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암살’, 염 대장이 아니라 안옥윤이 죽어야 했다
<알림> 영화의 스토리 일부가 담겨 있으니 아직 보지 않으신 분은 주의 바랍니다.
1)이야기꾼 최동훈
세월호 특위를 깔아뭉개면서, 메르스에 갈팡질팡하는 정부에 짜증났고 무더위에 지친 여름이었다. 어디, 한바탕 천둥벼락이라도 때려줬으면 했는데, 영화 <암살>의 시원한 기관단총이 갑갑한 일상의 벽을 통쾌하게 무너뜨렸다. 영화를 함께 보고 나온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이왕 쏘는 거, 대포 한두 방 터뜨려야 하는 거 아니야? 그 시절엔 지뢰란 거는 없었나?
상업영화라면 ‘별로’ 라고 생각해 온 내가 이상하게도 흥행의 보증수표 최동훈 감독의 영화는 여러 편 보았다. 2006년 <타짜>, 2009년 <전우치> 등, 그의 영화에서 화려한 액션은 기본에 불과하고 핵심은 탄탄한 이야기이다. 그는 한국 영화감독 가운데 인문학과 또는 소설가 출신의 계보를 이어가고 있다. 철학과 출신 박찬욱 감독, 소설가 출신 이창동 감독, 국문과 출신 최동훈 감독, 이들의 영화는 바람이 비구름을 몰고 가듯 이야기를 몰고 가는 영화이다. 때로는 황당무계한 영화이지만 일단 시원하게 비를 뿌려대는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번 영화 <암살>도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은 이 영화의 소재가 되는 여러 역사에 대해 언급한다. 젠장!, 역사적 사실로는 맞는 게 없다. 이 영화에 나오는 역사는 우리 관객이 “제발 그래 줬으면!” 하는 염원의 역사에 불과하다. 어떻게 보면 이게 진짜 역사일지도 모른다. 실제 역사에서 떨어져 나온 부스러기를 감독이 염원 속에서 조립해서 만들어낸 이야기는 정말 외국인이 “판타스틱(환상적)” 외칠 때 그 느낌 그대로이다.
2)살부의 이야기
최동훈 감독이 이야기를 짤 때 기본 축은 ‘살부(殺父)’의 이야기이다. 아버지란 어머니를 빼앗아간 존재이다. 그는 증오의 대상이다. 이토 총독을 등에 업고 뛰어가는 강인국 사장(이 장면, 최근 인터넷 어디서 본 것 같은데?), 그는 어머니 조국을 팔아먹고서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다. 영화에서 그는 집사를 시켜 영화의 주인공 안옥윤의 어머니를 쏘아 죽이라고 명한다.
배반자 염 대장, 그는 복잡한 자, 콤플렉스를 가진 자이다. 그는 어머니 조국을 위해 아버지 강인국을 습격했으나, 다시 더 큰 아버지, 일제의 밀정이 된다. 그는 왜 배반했을까? 그는 자신의 것이 아버지의 것보다 작다는 것을 안다. 그는 자신의 왜소(矮小)함 때문에 더 거대한 아버지를 선망한다. 그는 아버지 콤플렉스를 가진 자이다. 배반자 염 대장, 그는 이 나라 친일파, 친미파의 모델이다. 친일파든 친미파든 모두 왜소 콤플렉스를 가진 자들이기 때문이다.
반면 여자 주인공 독립군 안옥윤은 아버지에 의해 어머니가 살해당한 자이다. 그가 어머니라고 믿었던 하녀 역시 경신년 일제의 토벌에 의해 처단된다. 그가 죽은 어머니의 복수를 수행하며 어머니 조국을 찾아 나선 것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감독이 안옥윤이 속한 독립군을 거대한 지하 동굴 속에 집어넣은 것도 이에 대한 알레고리로 보인다. 그 동굴은 곧 어머니의 자궁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안옥윤이 자신의 상관을 처단하고 독립군 감옥에 갇혀 있었다는 것은 그의 운명을 보여준다.
배반자 염 대장이 복잡한 자이듯, 하와이 피스톨 역시 복잡한 자이다. 그는 안옥윤보다 먼저 매국노 아버지를 처단하러 나섰으나 그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안다. 해방은 한두 명의 아버지를 죽인다고 다가오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신념을 잃어버린 그의 이름이 ‘하와이’인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와이’란 다가갈 수 없는 꿈의 나라를 의미한다. 그가 즐겨 타고 다니는 오토바이는 아네모네 댄스홀의 재즈와 같은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꿈은 꿈일 뿐이니, 세상은 허망하다. 하와이 피스톨은 허망한 세상을 떠도는 허무주의자이다. 허무주의자, 하와이 피스톨이 다시 찾은 꿈이 어머니의 이미지를 지닌 안옥윤이다. 사람들은 주인공 안옥윤을 연기한 배우 전지현의 액션 연기를 칭찬하다. 나는 감독이 배우 전지현의 이미지 때문에 캐스팅한 것으로 보인다. 전지현은 어머니의 이미지를 지닌 배우이며, 킬러로서는 좀 약한 이미지를 갖는다. 전지현은 이 영화에서 긴 머리칼을 지닌 어머니답게 어설픈 미소를 짓는 킬러의 역할을 연출했다.
영화 ‘암살’에서 안윤옥 역을 맡은 전지현과 하와이 피스톨 역을 맡은 하정우ⓒ‘암살’ 스틸컷
3)흰 색과 핏빛의 이미지
살부라는 영화의 이야기를 전개하는 데 매개 고리가 된 것은 안옥윤과 미츠코라는 쌍둥이 형제의 이야기였다. 형제란 서로 동일하면서도 서로 대립하는 자, 자신에게 부족한 것을 가진 자이기에 부러움의 대상이며 미움의 대상이다. 그러니 항상 쌍둥이가 등장하면 영화는 전전반측, 예측할 수 없는 스토리로 흘러간다.
이 영화에서 안옥윤과 미츠코 역시 형제 사이의 사랑과 미움의 드라마를 반복한다. 이 두 쌍둥이가 일으키는 혼란이 없었다면 영화의 이야기가 전개되는 고리를 상실했을 것이다. 미츠코가 안옥윤을 백화점에서 발견했을 때, 미츠코는 안옥윤의 경성잠입을 누설하는 위협적 존재가 된다. 주유소 장면에서 안옥윤은 미츠코를 보는 순간 마음이 흔들리며 암살에 실패한다. 미츠코는 강인국이 안옥윤의 거점을 알고 죽이러 왔을 때 대신해서 아버지의 총을 맞아 죽는다. 안옥윤은 미츠코가 되어 결혼식에 참여한다. 그리고 미츠코를 대신하여 아버지에게 총을 겨눈다. 미츠코이기에 안옥윤은 아버지를 총을 발사하지 못한다.
이 영화를 ‘판타스틱!’ 하게 만든 장면을 들라고 한다면, 누구나 결혼식 장면을 들 것이다. 감독은 이 결혼식에서 신부가 된 안옥윤이 아버지와 일제를 살해하는 것으로 설정했다. 흰 드레스를 입은 신부가 펼치는 화려한 피의 축제, 그것은 영화 <대부>에서 아기에게 세례를 주는 신성한 제례 사이에 끼어 넣은 잔인한 피의 암살을 연상시킨다. 그 장면은 또한 관객의 상상력 속에 첫날 밤 장면, 흰 시트 위에 떨어진 핏방울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무척이나 에로틱한 이런 설정이 있었기에 자칫 총탄이 무질서하게 난무하는 어설픈 장면으로 끝날 수도 있었을 이 장면을 지루함 없이 볼 수 있었다.
4)역사의 한
살부의 이야기는 심리적 원형을 의미하며 이 원형은 구체적 현실에서 여러 가지 이야기로 등장한다. 현실 속에서 살부라는 심리적 원형은 대체로 역사 정치적 드라마로 등장한다. 권력자가 바로 아버지의 이미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시대에서 ‘살부’의 이야기가 히트를 친다는 것은 그만큼 억압자에 대한 증오감, 한마디로 역사적 한이 팽배해 있다는 말이 된다.
한 개인에게 한이 있듯이 역사도 한을 가지고 있다.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역사적 실패는 역사적인 한으로 남는다고 한다. 이 한은 역사의 심층 속에 남아 있다가 언젠가 다시 화산처럼 폭발한다. 대중은 이런 역사적 한을 잊어버렸는지 모른다. 하지만 역사는 이 한을 기억하고 있으며 대중의 무의식 속에 자리 잡고서 메시아적인 염원이 되고, 역사의 반복을 일으킨다. 예를 들어 우리 역사를 보자. 동학혁명의 한이 삼일 운동으로 펼쳐졌으며, 4.19 혁명의 한이 87년 민주대투쟁으로 펼쳐졌다.
이런 역사적 한은 자주 유령이나 환상으로도 출현한다. 우리나라 무당들이 모시는 대표적인 신이 최영 장군이다. 그는 고려를 다시 세우는 일에 실패함으로써 역사의 한이 되었고 그 뒤 무당들의 꿈에 환상으로 출현했다. 그런 이치를 프로이트는 무의식 속에 있는 것이 환상이 되어 돌아온다고 말한다.
마찬가지가 아닐까? 해방 이후 친일파 척결이 실패로 돌아갔고 그것은 역사의 한으로 남았다. 친일파의 딸이 대통령이 되는 것을 보면 대중은 의식 속에서는 역사의 한을 잊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역사의 한이 무의식의 지층 속을 흐르고 있었다. 이것은 이번 <암살>이라는 영화가 히트 치는 것을 보고 알 수 있다. 이 영화는 역사의 한이 환상으로 출현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특히 인상적이다. 영화의 마지막 염 대장은 안옥윤의 총을 맞는다. 그가 비틀거리며 문을 나서면 마치 환상처럼 들판에는 흰 색의 만장이 걸려 바람에 나풀거린다. 그 만장은 곧 이 나라의 해방을 위해 죽어간 선열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 선열들 앞에서 일제 밀정의 시체를 바침으로써 역사의 한을 달랜다는 뜻일 것이다.
내가 대중 영화를 싫어하는 이유는 영화가 현실의 꿈을 대신 이루어주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이 마지막 장면에서 염 대장을 죽인 감독 최동훈에 대해 항의하고 싶다. 현실의 친일파가 진정으로 척결될 때까지, 대중들은 역사의 한을 잊어서는 안 된다. 역사의 한을 더 깊이 간직하기 위해서는 안옥윤이 하와이 피스톨과 함께 죽었어야 했다. 우리 관객은 살아 있는 염 대장의 뻔뻔스러운 웃음을 뒤로 하고 영화관을 나서야 한다. 속으로는 왜소 콤플렉스를 지닌 친일파에 대해 불붙은 적개심을 가지고 말이다.
사람들은 이 영화에서 명대사가 이러니저러니 하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한두 명을 죽인다고 해방이 오지 않는다!”는 하와이 피스톨의 말에 “그래도 해야 된다”, “우리가 싸우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안옥윤의 말을 그 가운데 최고로 꼽고 있다.
글쎄, 나로서는 그 말보다 더 기억에 남는 말이 있다. 안옥윤의 어머니가 죽기 전에 한 말이다. 강인국이 보낸 집사가 총을 쏘기 전에 눈을 감으라 하자, 어머니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왜 네 앞에서 눈을 감아야 하는가?” 그 어머니는 눈을 감지 않은 채 죽는다. 그 말의 의미는 결코 해방을 보기 전에는, 진정으로 친일파가 척결되기 전에는 눈을 감지 않겠다는 말이다. 나는 역사의 한이 마치 그 어머니처럼 눈을 감지 않고 우리를 보고 있으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