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절 발신자와 수신자
☞ 저자는 다른 설명 없이 자신을 야고보로 소개한다. 그가 주님의 형제임을 수신자들이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야고보는 자신을 또한 ‘그리스도의 종’으로 소개한다. 1세기 교회에서 이 표현은 사탄의 종으로 살다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함으로 죄와 사망의 속박에서 해방된 자를 의미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종이 아니라 친구라 부르신 것(요한복음 15:15)은 새 창조의 영역으로 이전됨을 알리신 것이다. 편지의 수신자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다. 초기 교회 성도들은 핍박으로 인해 흩어져야 했는데 이것이 복음의 진보가 되었다. 바벨론 유수 이후 흩어져 있는 유대인을 지칭한 ‘디아스포라’를 야고보가 사용한 것은 초대 교회 구성원 대부분이 유대인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야고보는 또한 ‘열두 지파에게’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이 표현은 예수님이 세우신 하나님의 백성을 지칭한다.
2절 시험을 기쁘게 여겨라
☞ 야고보는 수신자들을 향해 “내 형제들아”라는 호칭을 자주 사용한다. 이 호칭은 야고보와 수신자들이 예수님으로 인해 영적 가족이 되었음을 표현한다. 야고보가 여기에서 언급한 시험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맞닥뜨리는 다양한 유혹을 말한다. ‘여러 가지’라는 표현은 뜻하지 않았던 다양한 상황을 전제하는데, 야고보는 수신자들이 처한 어려운 환경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1절 마지막과 2절 시작을 야고보는 ‘카라’(기쁨)라는 단어로 연결한다. 그리고 ‘파스’(개역성경에는 ‘온전히’로 번역됨)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어떠한 시험을 당하든지 ‘그 모든 것을 기쁘게 생각하라’고 권고한다. 믿음으로 사느라 겪는 시험이기 때문이다.
3절 시련이 인내를 이룸
☞ 야고보는 이 땅에서 믿음과 시련이 서로 연결됨을 알고 있었다. 유대교와 결별한 개종자들은 시련과 유혹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다. 이러한 정황을 경험한 성도는 인내를 배우게 된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5:4-5에서 인내가 주는 유익을 알려 주었다. 인내는 시련을 이겨 내는 힘이 되고,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소망으로 이어진다. 궁극적으로 믿음을 견고하게 해 준다. 야고보는 인내로 인한 열매를 수신자들이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음을 주지시킨다.
4절 성도를 온전하게 하는 인내
☞ 이제 야고보는 한 단계 더 나아가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라고 명령한다. ‘온전히’(텔레이오스)라는 단어를 단수(목적격)와 복수(주격)로 두 번 사용하면서 인내를 위한 온전한 노력이 주는 유익을 강조한다. 시련은 인내를 이루고 인내는 온전함을 가져온다.
5절 하나님의 사랑
☞ 야고보는 ‘지혜’를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로 본다. 이러한 사고는 “대저 여호와는 지혜(소피아, LXX)를 주시며”(잠언 2:6)라는 말씀과 맥을 같이한다. 지혜를 선물로 주시는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에 대해 두 가지 속성을 보이신다. ‘후히 주심’(하플로스)과 ‘꾸짖지 아니하심’(메 오네이디존토스)이다. ‘하플로스’는 신약성경에 한 번 사용된 단어로, 당신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나타낸다. 꾸짖지 않으시고 귀를 기울이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은 하나님 백성이 누리는 특권이다.
6-8절 두 마음을 품지 말라
☞ 야고보는 ‘오직 믿음으로 구하라’고 명하는데, 예수님도 의심하지 않고 기도할 것을 마가복음 11:24에서 강조하셨다. 의심과 기도는 병립할 수 없다. ‘의심하는 자’(호 디아크리노메노스)는 본문의 문맥에서 결정을 못하고 주저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이들의 불안정한 마음 상태가 요동치는 바다 물결에 비유된다. 야고보는 그들을 향해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라고 단호하게 명령한다. 마음에 의심을 품은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두 마음을 품어’(딥쉬코스)는 문자적으로 두 개의 영혼을 가진 상태를 의미한다. 믿음으로 구하지 않는 것은 두 영혼 사이에서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음을 강조하셨다.(마태복음 6:24) 두 마음을 품게 되면 삶의 모든 문제에 우유부단함을 보이게 된다. 믿음이 없는 자는 결국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9-10절 소유의 허무함
☞ ‘낮은’으로 번역된 ‘타페이노스’의 일차적 의미는 ‘겸손한’, ‘하위의’인데, 여기서는 ‘가난함’을 의미한다. 공동체 구성원들의 열악한 상황을 잘 알고 있던 야고보는 그들에게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라고 권면한다. 이는 가난한 중에 인내함으로써 소망을 이루는 것을 암시한다. ‘부한 자’(호 플루시오스)에 대해서는 낮아짐을 자랑하라고 권면한다. 이 땅의 소유가 영원한 소망 앞에서 한없이 작기 때문이다. ‘지나감이라’에 해당하는 ‘파레르코마이’는 소멸되는 것을 뜻하는 동사다. 가난한 자가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자가 낮아짐을 자랑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5절)에 근거한다. 재물이 시간과 함께 사라질 것이기에 영원한 소망을 기억하는 것이 참지혜다.
11절 부자의 어리석음
☞ 재물의 한계를 뜨거운 바람에 말라 떨어져 버리는 꽃에 비유한다. 인간의 어리석음은 삶의 목적을 많은 소유에 두는 것이다. 어리석은 인간은 그러한 탐욕에서 해방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를 가진 성도는 궁극적인 소망을 잃지 않고, 부한 자의 어리석음을 넘어선다. 이는 예수님이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누가복음 12:18-21)에서 말씀하신 진리와 맥을 같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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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는 성도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겪는 많은 어려움을 하나님의 지혜로 넘어설 수 있다고 교훈한다. 특히 여러 가지 어려움에 직면한 수신자 공동체를 향해 믿음에 굳건하게 서서 눈에 보이는 세상 것에 의존하거나 위축되지 말라고 격려한다. 눈에 보이는 것은 우리를 속이기 때문이다. 성도는 두 마음을 품지 말아야 한다.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것과 같아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성도는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고, 자신의 부족함을 하나님께 아뢰고 구해야 한다. 부자의 많은 소유도 풀의 꽃과 같이 헛된 것이다. 그것을 쫓지 말고 생명의 면류관을 구해야 한다. 성도는 교만을 피하고 겸손함으로 하나님께 인정받아야 한다. 세상의 방법이 남을 이김으로 인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방법은 이웃을 살피며, 종말을 기억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