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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밤의 악몽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러시아 모스크바주(州)(모스크바시를 둘러싼 수도권 지역/편집자)에 속한 크라스노고르스크시(市)에 있는 대형 공연장 '크로쿠스 시티홀'의 불타고 무너진 잔해 속에서 생존자를 찾는 작업이 주말 내내 이어지고, 병원으로 후송된 부상자들 중에는 끝내 가족 곁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이들도 나왔다. 24일 오후(현지 시간) 기준 사망자가 137명으로 늘었다는 발표가 나왔지만, 아직 최종 결과는 아니다. 여전히 생사의 고비를 넘나드는 중상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급박한 테러 현장의 부상자 후송 장면. 러시아는 103이 우리 나라의 119와 같은 구급차량이다/사진출처:러시아 비상사태부
안드레이 보로비요프 모스크바 주지사는 23일 성명을 통해 "소방·구조인력 700여명이 사건 현장에 투입돼 구조물 해체 및 인명 수색 작업을 하고 있다"며 "작업은 적어도 며칠 동안 계속될 것"이라고 밝혔다. 총격 사건이 발생한 '크로쿠스 시티홀'은 화재로 거의 소실되고, 남은 천장 부분도 붕괴 위험이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부상자들은 주로 총상을 입었거나, 화재로 인한 화상, 구조물 붕괴에 따른 압박과 질식, 골절 등 외상 환자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에게 공급할 혈액이 부족하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모스크바 가브릴로프 혈액센터에는 헌혈에 나선 수천명의 모스크바 시민들로 긴 줄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보로비요프 주지사는 사망자 유족에게 300만 루블(약 4천200만원)을 위로금으로 지급하고, 입원 환자에게는 100만 루블(약 1천400만원), 외래 치료를 받는 경상자에게는 50만 루블(약 700만)을 각각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무고한 시민들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한 무장괴한 4명과 이들을 도운 것으로 의심되는 용의자 등 11명이 사건 발생 이튿날(23일) 러시아 연방보안국(FSB) 소속 특수부대원들에게 체포돼 심문을 받고 있다. 푸틴 대통령은 긴급 대국민연설을 통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모든 이들에게 깊은 조의를 표한다"고 애도하고, 남은 유가족들과 부상자들에 대한 적극 지원과 배후 조직 응징을 다짐했다. 일요일인 24일은 '국가 애도의 날'로 지정됐다.
◇ 모스크바 테러의 추억
기나 긴(?) 악몽에서 깨어날 즈음, 모스크바 시민들은 22년전 발생한 참혹한 테러사건을 떠올리고 있다. 2002년 10월 모스크바 두브로프카 지역에 있는 공연 센터(Театральный центр на Дубровке, 통칭 두브로프카 극장)에서 발생한 대형 인질사건이다. 당시, 푸틴 대통령의 체첸 반군 진압 작전(체첸전쟁)에 의해 궤멸 위기로 몰린 체첸 무장세력 수십명이 소련 시대의 뮤지컬 '노르드-오스트'(Nord ost, 러시아어로는 Норд-ост)가 공연중인 극장안으로 난입, 관객 등 900여명을 인질로 잡고 진압부대와 사흘간 대치했다. 러시아의 무모한(?) 진압 작전으로 모두 130명이 희생됐다.
영화 '오펜하이머'로 최근 오스카상 7관왕에 오른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11번째 첩보 스릴러 영화 '테넷'(2020년 개봉)의 오프닝 격인 '우크라이나 키예프(키이우) 오페라 극장 테러'가 영감을 받았다는 그 인질극이다.
두브로프카 극장 인질극 희생자 추모비/사진출처:위키피디아
크리스토프 놀란 감독의 영화 '테넷' 중 키예프 오페라 극장 테러의 한 장면/유튜브 예고편 캡처
두브로프카 극장과 '크로쿠스 시티홀' 사건은 모스크바의 주요 공연장을 대상으로 한 테러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지만, 범행 주도 세력과 동기, 수법 등에서는 판이하게 다르다. 두브로프카 인질극은 체첸 반군이라는 분명한 반러시아 조직이 확실한 동기를 갖고 인질극을 벌였다.
그러나 '크로쿠스 시티홀' 사건은 아직 배후가 불분명한 소수의 무장세력이 건물을 파괴하고 민간인들에게 총격을 가한 뒤 혼란을 틈타 도주했다. 일종의 '사보타주'(극비 폭파 계획)다. 러시아의 특수 군사작전(우크라이나 전쟁)에 맞서 우크라이나 정보기관(SBU와 군정보총국·GUR)이 써온 저항 수법이다. 미국 일간지 워싱턴 포스트(WP)와 뉴욕 타임스(NYT)에 따르면, 미국 CIA가 그동안 우크라이나 정보기관 주도의 '사보타주'에 직간접으로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졌다.
소련 붕괴 이후 지난 30여년간 러시아의 주요 시설을 대상으로 한 테러 사건은 러시아의 특수 군사작전을 경계로 그 전과 후로 나뉜다. 그 전에는 체첸 반군으로 대표되는 북카프카스 지역의 이슬람반군에 의해 주로 저질러졌다. 지난 2년간은 우크라이나측의 '사보타주'가 대부분이다. 그 수법을 보면, 체첸반군들은 자폭테러(모스크바 지하철 사건)과 인질극으로, 전시 상태에 있는 우크라이나 측은 주요 시설 폭파나 무력화를 겨냥한 '사보타주'다. 그 과정에서 인명 피해가 났다.
◇ '크로쿠스 시티홀' 테러 재구성
rbc 등 현지 언론과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에 따르면 크로쿠스 시티홀 테러는 금요일인 22일 밤 8시로 예정된 록 그룹 '피크닉'의 콘서트가 시작되기 전에 발생했다. 홀 안에 앉아 공연을 기다리던 사람들은 로비에서 난 총격 소리를 공연 축하 불꽃놀이인 줄 알고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무장괴한들의 총격으로 밝혀지면서 관람석은 순식간에 공포에 휩싸였다. 다행히 현장 보안담담자들이 관객들을 무대와 뒷문을 통해 바깥으로 내보냈다. 사건 초기에 건물 밖 주차장으로 달려나온 사람들이 바로 이들이었다.
건물밖으로 나온 관람객들이 주차된 차량들 사이로 도망치는 모습/사진출처:현지 매체 영상 캡처
무장괴한들이 홀 안으로 난입해 관객들에게 총격을 가하면서 상황은 더욱 급박해졌다. 밖으로 나가기 위해 2층 관람석에서 무대쪽 출구로 내려울 시간조차 없었다. 날아오는 총알을 피해 바닥에 엎드리거나 좌석 뒤에 숨고, 범인들의 눈치를 보며 기어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일부는 출구 쪽으로 향했고, 일부는 멀리 떨어져 있는 탓에 목숨을 구했다.
동시에, 범인들이 던진 폭발물과 가연물질로 건물 복도에서 불길이 시작됐다. 가까스로 거리로 뛰쳐나온 사람들은 순식간에 건물 전체가 화염에 휩싸이는 모습을 보고 진저리를 쳤다. 소방 헬리콥터가 불타는 건물에 물을 쏟아부었지만 역부족이었다. 무장괴한들은 건물에 들어가자마자 불을 지른 것으로 알려졌다. 두어 차례 폭발음도 들렸다.
진짜 악몽이 홀 안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무장 괴한들은 사방을 돌아다니며 무방비 상태의 시민들에게 총격을 가했다.
현장 수색 과정에서 당시의 아비규환을 짐작케 하는 광경들이 다수 포착됐다.
'크로쿠스 시티홀' 화장실 중 한 곳에서 무려 28구의 시신이 발견됐다. 또 대피 계단을 통해 달아나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총격을 받은 듯, 시신 14구가 한 곳에 몰려 있었다. 대부분이 가족 단위였다. 자녀를 품에 꼭 껴안은 채 쓰러진 부모의 시신을 본 구조요원들은 눈시울을 붉혀야 했다.
괴한들의 총격은 상당히 짧은 시간 동안 집중적으로 벌어졌다. 모스크바의 신속대응 특수부대(SOBR, 러시아어로는 СОБР, Специальный Отряд Быстрого Реагирования, 일종의 대테러부대)와 무장 경찰 '오몬'(OMON)이 '크로쿠스 시티홀'에 진입하기 시작했을 때, 무장 괴한들은 이미 현장을 떠난 상태였다. 진압군이 건물을 채 차단하기도 전에, 괴한들은 입고 있던 위장복을 벗어던지고 혼잡한 대피객들에 섞여 현장을 빠져나간 것으로 보인다. 사건 현장에서 무장괴한의 사살이나 검거 소식이 들려오지 않았던 이유다.
하지만 러시아 군경은 그들의 도피 가능 경로를 얼추 파악하고 그 뒤를 쫒기 시작했다.
◇ 무장괴한(테러범) 체포및 공개
테러범들의 체포는 알렉산드르 힌슈테인 국가두마(하원) 의원에 의해 처음 알려졌다. 힌슈테인 의원은 23일 자신의 텔레그램 채널을 통해 흰색 르노 자동차를 타고 도주한 테러범들의 체포 장면을 비교적 자세하게 설명했다.
"파악된 정보에 따르면, 테러범들이 탄 르노 차량은 브랸스크주 카라친스키 지역 카순 마을 근처에서 발견됐다. 이 차량은 군경의 정지 요구에도 멈추지 않고 (임시 검문소를) 통과했으나, 집중 총격으로 타이어가 터지면서 전복됐다. 범인 한 명은 그 자리에서 체포됐으나 나머지는 인근 숲속으로 달아났다. 군경은 수색 작업 끝에 23일 오전 3시 50분쯤 두 번째 범인을 잡았다. 수색은 계속되고 있다".
그는 르노 자동차 안에서 테러범들이 '크로쿠스 시티홀'에서 사용한 AKM 돌격소총(AK-47 소총의 개량형)의 탄창과 권총 한자루, 타지키스탄 시민의 여권 등이 발견됐다며 사진을 공개했다.
테러범들이 탄 도주용 차량에서 발견된 압수물들/사진출처:텔레그램
러시아 군경은 우크라이나로 향하는 고속도로 M-03을 차단하고, 테러범을 기다렸다. 검문 요원들에게는 범인들이 무장하고 있으니 각별히 주의하라는 명령도 하달됐다. 러시아 연방 도로 관리국은 "23일 0시부터 M-03 고속도로가 부분 통제되고 있다"며 "특히 368km 지점부터 385km까지 모든 차량이 일시적으로 통제됐다"고 밝혔다.
러시아 FSB가 23일 아침 "핵심 테러 용의자 4명이 모두 모스크바에서 남서쪽으로 약 300㎞ 떨어진 브랸스크 지역에서 검거됐다"고 공식 발표했다. 우크라이나 국경에서 약 100㎞ 떨어진 곳이다. FSB는 "범인들이 국경을 넘어 우크라이나로 탈출하려고 했고, 우크라이나 측과 접촉하기도 했다"고 주장했다.
러시아 측은 범인 체포 과정에서 상상할 수 없는 폭력도 행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영상도 나왔다. 세번째로 공개된 범인은 피범벅 상태인 얼굴을 붕대로 칭징 감고 있었다. 체포 중에 오른쪽 귀가 잘렸다고 했다. 범인의 입에 잘린 귀를 쑤셔박은 듯한 사진도 인터넷에 공유됐다. 사진의 조작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 범인의 옷에도 피가 흥건했다.
◇ 테러리스트들은 누구?
체포된 범인들의 심문 영상이 공개됐다. 첫번째 범인은 러시아어로 텔레그램을 통해 들었던 '종교 지도자' 측의 사주를 받고 지난 4일 터키를 통해 모스크바에 왔다고 진술했다.
러시아 국영 방송사 러시아 투데이(RT)의 편집장 마르가리타 시모냔이 23일 공개한 영상에 따르면 두손과 두발이 묶인 그는 땅바닥에 엎드린 상태에서 "(테러) 지시자가 공연장에 있는 모든 사람을 살해하라는 임무를 줬다"고 러시아어로 말했다. 그는 "한 달 전쯤 '종교 지도자'와 텔레그램으로 연락을 주고 받았으며 범행 대가로 50만 루블(약 750만원)을 받기로 했다"고 털어놨다.
러시아어를 구사하는 첫번째 테러 용의자 심문 모습/영상 캡처
"범행에 사용한 무기는 튀르키예(터키)에서 확보했으며, 돈을 받기 위해 공연장에서 사람을 쐈다"고 그는 주장했다. 그가 실제로 전달받은 돈은 50만 루블의 절반 정도였지만, 나중에 100만 루블을 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고도 했다.
시모냔 편집장은 두번째 범인이 신문받는 영상도 공개했다. 그는 러시아 수사당국의 질문에 타지키스탄어로 답변했다. 옆에서 러시아어로 통역됐다. 타지키스탄은 이번 테러의 배후를 자처한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세력인 '이슬람국가'(IS)의 조직이 활동하는 지역 중 하나다. IS는 자체 아마크 통신을 통해 소속 무장대원 4명이 테러를 저질렀다고 주장하면서, 이들의 사진을 모자이크해 공개하기도 했다.
시모냔 편집장은 우크라이나 국경까지 불과 100㎞ 정도 남겨 놓은 상태에서 범인들을 체포한 군인들을 포상해야 한다며 "이번 사건이 '형제가 아닌 사람들'(우크라이나인들)에 의해 계획된 것이 분명하다"고 강조했다.
◇ 진짜 누가 배후일까?
테러 핵심 용의자 4명이 체포됐으니, 배후는 곧 가려질 것으로 보는 게 상식이다. 하지만 러시아측의 수사 발표를 곧이곧대로 믿는 서방국가와 언론은 별로 없을 것 같다. 러시아측이 이 사건을 정치·외교적으로 활용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매체와 주요 외신에서는 사건 발생 직후부터 테러 배후 조직에 대한 다양한 분석과 예측이 제기됐다. 중앙아시아의 타지키스탄인들이 범인으로 잡힌 이상, 배후 세력의 범위는 상당히 좁혀졌다. 하지만, IS측이 일찌감치 자신들이 배후라고 나서면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서방), IS간에 복잡한 '테러 배후 방정식'이 형성되는 느낌이다.
러시아측은 일단 우크라이나를 배후 세력으로 몰아가는 분위기다. 일견 당연하다. 러시아 FSB는 "브랸스크 지역에서 붙잡힌 테러범들이 우크라이나 국경을 넘을 계획을 갖고 있었으며, 우크라이나 측과 관련 접촉을 갖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는 "접촉이란 단어가 주는 의미는 불명확하나, 러시아 측은 '우크라이나 개입 흔적'을 공식화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테러범들의 국적은 타지키스탄으로 알려졌다. IS의 활동 무대다. 서방 외신이 이번 총격 사건을 IS와 연관짓는 주된 이유다.
하지만, 러시아에게 우크라이나와 일체 관계가 없는 IS의 테러설은 '최악'이다. 70%대의 높은 투표율에 압도적인 득표율로 임기 5기를 연 푸틴 대통령에게 IS 테러설은 그의 권위를 흠집내는 도발이자, 향후 국정 수행에 큰 악재가 아닐 수 없다.
러시아 언론들은 FSB의 우크라이나 개입및 추적 발표에 주목했다. 테러 사건의 실체 파악과 배후 분석에 핵심 '팩트 요인'로 설정됐다. 이번 공격이 우크라이나 SBU(보안국)에 의해 직접 기획됐다는 주장에서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측을 속이기 위해 IS의 테러 조직을 이용하기로 했다는 시나리오까지 나왔다.
러시아 일각에서는 사건 직후, 주러 미국 대사관이 지난 7일 대형 콘서트장 등 공공장소를 겨냥한 테러 공격 가능성을 경고한 사실에 주목한 '응모론'도 제기됐다. 주러 미국 대사관은 테러의 배후를 알고 있었으며, 스스로 테러 공격에 연루되었을 가능성도 있다는 주장이다.
성소수자 인권을 지지한다는 의미로 무지개색 깃발을 내건 주러 미국 대사관과 영국 대사관/캡처
친크렘린 강경 올리가르히인 콘스탄틴 말로페예프 차르그라드 그룹 회장은 우크라이나의 개입을 기정사실화했다. 극우 민족주의 성향의 차르그라드 TV 등을 소유한 그는 "체첸반군의 마지막 테러 '노르드-오스트' 사건(두브로프카 극장 인질극) 이후, 우리는 체첸 전쟁에서 승리했다"며 "우리는 다시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승리할 준비가 되어 있다. 우크라이나 민간인에게 도시를 떠날 수 있도록 48시간의 말미를 주고, 총공세로 전쟁을 끝내자"고 주장했다. 그는 2014년 우크라이나 동부지역 분쟁에서 돈바스 지역(도네츠크주와 루간스크주)의 독립 투쟁에 앞장선 인물이다.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안보회의 부의장(전 대통령)도 "이들이 키예프(키이우) 정권의 테러범으로 확인된다면, 끔찍한 행위를 저지른 국가도 무자비하게 파괴돼야 한다"고 부추겼다. 안드레이 카르타폴로프 러시아 하원 국방위원장은 "우크라이나가 이번 테러의 배후로 밝혀진다면, 러시아가 전장에서 명확하게 대응을 해야 할 것"이라며 보복 대응을 주장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군 정보총국(GUR)의 안드레이 유소프 대변인은 23일 테러범들이 우크라이나로 탈출을 시도했다는 러시아 FSB의 발표를 부인했다. 그는 우크라이나 매체 'RBC-우크라이나'에게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2년 넘는 교전 중인 그 곳에는 러시아 보안군들이 깔려 있는데, 그 곳을 통해 국경을 넘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
또다른 GUR 관계자도 "FSB의 발표는 거짓말"이라며 "사건이 발생한 지 몇 분만에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개입 테러로 몰아갔고, FSB 발표도 그 일환"이라고 주장했다. 스트라나.ua는 "이번 테러 공격이 IS나 또다른 이슬람 과격단체에 의해 저질러진 것으로 입증되더라도,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와 연관설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유소프 대변인은 총격 사건 직후에 낸 첫 논평에서는 "이번 테러 공격은 푸틴의 명령에 따라 러시아 특수부대가 계획적이고 의도적으로 도발한 것"이라며 "우크라이나 전쟁을 더욱 확대하고 추가 동원령을 발령하기 위한 명분을 쌓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러시아 FSB의 자작극이라는 뜻이다. "모스크바 중심부에서 자동소총을 든 무장세력 집단이 전혀 방해받지 않았다는 점 등 겉으로 드러난 여러 증거들로 미뤄볼 때 러시아 FSB에 의해 조직된 게 분명하다"고도 했다. 우크라이나 외무부와 대통령실에서도 사건 발생 초기 비슷한 논평이 나왔다.
크로쿠스 시티홀 잔해 수색 모습/영상 캡처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텔레그램을 통해 "어제(22일) 모스크바에서 일어난 일로 푸틴 (대통령) 등 쓰레기들은 모두 다른 사람을 비난하려고만 한다"며 "그들은 늘 같은 수법을 쓴다"고 주장했다. 미하일로 포돌랴크 우크라이나 대통령 고문은 "우크라이나는 이 사건들과 전혀 관련이 없다"며 "러시아 측의 주장은 절대 용납될 수 없으며 터무니없다"고 일축했다.
존 커비 미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소통보좌관도 브리핑에서 "현재로서는 우크라이나나 우크라이나인이 연루돼 있다는 징후는 없다"며 '우크라이나 연루설'에 선을 그었다.
미국 등 주요 서방 측이 지목하는 테러의 배후는 IS다. IS의 하부조직인 이슬람국가 호라산(ISIS-K)이 최근 몇 년간 푸틴 대통령을 겨냥해왔다는 게 주요 이유다. 푸틴 대통령이 체첸전쟁을 벌이고,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등 무슬림에게 잔혹 행위를 했다는 것이다. 특히 ISIS-K는 아프가니스탄과 타지키스탄 일원에서 활동하는 조직으로 알려졌다.
미 CNN 방송은 정부 소식통을 인용해 "지난해 11월부터 ISIS-K가 러시아를 공격할 계획이라는 정보가 지속적으로 접수됐다"는 보도했다. 미 NYT도 “ISIS-K는 지난 2년 동안 러시아에 집착해 왔다”며 "모스크바가 아프가니스탄과 체첸, 시리아 내전에 개입한 것을 언급하면서 크렘린을 겨냥해 왔다"고 전했다. CBS 뉴스는 "미국은 IS의 배후 주장을 뒷받침하는 정보를 보유하고 있으며, 그러한 주장을 의심할 이유가 없다"며 "미국 측은 러시아에 잠재적인 테러 공격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러시아 일부 매체는 이를 '가짜 뉴스'로 규정했다. 오히려 주러 미국대사관의 테러 경고를 이번 총격사건과 연계시키고 있다. 모스크바 주재 미 대사관은 지난 7일 "모스크바에서 콘서트 등 대규모 행사를 표적으로 한 극단주의자들의 공격이 임박했다"고 공개적으로 경고한 바 있다. 러시아 정보기관 소식통은 미국의 경고가 전달됐음을 확인했으나 구체적인 내용은 없었다고 밝혔다.
푸틴 대통령도 아예 미국의 경고를 '협박'이라고 일축했다. 그는 지난 19일 FSB 고위 관리들과 가진 회의에서 미국의 테러 경고에 대해 "명백한 협박이자 우리 사회를 위협하고 불안정하게 만들려는 의도와 유사하다"고 말한 것으로 미 블룸버그 통신은 전했다. 당시 주러 미국 대사관의 테러 위협 경고는 러시아 대선을 방해하려는 세력의 심각한 도발이 있을 수 있다는 정도로 받아들여졌다. 대선이 순조롭게 끝나고 푸틴 대통령의 당선이 확정된 뒤 '크로쿠스 시티홀'과 같은 대형 테러가 일어날 줄은 생각조차 못한 것으로 보인다.
서방 외신은 이번 테러 공격에 우크라이나가 개입했다는 증거가 없다는 주장을 일관되게 펴고 있다.
◇ 테러 사건이 우크라이나 전쟁에 미치는 영향
이번 테러 사건은 어떤 형식이든 우크라이나 전쟁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개입'설은 이번 테러 공격의 실제 배후가 누구인지와는 무관하게 계속 강조될 가능성이 높다.
그 의도는 '우크라이나 전쟁의 확대와 동원령 발령의 명분 쌓기'다. 러시아에서는 그동안 푸틴 대통령이 대선 후 동원령을 발령할 것이라는 소문이 끈임없이 돌았다. 따라서 대통령 선거 기간에 우크라이나 인접 국경 도시 벨고로드에 대한 우크라이나의 포격, 게릴라식 침투 공격과 함께 이번 테러는 러시아의 동원령 발령을 정당화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수 있다.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는 "푸틴 대통령이 이번 테러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지는 알 수 없으나 이미 많은 러시아 전문가는 대선 이후 푸틴 대통령이 안보 정책에 있어 상당한 변화를 꾀할 것으로 예상했다"고 보도했다. 내부의 반체제 세력을 가혹하게 진압하거나,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우크라이나 전쟁 승리를 위해 추가 징집하는 조치(동원령) 등을 취할 수 있다는 게 핵심이다. 푸틴 대통령이 안보 정책에서 대대적인 변화를 줄 구실을 찾고 있었다면, 이번 테러가 그 빌미가 될 것이라고 이 매체는 짚었다.
다만, 크렘린이 실제로 동원령을 계획하고 있었느냐가 이 시나리오가 작동할 수 있는 전제조건이 된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계약병 모집'만으로 특수 군사작전 수행에 충분하다며 추가 동원설을 부인해온 푸틴 대통령이 진짜 추가 동원 계획을 갖고 있지 않았다면, 그것은 '허황된 가짜 뉴스'에 불과하다. 실제로 추가 동원령 계획을 짰다는 증거도 아직 없다.
스트라나.ua는 "크렘린이 우크라이나 전쟁을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고, 지금처럼 '조금씩 진격하는' 장기전을 계획하고 있다면, 소위 '크로쿠스 자작극'은 푸틴 대통령에게 득이 아니라 손해가 될 것"이라며 "자칫하면 5기 연임을 시작하는 푸틴 대통령이 국가 안보를 완벽하게 책임지지 못하는 지도자라는 평판으로 내몰릴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푸틴 대통령이 추가 동원령보다는 서방측에 키예프에 대한 추가 지원을 늦추고, 나토(NATO)군의 우크라 파병설을 주저앉힐 수 있는 기회로 이번 총격 사건을 이용할 수도 있다. 서방측의 반 테러 정서를 잘 탄다면, 우크라이나와 서방을 러시아가 펼친 협상 테이블로 끌어올 수도 있다.
그같은 가능성은 이번 사태를 대하는 서방측의 애도 성명에서 부분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스트라나.ua에 따르면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프랑스는 크로쿠스 시티홀 테러 공격을 강력히 규탄하고 러시아 국민과의 연대를 표명한다”고 밝혔다.
파라 다클랄라 나토 대변인은 "우리는 모스크바의 콘서트 참석자들에 대한 공격을 분명하게 규탄한다"며 "그 어떤 것도 이러한 극악무도한 범죄를 정당화할 수 없다. 희생자들과 그 가족들에게 깊은 위로를 전한다"고 했다.
유럽연합(EU) 지도부도 이번 테러 공격을 한 목소리로 규탄했다. 스트라나.ua는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처음으로 서방 진영이 한 목소리로 러시아 지지 발언을 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며 "적어도 현재로서는 서방 측이 이번 테러 공격에 대해 크렘린을 비난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나아가 "우크라이나 측이 (전쟁 확대를 위한) 러시아 '자작극' 주장을 펴지만, 서방 측이 이를 따르기는 커녕, 애도하고 위로하는 공감적인 어조는 그 자체로 놀랍다"고 썼다. 또 전쟁의 조기 종식 지지세력이 자신들의 주장을 강화하기 위해 이러한 상황을 이용할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고 내다봤다.
러시아 당국이 앞으로 우크라이나의 테러 개입설을 어떤 방식으로 구체화할 것인지 주목된다. 키예프가 직접 테러 공격을 준비했거나 이에 공모했다고 비난할 것인지, 아니면 우크라이나의 배후 조직이나 특정 기관의 존재에 대해 모호하게 얼버무릴지 지켜볼 일이다.
◇ 러시아의 주요 테러 사건은?
러시아 역사상 가장 큰 테러 사건은 2004년 무려 333명이 희생된 베슬란 초등학교 인질극이다. 체첸반군은 꼭 20년 전 북카프카스에 있는 베슬란의 한 초등학교에 들이닥쳐 어린이와 학부모 등 1천100명을 인질로 잡고 러시아군과 대치했다. 러시아군은 사흘 만에 무력으로 진압하는 작전에 돌입했고, 이 과정에서 어린이 186명을 포함해 총 330명 이상이 아까운 목숨을 잃었다.
이후 2010년 3월에는 출근 시간대에 모스크바 지하철역 2곳에서 연쇄 폭발 사건이 일어났다. 41명이 숨지고 80명이 부상했다. 이 사건은 체첸과 인접한 다게스탄자치공화국 출신 여성 2명(소위 '블랙 위도우', 러시아어로는 Чёрные вдовы)이 허리에 차고 있던 폭발물을 터뜨리면서 일어났다. 다게스탄의 이슬람 분리독립 운동 세력은 그 지역에 이슬람 국가의 건설을 목표로 했다.
이듬해(2011년)에는 모스크바 도모데도보 공항에서 발생한 폭탄 테러로 37명이 숨졌다. 러시아 당국은 범인이 북카프카스 출신이라고 밝혔다. 또 2017년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지하철 테러 사건이 발생해 범인을 포함해 16명이 숨졌다. 범인은 키르기스스탄 남부의 우즈베키스탄 소수민족 출신으로 알려졌다. 그는 시리아 반군 진영에서 싸우는 우즈베키스탄 테러 조직의 사주를 받은 것으로 추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