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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조상들은 전통적으로 아들이 태어나면 일찍 장가를 보내어 가문의 대를 이어갈 후손을 보게 했습니다. 나이가 어려도 장가를 가면 상투를 매고, 어른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런 만큼 나이는 어리지만 어른 노릇을 해내야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바 미스바(Bar mitzvah)]라는 의식이 있습니다. 자녀가 12살이 되면 부모는 아이를 데리고 성전에 올라가서 하나님 앞에 아들을 바치고 법적인 아들로 삼았습니다. 일종의 성년식입니다. 이 성년식을 통해서 비로소 아버지의 유산을 상속받을 수 있는 정당한 법적 권리를 누리는 아들이 되었습니다.
물론 그전에도 아들은 아버지의 아들이기는 하지만 열두살이 되어 성년식을 하기 전에는 독립된 하나의 완전한 인간으로 간주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책임 아래서 지도를 받는 존재였습니다.
로마에서도 열 네 살에서 열 일곱 살 사이에 성년식을 했습니다. 성년식을 치른 후 그들은 ‘토가’라는 긴 옷을 입고 공식적으로 어른이 된 것을 선포했습니다. 몇 살에 어른이 되느냐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성년식은 자녀들이 부모로부터 법적인 아들로 인정받아 재산을 상속받는 자격을 누린다는 데에 초점이 있습니다.
이러한 관습을 이해하고서 오늘 본문을 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믿는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이 믿음의 성년식을 치룬 어른이 되었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3장에서 ‘믿음이 오기 전’과 ‘믿음이 온 후’로 구분하면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예수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아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받을 상속자가 되었음을 말했습니다.
4장에서도 믿음 전후를 통해서 신분의 변화가 되었는데, 말하자면 믿음의 성년식을 치루었는데, 거기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내야 하는데, 오락가락하는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을 보면서 안타까움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믿음이 오기 전에는 율법에 의해서 사는 자요, 믿음이 온 후에는 믿음으로, 은혜로 살아야 하는 자임을 생각했습니다.
4장에서는 그 구분을 종과 아들로 구분하여 설명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성도는 어떤 존재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강력하게 호소합니다.
1. 이전에 우리가 어떤 존재였는지를 말합니다.
우리가 믿음의 성년식을 치루기 전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와 합하여 세례를 받기 전에는 어떤 존재였을까요?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1)
그 당시의 문화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 당시에는 아무리 주인의 아들이라 해도 성년식을 하기 전에는 종처럼 대우를 받았습니다. 종보다 나을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특별히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던 나라들에 있어서는 그 정도가 더 심했습니다. 주인의 아들을 가르치는 가정교사가 종이었지만 그에게는 주인의 아들을 채찍으로 때릴 수 있는 권한까지 부여되었습니다. 선생으로서의 막강한 권위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 밑에서 매 맞으며 자라는 아들이니, 그 아들이 주인의 아들로서 태어나기는 했지만 성년식을 하기 전까지는 사실상 종보다 나을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러한 당시의 풍속을 염두해서 2절을 보십시오.
“그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나니”(2)
주인은 똑똑한 종들 가운데서 아들의 가정교사로, 혹은 재산을 관리하는 청지기로 삼았습니다. 아들은 성년이 되기 전까지 이들 아래서 관리를 받았습니다. 바로 율법이 그러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마귀는 하나님의 선한 의도와는 달리 율법의 기능을 바꾸어 버렸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 노릇 하였더니”(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는 유치한 유대교의 율법에 매여 종살이하고 있었습니다.”(현대인의 성경 3)
율법이 오히려 마귀의 도구가 되어서 인간을 율법의 노예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인간을 압제하는 도구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통해 인간의 죄를 드러내고 그들을 그리스도 앞으로 이끌려고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사단은 율법으로 인간의 죄를 드러내어 절망에 빠뜨리는데 이용합니다. 인간을 정죄한 도구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인간은 율법에 매여 종살이하는 노예가 되어 버렸습니다.
2.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역사를 보십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녀된 자들을 그냥 내버려 두시지 않으셨습니다. 마치 아이들이 자라다가 때가 차면 가정교사 밑에서 풀려나 자유인이 되고, 아버지의 재산을 정당하게 받을 수 있는 법적인 상속자의 가젹을 갖추는 것과 같이 하나님 아버지는 결단하셨습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4)
하나님께서 ‘때가 차매’ , 하나님의 때가 충만하므로 그 아들을 구세주로 보내십니다. 그 아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십니다. 율법의 노예로 전락한 인간을 위해 무엇을 하셨습니까?
첫째는 우리를 속량하셨습니다.
옛날 노예가 매매되던 시절에 어떤 부자 한 사람이 노예를 사기 위해서 노예 시장에 가서 흥정을 합니다. 그래서 노예를 비싼 대가를 지불하고 삽니다. 그리고는 밖에 나와서 노예에게 선언합니다. “너는 이제부터 자유다” 그때에 노예는 자유자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속량’입니다.
속량이란 “대단히 값비싼 어떤 대가를 지불하고 노예를 노예된 자리에서 자유케 하는 사건”입니다. 속량을 받은 자의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자력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데, 주인의 은혜로 속량을 받은 것입니다.
율법의 노예된 우리를 속량했으니 어떻게요, 하나님은 예수님의 목숨 값을로 우리를 속량하셨습니다.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아들을 얻게 하셨습니다.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5)
율법의 진노 아래에서 영원한 형벌을 피할 수 없었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속량하여 주시고 나아가 우리에게 하나님의 아들의 명분을 주셨습니다.
죽어 마땅한 죄인을 어떤 사람이 비싼 보석금을 지불하고 풀어주었습니다. 자유자가 된 것만도 고마운데 더 나아가 그를 아들로 삼아 주셨다는 것입니다. 큰 은혜요 감격입니다.
그 뿐 아닙니다.
셋째는 성숙한 아들로 살도록 성령을 부어 주십니다.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5)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을 우리 마음 속에 보내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게 하셨습니다. 성령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 됨을 깨닫게 하시고 고백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아바’라는 말은 우리 식으로 말하면 ‘아빠’입니다. 아버지를 친근하게 줄여서 부를 때에 ‘아빠’라고 하듯이 아람어에서도 그렇게 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에게 임하면 하나님을 아버지로, 친근한 사랑의 아빠로 부르며 나아가며 신뢰하고 의지하는 자녀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는 곳에는 하나님께 친근함과 신뢰감을 가지고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에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부르듯이 기도로 나아갑니다.
사도 바울은 그래서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7)
분명한 신분의 변화, 종에서 아들이 되었습니다. 아들입니다.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유업을 받게 되었습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천국의 시민권자가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아도 천국의 시민권자로 하나님의 자녀 다움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이 어떻게 합니까?
“그러나 이제는 여러분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도 여러분을 아십니다. 그런데 왜 여러분은 약하고 무가치하며 유치한 율법으로 되돌아가 다시 종이 되려고 하십니까?”(현대인의 성경 9)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이 아시는 자녀가 된 사람이 어떻게 다시 믿음의 퇴보를 보이는 율법의 종이 되었는지를 지적하고 염려합니다.
우리가 거듭 살펴보았듯이 율법이 악마적인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율법의 종노릇을 한다는 것은 율법을 구원의 조건으로 받아드리는 것입니다. ‘이래 이래 행해야 구원을 받는다. 이렇게 저렇게 하지 않으면 지옥 간다’는 율법주의자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드리는 자, 성령의 지배를 받는 성도는 율법을 자연스럽게 이루며 삽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을 보십시오.
“저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10)
예, 우리도 예배 시간을 지키고, 절기를 지키고, 주일을 성수합니다. 이것을 우리도 합니다. 또 마땅히 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입니까? 이렇게 해야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구원의 조건으로 생각하면 율법주의요, 이단적으로 퇴보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한 해의 결산과 예산을 토의하는 예결산위원모임이 있습니다. 헌금 데이터를 가지고 말하게 됩니다.
저는 이 시간에 헌금을 많이 했느냐, 적게 했느냐를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드린 헌금이 율법적인 헌금이냐, 아니면 복음적 헌금이냐를 묻고 싶습니다.
율법적 헌금은 헌금 많이 해서 공로를 쌓으면 천국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분의 헌금입니다. 내가 십일조를 해야 천국에 갈 수 있다. 그러면 십일조를 하면서 짐이 됩니다. 힘이 듭니다. 천국 가기 위한 조건으로 드려지는 헌금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즐거움이 없습니다.
반면에 복음적 헌금은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해 주신 은혜에 감사해서 사랑의 응답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은혜 아래서 드리면 감사요 즐거움이요 감격이요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요한 웨슬러는 영국의 신앙 부흥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과거에 자신이 옥스포드대학에 다닐 때를 돌아보면서 자신의 신앙을 평가했습니다.
그때에 목사의 아들이었던 그는 많은 봉사사역을 했습니다. 감옥과 노동자 숙소를 방문 전도를 했습니다. 빈민구제와 구제 사업을 했습니다. 주일을 지키고,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켰습니다. 금식기도도 하고 성경 연구도 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의지하기 보다는 종교적인 사슬에 얽매였고, 자신의 의로움을 더 신뢰하였습니다.
그는 그때를 돌아보면서 고백하였습니다.
“나는 아들로서의 믿음이 아니라 노예로서의 믿음을 소유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이 복음적 신앙에서 율법적 신앙으로 퇴보하는 것을 염려했습니다.
“내가 여러분을 위해 수고한 것이 헛되지 않았나 걱정됩니다.”(현대인의 성경 11)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이 ‘은혜의 대학교’에 입학하여 잘 다니다가 ‘율법의 유치원’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 같은 믿음의 퇴보를 보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어떠합니까?
신앙이 성숙하고 있으면 감격이 있습니다. 감사가 있습니다. 자유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자원하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신앙의 퇴보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신앙생활에 재미가 없습니다. 무미건조한 종교 생활에 빠집니다. 무거운 짐으로 생각합니다. 주변 사람의 눈치를 슬슬 보게 됩니다.
성공회 신부이자 찬송가 작가인 존 뉴턴(JOHN NEWTON)은 1725년 영국에서 태어났습니다. 뉴텬의 어머니는 경건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아들이 목사가 되길 바랐습니다. 그러나 뉴턴이 여섯 살 되던 해에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고, 선원이던 아버지는 이듬해에 재혼했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 어린 뉴턴의 행실은 점차 삐뚤어졌습니다. 악행을 일삼으로 욕설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에게도 하나님의 때가 이르렀습니다.
당시에 노예상이던 뉴턴은 아프리카에서 무역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에 큰 폭풍우를 만났습니다. 배가 파선되고 위급한 상황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주여,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는 임박한 죽음 앞에서 성경 말씀을 떠올리며 자신의 종말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리고 지난날 악행에 대한 죄책감으로 하나님이 자신을 용서하시지 않을 것이라면서 절망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의 기도는 응답되었고, 폭풍우는 호전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뉴턴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며 자신을 기억하신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는 어떤 죄인이라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후 은혜와 사랑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 존 뉴턴은 나이가 들어 기억력이 감퇴해 갔지만 늘 입버릇처럼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다른 것은 다 잊어도 내가 죄인이었던 것과 죄에서 구원받았다는 것은 결코 잊어버리지 않는다."
실제로 그는 서재 벽면에 신명기 15:15을 기록해 두었습니다.
“너희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를 속하셨음을 기억하라”
성도 여러분, 신앙의 퇴보가 아닌 진보를 원하십니까?
날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고 고백하며 구체적으로 실천하며 사시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3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