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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준 신부의 철학상담] (48) 언어
언어의 본질은 지시가 아닌 ‘의미의 드러남’
자연 안에서 오로지 인간만이 언어를 사용한다. 언어는 현상학적으로 인간의 고유한 본질적 특성을 밝혀주는 매우 중요한 요소다. 인간의 본질을 규정한 오래된 그리스 말 중에 ‘초온 로곤 에콘(ζῷον λόγον ἔχον)’이 있다. 이 말은 보통 ‘이성을 가진 동물’로 번역되는데, 사실 여기서 이성에 해당하는 ‘로고스(λόγος)’는 ‘말’을 뜻하며, 말은 언어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인간의 생각은 언어 없이는 불가능한데, 이 언어를 통해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발화 사건이 말이라면, 이런 생각과 말을 기호로 기록한 형태가 문자다. 언어는 존재와 삶의 풍부한 의미의 담지자로서 우리는 이 언어를 통해 자기와 세계를 이해할 뿐 아니라 타인과 대화하고 소통한다.
하이데거(1889~1976)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라고 주장한다. 이 진술은 두 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데, 첫째, 언어가 존재 현상을 이해하는 가장 근본적인 요소라는 것이며, 둘째, 언어는 진리가 드러나는 장이라는 것이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진리를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알레테이아’는 ‘비은폐성’(발견되어 있음)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진리는 단순한 명제의 참과 거짓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가 자기를 드러내는 방식을 의미한다. 존재는 보통 은폐된 채로 있으며, 그 은폐성에서 끄집어내 오는 것이 진리인데, 이때 언어는 진리를 위한 중요한 도구가 된다. 언어로 말함으로써 존재 의미가 비로소 분명히 밝혀지기 때문이다.
우리의 의식은 항상 어떤 대상을 지향하며, 이때 언어는 이 지향성을 매개하는 중요한 도구로서 작용한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의식 대상을 외부 세계와 연결하며, 새로운 의미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후설(1859~1938)에 의하면 언어는 ‘지시’와 ‘표현’의 두 가지 기능을 갖는다.
언어의 지시 기능이 경험적 사물을 향해 있다면, 언어의 표현 기능은 ‘의미’를 향해 있다. 후설에 의하면 의미는 사물처럼 지시될 수 없으며 오로지 표현될 뿐인데, 언어의 본질적 기능은 대상의 지시가 아닌 바로 의미의 표현에 있다. 이렇게 의식의 지향성이 근본적으로 물리적 대상을 넘어 의미 구조를 형성하는 만큼, 언어로 표현된 의미 세계는 그 다양한 맥락과 의도와 해석에 따라 이해될 필요가 있다. 이때 언어가 담고 있는 ‘이념성’은 소통과 긴장의 중요한 단서가 된다.
언어는 우리의 사고이자 인식 그 자체다. 자연과 다르게 인간의 세계는 언제나 언어로 매개된 세계이며, 그 세계는 또한 새롭게 이해되고 해석되어야 할 ‘매개된 직접성’으로 우리 곁에 있다. 우리는 이 언어로 매개된 세계 속에서 자기를 이해할 뿐 아니라 자기를 실현한다. 그런 만큼 우리가 평소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단순한 발화 사건이 아니라 존재 진리에 참여함이자 자기 존재를 실현하는 것과 직결된다.
가다머(1900~2002)에 따르면 우리의 언어는 공동체 안에서 형성된 것이며, 역사를 통해 전통적으로 전승된 언어다. 인간의 이해가 언어로 전승된 과거의 전통에 근거하고 있는 만큼 현재의 이해를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이 시간적 간격을 메우는 새로운 해석의 작업이다. 시간적 간격에서 비롯된 이해의 갈등과 그로 인한 상처 역시 이런 해석의 작업을 통해 치유될 수 있다
[박병준 신부의 철학상담] (49) 진리
진리, 본래의 자기 드러냄인 ‘탈은폐’의 사건
“진리가 무엇이오?” 예수님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절박한 순간에 빌라도가 예수께 던진 이 물음은 참된 앎을 추구하는 인간 모두에게 던져진 삶의 근본 물음이기도 하다. ‘지식(앎)’과 ‘원의(열망)’는 인간의 정신적 실행의 두 근본 요소로서 인간은 본성적으로 ‘지식을 추구하는 존재’다. 이 지식은 항상 ‘참된 것’, 즉 진리와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빌라도가 예수께 던진 물음에서 짐작하듯 진리 이해는 쉬운 문제가 아니다.
진리의 문제는 오래전부터 지식의 근거와 방법을 탐구하는 철학의 인식론의 주요 주제였다. 일찍이 플라톤(BC 428/7~348/7)은 참된 지식은 변화하고 사라지는 것에 있지 않으며, 그보다는 불변하고 영원한 것, 즉 ‘선’의 이데아 세계에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에 따르면 진리는 항구하고 영원하며 절대적인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의 지식은 그럴 수 없으며, 항상 한계를 지니고 있다. 모든 지식이 원천적으로 진리를 함축하고 있어야 하지만, 인식의 제약으로 인해 진리는 철학적 의미에서 항상 참인 지식으로서의 절대적 진리, 즉 진리 자체와 제한된 지식으로서의 상대적 진리로 구분된다. 유한한 인간의 지식은 모두 그것이 과학적 사실에 근거하고 있더라도 엄밀한 의미에서 절대적 진리가 아닌 상대적 진리라 할 수 있다.
진리는 기본적으로 인식 대상의 표준(본질·성질·속성)과 언어적 진술 형식에 의해서 결정된다. 진리는 지성과 사물의 일치를 의미하며, 이는 판단을 통해 참과 거짓으로 밝혀진다. 즉 진리는 형이상학적-존재론적 사태요, 동시에 언어적-논리적 사태다. 진리는 형이상학적으로 참된 실재와 관련된 것이지만, 언어로 표현하지 않으면 전혀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진리를 바라보는 관점이 철학자마다 차이가 있으며, 그에 상응한 다양한 진리 이론이 있다. 대표적 이론으로서 사물과 지성의 일치에 기반한 진리 ‘대응 이론’, 진술의 정합성에 기반한 진리 ‘정합 이론’, 삶의 실용성에 기반한 진리 ‘실용주의 이론’, 의사소통과 사회적 합의에 기반한 진리 ‘합의 이론’이 있다.
오늘날 우리가 눈여겨볼 현대 이론으로서 ‘해석학적 진리’가 있다. 이 이론의 중심에 하이데거(1889~1976)가 있다. 그는 전통적인 진리 개념에 맞서 진리의 본질은 로고스의 기능인 ‘보게 해줌’에 있다고 강조한다. 무슨 뜻인가? ‘로고스’, 즉 ‘말’은 본래 존재 진술에 관여하면서 존재를 ‘은폐되어 있음’에서 끄집어내어 ‘비은폐된 것’으로 보이게끔 해주는 본질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 이런 존재의 ‘비은폐성’이 소위 진리를 뜻하는 고대 그리스말 ‘알레테이아(ἀλήθεια)’의 의미라는 것이다. 이렇게 진리는 자기를 덮고 있던 망각과 은폐에서 벗어나 본래의 자기를 드러내는 ‘탈은폐’의 존재 사건이다.
인간은 세계 내 존재로서 존재 진리의 물음 앞에 놓인 유일한 존재자다. 문제는 세계가 앞서간 사람들에 의해서 미리 이해된 세계라는 사실이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역사-문화’와 ‘철학-이념’의 형태를 띤 미리 이해된 ‘선이해’는 현재 우리의 이해 기반이 되지만, 새로운 진리 인식의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고정 관념에 사로잡혀 얽매일 때 진리에서 멀어지며, 자유롭지 못한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박병준 신부의 철학상담] (43) 실존
인간은 실존을 향해 나아가는 ‘되어감의 존재’
철학상담은 내담자의 ‘인격적 실존’에 참여하여 그들의 변화와 성장을 돕고자 한다. 대부분의 상담이 그렇지만, 특히 철학상담은 인격적 실존과의 진정성 있는 만남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실존(Existenz)’의 구조와 본질에 대한 철학적 해명이 무엇보다 중요하게 요구된다. 실존에 대한 철학적 이해 없이 내담자의 ‘자유’를 독려하고, 자기 삶의 ‘책임’을 강조하는 철학상담을 제대로 수행하기란 사실 쉽지 않다.
라틴어 ‘existentia’의 번역어인 실존은 어원적으로 고대 그리스어 ‘실체’에 대응한 ‘존재’, 다시 말해 존재의 실재성 혹은 현실성을 뜻하는 개념이다. 그러나 형이상학적 용어인 실존이 인간의 자기 해명과 밀접한 관련이 있게 된 것은 실존철학의 영향이다.
현대 실존철학의 효시로 알려진 키르케고르(1813~1855)는 인간을 실존으로 규정한다. 실존으로서 인간은 자기 자신을 본질적인 ‘무엇’으로 규정하지 않고, 자유롭고 책임 있는 주체로서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실현해가는 ‘어떻게’로 이해한다. 즉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으로 있음’이 아니라 ‘어떻게 있음’이다.
이와 관련해 키르케고르는 인간은 정신으로서 무한과 유한, 영원과 시간, 자유와 필연, 영혼과 육체의 관계를 자기와 관련시키는 종합을 통해 비로소 자기로 실존한다고 주장한다. 실존하는 인간은 개별적인 ‘단독자’로서 매 순간 자기 내면으로 들어가 진리와 대면하는 존재다. 키르케고르는 주체적 인간의 진리를 향한 내면성의 가장 높은 정열을 ‘신앙’이라 일컫는다.
야스퍼스(1883~1969)는 실존을 역사적 상황 속에서 자기 선택과 자기 결단의 행위를 통해 참된 자기를 실현해 가는 ‘존재 가능’으로 이해한다. 그에게 실존은 심연과 같은 가장 어두운 개념이다. 실존은 그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고유한 것으로서 오로지 한계상황 속에서 자기 존재 가능과 관련하여 초월의 방식으로 자기를 밝힌다. 이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처해있는 한계상황(고통·투쟁·죄책·죽음) 안에서 자기 한계를 부단히 넘어서려는 투쟁을 통해 본래의 자기인 실존으로 도약해 가는 존재임을 의미한다. 한계상황의 체험 없이는 결코 진정한 자기가 될 수 없기에 ‘한계상황을 경험하는 것과 실존하는 것은 동일’하다.
야스퍼스는 이외에도 진정한 실존이 되기 위한 조건으로 자유·이성·(실존적) 소통을 든다. 인간은 무엇보다 자유로운 존재로서 모든 것을 통합하는 궁극적이며 절대적 진리로 ‘하나’(일자)인 초월자와 관계하면서 규정된 세계를 넘어 진정으로 자기 가능 실존을 향해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야스퍼스는 이렇게 자유롭게 초월자와 관계함을 실존의 자기 확신에서 오는 ‘철학적 신앙’이라 불렀다. 이는 신학의 계시 신앙과 다르게 오로지 ‘이성’에 근거한 것이다. 이성이야말로 자기 제약 없이 무한히 뻗어 나가는 개방된 초월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즉 이성은 ‘일자를 향한 통일을 무한히 추구하는 충동의 원천’이자 ‘무한한 소통의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실존은 이성의 무제약적인 공간 안에서 초월자와 관계하면서 진정한 자기가 되기 위한 실존적 소통을 하게 된다.
실존으로서 인간은 결코 이미 규정된 ‘됨의 존재’가 아니라 자기 가능 실존을 향해 나아가는 ‘되어감의 존재’이다. 이는 우리가 부단히 자기가 되고자 노력하는 이유다.
[박병준 신부의 철학상담] (41) 권위
권위는 전통 위에 세워지며, 모든 이해와 진리의 기반
권위는 사전적 정의에 의하면 ‘타자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일종의 힘’으로 언뜻 인간의 자율성 혹은 근본 자유와 대치되는 개념으로 비칠 수 있다. 그러나 권위는 철학적으로 강제적 억압이나 구속을 전적으로 배제하는 자유에 기초한 자발적이며 자율적인 타자에 대한 영향력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권위’는 ‘권력’과 근본적으로 구분되는 개념이다. 그런데 오래전부터 철학의 주요 주제가 되어 왔던 권력과 다르게 권위가 철학적으로 주목받는 개념이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권력은 무엇보다 인간의 잠재된 본능적 욕구나 욕망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강제와 억압을 통한 지배 의지의 관철이라는 타율적 성격을 내재하고 있는 반면, 권위는 지배의 타율적 성격이 배제되고 내면의 자율성이 강조된 능동적 행위다. 또 권위는 ‘권한’처럼 제도나 법률 같은 외적 형식에 의하여 외부로부터 부여받은 힘과도 구별된다. 그런 차원에서 권위가 반드시 권한의 사용으로부터 드러나는 것은 아니며, 권위 없이 권한이 주어지듯이 권한 없이 권위도 주어질 수 있다. 누가 권한이나 권력을 이용하여 타인에게 강압적으로 권위를 요구할 경우, 이를 부정적 의미의 ‘권위주의’라고 명명한다.
권위를 뜻하는 라틴어 ‘auctoritas’는 ‘auctor’(원작자)라는 어근과 ‘augere’(증가·확대하다)라는 동사에 어원을 두고 있다. 권위는 어원적으로 원작자에 의하여 확실하게 ‘보증된 힘’을 뜻한다. 이런 이유로 오늘날 자주 권위는 학문적으로 원작자를 인용함으로써 드러나곤 한다. ‘권위 있는 논증’(argumentatio ex auctoritate)의 표현에서 보듯이 누가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거나 주장할 때 원작자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것을 적절하게 인용한다면 그의 말에 권위가 생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권위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철학자로 현대 철학적 해석학의 기초를 세운 가다머(Gadamer, 1900~2002)가 있다. 가다머는 권위를 해석학적 관점의 이해와 인식의 근본 문제로 환원시킨다. 그는 기본적으로 권위의 본질이 인간의 자유로운 이성에 기초한 ‘인정’과 ‘인식’, 다시 말해 스스로 자기의 한계를 인식함으로써 선행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더 나은 ‘판단’과 ‘통찰’에 순응하고 이를 인정하는 탈계몽주의적 합리적 이성에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권위에 상응하여 우리가 이미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당위의 전제된 조건이 이미 개인의 인식에 앞서 존재하며, 이것이 다름 아닌 역사적으로 전승되어 오는 ‘전통’이다. 즉 권위는 전통 위에 세워지며, 이는 모든 이해와 진리의 기반이 된다.
물론 가다머의 이런 주장은 전통이 무조건 절대적 진리이며 권위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보다 오히려 이해가 기본적으로 전통이라는 선입견 위에 기초하고 있는 만큼 이런 제약된 조건 속에서 우리가 자기 한계를 인식하고 더 나은 통찰을 신뢰하는 이성에로 도약해나갈 필요가 있음을 강조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오늘날 사회 곳곳에서 일방적으로 권력과 권한만을 앞세우며 전통을 무시하거나 파괴함으로써 스스로 권위를 실추하는 현상을 목도한다. 실추된 건강한 권위의 회복을 위해 어느 때보다 각자의 성찰과 반성 그리고 더욱더 깊이 있는 철학적 사유가 필요해 보인다.
[박병준 신부의 철학상담] (11) 우정
우정은 사랑의 한 표현이며 치유의 한 원리
우정은 일상에서 자주 듣는 친숙한 용어다. 우리 속담에 ‘친구 따라 강남 간다’(隨友適江南)라는 말이 있다.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말도 있다. 이는 우정이 우리 자신의 사회적 정체성과 평가에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사마천(司馬遷, 기원전 145~86년경)은 「사기(史記)」의 ‘관안열전(管晏列傳)’에서 우정의 참된 모습을 시류나 시세에 편승하지 않고 항상 상대의 마음을 읽으며, 그 처지를 깊이 이해하는 공감적 태도로 보았다. 만약 이런 진정한 친구가 곁에 한 명이라도 있다면 아마 삶에서 오는 그 어떤 고통도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사회적 존재인 인간은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자기를 규정할 뿐 아니라 자기를 실현한다. 우정은 단순히 원활하고 원만한 관계를 위한 삶의 기술이 아니라 그 자체로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방향을 설정해주는 삶의 구성 요소다. 더욱이 우정은 잘못된 관계로 인해 상처받은 우리 마음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힘의 원천이기도 하다. 사실 삶을 견디지 못하고 포기하는 순간은 대부분 곁에 아무도 없다는 고립감과 외로움을 느낄 때이며, 이런 감정은 홀로 감당하기 힘든 바로 그 순간이기 때문이다.
우정은 사랑의 한 표현이다. 사랑이 치유의 근본 원리이듯 우정 역시 치유의 한 원리다. 존재 자체 혹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초월적 사랑은 존재 긍정을 통해 모든 존재하는 것에 이미 깃들어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사랑의 기본 원리는 ‘주는 것’에 앞서 ‘받음’에 있다. 사랑은 대가 없이 주어진 은총적 선물이며, 우리가 이를 이해하고 마음으로 느낄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를 내적으로 충만하게 하는 힘의 원천이 된다.
우리는 이미 주어진 이 초월적 사랑을 종교적으로 무조건적이요 절대적인 아가페(αγάπη)적 사랑이라고 부른다. 자기 존재의 당위성도 이러한 은총적인 아가페적 사랑에 근거한다. 정신적으로 건강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일상에서 항상 이런 존재 긍정의 힘인 사랑을 실제로 느낄 수 있어야만 한다. 이를 훈련하는 것이 철학상담의 목표 중 하나다.
우리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우정을 통해 구체적으로 사랑을 주고받는다. 사랑과 관련해 플라톤(Platon, 기원전 428/7~348/7년경)이 「향연」에서 고상한 용어인 에로스(ἔρος / ἔρως)를 강조한 것과 달리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기원전 384~322년)는 「윤리학」에서 일상의 용어인 우정(φιλία, 필리아)을 강조한다.
우정은 남녀노소, 부모와 자녀, 부부, 왕과 신하, 주인과 노예 등 모든 인간관계를 포괄하는 보편적인 관계 규정적 개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정을 사회적 존재인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 반드시 추구해야 할 ‘덕’으로 간주하며, 우정의 본질이 형평성(균등성·유사성), 공동체성, 나눔(보답성)에 있음을 강조한다. 우정이 잘 형성되기 위해서는 유사한 사람들끼리 균등하게 어울리며, 함께 생활하고, 서로 주고받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우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특별히 지혜로움이 필요하다.
상처를 주고받음이 아닌, 서로에게 위로가 되고 치유가 되는 진정한 우정을 나누기 위해서는 그 무엇보다 상호 고유한 인격을 존중하고, 그 고유함을 서로 주고받으며 변화될 수 있어야 한다.
[박병준 신부의 철학상담] (9) 영성 치유
궁극적 실재를 향한 자기 초월이 영성 치유의 핵심
철학상담의 영성 치유는 인간 본성에 근거한 영적 도약과 활력을 목표로 하는 영적 치유를 의미한다. 영성 치유는 일차적으로 자기 문제와 관련해 정서적 반응과 체험을 살피고, 자기와 타자의 올바른 관계 정립과 인격 성숙 및 의식의 확장을 도모하는 자기 치유와 일상의 자기 성찰을 통해 영혼의 근력을 키움으로써 건강한 삶을 영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영성 치유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인간의 본질에 관한 근본적·철학적 통찰이 필요하다. 인간 본질을 규정하는 고전적 개념으로 프쉬케(ψυχή), 즉 영혼이 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물질에 대응한 생명의 원리로서 영혼을 이해했을 뿐만 아니라 특별히 인간의 영혼에 고유한 지위를 부여했다.
인간은 자연의 생명체 중 유일하게 만물의 원리(ἀρχή, 아르케)를 파악하고 이해할 수 있는 고유한 영혼을 지니고 있으며, 이는 바로 고대 그리스인들이 누스(νους)라 부르는 정신이다. 정신은 무엇인가를 생산하고 제작하는 기술(τέχνη, 테크네), 사물을 분별하는 인식(επιστήμη, 에피스테메), 삶의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는 도덕적 실천지(φρόνησις, 프로네시스), 그리고 만물의 원리와 진리를 좇는 지혜(σοφία, 소피아)를 모두 포괄하는 인간 본질의 핵심 개념이다.
인간은 육체와 함께 정신적인 영혼을 가진 존재다. 인간은 육체로 인해 제약을 받지만, 정신적으로 무제약적인 존재라 할 수 있다. 인간이 유한한 존재임에도 절대적인 것을 향해 끊임없이 자기 초월을 감행할 수 있는 것은 이런 무제약적인 정신을 소유한 까닭이다. 고유한 인격으로서 나는 일차적으로 자기 육체를 통해 타자와 구분되지만, 정신적으로 자기 의식과 반성을 통해 비로소 고유한 개체로 존재한다. 우리는 이런 무제약성을 지닌 정신을 본성으로 갖기에 규정된 자기를 넘어서는 내재적 자기 초월뿐 아니라 자기 밖의 타자에게로 초월해 갈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 자연을 넘어 초자연적인 궁극적 실재로까지 초월해 갈 수 있다.
내재적 자기 초월은 고유한 경험을 통해 이미 규정되고 이해된 자기를 넘어섬을 의미한다. 물론 이런 자기의 고유한 경험은 결코 홀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시간과 공간의 연속성 안에서 공동체 삶을 통해 형성된 것이다. 타자를 향한 외재적 자기 초월은 자기를 극복하는 자기 헌신과 봉헌을 의미한다. 물론 이것은 육체적 결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정신적으로 자기 부정을 통한 타자와의 일치를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궁극적 실재를 향한 자기 초월은 절대적 존재에게로의 자기 개방을 의미한다. 우리의 전체 삶과 존재 의미는 궁극적으로 절대적 존재로부터 비로소 그 참된 의미가 밝혀지기에 이런 궁극적이며 절대적인 실재에로의 자기 초월은 영성 치유의 핵심이 된다.
영성 치유는 이런 정신적 인간 존재의 본성적 특성인 초월성에 근거해 3단계로 구성된다. 첫 번째 단계는 정서적으로 마음의 격정을 다스리고 자기를 객관화하는 자기와의 관계 정립으로서 1인칭적 자기 초월이다. 두 번째 단계는 격정을 일으키는 자기 밖의 원인을 살펴 공감하고 이해하는 자기와 타자와의 관계 정립으로서 2인칭적 자기 초월이다. 세 번째 단계는 무제약적인 실재를 향해 개방적 자세를 갖는 자기와 절대자와의 관계 정립으로서 3인칭적 자기 초월이다.
[박병준 신부의 철학상담] (8) 상처와 치유
스스로 영혼의 상처 보듬을 수 있는 영적 힘 길러야
우리는 살면서 상처받곤 한다. 인간은 사소한 일에도 쉽게 상처를 받는 연약한 영혼을 가진 존재다. 연약한 영혼에 가해진 상처는 치료를 통해 낫는 육체의 상처와는 달리 항상 흔적을 남기며, 영적으로 약해질 때마다 다시금 도져 괴로움과 아픔을 주곤 한다. 이는 우리가 경험의 존재임과 동시에 자기의 고유한 경험과 그 기억을 통해 비로소 자기가 된다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Hipponensis, 354~430)는 「고백록」에서 인간의 영혼을 고유한 경험이 저장된 ‘기억의 창고’라 부른다. 그에게 고백은 기억을 떠올림이요, 기억은 자기 자신을 찾는 여정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경험과 기억이 영혼에 영원한 흔적을 남기는 상처로 얼룩져 있다면, 과연 우리는 이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앙의 관점에서 이런 상처를 치유하는 힘은 오로지 하느님 사랑에 있다고 주장한다.
마음의 상처는 부정적 경험에서 비롯되며, 그 원인은 실로 다양하다. 그런데 부정적 경험의 무수한 원인 가운데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홀로 서지 못함’이다. 우리는 홀로 서지 못한 채 항상 타인의 인정에 목말라하며, 끊임없이 타인을 욕망한다. 왜 우리는 홀로서지 못하고 타인을 욕망하는 것일까?
플라톤(Platon)은 「향연」에서 타인을 욕망하는 인간의 모습을 에로스(eros)의 기원에서 찾는다. 이 기원에 따르면 인간의 성은 본래 남·여 둘만이 아니라 남녀추니(hermaphrodite)를 합해 셋이었으며, 지금의 인간 둘이 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힘과 자만심에 신과 맞섰고, 이를 참지 못한 제우스가 인간을 반으로 잘라놓았다. 그때부터 반으로 잘린 인간은 나머지 반쪽을 그리워하며 한 몸이 되기만을 열망했다는 이야기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구약 성경의 창세기 2장에도 있다. 하느님께서 처음 아담을 창조하시고, 홀로 있는 것이 보기 좋지 않아 그의 갈빗대를 빼내어 협력자인 하와를 만드셨다는 이야기다.
하나로 붙어 있다가 둘로 갈라졌든 혹은 애당초 하나였다가 둘로 갈라졌든 두 이야기의 핵심은 타인을 향한 인간의 근원적 욕망과 소외에 관한 것이다. 욕망은 생물학적인 본능적 욕구와 구별되는 인간의 정신적 욕망을 의미한다. 인간은 삶의 여정 내내 자기와 온전히 하나가 될 수 있는 ‘타자인 자기’를 갈망하는 존재다. 인간은 항상 타인으로부터 위로받고, 인정받고, 사랑받고자 갈망한다. 소외는 자기로부터 근원하지만, 결코 자기가 될 수 없는 ‘자기인 타자’의 낯섦을 의미한다.
나와 타자 사이에 놓인 이런 근원적 소외, 즉 타자의 낯섦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타자를 자기와 일치시키려는 욕망이 지나칠 때, 우리는 쉽게 상처받을 수 있다. 문제는 이런 잘못된 관계 설정으로부터 얻은 상처는 고스란히 평생 스스로 감당하며 살아야 할 고통의 굴레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결코 지울 수 없는 영혼의 부정적 흔적으로 남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혼의 상처를 치유하는 일은 일회적일 수 없으며, 오히려 평생의 과제라 할 수 있다. 부정적인 경험을 가능한 한 최소화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일은 스스로 상처를 보듬을 수 있는 영적 힘을 기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영적 치유의 본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