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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다해 10월19일 연중 제28주간 토요일
[청주] 당당해 집시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영억 라파엘 신부
† 제1독서 : 로마 4, 13. 16 - 18
† 복음 : 루카 12, 8 - 12
★ 바오로 사도는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게 된다는
사실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 대한 이야기로 설명한다. 아브라함은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주님의 약속을 믿음으로써 세상의 상속자가
되었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 자신에 대하여 증언해야 할 때가 올
것이라고 이르신다. 그때가 되면 고난이 닥쳐오지만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성령께서 함께하실 것이기 때문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에 대해 증언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한국 천주교회사에 관한 강의를 많이 하고 있는 김길수
교수의 『하늘로 가는 나그네』라는 책에서는 조선 시대의 두 사람의
삶과 죽음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조선 시대 최고의 충절을
보여 준 문신 성삼문이며, 다른 한 사람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입니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신념 때문에 목숨까지 포기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죽을 때의 모습은 사뭇 다릅니다.
성삼문은 죽기 전에 다음의 시를 남겼다고 합니다. “둥둥둥 북소리 사람의
목숨을 재촉하고/ 고개 돌려 보니 해가 서산으로 저무는구나./ 황천 가는
곳 주막 하나 없다는데/ 오늘 밤 나는 어디서 머물꼬.” 이 절명 시에서 우리는
성삼문이 생을 마감하면서 짙은 허무를 느끼고 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 반면, 김대건 신부는 죽음을 앞두고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주님을 위하여 일해 왔습니다. 이제는 이 목숨을 바치려 합니다.
바야흐로 나를 위한 새 삶이 시작됩니다. 여러분도 나처럼 죽지 않는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하느님을 믿으십시오.” 이 말에서 김대건 신부는 마음의
평화를 잃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감히 생각해 보건대, 두 사람의 이러한 대조는 인간적인 가치에 따른
신념과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신앙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 주실 것이다.” 김대건 신부가
증언한 모습은 인간적 차원을 뛰어넘은 것입니다. 바로 성령께서 김대건
신부를 통하여 증언하신 것입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당당해집시다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신부님
2013년 다해 10월19일 연중 제28주간 토요일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 주실 것이다.>
+ 루카 12,8-12
당당해집시다.
가정 방문을 해 보면 그 가정의 분위기를 읽을 수 있습니다. 성상이나
성화를 모셔놓은 외적인 것을 통해 그 사람의 모두를 알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마음으로 믿으면 되지 요란스럽게
드러내야 하느냐? 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이 식사 전후에 성호경도 제대로 긋지 못하고 있다면 너무
소극적입니다. 사람은 감각적인 면이 있기 때문에 십자가나 성상 등
기도의 도구를 통해 그 의미나 뜻을 새기고 하느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일깨울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는 자는,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루카12,8)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안다고 말하면 예수님께서도 그를 안다고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의 잇속을 차리려고
누구를 잘 아는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나 복음에서 안다고 하는 것은
손해가 오더라도 그를 안다는 마음에 변함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선조들은 하느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히고 많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하느님을 모른다고 한마디만 하면 자유를 누릴 수 있는데도
목숨을 걸었습니다. 사랑하는 하느님의 마음을 상해드리지 않기 위해
자기의 목숨을 내 놓았습니다. 신앙을 지킨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때로는 믿지 않는 사람으로부터 무안을 당할 수도 있고
자존심을 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야말로 믿음을 드러낼
때입니다.
우리가 땅에서 하는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헤아려 주십니다. 그리고
각자가 행한 대로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뿌린 것을
거두는 법입니다”(갈라6,7) .그리고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상급인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우리 삶의 모습이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데 당당하기를 희망합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물질적인 풍요를 추구해서는 안됩니다.
옛날 그리스도교가 처음 시작되었을 때, 어떤 황제가 그리스도인들을
없애기 위해 신하들과 대책 회의를 열었습니다. 한 신하가 “그리스도인
들을 무조건 다 죽이자.”라고 제안하자, 다른 신하가 “그들이 기쁘게
순교하는 것을 못 보셨습니까? 아마 그렇게 하면 오히려 영광으로
생각할 것이고, 이로써 그 세력이 더 늘어날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다른 신하가 “고통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니
박해를 더욱 더 심하게 합시다.”라고 말합니다. 이번에도 다른 신하가
나서서 말합니다. “그렇게 하면 더 예수라는 신을 경외하고 뜨겁게
믿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신하가 별 것 아니라는 듯 웃으며 말합니다.
“뭘 그렇게 고민하십니까? 그들에게 더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십시오.
돈도 많이 주고, 부족한 것이 없게 만들어 줘 보십시오. 그러면 그들은
스스로 타락해서 쫄딱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무엇이든 다 채워져야 행복할 것 같지요. 그러나 다 채워졌을 때가 가장
커다란 위기의 순간입니다. 왜냐하면 행복은 넘침과 편안함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약간의 부족함과 힘듦 가운데 노력할 때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하지 않아도 부족함이 없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그들이 행복할 것이라 생각하기도 하지만, 오히려 물질적인 풍요로움과는
정반대로 정신적인 피폐함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부족하다고 또 힘들다고 좌절하고 포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행복의 순간에 가까워졌다는 증거가 되니까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박해의 순간을 두려워하지도 또 걱정하지도 말라고
하시지요. 왜냐하면 성령께서 함께 해주셔서 어떤 말을 해야 할 것까지도
다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면 그만큼 행복과
가까이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물질적인 풍요를 추구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성령과 함께 하는 삶,
주님을 세상에 증거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약속하신 행복이 있는 하느님 나라에 그만큼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 자신은 얼마나 행복에 가깝습니까? 또한 얼마나
성령과 함께 하고 있으며, 주님을 세상에 증거하고 있습니까? 어떤
책에서 본 글인데, 동물들이 달리기를 합니다. 그런데 다른 동물들은
결승점을 향해서 뛰어나갔지만, 가장 느린 달팽이 둘은 아직도
출발점에서 그리 멀리 가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자 달팽이 하나가
말하지요.
“다 같이 출발했는데, 우리 둘밖에 안 보여.”
그러자 다른 달팽이는 그 말을 받아서 이렇게 말합니다.
“걱정하지 마. 우리보다 먼저 떠난 다른 동물 모두 이 지구 안에 있을
거야.”
세상 안에서는 많고 적음을 중요하지 않습니다. 성령과 함께 하고,
세상에 주님을 증거하는 삶 안에서 분명히 세상의 것을 뛰어넘는
행복을 얻을 수 있으니까요.
인간은 주는 가운데 풍요로워지나 탐욕은 쌓는 가운데 빈곤해진다.
(페르시아 속담)
대부도에 있는 동주염전에 다녀왔습니다. 큰 감동이었습니다.
100세까지 현역
역사 안에서 보면 나이가 들어서까지 노력을 멈추지 않았던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제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이들은
충분하다는 안일함을 버리고 쉬지 않고 노력 합니다. 괴테는 80세에
명작 ‘파우스트’를 탈고 했지요. 토스카니니는 90세까지 20세기의
대표 지휘자로 활동했습니다. 피카소, 피터 드러커는 90세 이후에도
창작활동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에디슨은 92세에도 발명에 몰두했으며,
파블러 카잘스는 95세에도 하루 6시간씩 첼로 연습을 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끊임없는 노력들이 그들의 걱정을 줄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세상
안에서 기억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들은 그냥 걱정만을 하는 것 같습니다.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걱정만 할 뿐입니다. 주님께서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걱정하지
말라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일까요? 성령과 함께 하는데 최선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노력들이 내 걱정을 줄여주는 것은 물론이고,
세상 안에서 기억되는 것을 뛰어넘어 주님께 기억되는 나를 만들어 줄
것입니다.
- 인천 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기타] 참된 삶의 목적.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모든 것이 끝을 가지고 있기에 허무한 것일 아니라 소중한 것입니다.'
2013년10월19일 연중 제 28주일 토요일 복음묵상
“어떻게 답변할까, 무엇으로 답변할까, 또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 주실 것이다.” (루카12,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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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서 놓아야 할 가을을 봅니다.
아침저녁으로 옷깃을 여미는 자신의 모습을 봅니다.
오늘은 복음 내용과는 상관없는 이야기를 묵상했으면 합니다.
5,6전에 쓴 글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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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가을을 아름답다고 합니다.
붉게 물든 잎들을 달고 있는 나무를 보아도,
들판에 노랗게 물든 벼들의 무거운 이삭을 보아도, 바람에 나뒹구는
낙엽들을 보고도 사람들은 아름답다고 말을 합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면서 얼굴에 시를 쓰고 있는 이들의 모습을
보는 것도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가을을 보고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일까요?
그저 가을은 아름답다고만 말하지 말고, 왜 가을을 아름답다고
말하는지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가을의 풍경 속에서 우리가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들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예상치 못한 답변일 수도 있겠습니다마는,
우리가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들 모두는 ‘죽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죽어가고 있는 것을 보고 우리는 아름답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상하지 않습니까?
죽어가는 것을 보고 아름답다고 말하는 우리의 모습이 말입니다.
아마도 우리 모두에게는 고향으로 회귀하려는 강한 본능이 있나 봅니다.
죽어간다는 것은 다른 말로 고향을 찾는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실 때, 난 곳으로 돌아가려는 성향을 입력해
주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본능처럼 강한 그 무엇을 말입니다.
저는 이에 대해 새로운 용어를 하나 만들고자 합니다. ‘하느님에 의해
입력된 마지막 신호(The Last Signal Inputted By God)’라고 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죽어가는 것을 보고 아름답다고 이야기하는 것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입력하신 신호를 삶 속에서 느낄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에게 새겨 넣어주신 신호(Signal)에 촉각을
세워야만 합니다. 늙어간다는 것을, 유한한 삶을 산다는 것을 복음적
맥락에서 관조할 수 있다면,
아마도 우리의 정신과 마음의 세계는 보다 풍요로워지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삶은 주어지는 것이지만, 그 삶을 살아가는 방식은 우리의 선택입니다.
여기서 선택이라는 말을 사용한 이유는, 우리의 삶에 의해 죽음의 결과가
달라진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가을 깊숙한 요즈음 미사를 드리는
마음이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하고 풍요롭습니다.
늙음을 생각하지 않고는 성숙할 수 없습니다.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는 절대로 신앙적 성숙을 꾀할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잘 죽기 위해서는 잘 살아야 한다는 결론이 늘 떨어집니다.
우리가 만약 늘 죽음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정신병 중에서도 아주 중증
(重症)임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전체를 놓고 삶을 판단해야 하는 것이
지혜로운 삶이라 한다면, 가끔은 삶과 죽음을 함께 놓고 바라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시인 윤동주(尹東柱)를 무척 좋아합니다.
그의 삶이 그의 마음을 증명했기에 그러합니다.
그 유명한 서시(序詩)의 한 구절을 떠올려봅니다.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모르긴 해도 아마 청년 윤동주는 암울한 시대적 아픔 속에서도
참다운 긍정과 희망,
그리고 삶의 여정에 대한 의미를 깨달았던 인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한 깨달음에서 그의 생각이 시가 되었고, 삶으로 살 수 있었던
힘이 되지 않았었을까 생각해봅니다.
정말로 자유로웠고 지혜로웠던 사람이지요.
하늘나라에 가신 아버지가 무척 많이 생각이 납니다.
여러분, 이 아름다운 계절, 먼저 가신 이들을 통해서
우리의 참된 삶의 목적을 묵상해볼 수 있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요?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수도회] 위로받기 원한다면 고개를 위로
2013년 다해 10월19일 연중 제 28주간 토요일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 주실 것이다.>
루카 12,8-12
위로받기 원한다면 고개를 위로
운전 중에 한 라디오 방송국에서 들려온 멘트입니다. “ ‘위로’받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머리를 고개를 쳐들고 ‘위로’ 한번 바라보십시오.”
위로 받고 싶다면 위로 머리를 들라는 말, 참으로 의미심장한 멘트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차를 주차하자마자 ‘위로’가 필요했던 저는 고개를 ‘위로’ 쳐들고
하늘을 바라봤습니다. 바삐 살아오느라 참으로 오랜만에 올려다본
하늘이었습니다. 참으로 맑고 투명한 옥색 하늘이었습니다. 여기
저기 뭉게구름이 유유히 떠다니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풍경이었습니다. 이 세상 그 어떤 대화가도 묘사할
수 없는 한폭의 수채화였습니다. 오직 주님의 성령께서만 그려낼
수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정말이지 그림 같은 가을하늘 그 자체로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앞으로 좀 더 자주 위로 고개를 쳐들어 하늘을
바라봐야겠습니다.
삶이 힘겨울 때 이웃 동료들의 따뜻한 위로도 필요합니다. 세상이
주는 달콤한 위로도 필요합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위로가 있더군요.
위로부터 오는 위로입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인간으로부터 오는 위로, 세상이 주는 위로는
참으로 제한적입니다.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완전한 충족, 충만함이란 불가능하겠지요.
그러나 위로부터 오는 위로,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위로, 주님의
성령께서 베푸시는 위로는 그야말로 무한하며 충만합니다. 그
위로의 맛을 느낄 때 더 이상 아쉬움이 없습니다. 더 이상 세상이
주는 위로는 필요가 없게 됩니다.
이 좋은 계절, 세상만사 안에 현존하시고 활동하시는 주님 성령의
손길에 더욱 민감해지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얼마 전 한가한 주일 오전 시간에 겪은 특별한 에피소드입니다.
주중 피로가 겹쳐서인지 아침식사를 끝내니 ‘몽롱’ ‘노곤’했습니다.
다행히 아무런 스케줄이 없었습니다. 휴게실 편안한 소파에 앉나
TV를 틀었습니다. 참으로 여유롭고 편안한 주일 오전이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스르르 잠이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세상 모르게 깊은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얼마나 잤을까요? 부르르
하는 소리가 연속적으로 들려왔고 힘겹게 스마트폰을 들어보니...
세상에 부재중 전화가 10번이나 찍혀있었습니다. 그리고는 문자
하나! “신부님, 저희 신자들 모두 모여 신부님 강의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디쯤 오고 계시나요? 10시부터 강의 시작인거
기억하시죠?”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켜 시간을 확인했더니 10시 정각이었습니다.
그제야 다음 주일날이 아니라 바로 오늘 한 본당 강의가 있는
날이었습니다. 불행 중 다행으로 택시 타면 20여분 남짓이면 도착하니
양해를 구하면 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초스피드로 옷을 갈아입고
택시를 잡아탔습니다.
그런데 정작 큰 문제는 강의 준비였습니다. 꽤나 어렵고 특별한 강의
주제였고 제 생각에 아직 일주일이나 여유가 있으니 이제 슬슬
준비하면 되겠지, 생각했는데, 잠시 후부터 강의를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택시 속에선 저는 정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머리 털
나고 나서 그렇게 간절히 기도해본 적도 없었습니다.
“주님, 제가 이거 초대형 사고 쳤는데, 어떡하죠? 주님 정말 큰일입니다.
주님, 좀 도와주십시오. 도움이신 성모님, 방법이 없겠습니까? 제발
좀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날씨가 더운 날씨도 아닌데 등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렀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걱정하지 말거라.
성령께서 다 알아서 해주실 것이다. 그분께 맡겨라.”
그토록 불안했던 마음이 조금씩 진정이 되어갔습니다. 그리고
여유가 생겼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머릿속이 하얗더니 이런
저런 강의와 관련된 아이디어들이 조금씩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이윽고 초롱초롱한 신자들의 눈동자를 앞에 두고 강론대에
섰습니다. 참으로 뜻밖의 일이 벌어졌습니다. 강의 원고 없이는
아무 것도 안 되던 저였는데, 자동으로 강의 전체 스케마가
머릿속에 그려졌습니다. 그리고는 재미있고 유익한 예화들이
순간순간 떠올랐습니다. 말도 꼬이지 않고 술술 풀려나갔습니다.
강의 끝내고 돌아서는 제게 다들 한 목소리로 말씀해주셨습니다.
“정말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정말 감명 깊었습니다.” “앞으로
살아가는데 큰 힘이 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권고 말씀이 문자 그대로 제 안에서 이루어지는 진한
체험이었습니다.
“너희는 회당이나 관청이나 관아에 끌려갈 때, 어떻게 답변할까,
무엇으로 답변할까, 또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 주실 것이다.”
성령께 내어맡긴 결과입니다. 성령께서 활동하신다는 표시였습니다.
살레시오회 선교국 합동 바자회 및 선교의 날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일시: 2013년 10월 20일(일) 전교주일
장소: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 살레시오회 관구관 운동장
(무료주차 가능, 7호선 보라매 전철역 번 출구 도보 분)
미사: 오전 9시 30분, 12시(살레시오회 해외 선교사제 미사 집전)
내용:
-해외 선교사와의 만남 토크쇼(몽골 이호열 신부, 캄보디아 강종명 신부)
-사진 전시 및 영상(몽골, 캄보디아, 수단, 남수단, 말라위, 파푸아 뉴기니아)
-바자회 및 먹거리 장터(수익금은 전액 제세계 교육 사업에 사용)
문의: 02) 828-3500
- 살레시오회 한국 관구 부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 주실 것이다."
2013년 다해 10월19일 연중 제28주간 토요일
<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 주실 것이다. >
루카 12,8-12
<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 주실 것이다." >
오늘 짬이 나서 ‘그래비티’란 영화를 보았습니다. 인공위성과
우주정거장이 있는 곳에서 일을 하는 한 여성이 우주복을 입고 우주
공간에서 작업하다가 사고를 당합니다. 날아오는 파편들에 부딪혀서
우주 공간으로 날아가 버리게 된 것입니다.
어둡고 무한한 우주로 떠내려가는 이 여성을 구하기 위해 한 남성이
자신의 목숨을 걸고 이 여성을 쫓아옵니다. 결국 이 여성을 찾아 둘은
자신들의 우주선이 있는 곳으로 돌아오지만 이미 우주선은 파괴되었고
나머지 사람들도 죽어있었습니다.
이 남성은 또 이 여성을 데리고 다른 우주 정거장 있는 곳으로 향했지만,
거기에서는 이 남자가 위험에 처합니다. 여자가 한 가닥 줄에 의지해서
간신히 자신을 구해준 남자를 잡고는 있었지만 남자는 여인의 손을
놓습니다. 왜냐하면 그 한 가닥의 줄도 끊어지려 하기 때문에 자신이
손을 놓지 않으면 둘이 다 목숨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그 남성은 우주미아가 되어버립니다.
그 남자의 희생으로 목숨을 건지 여자는 새로 태어나는 마음으로 거기
있는 우주선을 분리해 다른 곳으로 이동하려고 하는데 알고 보니 그
우주선에는 연료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여자는 할 수 있는 방법을 다
해 보지만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직감하고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냥 편안하게 죽을 생각으로 우주선에 있는
산소를 빼냅니다.
산소가 줄어들면서 의식을 잃어갈 무렵 우주선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가 자신을 구해주었던 남자가 밖에 있는 것입니다. 그는 문을 열고
들어와 그 우주선을 추진시킬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알려줍니다. 착륙을
위해서 사용되는 에너지를 쓰라는 것이었습니다. 정신이 바짝 든 그녀는
주위를 다시 보지만 이것은 꿈이었습니다. 여자는 다시 힘을 회복하여
꿈에서 그 남자가 일러준 대로 우주선을 작동시키니 작동이 되었고
그렇게 극적으로 지구에 돌아오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대부분의 영화가 그렇지만 이 영화 역시 성경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혼자 힘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는 우리.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잡아주시고 새로 태어나게 해 주시기 위해 당신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그래도 살아가다보면 또다시 방향을 잃을 때가 있습니다.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확신이
들 때도 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우리를 그냥 놓아두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속의 인도자인 성령님을 통해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 성령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으면 그 목적지까지 도달하기는
불가능합니다.
예수님도 오늘 우리 마음속에 당신의 성령님을 통해 우리를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결코 혼자두지 않으시겠다는 약속을 주십니다.
“너희는 회당이나 관청이나 관아에 끌려갈 때, 어떻게 답변할까,
무엇으로 답변할까, 또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 주실 것이다.”
예수님은 임마누엘이란 이름도 가지고 계신데 임마누엘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시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돌아가셨지만 그만큼
귀중한 자녀들을 아무 도움 없이 두시지 않으십니다. 아무리 힘든
때라도 내면에서 울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하는 것입니다.
함께 계시겠다고 하셨으면 함께 계시는 분인 것입니다. 그리고 꼭 필요한
때에 더 확실한 목소리를 우리 갈 길을 밝혀주십니다.
25살 때 저의 내면의 목소리가 저를 사제로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난
저는 저항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결혼해서 자녀를 낳아 사제와
수녀로 만들겠다고 했습니다. 그때 천둥처럼 내면에서 울렸던 목소리가
있습니다.
“나는 ‘너’를 원한다.”
이 목소리에 저는 감히 대구를 할 수 없었고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그 때는 원망스럽기도 한 목소리였지만, 그리고 지금은 사제가 되어있고
참으로 이 길로 이끄신 성령의 도우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숙종대왕 때 수원지역에서 한 청년이 돌아가신 어머니를 냇가에 묻기
위해 땅을 파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던 한 선비가 그것을 이상하게 여겨
왜 사람을 개울에 묻으려고 하느냐고 나무랐습니다. 그랬더니 그 청년은
눈물을 훔치며 갈 처사라고 하는 사람이 그렇게 시켰다는 것입니다. 그
선비는 민심을 살피던 숙종 대왕이었습니다. 대왕은 무식하지만 그래도
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강한 그 청년에게 쌀 삼백 섬을 하사하고 명당자리에
어머니를 모시게 했습니다. 그리고 왕은 갈 처사라는 사람을 찾아가 왜
청년에게 그런 어리석은 일을 하라고 시켰느냐고 따졌습니다. 그 선비가
누구인지 모르는 갈 처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개뿔도 모르면 잠자코 있으시오. 그 곳은 그 곳에 시신을 묻기 전에
반드시 많은 곡식을 얻고 또 새로운 명당자리를 얻을 명당 중에 명당이요.
묻히기 전에 복이 들어오는데 그 곳이 물이건 불이건 무슨 상관이겠소.”
갈 처사의 능력을 안 숙종은 자신의 묘자리도 그에게 물어서, 서울
서북쪽 서오릉에 자리한 ‘명릉’이란 자리를 잡게 했다고 합니다.
우리 안에도 따르기만 하면 복이 되는 말씀이 계십니다. 그 청년이
결국에 복을 받았던 것처럼, 성령의 이끄심은 좋은 목적지에 도달하게
하십니다. 항상 내 안에서 울리는 성령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바치며 우리를 구해 주셨으니, 그 귀한
생명을 잃지 않도록 우리를 지켜줄 성령님의 도우심을 항상 주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오산 성당 홈페이지: http://cafe.daum.net/ca-osan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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