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명장열전>
(2). 호동왕자<好童王子>
충성으로 영토 넓혔으나 사랑 잃은 비운의 왕자
고구려 호동왕자 위해 신비의 자명고를 찢은 낙랑 공주
소설·대중가요로 절절하고도 슬픈 사랑이야기 전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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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동(好童·?~32년 음력 11월)은 고구려의 제3대 왕 대무신왕의 아들이다.
당시 고구려는 압록강의 상류부터 그 중류 일대까지 자리 잡고 있어 바다 없는 내륙국(內陸國)이었다.
주위에는 고구려를 창과 화살로 겨누고 있는 적국들뿐으로 북으로는 부여(扶餘)와 읍루, 동은 옥저(沃沮)와 예맥(濊貊), 서남은 한(漢)나라의 한 고을로서 왕검성(王儉城)에 근거를 둔 낙랑(樂浪)이 틈만 나면 고구려를 치려 했다.
서기 32년(대무신왕 15년) 음력 4월, 호동이 옥저로 여행했을 때다. 호동이 낙랑 주위를 정찰하며 정세와 군량을 살펴보던 중 사냥을 나온 낙랑왕 최리(崔理)의 일행과 마주쳤다. 최리는 호동을 보자 그가 고구려의 왕자임을 알아채고 극진히 모셨다.
신기한 힘을 가진 낙랑의 자명고·자명각
성에 이른 호동은 최리가 베푸는 연회를 받아들이며 이곳의 사정을 면밀히 살폈다. 낙랑에는 신기한 힘을 지닌 자명고와 자명각이 있었다. 적군이 낙랑의 땅에 발을 디디기만 하면 북과 태평소가 저절로 소리를 내 적군의 침입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최리에게는 아리따운 딸이 하나 있었다. 호동이 연회에서 그녀를 만나보니, 공주의 잘생긴 얼굴과 고운 목소리에 저절로 가슴이 떨렸다. 공주 역시 호동의 수려한 모습을 한 번 보고는 자꾸 그 늠름한 기골이 눈앞에 떠올랐다. 아침저녁으로 호동왕자에게 문안을 드리는 사이 공주와 호동은 서로에게 깊은 마음을 지니게 됐다.
괴롭기는 했지만 이미 낙랑공주는 호동에게 남김없이 모든 걸 바쳤다. 공주는 호동에게 자명고와 자명각이 있는 무고(武庫)도 가르쳐 주었고, 왕검성의 어디쯤 산성이 있는지, 산성엔 어떤 준비가 있는지, 군병은 어떤 체제로 배치돼 있는지 등 국가 중요 정보를 모조리 알려주었다.
마침내 호동이 고구려로 돌아가는 날이 왔다. 공주는 정표로 거울을 내주며 왕자를 떠나보냈다. 고구려로 돌아온 호동은 소읍별이라는 여자를 만났다. 호동은 이제 낙랑을 치기로 결심하고 그녀에게 중요한 임무를 맡겼다. 읍별이 패물장수로 변장해 낙랑공주에게 호동의 편지를 전하고 그 회답을 받아오는 것이었다.
나라를 배반하고 사랑을 선택한 낙랑
이튿날 왕검성으로 떠난 읍별은 무사히 대궐로 들어가 공주를 만났다. 공주는 읍별이 건네는 자신의 거울과 호동의 편지를 받아 들고 한동안 가만히 서 있다가 망연한 얼굴로 눈물을 흘렸다. 편지의 사연은 간단했다.
"낙랑공주여, 그대는 낙랑의 신기 자명고와 자명각을 찢어버려라. 그리하면 내 그대를 아내로 맞을 것이요, 그리 못 하면 나도 할 수 없노라."
며칠을 두고 망설이고 고민하던 공주는 드디어 칼을 품고 자명고와 자명각이 있는 고루(鼓樓)로 올라갔다. 깊은 밤, 처음 들어서는 고루 안에는 엄청나게 큰 북과 태평소가 놓여 있었다. 북 앞으로 다가간 공주는 이를 악물고 북에다 힘껏 칼을 내리꽂고 태평소를 부쉈다.
공주는 떨리는 손으로 장도를 칼집에 꽂고 고루를 나섰다. "호동님! 이 몸은 이제 낙랑공주가 아닙니다. 오히려 낙랑의 적이옵니다. 하루바삐 구해 주옵소서!" 낙랑공주의 회답을 받아 든 읍별은 날이 밝기가 무섭게 대궐을 빠져나갔다.
호동, 낙랑국 점령했으나 공주는 죽음으로
공주의 회답을 얻은 호동은 그 즉시 군사를 꾸려 왕검성으로 진격했다. 고구려가 공격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낙랑은 아무런 손도 쓰지 못한 채 그저 고구려군이 성을 에워싸는 광경만 바라보았다. 최리는 황급히 고루로 뛰어 올라갔으나 이미 그곳에는 찢겨진 자명고와 부숴진 자명각만이 놓여 있었다. 고루를 지키고 있던 신하가 어제 공주가 다녀갔다는 말을 전했다.
"공주가 고구려 왕자에게 홀려 이 아비를 배반하고 나라를 배반하다니…." 할 말을 잃은 최리는 공주를 불러들여 그 자리에서 목숨을 앗았다. 그 순간 호동왕자가 들이닥쳤다. 최리를 붙잡긴 했지만, 공주가 죽은 것을 알고 호동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뼛속에서 솟는 것 같은 눈물을 흘렸다. 낙랑을 손에 넣었으나 고구려로 돌아가는 호동의 마음은 기쁨보다 슬픔이 더 컸다.
이 아름다운 사랑과 충성 이야기는 1942년 12월 22일∼1943년 6월 16일 매일신보에 게재됐던 이태준이 쓴 장편 소설 '왕자 호동'의 내용을 중심으로 엮어 보았다. 1949년에 발표된 고려성 작사, 김교성 작곡의 '자명고 사랑'이라는 대중가요를 들어본다.
호동 왕자 말채찍은 충성 충(忠)자요 모란 공주 주사위는 사랑 애(愛)잘세 충성이냐 사랑이냐 쌍갈래 가슴 이리 갈까 저리 갈까 별도 흐리네
자명고를 찢고서야 웃어 본 공주 전승고를 듣고서야 울어 본 왕자 사랑 팔아 충성을 산 호동의 가슴 울어 봐도 웃어 봐도 모란은 없네
주님의 무덤 위에 피는 꽃잎은 왕자님의 가슴속을 헤치는 원한 팔 척 장검 둘러 잡고 노리는 별은 일편단심 매듭짓는 직녀성일세
노랫말의 내용이 절절해 이 시대 젊은이들에게 참사랑을 알려주는 지침으로 보여 소개해 보았다.
<박희 한국문인협회 전통문학위원장>
추억의 영화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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