 됩니다.
8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9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공관복음에서는 오병이어 이적에서 빌립과 안드레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데, 이곳에서는 이들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안드레가 베드로의 형제임에도 „열두 제자 목록“에 그의 이름이 그의 형제 옆에 있지 않고 빌립 옆에 있으며(막 3:18; 행 1:13), 요 6:7 이하에서뿐만 아니라 12:21-22에도 빌립과 함께 나옵니다. 이 두 사람은 같은 고향(벳세다) 사람이며 같이 열두 제자 중에서 유일하게 그리스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은 매우 가까운 친구였던 것 같습니다.
안드레는 „너희에게 떡 몇 개가 있는지 가서 보라“(막 6:38)고 하신 예수님 말씀에 따라, 오병이어를 가진 사람을 찾아서 예수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비록 그는 예수님 명에 순종해서 이 일을 하기는 했지만, 자기가 가지고 온 것이 무슨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찾아보라고 명하신 것이고, 이들은 찾아서 보잘것없는 것이지만 그것을 예수님께 가지고 온 것이며, 예수님이 그것을 받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너무나 신비합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과정 없이 하늘에서 떡이 내려오도록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제자들이 드린 것을 받아 그것으로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줍니다: 아무리 작은 것일지라도 우리가 주님께 위탁하면, 그분은 이것으로 큰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주권과 전권으로 사역하시지만, 그럼에도 우리의 헌신을, 그것이 우리 눈에는 별 의미가 없이 보일지라도, 사용하신다는 메시지입니다. 그러므로 오병이어의 급식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작은 헌신을 받으셔서 이것으로 큰 사역을 일으키신다는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시니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가 오천 명쯤 되더라
11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예수님은 이 급식 이적에 제자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참여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급식하는 일도 도와야 합니다. 이들은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질서 있게 앉혔습니다. 이것은 식사를 위해 준비하는 것입니다. 음식이 없는데 상을 펴고 수저를 놓는 것과 비슷합니다. 먹을 것이 없는 상태에서 이 명령에 순종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곳은 „잔디가 많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때는 동쪽 해안에 풀이 나는 3월입니다. 따라서 그곳은 산 위에(요 6:3: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있는 넓은 들과 같은 고원지대임을 알 수 있습니다(„이곳은 빈 들이요“: 막 6:35). 그러므로 이들은 잔디 위에 편히 앉아 먹을 것을 기다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놀랍게도 말세의 선한 목자에 대해 말한 겔 34:14의 예언을 그대로 성취하는 것입니다:
„좋은 꼴을 먹이고 그 우리를 이스라엘 높은 산에 두리니 그것들이 그 곳에 있는 좋은 우리에 누워 있으며 이스라엘 산에서 살진 꼴을 먹으리라.“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이 예언을 성취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일은 예수님이 시 23:2에 따른 선한 목자라는 특징적 표시가 됩니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이 모든 것은 요한복음 10장의 선한 목자라는 예수님의 자기 계시에서 더욱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나는 선한 목자라“(10:9-11).
이제 본 단락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이 말씀이 가르치는 바를 다음과 같이 간단히 정리합니다:
1. 정작 이적을 설명하는 구절은 매우 짧습니다: „예수님이 기도하신 후에 먹을 것을 나누어 주셨다.“ 예수님의 모든 이적 보도가 그렇듯이, 보도 자체는 전혀 스펙터클하지 않고 센세이션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귀신을 쫓은 예수님 보도를 오늘날 은사주의에서 귀신을 쫓은 보도와 비교하면 쉽게 차이점이 드러납니다. 후자는 요란하고 대단하게 보여서 의도적으로 쇼를 한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마디 말씀으로 이 일을 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적 보도를 통해 배울 수 있는 점은, 그것이 사실 보도라는 점입니다. 보도자는 본 것을 자세히 풀어서 설명하거나 자기 감정도 이입하는데, 복음서 기록자들은 단지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하셨다는 것만 보도합니다. 모든 것이 예수님 자체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오늘날의 이적 보도는 이적을 일으킨 사람에 집중되므로 예수님은 뒷전에 밀립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많은 사기꾼이 등장합니다.
2. 예수님은 우리가 드린 것을 받아 사용하셔서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은 대단히 적은 것이고, 그 자체는 하나님께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것을 받으셔서 사용하시면 그것은 엄청난 효과를 가져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진 작은 것이라도 하나님 손에 맡기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역사가 눈에 드러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실망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관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능력 있는 하나님의 종이 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사용하시도록 나의 것을 믿음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중요하고, 그것이 하나님께 귀중합니다.
3. 예수님은 이 사건을 의도적으로 유월절과 연관 지으십니다. 제자들이 빵과 물고기를 예수님께 가져온 것은, 당시 유월절에 먹고 마실 것이 일단 가장에게 주어지는 것과 연관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빵을 받으셨“습니다. 그분이 „감사기도“를 하신 것은 유월절 예식이 가장의 축복으로 시작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분이 빵과 물고기를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신“ 것은 가장이 유월절 음식을 나누어주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그곳에서 음식을 먹는 유대인은 유월절 예식을 연상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구약의 유월절 예식과 관련짓는 것을 통해 예수님은 무엇을 나타내시려는 것일까요? 그분은 첫 유월절 예식 시에 애굽의 노예상태로부터 구속될 때와 같이 지금 메시아적인 구속이 가까웠음을 나타내시고자 하십니다. 이제 예수님이 메시아로서 자기 백성을 사탄의 지배로부터 풀어주실 때가 왔습니다. 그동안에 하신 예수님의 축귀와 치료 사역은 주로 이 메시지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이 이적을 현장에서 체험하고 그 의미를 깨달은 사람은 얼마나 감격했을까요? 나중에 성만찬 제정 시에도 성만찬을 유월절과 연관지으십니다. 그러므로 유월절, 오병이어 급식, 성만찬은 서로 연될되어 있습니다.
4. 예수님은 이 사건 이후 유대인과의 논쟁에서 자기가 „생명의 떡“이 되심을 강조하셨습니다(6:51). 그리고 „인자의 살“을 먹고 „인자의 피“를 마시면 „영생“을 얻는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성찬식을 제정하실 때에도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이 이 오병이어 사건을 의도적으로 마지막 만찬과 연관 지으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요한은 이 사건으로 마지막 만찬 보도를 대신했으므로 그는 그 중요한 사건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감사기도 하시고“, „나눠 주시고“는 유월절 예식과 성찬식에서 사용하는 말입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은 생명의 떡으로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며, 영적 의미에서 우리에게 배고픔을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모든 갈증도 채워주십니다(„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 4:14). 우리는 매일 생명의 말씀으로 배고픔과 갈증을 해소해야 합니다.
5. 예수님이 „그들의 원대로“ 주셨다고 합니다. 12절에서는 그들이 배부르게 먹었다고 하고 13절에서는 먹고 남은 것이 „열두 바구니에 찼다“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축복의 성격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넘치도록 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이것은 낙원에 대한 이야기에서 매우 잘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을 신뢰하고 확고하게 붙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이 그토록 고생하는 것은 왜 그렇습니까(히 11:36 이하)? 그것은 그러한 고생이 그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사역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고생을 하고 어떤 삶을 살든, 이것이 나에게는 가장 좋은 삶이라는 것을 믿고 하나님의 축복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것이 가장 큰 축복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고난 속에서도 감사함과 평안과 기쁨과 신뢰를 잃어서는 안 됩니다. 불평과 두려움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곳에서 나옵니다.
12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13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는 사실도 의도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이 이스라엘에게 가르치시려고 의도적으로 „열두 바구니“만큼 남겨주셨습니다. 열두 제자가 나누어주고 열두 바구니가 남았다는 것은, 말세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다시 일으키신다는 예언과 관련되어 있습니다(참조: 사 49:6 이하; 60:4). 이를 통해 지금 메시아적 말세 사건이 일어났음을 알려줍니다. 오병이어 사건을 잘 관찰하면 이렇게 여러 상징이 들어있고, 이것을 통해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가르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많은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오늘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우리는 배운 것을 통해 자신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의 큰 은혜와 계시를 받고도 그분께 반항하는 무리가 되기 쉽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축복하시는 하나님이시며, 우리에게 영생을 넘치도록 주십니다. 우리가 굶어 죽고 순교를 당한다고 할지라도 이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서라도 하나님의 선한 인도하심을 신뢰해야 합니다. 더욱이 지금은 메시아의 은혜의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각주 1) 요 6:15 이하의 바다 위로 걸어가시는 이적도 마태, 마가복음에 나오지만, 이것을 오병이어 이적에 딸린 것으로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