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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루나 칼럼 >
사무침의 시 . 설 렘의 노래 (5)
글 | 이원익 leewonik@hotmail.com
한국 불교의 전파와 대중화에 힘을 보태려는 발원으로
태고사를 도와 왔으며 우담바라회 회원이다. 포항에서
태어나 경남고와 서울 문리대를 졸업했다. 오래 전에
회사 주재원으로 와서 LA 지역에 살며 국제운송업을
하고 있다.
한 인간이 태어나 청소년기를 지나서 어른이 되자면 으레 성장통이 따른다. 신생국가 한국의 70년대와 그 뒤를 이은 80년대, 그리고 2,000 년대 초에 이르는 세월은 후유증이 혹심한 성장통의 시대였다. 경제는 쑥쑥 자라 팔다리는 길어졌지만 군사독재의 질곡과 빈부격차의 심화, 사회의 부조리와 가치관의 혼란은 이 개발도상국 국민들의 강인한 면역 체계마저 무너뜨렸다. 그러면서도 경험과 상상의 들판은 넓어지고 골짜기는 깊어져 사람들은 이전에는 보지 못하고 겪지 못하고 생각지도 못했던 언저리에까지 자의반타의반 발걸음이 닿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는 가운데에서도 이 땅의 시인들은 어떤 사무침과 설렘으로 이 흔들리는 밤을 지새웠으며 비록 그것이 또 한 번의 희망고문에 그칠지라도 다시금 밝아 오는 새날에 기대를 걸며 어떠한 아침을 노래했던가? 이에 우리는 40년대 후반에서 70년대 초반에 태어나 이 소용돌이의 시대를 노래한 수많은 시인들의 작품 가운데 내 눈길에 부처님의 그림자가 어린 듯한 시와 시조들을 한 서른 편 가까이 골라 보기로 한다.
먼저 경북 영주에서 태어난 송준영(취현 1947~)이 있다. 열여덟 살에 선문에 들어 여러 조사를 찾아가 선을 배웠다. 1995년, 늦은 나이에 등단하였다. 선과 시를 접목시키는 선시 이론가로서 동방대학원대학교 겸임교수를 지냈으며 계간 <시와 세계>발행인 겸 주간을 맡았다.
습득(拾得)
송준영
1호선 지하철 분실물쎈터에 있는 건
하얀 차돌 두어 개와 나를 따라온
청태 사이로 비치는 오대산 맨가슴 그리고
가부좌 틀고 있는 청량선원이네 그곳엔
내가 주워온 금빛 옷을 걸친 늙은 부처 아니
법당 왼쪽에 단정히 앉아 있던
이마 말간 문수동자가 있네 아니 이날
툇마루에 졸고 있는 하늘 한 자락과
푸른 솔잎 입에 문 물총새 한 마리 그리고
솔바람이 있네 아니 지하철 분실물쎈터
알림판엔 깔깔 웃던 습득물이 붙어
있네 동굴속으로 고함지르며 사라진
습득이 붙어있네 습득이 보이네
이 시는 시인이 오대산 청량산에서 참선을 하고 귀경하다 지하철 분실물 센터에 붙은 알림판을 보고 쓴 것이다. 1호선 지하철은 도시 문명의 대표적인 상징물인데 진정으로 잃은 것은 그 마음이 아니던가! ‘습득(拾得)’은 또한 당나라 스님의 이름이기도 하니 절묘한 중의법을 쓴 것이다. 습득은 본래 국청사 풍간 선사가 주워 와 길러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한산’과 함께 문수ㆍ보현보살의 화신이라고도 하는데 둘은 마침내 몸을 줄여 바위틈으로 사라졌다고 한다.
김동수(金東洙.1947~)는 전북 남원 출생으로 전주대 사범대학 국어교육과를 나왔다. 1982년 등단하였으며 백제예술대 방송시나리오 극작가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향토적 서정시를 추구하였으며 특히 불교의 정신과 원리들을 시 짓기에 다양하게 적용하였다.
여여(如如)
김동수
길 건너 전신주
늘 그대로이다
비에 젖어
추레하게 서서
오는 비 다 맞으며
세상은 나같이
사는 거라고
한 세월 골목에서
그냥 산다
경남 함안산인 이혜선(李惠仙 1950~)은 1981년에 등단하였다. 동국대 국문과를 나와 같은 대학 외래 교수와 몇 대학의 강사를 지냈다. 그의 시에는 불교사상에 기반을 둔 역설의 미학이 엿보인다.
거미줄 법문
이혜선
다보사 큰 법당에 가부좌하고 앉으니
머릿속에 매미소리
탱탱한 줄 하나 매어 놓는다
연이어 가로세로
얽히고설킨 거미줄 소리소리
순식간에 빈 머릿속
매미허물로 가득 찬다
꿈틀대는 초침 속 결가부좌하고
꽉 끼는 옷을 벗는다
몸부림 옷부림친다
팔만 사천 땅 속 시침 분침 흔들린다 조여든다
조여 오는 거미줄 속에 앉아
벗어버린 옷, 텅 빈 안쪽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이판사판
탱탱한 어둠 밧줄 한 쪽 끝을
확 놓아버리니 거미줄 밖이다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난 홍사성(1951~)은 동국대 불교학과를 나와 불교신문 주필 등 오랜 세월 불교 언론에 몸 담았다. 2007년에 등단하여 주옥 같은 불교시들을 발표해 오고 있다.
진신사리
홍사성
평생 쪽방에서 살던 중국집 배달원이
교통사고로 사망했습니다
고아였던 그는 도와주던 고아들 명단과
장기 기증 서약서를 남겼습니다
배우식(1952~)은 충남 천안에서 태어났다.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학예술학과를 나왔다. 2003년 등단하였으며 한 때 실명의 위기를 넘겼다. 새 이미지를 통한 풍정을 잘 그려 내고 있다.
북어
배우식
사람한테 잡혀가도 입을 크게 벌리고만 있으면 산다고 아버지한테 귀 닳도록 들었습니다. 사람한테 잡혀가도 눈만 크게 부라리고만 있으면 사람들이 겁먹고 도망간다고, 눈을 똑바로 뜨고만 있으면 사람들이 무서워서 벌벌 떨며 도망간다고 아버지한테 귀빠지게 들었습니다. 잘 보이지는 않지만, 눈 하나 깜박대지 않고 크게 뜨고 있는 내가 무섭지요. 벌벌 떨리지요?
중학생인 열여덟 살 때 친구를 따라 절에 갔다가 ‘누구나 부처님이 될 수 있다’는 어느 스님 말씀에 이끌려 한 해만 도를 닦고 집에 간다는 생각으로 출가했다는 승려 시인 임효림(1952~)은 경남 거창 태생이다. 실천불교승가회 공동의장과 만해마을 사무총장을 맡았다. 2002년 등단하였으며 그의 시는 대개가 짧으며 함축이 깊다.
무제
임효림
귀를 가졌다고 어찌
저 많은 새소리 다 들을 수 있으랴
눈을 가졌다고 어찌
저 많은 꽃들을 다 볼 수가 있으랴
안원찬(1953~)은 강원도 홍천 출생이다. 고향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치고 한신대 문예창작과를 나왔다. 2004년 등단하였으며 고향의 문화원에서 문예창작을 강의하였다. 그의 시에는 우리네들의 희로애락이 녹아 있고 더불어 흙에서 일구는 기쁨과 고통이 승화해 있다.
법고(法鼓)
안원찬
천오백 년 전
화엄사에 끌려왔다는 암소와 수소
한 울음이 한 울음을 껴안고 운다
새 아침과 헌 오후 두 차례
매 맞으며 운다
화엄사의 법고는 커서 소 두 마리의 가죽이 필요하다고 한다. 절의 사물의 하나인 법고는 아침저녁 예불 때에 맞춰 울리며 모든 가죽 가진 중생들의 아픔을 위로한다.
도종환(都鍾煥 1954~)은 충북 청주에서 태어나 충북대 국어교육과를 나와 중학교 교사를 시작으로 교직에 몸담으며 전교조 운동을 하다가 투옥되기도 했다. 1984년에 등단하였으며 후에 정계에 입문하여 국회의원 및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지냈다. 아내가 병사한 후 재혼했는데 이에 실망한 독자들이 시집 <접시꽃 당신>을 무더기로 폐기하거나 헌책방에 내어 놓았다고 한다.
담쟁이
도종환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 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서울에서 태어난 오형근(1955~)은 중앙대 문예창작과를 나와 1988년에 등단했다. ‘소’ 연작 46편과 ‘무제’ 연작 10편이 실려 있는 두 번째 시집 <소가 간다>에서 보듯이 불교적 세계관을 시로 잘 표현하였다.
소 6
오형근
소의 눈에는 태어나기 전부터
비가 내렸다
눈 껌벅일 때마다
세상 하나씩 지나간다
백무산(백봉석, 1955~)은 경북 영천에서 태어나 1974년에 현대중공업에 노동자로 들어갔는데 1984년에 ‘지옥선’을 발표하면서 시인으로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노동해방문학> 편집위원을 지냈고 국가보안법에 걸려 옥에 갇힌 바 있다. 대기업 공장 노동자 출신 시인으로서 크게 주목받아 왔으며 혁명가이자 시인인 박노해 등과 함께 80년대 노동시 운동을 이끌었다.
유허비
백무산
예전에 이 동네에서 살았던 적 있지
야산 자락에 등이 휘고 손이 거친 사람들
겨우 기대어 살던 마을
옛길 하나 옛집 하나 남김없이 다 밀고
새로 들어선 마을 다시 와 보니
최제우 선생의 처자가 있던 자리라고
선생의 유허비가 요란하게 서 있네
처가 터에 무슨 유허비냐고?
그렇지, 변변찮은 사내 하나 있었지
삼세끼 피죽 끓여먹더라도 처가는 넘보지 말랬더니
숫제 처자식을 처가에 떠넘기고 떠났다가
노숙자 꼬라지로 돌아온 일도 다반사라던데
그대가 떠난 길은 ‘밖’이던가 ‘ᄇᆞᆰ’이던가
그것이 무엇이든 가야만 하고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일에 대해서
가는 내가 길이 되고 통과하는 내가 문이 되어서도
다시 또 가야 하는 일에 대해서
나도 사무친 일이 있네, 그렇다네,
변변찮은 사내여, 어쩐지 그 일은 내게도
전생에 못다 간 길처럼 가슴이 더워지네
나를 데려가시게, 변변찮게 살고 싶네
박노해(朴勞解, 朴基平 1957~)는 전남 함평에서 태어나 고흥, 벌교에서 자랐다. 판소리 가수였던 아버지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어머니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열여섯 살에 서울에 올라가 낮에는 노동을 하고 밤에는 선린상고 야간부를 다녔다. 1984년 스물일곱 살에 첫 시집 <노동의 새벽>을 출간했는데 군사독재 정부의 금서 조처에도 100만 부 가까이 팔리며 얼굴 없는 시인으로 불렸다. 노동운동에 뛰어들어 7년여의 수배생활 끝에 체포되어 참혹한 고문 후 사형이 구형되고 무기징역에 처해졌다가1998년 7년 6개월의 수감 끝에 석방되었다. 이후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복권되었으나 국가보상금을 거부했다. 끝까지 노동계에 관여하며 노동시를 고수하고 있는 백무산과는 달리 박노해는 방향 전환을 한다. ‘과거를 팔아 오늘을 살지 않겠다’며 스스로 사회적 침묵을 하였는데, 2000년 이후에는 평화운동가 및 사진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하늘
박노해
우리 세 식구의 밥줄을 쥐고 있는 사장님은
나의 하늘이다
프레스에 찍힌 손을 부여안고
병원으로 갔을 때
손을 붙일 수도 병신을 만들 수도 있는 의사선생님은
나의 하늘이다
두달째 임금이 막히고
노조를 결성하다 경찰서에 끌려가
세상에 죄 한번 짓지 않은 우리를
감옥소에 집어넌다는 경찰관님은
항시 두려운 하늘이다
죄인을 만들 수도 살릴 수도 있는 판검사님은
무서운 하늘이다
관청에 앉아서 흥하게도 망하게도 할 수 있는
관리들은
겁나는 하늘이다
높은 사람, 힘 있는 사람, 돈 많은 사람은
모두 하늘처럼 뵌다
아니, 우리의 생을 관장하는
검은 하늘이시다
나는 어디에서
누구에게 하늘이 되나
대대로 바닥으로만 살아온 힘없는 내가
그 사람에게만은
이제 막 아장걸음마 시작하는
미치게 예쁜 우리 아가에게만은
흔들리는 작은 하늘이것지
아 우리도 하늘이 되고 싶다
짓누르는 먹구름 하늘이 아닌
서로를 받쳐 주는
우리 모두 서로가 서로에게 푸른 하늘이 되는
그런 세상이고 싶다
문혜관 스님(1957~)은 대흥사에서 기산스님을 은사로 득도하였으며1989년 ‘시조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 <번뇌, 그리고 꽃>과 <찻잔에서 선운사 동백꽃 피어나고>를 냈다. ‘불교문학포교원’ 주지로 있으면서 계간 <불교문예>를 발행하고 있다. 그의 시는 무미한 듯하면서도 청량한 산간수 같은 맛이 있다.
반야교 난간에 서서
문혜관
달빛은 저리 밝고 별빛 또한 총총한데
반야교 차가운 돌 자정의 하늘 바라보며
별빛에 잠 못 이루는 붉디붉은 동백꽃
시가 되기에는 너무나 빠알갛고
사랑이 되기에는 너무나 아픈 꽃
그러나 어쩌리, 인생 이 또한 아픈 것을
강원도 인제에서 수의사를 하고 있는 강규(1957~)는 산과 동물을 사랑하는 설악산 시인이다. 서울의 고등학생 불교학생회 간부로 불교에 심취했던 그는 한때 서울대에서 수의학을 전공한 미국 유학파 교수였다.
개에게 길을 물어본 적이 있다
강규
꽃그늘 봄바람 속에 절집 개를 기다리는
마을 분식집 마당 개에게 전생을 물어본 적이 있다
누구의 보시물이 될 것인지 괜히 물어본 적이 있다
너를 끌어낸 반 평의 햇빛과
너의 망막에 드는 만상이
죄다 새장 밖의 그림인데
코가 꿰인 나도
쓸모없는 자유를 투덜댄 적이 있다
농협사료 냄비 한 개와
떡라면 냄비 하나를 마주하고서
우리의 전생을 이야기하다가
한 입 감사하게 넘기시자고
한 그늘 아래, 또 우리의 후생을 이야기했다
충남 부여 태생인 홍성란(1958~)은 1989년에 등단하였다. 성균관대 대학원 국문과를 나왔다. 시와 시조의 형식을 넘나들며 자신 만의 미학을 구축하고 있다는 평이다. 유심시조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있다.
그 새
홍성란
갠 하늘 그는 가고
새파랗게 떠나 버리고
깃 떨군 기슭에 입술 깨무는 산철쭉
아파도
아프다 해도
빈 둥지만 하겠니
주류 문단이나 언론에서는 잘 언급되지 않는 시인이자 번역가이며 명상가로서 류시화(본명 안재찬 1958~)가 있다. 충북 옥천에서 태어나 대광고와 경희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였고 1980년에 등단하였다. 초창기에는 동인활동도 했으나 1983년에 활동을 중단한다. 이후 본명을 버리고 류시화라는 이름을 쓰며 명상서적 번역 작업을 시작하고 1988년부터 미국과 인도 등지의 명상센터에서 생활하고 인도여행을 통해 명상가를 자처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외톨이처럼 문단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신비주의적 세계관에 젖은 시집을 내곤 하는데 문단의 평가는 엇갈리지만 애독자가 많다.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류시화
물 속에는
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는
그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 안에는
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있는 이여
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이여
물처럼 하늘처럼 내 깊은 곳 흘러서
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이여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송찬호(宋燦鎬1959~)는 충북 보은에서 태어났다. 경북대 독어독문과를 나와 2003년에 등단했다.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기와 글쓰기를 좋아했는데 이윽고 삶의 진정성을 잘 표현하는 시인이 되었다.
악어와 악어새
송찬호
악어가 입을 딱 벌리자
기다렸다는 듯이
악어새가 날아와
톡톡톡톡톡
쫑쫑쫑쫑쫑
악어 이빨 사이 고기 찌꺼기를 파먹고
악어 입 속을
말끔하게 청소해 놓았다
악어새가 날아가자
악어가 입을 닫았다
연주가 끝나고
피아노 뚜껑이
탁, 하고 닫히는 것 같았다
윤제림(1960~)은 충북 제천 태생으로 동국대 국문과를 나왔다. 무심히 스쳐 지나갔을 법한 일상과 기억, 농담, 작은 기사, 광고 전단지, 소소한 사물 등 주변의 다양한 것들을 무겁지 않고 천연덕스럽게 시로 잘 만들어낸다는 평이다.
길
윤제림
꽃 피울려고 온몸에 힘을 쓰는 벚나무들, 작전도로 신작로 길로 살 하나 툭 불거진 양산을 쓰고 손으로 짰지 싶은 헐렁한 스웨터를 입고, 곰인형 가방을 멘 계집애 손에 붙들고 아낙 하나가 길을 간다. 멀리 군인트럭 하나 달려오는 걸 보고, 흙먼지 피해 일찍 피어난 개나리꽃 뒤에 가 숨는다. 흠짓 속도를 죽이는 트럭, 슬슬 비켜 가는 짐칸 호로 속에서 병사 하나 목을 빼고 외치듯이 묻는다. "아지매요, 알라 뱄지요?" 한 손으로 부른 배를 안고,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아낙이 수줍게 웃는다. 금방이라도 꽃이 피어날 것 같은 길이다.
공광규(1960~)는 충남 청양에서 태어났다. 동국대 국어국문학과를 나왔으며 1986년에 등단하였다. 단국대 등에 출강하였으며 시 창작 방법에 관한 연구서를 펴낸 국문학자다. 성철 스님을 소재로 한 동화책도 펴냈다. 자신이 몸소 부딪힌 당대의 사회 현실을 생생하게 형상화한 여러 시편들이 있다.
폭설
공광규
술집과 노래방을 거친
늦은 귀가길
나는 불경하게도
이웃집 여자가 보고 싶다
그래도 이런 나를
하느님은 사랑하시는지
내 발자국을 따라오시며
자꾸 자꾸 폭설로 지워 주신다
안도현(安度昡1961~)은 경북 예천에서 태어나 대건고와 원광대 구어국문과를 나왔다. 1981년 등단하였으며 전북 이리중학 국어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전교조에 가담으로 해임되었다. 복직하여 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우석대 문창과 교수, 단국대 부교수로 부임하였다. 2013년 초에 정부에 대한 반대의 표시로 절필을 선언했었다. 이렇듯 단순한 문학 소년에서 문학적 현실주의자로 변신한 그는 뜨거운 가슴을 안은 ‘연탄재 시인’이 되었다. 전주에 오래 살다가 2020년 초에 고향인 예천으로 옮아갔다.
너에게 묻는다
안도현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경기 화성에 토방을 지어 놓고서 ‘농사짓는 시인’이 된 이덕규(1961~)의 최대 관심사는 환경이다. 화성에서 나고 자란 그는 고2때 친누나가 세상을 뜨자 그 슬픔의 해방구로 문학을 선택했다. 1998년에 등단하였다. 학부는 토목공학과를 나와 토목기사로도 일했다.
밥그릇 경전
이덕규
어쩌면 이렇게도
불경스런 잡념들을 싹싹 핥아서
깨끗이 비워놨을까요
볕 좋은 절집 뜨락에
가부좌 튼 개밥그릇 하나
고요히 반짝입니다
단단하게 박힌
금강(金剛) 말뚝에 묶여 무심히
먼 산을 바라보다가 어슬렁 일어나
앞발로 굴리고 밟고
으르렁그르렁 물어뜯다가
끌어안고 뒹굴다 찌그러진
어느 경지에 이르면
저렇게 마음대로 제 밥그릇을
가지고 놀 수 있을까요
테두리에
잘근잘근 씹어 외운
이빨 경전이 시리게 촘촘히
박혀 있는, 그 경전
꼼꼼히 읽어 내려가다 보면
어느 대목에선가
할 일 없으면
가서 '밥그릇이나 씻어라' 그러는
함민복(咸敏復 1962~)은 충북 중원에서 태어났다. 수도전기공고를 졸업하고 월성원자력발전소에서 근무했다. 이후 서울예전 문예창작과에 입학했으며 1988년에 등단하였다. 1996년에 우연히 놀러갔던 마니산이 좋아 인근 폐가를 빌려 강화군 화도면 동막리에 정착하였다. 그의 시는 의사소통이 막힌 현실, 물질과 욕망에 떠밀리는 개인의 소외 문제를 다루며 일상에서 마주하는 대상들을 따뜻하고 진솔한 언어로 끌어안는다.
만찬
함민복
혼자 사는 게 안쓰럽다고
반찬이 강을 건너왔네
당신 마음이 그릇이 되어
햇살처럼 강을 건너왔네
김치보다 먼저 익은
당신 마음
한 상
마음이 마음을 먹는 저녁
고영섭(高榮燮 1963∼)은 경북 상주 출생으로 동국대 불교학과를 졸업했다. 1989년부터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한국불학연구소 연구실장을 역임했으며 한림대, 강원대, 서울시립대, 서울대 종교학과 강사를 거쳐 동국대 불교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포월(抱越)
고영섭
지렁이 한 마리가 전신투지로
염천의 길 위를 기어가고 있다
일생에 한 번을 순례한다는
수미산 성지로 가는 것일까
머리와 두 팔 다리 헤어진 채로
이 땅의 서러움을 모두 껴안고
저 땅의 기꺼움을 죄다 껴안고
포복하며 열어가는 새로운 역사
아, 어둠을 뚫고 나와 길 위에다
제 생사를 내맡긴 생명의 보살
정끝별(1964~)은 전남 나주 태생이다. 이화여대 국어국문과를 나왔으며 같은 대학 같은 과 교수다. 1988년에 등단하였다. 아이 고만 낳겠다고 ‘끝별’이 되었지만 국어의 시적 표현 가능성을 확장한 ‘첫별’의 하나가 된 것 같다.
밀물
정끝별
가까스로 저녁에서야
두 척의 배가
미끄러지듯 항구에 닻을 내린다
벗은 두 배가
나란히 누워
서로의 상처에 손을 대며
무사하구나 다행이야
응, 바다가 잠잠해서
장석남(張錫南 1965~)은 인천 앞바다 덕적도에서 태어나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하였다. 한양여대 문예창작과 교수다. 1987년 등단하였으며 신서정파로 분류되기도 한다.
목도장
장석남
서랍의 거미줄 아래
아버지의 목도장
이름 세 글자
인주를 찾아서 한번 종이에 찍어보니
문턱처럼 닳아진 성과 이름
이 도장으로 무엇을 하셨나
눈앞으로 뜨거운 것이 지나간다
이 흐린 나라를 하나 물려주는 일에 이름이 다 닳았으니
국경이 헐거워 자꾸만 넓어지는 이 나라를
나는 저녁 어스름이라고나 불러야 할까보다
어스름 귀퉁이에 아버지 흐린 이름을 붉게 찍어놓으니
제법 그럴싸한 표구가 되었으나
그림은 비어있네
이홍섭(1965~)은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나 강릉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90년에 시인으로, 2000년에는 문학평론가로 등단했다. 비승비속(非僧非俗)의 시인이라 할 만하다.
두고 온 소반
이홍섭
절간 외진 방에는 소반 하나가 전부였다
늙고 병든 자들의 얼굴이 다녀간 개다리소반 앞에서
나는 불을 끄고 반딧불처럼 앉아 있었다
뭘 가지고 왔냐고 묻지만
나는 단지 낡은 소반 하나를 거기 두고 왔을 뿐이다
이윤학(1965~)은 충남 홍성에서 태어나 동국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90년에 등단했다. 세상에서 가장 누추하고 사소한 것들에서 시의 계기를 발견하며 변두리의 구질구질하고 스산한 풍경이나 보잘것없이 버려진 사물들에서 사를 뽑아낸다.
전생의 모습
이윤학
작년에 자란 갈대
새로 자란 갈대 사이에 끼여 있다
작년에 자란 갈대
껍질이 벗기고
꺾일 때까지
삭을 때까지
새로 자라는 갈대
전생의 기억이 떠오를 때까지
곁에 있어주는 전생의 모습
이병승(1966~)은 서울 출생으로 일찍이 동시집과 청소년 소설을 펴 낸 아동ㆍ청소년 문학가이다. 건국대 국어국문과를 나와 1989년에 등단하였다. 그는 시를 통해 유년과 청년기를 거쳐 일상의 비루함에 찌든 어른 세계에서 예민한 관찰력으로 시적 유희와 섬세함을 선사한다.
까닭 없이도 끄떡없이 산다
이병승
어제는 하루 종일
까닭 없이 죽고 싶었다
까닭 없이 세상이 지겨웠고
까닭 없이 오그라들었다
긴 잠을 자고 깬 오늘은
까닭 없이 살고 싶어졌다
아무라도 안아주고 싶은
부드럽게 차오르는 마음
죽겠다고 제초제를 먹고 제 손으로 구급차를 부른 형,
지금은 싱싱한 야채 트럭 몰고 전국을 떠돌고
남편 미워 못 살겠다던 누이는 영국까지 날아가
애 크는 재미로 산다며 가족사진을 보내오고
늙으면 죽어야지 죽어야지 하면서도
고기반찬 없으면 삐지는 할머니
살고자 하는 것들은 대체로
까닭이 없다
김선우(金宣佑 1970~)는 여류 시인이다. 맏이인 오빠가 사고사로 죽자 아들을 보자고 낳은 아이가 여자애였다.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나 강원대 국어교육과를 나왔으며 1996년에 등단했다. 그의 시에는 독특한 페미니즘적인 시각이 엿보인다.
완경(完經)
김선우
수련 열리다
닫히다
열리다
닫히다
닷새를 진분홍 꽃잎 열고 닫은 후
초록 연잎 위에 아주 누워 일어나지 않는다
선정에 든 와불 같다
수련의 하루를 당신의 십 년이라고 할까
엄마는 쉰 살부터 더는 꽃이 비치지 않았다 했다
피고 지던 팽팽한
적의(赤衣)의 화두마저 걷어버린
당신의 중심에 고인 허공
나는 꽃을 거둔 수련에게 속삭인다
폐경이라니, 엄마,
완경이야, 완경!
문태준(1970~)은 경북 김천에서 태어나 김천고, 고려대 국어국문과를 나왔다. 1994년에 등단하였으며 한국 서정시의 계보를 잇는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맨발
문태준
어물전 개조개 한 마리가 움막 같은 몸 바깥으로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죽은 부처가 슬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이듯이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펄과 물 속에 오래 담겨 있어 부르튼 맨발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 갔다
저 속도로 시간도 흘러왔을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또 헤어져서는 저렇게 천천히 돌아왔을 것이다
늘 맨발이었을 것이다
사랑을 잃고서는 새가 부리를 가슴에 묻고 밤을 견디듯이 맨발을 가슴에 묻고 슬픔을 견디었으리라
아- 하고 집이 울 때
부르튼 맨발로 양식을 탁발하러 거리로 나왔을 것이다
맨발로 하루 종일 길거리에 나섰다가
가난의 냄새가 벌벌벌벌 풍기는 움막같은 집으로 돌아오면
아- 하고 울던 것들이 배를 채워
저렇게 캄캄하게 울음도 멎었으리라
이것으로 다섯 번에 걸쳐 펴 보인 시인 순례는 일단 마감을 하려고 한다. 그리고 이보다 더 젊은 세대 - 70년대 이후에 태어나 활발히 시작활동을 했거나 지금도 하고 있는 숱한 시인들에 대해서는 훗날을 기약하며 좀 더 시간을 드리도록 하겠다. 이 젊은 남녀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가 여태 보지 못하고 생각지도 못했던 뛰어나고 위대한 작품을 부화시키려 고독한 보금자리에서 열정과 고뇌에 찬 채 우리말 시의 알들을 품고 꼼짝없이 몸을 사리고 있을 것이다. 이런 사무침과 설렘의 기대 하나 만으로도 나의 이 한살이란 것이 참 끝까지 살아 볼 만한 그 무엇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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