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1일 목요일 성 스타니슬라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31-36 31 위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데,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32 그분께서는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신다. 그러나 아무도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33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참되심을 확증한 것이다. 34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 하느님께서 한량없이 성령을 주시기 때문이다. 35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 36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
땅에 속한 사람
내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들 중에 정치가가 있는데 정치하는 사람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말을 함부로 하기 때문입니다. 약속도 아주 잘하지만 그게 공약(空約)이 되고, 자신이 하는 말에 대하여 책임을 지지 못하면서 함부로 말만 앞세우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끝난 선거 뒤에 모든 정치가들이 국민의 뜻을 겸허히 받아들인다면서 반성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국민이 원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승리하고 권력을 어떻게 하면 잡을 것인지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원하지 않는 경영학을 전공하였는데 그것은 어느 날 고시를 보는데 선택과목 중에 경영학이 들어 있어서 자신 없는 것을 도전하다가 우연히 나도 모르는 사이에 공부하게 된 것입니다.
요즘은 내가 전공한 것을 잘 모르기 때문에 경영학에 대하여 사이비(似而非) 학자가 된 것 같아서 사람들이 나에게 혹시 사기꾼이라고 말한다고 해도 정말 할 말이 없을 지경입니다. 어느 때는 내가 사기꾼의 제일 선두에 있는 사람 같이 보일 때가 있는데 도저히 안 될 일도 나는 할 수 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경영학자가 흔히 하는 말입니다. “안 되는 일을 하게 하라.”라는 말은 경영학을 공부하면서 제일 먼저 배운 말이고 그 일에 평생을 걸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가족들이나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내게 그런 사기꾼과 같은 처신을 하지 말라고 아주 정중하게 충고를 해 주시곤 합니다. 나는 그 분들에게 항상 감사하고 삽니다.
위(上)는 아주 힘 있고 권력이 있는 분을 나타내는 말이었습니다. 우리도 그렇고 특히 정치가들은 위를 지향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도 권모술수에 능하면서 하늘에 계신 하느님을 지향하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 분의 눈에 들어야 하는 사람들이니 우리도 아주 간사한 정치가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임금을 윗분이라고 하였고, 백성들이 남쪽에서 북쪽을 바라보고, 북쪽에 사는 사람들은 남쪽을 바라보고 절을 하였습니다. 바로 윗분이 계시는 자리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제사를 지낼 때도 북쪽에 조상의 위패를 모셔놓고 지냈고 흔히 아래 아이들이나 아래 사람이 따뜻하게 있어야 한다고 '아랫목'이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요한 사도는 하느님을, 그리고 예수님을 '위에서 오시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오른편도 하느님을 나타내기 때문에 항상 왼편은 나의 편이라고 생각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높은 산에 올라가면 하늘이 더욱 가까워 보이고 먼 곳에 보이는 많은 것들이 아래에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렇게 보이는 것은 아주 자연적인 모습으로 우리는 그런 모습과 장소에 은연 중 아주 많은 영향을 받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위에 계신 하느님이라고 해야 하느님을 아주 쉽게 인식합니다. 하늘은 광대하고 측량할 수 없는 무한대라고 느끼며, 그런 하늘을 관장하시는 하느님을 상상하면 아주 쉽게 하느님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어디든지 다 계시며, 아주 비좁은 내 가슴에서도 살아계시는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하늘에서 오신 분을 ‘위에서 오신 분’이라고 표현하는 요한 사도의 의중을 조금은 살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분은 권력을 가지고 계셨지만 권력으로 이 세상에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비천한 사람의 신분으로 오셨지만 그 분은 하느님이시니 모든 것 위에 계신 분입니다. 요한 사도는 우리와 예수님을 그렇게 구분하십니다. 우리는 땅에서 난 사람이고, 예수님은 하느님에게서 오신 분이라고 구분합니다. 땅에서 난 사람들은 땅에 속한다고 하고 땅에 속한 사람들은 하늘의 법칙에 의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땅과 세상을 창조하신 그 분에게 소속됩니다. 그래서 우리하는 말(言)은 땅에 사는 사람들의 말이라는 것입니다. 속되고, 세상에 젖어서 아무리 거룩하게 하려고 하여도 결국 세상의 말에 파묻혀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처지만 생각하고 우리의 입장만 생각하는 땅의 사람입니다.
어려서 아버지가 항상 불만스러워서 크면 절대로 아버지와 같이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되고 할아버지가 되니 이제서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고 아버지를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승어부(勝於父)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아버지를 이긴다.'라는 뜻입니다. 아주 훌륭하게 살아서 아버지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격려의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시면서도 우리에게 당신을 밟고 당신의 어깨에 올라가 재롱을 떨며, 우리를 더 크고 멋지게 보이게 하기 위해서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셨습니다. 당신을 밟고 당신을 무동 타고, 당신보다 나은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바라시는 아버지! 우리 아빠랍니다.
이런 말들은 땅에 속한 사람들의 얘기입니다. 우리 인간은 아무리 노력해도 하느님을 이길 수도 없고, 하느님보다 더 훌륭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과 인간은 그렇게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 큰 차이를 천지차이(天地差異)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을 초월적 존재(超越的 存在)라고 말합니다. 땅의 세계를 초월하시는 그 분을 우리는 믿고 있으며 하느님은 우리 신앙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가끔 분수를 모르고 사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 가끔 우리가 무슨 일이든 잘 안될 때, 또 예상하였던 결과가 나오지 않을 때 내 생각으로 하느님을 판단하고, 하느님을 평가합니다. 세월이 지난 다음에 가만히 생각해보면 얼마나 부끄러운지 모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품에서 아무리 경쟁을 하고 까불어도 땅에서 난 사람이고, 자연에 속한 자연인입니다. 결국 하느님의 품에 살고 있는 존재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되셨으니 사람의 눈으로 보셨을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이 예수님의 증언을 믿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고통과 사랑과 말씀이 하늘에서 왔지만 눈높이를 낮추어 가르쳐 주시고, 말씀하시고, 그것도 모자라 아주 쉽게 말씀하시기 위해서 언제나 비유로 설명하십니다. 사람의 발밑에 엎드리어 발을 씻어주는 겸손으로 대하시고, 기적을 베풀어 하느님의 권능과 나라를 미리 보여주십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그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아 마음이 굳어지고, 욕심이 생기고, 분수를 모르고, 자신의 고집을 세우고, 감히 하느님을 이기려고 합니다.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가야하는 땅에 속한 인간임을 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의 말씀이고, 하느님은 한량(限量)없이 성령을 보내주셔서 그 증언을 믿도록 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의심없이 믿고 신앙을 고백해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