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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6년 2월 8일 주일
[(녹) 연중 제5주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알려 주신 이 사명에 따라 충실하게 살고 있는지 진지하게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세상 안에 살면서도 세상의 논리에 휘둘리지 않고 복음 정신에 따라 살아갈 수 있는 은총을 간절하게 청합시다.
말씀의 초대
참된 단식은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떠돌이를 받아 주고, 헐벗은 이를 덮어 주며 보호하는 것이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복음 선포는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의 소금이며 빛이라고 말씀하신다(복음).
제1독서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리라.><나는 여러분에게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신비를 선포하였습니다.>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58,7-10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7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8 그리하면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
너의 의로움이 네 앞에 서서 가고 주님의 영광이 네 뒤를 지켜 주리라.
9 그때 네가 부르면 주님께서 대답해 주시고
네가 부르짖으면 ‘나 여기 있다.’ 하고 말씀해 주시리라.
네가 네 가운데에서 멍에와 삿대질과 나쁜 말을 치워 버린다면
10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 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나는 여러분에게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신비를 선포하였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2,1-5
1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갔을 때에,
뛰어난 말이나 지혜로 하느님의 신비를 선포하려고 가지 않았습니다.
2 나는 여러분 가운데에 있으면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결심하였습니다.
3 사실 여러분에게 갔을 때에 나는 약했으며,
두렵고 또 무척 떨렸습니다.
4 나의 말과 나의 복음 선포는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
5 여러분의 믿음이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느님의 힘에 바탕을 두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13-1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15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16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우리가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는(마태 5,13-14 참조) 오늘 복음은 우리를 ‘복음의 실천’이라는 삶의 자리로 초대합니다. 오늘 제1독서와 제2독서도 같은 방향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칫 복음 실천을 너무 거창한 일로 생각하지 않나 싶습니다. 지나치게 높은 목표는 오히려 아무것도 하지 않게 되는 핑계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어차피 해도 안 돼.” 하고 말이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에 소금이요 빛이라는 말씀을 조금 더 단순하게 곱씹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엉뚱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맛있는 떡의 핵심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적당한 ‘간’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맛있는 떡은 소금 간을 잘한 떡입니다. 그렇다고 짠맛이 도드라질 정도는 아니지요. 그러나 소금을 아예 넣지 않으면 밍밍하고 맛없는 떡이 되고 맙니다.
우리의 신앙도 이와 같지 않을까요? 능력과 여건이 되어 크고 거창하게 복음을 실천할 수 있다면 참으로 귀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있는 자리에서 주어진 내 몫을 다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신앙인의 (첫 번째) 신분증은 기쁨으로 인도하는 참행복입니다.’ 실제로 아무리 옳은 말을 해도, 늘 우거지상을 하고 있는 신자를 보고 성당에 가고 싶다거나 예수님을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번 한 주 동안이라도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주머니 속에 있던 손을 꺼내어 먼저 내밀 수 있는, 딱 이 정도로 ‘신앙인의 티’를 내 보면 어떨까요?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5,16).(진슬기 토마스 데 아퀴노 신부)
소금의 가치나 위력은 자신이 완전히 사라져야 발휘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피정객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뒤, 피로감이 밀물처럼 밀려오는 오후, 오랜만에 좀 쉬려고 드러누웠는데, 예고도 없이 건장한 청년들이 줄줄이 들이닥쳤습니다. 먼 길 오느라 식사도 제대로 못 한 분위기여서 주특기인 치즈·계란 라면을 열심히 끓여댔습니다.
라면 끓이는 데는 제 나름대로 신조가 있습니다. 국물이 한강이거나 퉁퉁 불어터진 라면은 절대로 용서가 안 됩니다. 조리 설명서에 따른 적정량의 물에 치즈 한쪽, 파 송송, 계란 탁! 불어터지기 전에 신속·정확·공정한 배분! 눈이 휘둥그래진 청년들이 후후 불어가며, 맛있다 맛있다, 하며 폭풍 흡입하는 모습에 제 마음이 얼마나 흐뭇해졌는지 모릅니다.
조리에 있어서 적절한 간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모릅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하는 마태오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소금을 주제로 한 가지 가르침을 건네고 계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도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마태 5,13)
어촌에 살다 보니 새삼 소금의 위력을 확인하게 됩니다. 물고기를 아무리 많이 잡아 와도 시간을 조금만 지체하면 상하게 되어 음식물 쓰레기통으로 직행하게 됩니다.
신속히 손질을 해서 적정량의 소금을 뿌리고 해풍에 말리게 되면 오랫동안 보관이 가능합니다. 갓 잡아 올린 생선을 구워 먹을 때는 또 어떻습니까? 잘 손질해서 살살 소금을 뿌려준 후, 숯불 위에 올려놓고 천천히 익혀 먹으면 그 맛이 일품입니다.
따지고 보니 소금의 역할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음식물에 완전히 녹아 들어가 눈에 전혀 보이지 않지만, 음식의 맛을 더해주는 소금의 역할, 바로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역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소명에 불충실했을 때, 어떤 결과를 초래할 것인지 명백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마태 5,13)
예수님의 또 다른 제자들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소명은 참으로 고상하고 숭고한 소명이지만, 우리가 부여받은 소명에 불충실하거나 게으르게 될 때, 언젠가 하느님 대전으로 나아가게 될 때 참으로 부끄럽게 될 것입니다.
소금의 가치나 위력은 자신이 완전히 사라져야, 자신이 완전히 녹아 내려야 제대로 발휘됩니다. 비록 드러나지 않지만, 공동체의 발전과 쇄신을 위해 ‘나’는 없어지지만, 그로 인해 이웃을 빛나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하고, 모든 것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갔으면 하는 사람들이 많은 이 세상에, 소금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실제로 이 세상에 충만히 현존하고 계신다는 가장 확실한 징표입니다. 조용히, 묵묵히, 뒷전에서,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그렇게 소금처럼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이야말로 참 그리스도인이며 세상의 빛입니다.
세상의 소금이 된다는 말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가 고민하던 중 구엔 반 투안 추기경님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직장인은 직장에서 성인(聖人)이 될 것이며, 군인은 군대에서 성인이 될 것이며, 환자는 병원에서 성인이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학생은 자신의 공부를 통해서, 농부는 논과 밭에서, 사제는 사제로서 사목의 현장에서, 공무원은 사무실에서 성인이 될 것입니다. 성인의 길로 나아가는 모든 발걸음은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면서 바치는 희생의 발걸음, 바로 그것입니다.”
명품은 스스로 라벨을 붙이지 않는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주 엄청난 정체성을 부여해 주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다가 문득 백화점 명품관이 떠올랐습니다. 여러분, 혹시 시장에서 파는 가방과 명품 가방을 구별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을 아십니까? 비가 올 때 반응을 보면 안다고 합니다.
비가 쏟아질 때 가방을 머리에 이고 뛰면 시장표고, 가방을 품에 꼭 껴안고 내 머리가 젖는 걸 선택하면 명품이라고 합니다. 우스갯소리 같지만 뼈가 있습니다. 명품은 스스로 “나 비싼 거야!”라고 소리치지 않습니다. 그 물건을 만든 장인이 붙인 ‘라벨’과, 그것을 소유한 주인의 ‘태도’가 그 가치를 증명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끊임없이 “나는 누구인가?”를 묻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그 답을 찾으려고 발버둥 칩니다. “나는 성공한 사업가야”, “나는 좋은 엄마야”라며 스스로 라벨을 붙이려 합니다. 하지만 오늘 저는 아주 분명하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내가 붙인 라벨은 가짜입니다. 진짜 라벨은 오직 나를 만드신 분만이 붙여주실 수 있습니다.
정말이지 내가 나를 규정하려고 할 때, 인간은 길을 잃습니다. 헨리크 입센의 희곡 『페르 귄트』의 주인공 페르 귄트는 “너 자신이 되어라”는 유혹에 빠져 평생을 방랑합니다. 그는 부자가 되기도 하고, 예언자 행세를 하며 스스로를 ‘세계의 황제’라 칭합니다. 하지만 노년에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밭에서 양파 하나를 집어 들고 껍질을 벗기며 이렇게 독백합니다. “이 껍질은 부자였던 나, 이 껍질은 예언자였던 나... 그런데 알맹이는 어디 있지? 아무리 벗겨도 중심이 없구나.”
하느님이 주신 본래의 정체성을 거부하고 스스로 수많은 가면을 썼지만, 결국 ‘아무것도 아닌 존재(Nothing)’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부모를 만나지 못한 아기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며, 인간이 스스로 가치를 창조하는 ‘초인’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창조주가 부여한 질서를 거부하고 스스로 절대적인 정체성을 세우려 했습니다.
하지만 말년의 그는 토리노의 광장에서 채찍질 당하는 말의 목을 껴안고 울다가 정신을 잃습니다. 이후 10년 동안 그는 정신 착란 상태에서 어머니와 여동생의 보살핌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어린아이처럼 살았습니다. 스스로 신이 되려 했던 철학자는 가장 의존적인 존재가 되어 생을 마감했습니다. 창조주를 잃은 피조물의 고독한 최후였습니다.
인간은 누구와 함께 있느냐, 누가 나를 규정해 주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됩니다. 1920년 인도 늑대 굴에서 발견된 두 소녀, 카말라와 아마라 이야기를 아실 겁니다. 그들은 분명 인간의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났지만, 부모의 양육을 받지 못하고 늑대 틈에서 자랐습니다. 발견 당시 그들은 네 발로 기고, 날고기를 먹으며, 밤에는 늑대처럼 울부짖었습니다.
“너는 사람이다”라고 규정해 주고 사랑해 주는 부모가 없으면, 인간은 스스로 인간다움을 세울 수 없습니다. 늑대와 대화하면 늑대가 되고, 하느님과 대화하면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반대로, 권위 있는 누군가가 긍정적인 라벨을 붙여주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하버드 심리학과 로젠탈 교수의 ‘피그말리온 효과’ 실험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그는 초등학교에서 무작위로 뽑은 학생들의 명단을 교사에게 주며 “이 아이들은 지능지수가 높은 영재들”이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일종의 ‘규정’을 지어준 것이지요. 교사는 그 권위 있는 교수의 말을 믿고 아이들을 ‘영재’로 대우했습니다. 눈빛, 말투, 기대감이 달라졌습니다. 8개월 후, 놀랍게도 그 아이들의 성적은 실제로 급상승했습니다. 권위 있는 자의 긍정적인 규정이 평범한 아이를 비범하게 만든 것입니다.
발명왕 토마스 에디슨도 마찬가지입니다. 초등학교에서 퇴학당한 에디슨이 받아온 편지에는 “댁의 아들은 지적 장애가 있어 가르칠 수 없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어린 에디슨에게 편지를 이렇게 읽어주었습니다.
“아드님은 천재입니다. 우리 학교는 수준이 너무 낮아 아드님을 가르칠 수 없으니 어머니가 직접 가르쳐주세요.” 어머니라는 절대적 권위자가 “너는 천재”라고 규정해 주었기에, 에디슨은 평생 자신을 천재로 믿고 살았고 실제로 발명왕이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규정해 주십니다. 이것은 단순한 칭찬이 아닙니다. 로젠탈 교수나 에디슨의 어머니처럼, 우리를 그렇게 만드시겠다는 창조적 선언입니다.
그런데 이 선언이 진짜 믿어지십니까? 솔직히 거울을 보면 소금은커녕 곰팡이 같을 때가 많지 않습니까? 이 선언이 믿어지려면 ‘보증’이 필요합니다.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에서 미리엘 주교는 전과자 장발장에게 은촛대를 주며 이렇게 말합니다. “장발장, 잊지 마시오. 나는 이 은으로 자네의 영혼을 샀소. 자네는 이제 악이 아니라 선에 속한 사람이오.” 은촛대라는 값비싼 대가, 즉 희생을 치르고 붙여준 이 새로운 라벨이 장발장을 성인으로 변화시켰습니다. 대가가 있어야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화가 벤자민 웨스트의 일화도 있습니다. 그가 어릴 때 어머니의 화장품으로 엉망진창인 그림을 그렸습니다. 보통 부모라면 혼냈겠지만, 어머니는 “어머, 이건 여동생 샐리구나!” 하며 아들에게 진한 키스를 해주었습니다. 훗날 거장이 된 벤자민 웨스트는 말했습니다. “나를 화가로 만든 것은 그때 어머니의 키스였다.”
어머니의 키스가 그를 화가로 만들었듯,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 곧 그분의 ‘피(Blood)’가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만듭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하시는 하느님의 키스이자, 우리 영혼에 찍힌 도장입니다. 예수님께서 목숨값을 치르고 “너는 내 것이다, 너는 빛이다”라고 하셨기에 우리는 그 말씀을 믿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세상이라는 닭장에 살고 있는 독수리들입니다. 어느 농부가 독수리 알을 주워 닭장에서 부화시켰습니다. 새끼 독수리는 어미 닭을 따라 모이를 쪼며 “나는 닭이다”라고 믿고 살았습니다. 어느 날 동물학자가 와서 그를 절벽으로 데려가 던지며 외쳤습니다. “너는 닭이 아니라 독수리다! 하늘이 너의 집이다, 날아라!”
처음에는 믿지 못해 퍼덕거렸지만, 뼛속 깊이 새겨진 본능과 학자의 외침을 믿고 날개를 펴자 창공으로 솟구쳤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오셔서 “너는 흙수저가 아니다. 너는 실패자가 아니다. 너는 세상의 빛이다!” 라고 알려주시는 동물학자이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피로 그 날개를 달아주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하나입니다. 그분이 붙여주신 라벨을 믿고, 닭장을 박차고 날아오르는 것입니다. 내가 소금임을 믿고 이웃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빛임을 믿고 올바른 삶의 길을 알려주는 행동할 때, 그것을 믿고 매일 할 때, 우리는 진짜 빛과 소금이 됩니다. 하느님 자녀가 됩니다.
성 대 레오 교황님의 말씀으로 강론을 마치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이여, 그대의 존엄성을 깨달으십시오!”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전에 들은 말이 있습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된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와도 나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바람이 불어서 나뭇잎이 흔들리듯이 우리는 외부의 환경에 의해서, 외부의 상황에 따라서 영향을 받습니다. 나뭇잎이 가지에 붙어 있으면 바람이 불어도 쉽게 떨어지지 않듯이, 정신을 맑게 하면, 정신을 바짝 차리면 길은 보이기 마련입니다. 젊은 부부가 연말을 맞이해서 프랑스 파리로 여행 갔습니다.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에서 성탄 밤 미사에 참례하였습니다. 그렇게 즐겁게 지내며 백화점에서 쇼핑도 했습니다. 그런데 돌아가는 비행기표를 정리하면서 ‘영주권 카드’를 놓고 온 걸 알았습니다. 대사관에 연락하니 시민권자가 아니면 온라인으로 신청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일주일 이상 더 머물러야 하고, 일정에 차질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여러 방법을 생각해 냈습니다. 아내가 한국으로 가서 있는 동안, 남편이 미국으로 가서 아내의 영주권 카드를 한국으로 가져가서 함께 오는 방법입니다. 그렇게 하면 정해진 시간에 올 수는 있지만 비용이 문제였습니다. 온라인으로 신청해서 서류를 다시 받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비용은 들지 않지만 1주일 이상 더 머물러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더 좋은 방법이 생각났습니다. 미국에 있는 친구에게 부탁해서 집에 있는 영주권 카드를 페덱스 택배로 보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비용도 적게 들고, 원하는 시간에 올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무척 놀랐지만, 방법을 생각해 낸 부부는 남은 일정 파리에서 즐겁게 지내다가 택배로 온 영주권 카드를 가지고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부부가 서로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놀라지 않고, 방법을 찾는 것입니다.
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15년 전입니다. 동창 신부님과 스페인 여행을 갔을 때입니다. 마드리드에서 차를 빌려서 여행 다녔습니다. 바르셀로나 공항에서 차를 반납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일정이었습니다. 저는 당연히 국제선인 줄 알고 국제선으로 갔습니다. 동창 신부님은 제가 이야기하니 따라왔습니다. 그런데 마드리드에서 갈아타는 일정이라서 국내선으로 가야 했습니다. 국제선에서 한참 기다리다가 탑승하려 하니 국내선으로 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서둘러서 국내선으로 갔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마드리드에서 한국 가는 비행기를 놓치면 주일 미사에도 차질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비용은 더 들었지만 바로 항공권을 살 수 있었고, 무사히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저를 믿고 기다려준 동창 신부님의 마음이었습니다. 마음이 넓은 동창 신부님은 비용도 함께 나누어 주었습니다. 상황은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럴수록 정신을 바짝 차리면 방법은 있기 마련입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우리가 하느님 나라로 갈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 말씀을 실천하기만 하면 어떤 바람이 불어도,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우리는 이 땅에서 하느님 나라를 시작할 수 있고, 죽을지라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하면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나으리라. 너의 의로움이 네 앞에 서서 가고 주님의 영광이 네 뒤를 지켜 주리라.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 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 그렇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그 길이 어렵지 않다고 이야기합니다. 능력과 재능으로 되는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혈연과 지연으로 되는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의 말과 나의 복음 선포는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인간의 지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크신 은총으로 주어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우리의 말과 행동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성인
성 예로니모 에밀리아니(Jerome Emiliani)
신분 : 신부, 설립자
활동연도 : 1486-1537년
같은이름 : 에밀리아노, 에밀리아누스, 예로니무스, 제로니모, 제롬, 지롤라모, 히에로니모, 히에로니무스
1486년 이탈리아 베네치아(Venezia) 태생인 성 히에로니무스 에밀리아니(Hieronymus Aemiliani, 또는 예로니모)는 젊어서 군인이 되어 트레비소(Treviso)의 카스텔누오보(Castelnuovo)에 주둔하는 베네치아 공화국 군대에서 근무하였다. 그러던 중 그는 1511년에 지휘관이 되었지만 캉브레(Cambrai) 동맹군에게 붙잡혀 포로가 되었다. 감옥생활은 그에게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회개하도록 하였다. 그 후 기적적으로 지하 감옥을 탈출한 그는 곧 트레비소의 마돈나 그란데(Madonna Grande) 성지를 순례하였다.
1518년 사제 서품을 받고 고향인 베네치아에 부임한 성 히에로니무스는 페스트가 만연하고 또 기근의 희생자들이 날로 늘어가는 불행한 사태가 발발했을 때, 특별히 고아들을 돌보기로 맹세하고 브레시아(Brescia), 베르가모(Bergamo) 그리고 코모(Como)에 고아원을 세우는 한편 베로나(Verona)에는 병원을 지었고, 참회하는 거리의 여성들을 위한 보금자리를 마련해 주는 등 여러 가지 사회활동에 혼신의 힘을 다 바쳤다. 1534년 그는 다른 두 사제와 함께 후에 '소마스카의 성직 수도회'로 변경된 '가난한 자들을 위한 봉사자회'를 설립하였다. 이 수도회 이름은 그들이 첫 수도원을 세운 도시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이 수도회의 주요 목표는 고아들을 돌보고 어린이들과 사제들을 교육하는데 있었다.
그는 병자들을 돌보는 일에 헌신하다가 결국 페스트에 감염되어 1537년 2월 8일 소마스카(Somascha)에서 운명하였다. 그가 사망한 후인 1540년 6월 4일에 그가 설립한 성직 수도회는 교황 바오로 3세(Paulus III)로부터 인가를 받았다. 성 히에로니무스는 1747년 교황 베네딕투스 14세(Benedictus XIV)에 의해 시복되었고, 1767년 교황 클레멘스 13세(Clemens XIII)에 의하여 고아들의 수호성인으로 시성되었다. 그리고 교황 비오 11세(Pius XI)는 1928년 3월 14일에 성 히에로니무스를 버림받은 청소년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성녀 요세피나 바키타(Josephine Bakhita)
신분 : 수녀
활동연도 : 1869-1947년
같은이름 : 요셉피나, 조세피나, 조세핀
성녀 요세피나 바키타(Josephina Bakhita)는 1869년 아프리카 수단(Sudan)의 다르푸르(Darfur)에서 부유한 가정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9살쯤 아랍 노예상인에게 납치되어 고통스런 청소년기를 보냈다. ‘바키타’라는 이름도 노예상인들이 지어준 것으로 ‘행운’이란 뜻이다. 이름과는 달리 그녀는 수단 중부 엘오베이드(El Obeid)와 현 수도(首都)인 카르툼(Khartoum)의 노예시장에서 팔리고 또 팔리는 신세가 되어 모진 고생을 했다.
그러다가 1883년 이탈리아 공사(公使) 칼리스토 레냐니(Callisto Legnani)에게 팔리면서 그녀의 운명도 바뀌게 되었다. 처음으로 욕설이나 매질이 아닌 인간적인 대접을 받은 그녀는 그 후 공사의 친구인 아우구스토 미치엘리(Augusto Michieli) 가족에게 보내졌고, 1885년 미치엘리 가족과 함께 이탈리아로 가서 그 가족의 유모로서 일하게 되었다. 그녀는 이탈리아에서 좋은 대우를 받으며 그 나라를 사랑하게 되었다.
미치엘리가 근무지를 옮기면서 자신의 큰딸과 유모인 성녀 바키타를 베네치아(Venezia)에 있는 카노사의 성녀 막달레나 수녀원에 맡겼는데, 그곳에서 그녀는 세상의 참된 주인이신 하느님의 존재를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녀는 교리를 배워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고, 1890년 1월 9일 세례를 받으면서 자신의 새로운 인생의 상징으로 요세피나라는 세례명을 정했다. 그리고 1893년 카노사의 성녀 막달레나 수녀원에 입회하여 3년 뒤인 1896년 12월 8일 첫 서원을 했다. 그 후 남은 50년의 생애를 이탈리아 북부 비첸차(Vicenza)에 있는 시호(Schio)라는 곳에서 카노사(Canossa)의 수녀로서 또 하느님의 겸손한 딸로서 살았다.
그녀는 온화하고 따뜻한 성품을 지녔고, 어떠한 천한 일도 마다하지 않고 행하며, 가난하고 곤경에 처한 이들을 돕는데 온힘을 다 쏟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녀를 ‘작은 흑인 어머니’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말년에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온화한 미소를 잃지 않았던 그녀는 1947년 2월 8일 선종하였다. 그녀가 선종하자 그녀의 덕행을 기억하는 수많은 추모객들이 몰려왔다고 한다.
그녀의 겸손과 높은 덕행으로 인해 선종 12년 후부터 시복시성 절차가 시작되었고, 1978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 역시 그녀의 영웅적인 덕행을 인정했다.
그녀는 1992년 5월 17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0년 10월 1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같은 교황으로부터 성인품을 받았다. 그녀에 대한 아프리카 교회의 현양 열기와 사랑은 매우 특별하다. 그래서 그녀는 ‘아프리카의 꽃’으로 불리고 있으며 수단의 수호성녀로서 존경받고 있다.
성 요한 (John)
신분: 설립자
활동지역: 마타(Matha
활동연도: +1213년
같은이름: 얀, 요안네스, 요한네스, 이반, 장, 쟝,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존, 죤, 지오반니, 한스, 후안
현 프랑스 남동부 프로방스(Provence)의 포콩(Faucon) 출신인 성 요한(Joannes)은 젊어서 엑스(Aix)로 가서 무술과 말 타기 등을 배웠다.
그러나 그의 관심은 자선활동과 기도에 있었기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와서 은수생활을 시작하였다.
그 후 그는 파리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여 박사학위를 받고 사제로 서품되었다.
첫 미사 때에 그는 하느님으로부터 특별한 계시를 받고 모슬렘들로부터 노예를 해방시키는 일에 헌신하기 시작하던 중 거룩한 은수자인 발루아(Valois)의 성 펠릭스(Felix, 11월 20일) 신부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그와 함께 지냈다.
그래서 이 두 성인은 노예 해방을 위한 수도회 설립을 계획하고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Innocentius III)의 인가를 받았다.
이때 성 요한이 초대총장으로 뽑혔다.
이것이 `삼위일체 수도회`의 시작이었다.
이 수도회는 1201년에 186명의 그리스도인 포로를 석방하고, 다음 해에는 요한 혼자서 110명을 해방시키는 등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성 요한에 대한 공경은 1655년 교황 알렉산데르 7세(Alexander VII)와 1694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12세(Innocentius XII)에 의해 승인되었다.
성 스테파노 (Stephen)
활동년도 : 1046-1124년
신분 : 설립자,수도원장
지역 : 뮈레(Muret)
같은 이름 : 스더, 스테파누스, 스테판
성 스테파누스(Stephanus, 또는 스테파노)는 프랑스 중남부 오베르뉴(Auvergne)의 티에르 자작의 아들로서 부친을 따라 이탈리아로 갔다가 수도자의 꿈을 실현시켰다.
그는 칼라브리아(Calabria)에 널리 알려진 몇몇 수도자들의 표양을 따르는 공동체를 프랑스에 세울 허가를 교황청으로부터 받았다.
그래서 그는 1110년경 리모주(Limoges) 교외의 뮈레에 수도원을 세웠는데 그랑몽(Grandmont) 수도회로도 알려졌다. 그는 회칙을 쓰지 않고 다만 이렇게 말했을 따름이다.
"그리스도의 복음 외에 다른 회칙은 없다." 그는 절대 청빈과 무소유를 강조했고, 모든 수도자가 은둔소 밖을 나다닐 수 없으며, 평수사들이 수도원 관리를 전적으로 맡게 하였다.
영국의 헨리 2세 왕은 그랑몽회의 최고 후원자였다.
그는 1189년 헨리 2세 왕의 소망대로 교황 클레멘스 3세(Clemens III)에 의해 시성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