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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절 沃沮族의 발전과 변화
1. 沃沮族의 족원
沃沮는 늦어도 서한(西漢) 초에는 형성되어있던 민족이다.
《三國志•魏書•東夷傳•東沃沮》: <漢>初, <燕>亡人<衛滿>王<朝鮮>, 時<沃沮>皆屬焉.
《後漢書•東夷傳•東沃沮》: <濊>及<沃沮>•<句驪>, 本皆<朝鮮>之地也.
漢 武帝 원봉(元封) 3년 (BC 108) 여름: 滅<朝鮮>, 以<沃沮>地爲<玄菟郡>.
이들 기사는 沃沮族은 빠르면 漢 초에 이미 족속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근거가 된다.
그 족명(族名)이 품은 뜻에 대해, 이전의 연구자들은 沃沮를 “窩集”, “渥集”, “烏稽”의 동음이사로 많이 여겨, “숲(森林)”이란 뜻으로 풀이하였다. 예를 들어 淸나라 때 학자 아규(阿桂) 등은 [《滿洲源流考•권1•部族》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漢•魏•晉 때 동방의 나라로 夫餘, 挹婁, 三韓이 있었다. 그 마을은 산과 바다 사이(山海間)에 흩어져 있는데 또한 沃沮, 濊 라고 불리는 것도 있었다. 魏나라 관구검(母丘儉)이 高麗를 지나 沃沮 1천여리를 가로질러 肅愼의 남계(南界)까지 이르렀었다. 沃沮란 바로 지금의 [여진족의] 渥集이다.” [또한] 능순성(凌純聲)은 “漢•魏 시대의 沃沮, 挹婁, 夫餘는, 隋•唐 시대의 勿吉, 靺鞨이요, 明나라 때의 兀者이며, 淸나라때의 渥集이다. 모두 같은 이름이 달리 표기된것 혹은 서로 전음(轉音)된것이다. …… 나는 다음과 같이 풀이한다. [이러한] 동북의 많은 민족의 이름은 모두 ‘窩集’라는 두 글자가 전음되어 나온것이다. 스스로 ‘삼림민족’이라고 일컬은 것이다 (《松花江下遊的赫哲族》).
그러나 沃沮가 “渥集”이며 또한 “숲 사람(林中人)”이란 뜻이란 것은 타당치 못하다.
1) 고대 동북지구는 모두 숲이 우거진 지역이었다. 그렇다면 동북지구의 여려 고민족은 모두 산림(山林)에서 많이 살았거늘, ‘산과 바다 사이에 있던 자(山海間者)’인 그 땅의 민족(古朝鮮, 濊, 貊, 高句麗, 韓, 新羅, 百濟 등)은 “沃沮”란 이름을 쓰지 않고, 어째서 沃沮만 “숲 사람”을 자칭했는가?
2) 沃沮의 거주지는 전적으로 “수목이 울창하게 우거지고, 여름에는 질퍽질퍽해서 사람과 말이 통행하기 힘든 곳 (《東三省輿地圖說》)”은 아니다. 《三國志》에 “其土地肥美, 背山向海, 宜五穀, 善田種.” 라고 했다. 이것을 보아 沃沮族의 거주지는 메마른 땅도 아니며 산림이 많지도 않다. 반대로 큰 조각의 좋은 경작지가 있었다. 沃沮族은 산에 살거나 숲에 사는 민족이 아니며, 평원에 정착생활을 하는 농업민족이다. 숲에 사는 민족이라서 “숲 사람”이란 이름이 되었다는 것은 이치상으로 통하지 아니하며,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1958년, 조선 평양시 점백리 41번지에서 “夫租薉君”이라고 새겨진 은인(銀印)이 하나 발견되었다. 1961년, 또 점백리에서 “夫租長印”이 하나 발견되었다. 연구에 따르면, 은인의 “夫租”란 沃沮의 첫 표기이고, 은인은 서한 시기의 것이며 늦어도 동한(東漢) 광문제(光武帝) 건무(建武) 6년 (AD 30) 이전의 것이라고 한다. 때문에 필자는 沃沮의 족명은 漢代, 특히 서한 때 존재하였으며, 원래는 ‘夫租’라고 하였지 “沃沮”로 쓰지는 않았고, “沃沮”는 후대에 “夫租”로부터 전사임을 알 수 있다.
夫租의 “夫”는 “番”자로부터 전사된것으로 夫餘의 “夫”와 같다. 夫租의 “租”는 “邾”와 소리값이 가까우니 “邾”자의 전사일런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夫租 즉 沃沮族은 東夷 番族과 邾婁族이 합쳐 이루어졌다.
이밖에도 손진기(孫進己)는 “夫租薉君” 은인을 근거로 沃沮族은 또한 濊人을 지칭하는 말이라고 단정지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것은 아마도 沃沮의 가장 이른 시기의 명칭일것이다. ...... 沃沮는 본디 濊族의 일지(一支)였는데 춘추-전국 교차 시기에 沃沮는 濊族중에서 분화되어 나왔을 것이다. 그래서 沃沮族이라고 칭해졌다.” 그러나 이 설은 증거가 여전히 부족하다. 그 중 가장 큰 원인은 “夫租薉君” 은인은 “전한(前漢) 후기 漢나라 조정이 樂浪郡 夫租縣의 유력자에게 수여한 것.”이지, 沃沮族의 우두머리에게 직접 수여한 것은 아니라는 데 있다. 《三國志》에 沃沮는 “國小, 迫于大國之間” 이어서 그들의 선조는 衛氏朝鮮에게 신속(臣屬)하였었고, 古朝鮮 멸망 후에도 “爲夷貊所侵” 되어 濊族에게 복속되었으며, 마지막에는 高句麗에 신속되었다.
“夫租薉君” 은인은 중앙정권이 沃沮族을 통치하는 濊人 우두머리 “渠帥”에게 하사하여 준것이다. 따라서 은인을 근거로 沃沮를 濊人의 일지로 단정지어 양자를 동족관계로 놓을 수는 없다. “夫租長印”은 서한 후기에 “夫租縣의 우두머리인 樂浪郡의 토착 호족 高尙賢을 위해 만들어 수여한것이다.” 高尙賢은 漢人이고(다만 이 때문에 고(高)씨가 漢人일 수는 없다), “夫租長印”을 가진 것으로 보아 沃沮는 당시 漢族의 일지로 추정된다. 상술한 바로써, “夫租薉君” 은인을 근거로는 沃沮의 족원을 판정할 수 없으며 믿을 수도 없다.
2. 沃沮族의 거주지역
漢나라 때 沃沮族에는 두 부部가 있다. 그 중 비교적 큰 부는 사료가 말하는 “沃沮”, “東沃沮” 혹은 “南沃沮”고, 비교적 작은 부는 사료가 “北沃沮”라 부른다.
《三國志•魏書•東夷傳•東沃沮》: “又有北沃沮, 一名置溝婁, 去南沃沮八百餘里, 其俗皆與南同, 界南接挹婁.”
“置溝婁”의 “置溝”는 “邾”자를 천천히 읽은 것이다. 빨리 읽으면 “邾”가 되니 “置溝婁”는 “邾婁”가 된다. 《三國志》에 “溝婁, 句麗名城也”라 적혀있다. 이를 근거로 “置溝婁”는 漢의 말과 夷의 말이 합져진 말로 볼 수 있다. 즉, “置”는 漢語에서 “한곳으로 모으다[彙]”라는 말이고 “溝婁”는 高句麗語로 “城”이란 뜻이니, 이 두 말을 합치면 “置城” (성을 세우다) 또는 “築城” (성을 쌓다)이 된다. 이런 풀이는 너무 복잡한데다 漢의 말과 夷의 말이 합져졌다 함은 짧은 견해다. 왜냐하면 [여기서의] “溝婁”가 “城”이라는 풀이를 전적으로 믿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沃沮의 거주지역은 《三國志》에 따르면 동옥저는,
“在高句驪蓋馬大山之東, 東濱大海; 北與挹婁•夫餘, 南與濊貊接. 其地東西夾, 南北長, 可折方千里.”
서한西漢이 동북지구의 행정구역을 짜면서 沃沮 사람이 살던 沃沮縣 및 沃沮城을 현도군玄菟郡에 속하게 했다가, 후에 낙랑樂浪 동부도위東部都尉에 속하게 했다. 이로써 오늘날의 지리와 저울질하면, 東沃沮의 중심은 응당 지금의 한반도 북부 함경도 지역에 있다.
《三國志》에 北沃沮는, “去南沃沮八百餘里……界南接挹婁.”
北沃沮의 거주지역은 현재 길림성 최동단 혼춘琿春 지역이 중심이다.
3. 沃沮族의 사회발전
沃沮의 사회발전 수준은, 양한兩漢 시기에는 아직 통일된 정권조직을 형성하지 못했고 그 민족은 “邑落” 단위로 흩어져 살았다. 각 邑落에는 “渠師”가 있었는데 자칭 “三老”라 하며, 각자 다스리는 邑落의 군정대사軍政大事를 맡았다.
또한, 그들은 高句麗에 신속되었는데, 따라서
“<句麗>復置其中大人爲使者, 使相主領, 又使大加統責其租稅, 貊布•魚•鹽•海中食物, 千里擔負致之, 又送其美女以爲婢妾, 遇之如奴僕.” 했다.
이것이 東沃沮의 상황이다.
北沃沮는 늘상 挹婁 사람들의 침탈을 받았다. 《後漢書》: “<挹婁>人憙乘船寇抄, <北沃沮>畏之, 每夏輒臧於巖穴, 至冬船道不通, 乃下居邑落”
沃沮 사람들의 민족적 성격은 《後漢書》에 “人性質直彊勇, 便持矛步戰”라 했다.
또한 沃沮 사람들은 “言語、飮食、居處、衣服有似<句麗>.” 하다고 한다.
沃沮 사람들의 혼인은 《三國志》의 주가 인용한《魏略》에
”其嫁娶之法, 女年十歲, 已相設許. 壻家迎之, 長養以爲婦. 至成人, 更還女家. 女家責錢, 錢畢, 乃復還壻” 라 했다.
이런 류의 혼인풍습은 비교적 특수하다.
沃沮 사람들의 장례풍속은 이차장二次葬[1차로 가매장하여 살은 썩히고 뼈만 추려 묻는 장례] (혹은 다차장多次葬)인데, 한 가족을 모두 같은 덧널[槨]에 넣었다.
《三國志》: “其葬作大木槨, 長十餘丈, 開一頭作戶. 新死者皆假埋之, 才使覆形, 皮肉盡, 乃取骨置槨中. 擧家皆共一槨, 刻木如生形, 隨死者爲數. 又有瓦[金+歷], 置米其中, 編縣之於槨戶邊.”
여기서 “刻木如生形, 隨死者爲數” 및 “又有瓦[金+歷], 置米其中, 編縣之於槨戶邊”은, 沃沮사람들은 죽은이에게 주는 일반적인 껴묻거리외에 무엇인가를 준비하여 [죽은이를] 본뜬 나무인형에게 껴묻거리로 주었다는 말이다. 이는 응당 ‘후하게 장사치룬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4. 沃沮族의 향후 흐름
《三國史記•高句麗本紀》에, 東沃沮는 BC 58년에 高句麗에 정복당했고 北沃沮는 BC 27년에 高句麗에 정복당했다. 그러나 沃沮 사람들은 여전히 민족을 이루어 살면서 高句麗와 융합하여 하나가 되지않았다. 晉나라 초기 무렵이 되서야 융합되었다.
삼국시대 魏나라 政始정시 7년 (246), 관구검母丘儉이 高句麗를 깨부셨다. 高句麗왕 궁宮이 東沃沮로 달아나자 관구검은 “遂進師擊之, <沃沮>邑落皆破之, 斬獲首虜三千餘級”했다 《三國志•東沃沮》. 궁은 또 달아나 北沃沮까지 이르렀다.
《晉書•夫餘國》에 따르면, 晉나라 태강太康 6년 (285)에 夫餘는 선비鮮卑 모용귀慕容廆의 습격을 받아 깨졌다. 그 왕 의려依慮는 자살했고 그의 아들과 아우는 “走保沃沮”하였다. 이 시기에도 沃沮가 존재했음을 말해준다.
晉나라 이후 역사책에는 두번 다시 沃沮란 이름을 볼 수 없다. 일반적으로 그 민족은 당연히 渤海 속으로 녹아들어갔다고 여긴다.
제13절 豆莫婁族의 발전과 발자취
1. 족칭이 품은 뜻과 족속
“豆莫婁”란 이름은 《魏書•豆莫婁傳》에 처음 보인다. 또《魏書•勿吉傳》은 이것을 “大莫盧”로도 쓰고있다. 이밖에 《新唐書•流鬼傳》에 실린 “達末婁” 또한 이 족속을 가리키는 말이다. 《晉書•四夷傳•肅愼》속에 “寇漫汗國”이 나오는데, 정겸丁謙, 양양楊暘 등은 “寇漫汗”(또는 “寇莫汗”로도 씀.) 또한 豆莫婁의 전사轉寫라 했다.
“豆莫婁”란 이름이 품은 뜻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풍가승馮家昇은 주장했다: 豆莫婁은 “對盧”의 이역異譯과 관계가 있다. [豆莫婁를] 빨리 읽으면 “對盧”가 되며, “豆莫婁”를 천천히 읽으면 [“對盧”가] 된다. “對盧”는 高句麗의 벼슬이름과 잇닿아 있고, 따라서 豆莫婁가 머금은 뜻은 ‘부락의 우두머리’다.
위국충魏國忠은 풍가승에 동조하여 말했다 (1982): “나중에 출현한 大莫盧, 達末婁 등은 [豆莫婁와] 음역音譯이 같지 않다. 그 실제는 모두 對盧의 동명이역同名異譯이며, [對盧는] 豆莫婁의 유래가 된다.”
장박천張博泉은 주장했다 (1982).: “잠중면岑仲勉은 돌궐문突厥文에 나오는 ‘Bokuli’(莫離)[역자주: o는 o 우무라우트]는 高離이며, 貊은 ‘Bokuli’의 소리값 [-li 을] 덜어 [짧게 줄인것이] 된다고 했다. 《後漢書》이현李賢 주: 「索」或作「橐」, 音「度洛」反.’ 《後漢書•郡國志》 <唐縣>有<都山>, 一名<豆山>, 今<關東>人讀「豆」爲「渡」. 洛과 貉자는 모두 各에서 나왔고, 貉은 바로 貊이며 莫로 읽는다. 이 때문에 度洛과 豆莫은 같은 소리값을 갖는 글자며, 索 혹은 橐는 豆莫(度洛)의 소리값이 합쳐진 것이다. 離와 婁는 소리가 대응되니, 豆莫婁는 사실 度洛離 [역자주: 즉 度洛離 = Bokuli= 貊]의 소리값이 바뀐것에서 유래한다.”
전랑운傳朗雲 및 양양은 豆莫婁를 “족명族名은 貊族에서 나왔다. 婁자는 성루, 촌락 등의 뜻을 갖고 있으니, ‘대맥성인大貊城人’을 일컫는 말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고 했다.
위에서 인용한 여러 설들은 모두 음운이 탈바꿈되어 변한다는 시각을 더해 연구하여 나온 결론이다. 같은 수법으로 이들을 검토하면, 豆莫婁의 “豆莫” 및 그것이 바뀌어 나온 “大莫”, “達末”, “寇漫” 등등은 응당 “邾”를 천천히 읽은 소리값이다. 어떤이는 또한 “邾”의 “연음衍音”[잔물결처럼 길게 퍼지는 소리] 일 수 있다고 한다. “豆莫” 등을 빨리 읽거나 반절反切을 취하면 “邾”음이 되니, “豆莫婁”는 “邾婁”의 읽는 법이 바뀌어 가며 내려온 말(轉讀轉寫)이다. 즉 豆莫婁는 東夷族 계통 중 邾婁族과 같은 민족이며, 豆莫婁는 東夷 邾婁 사람의 후예다.
2. 豆莫婁의 거주지역 및 사회발전
각 사료를 종합하면, 북위北魏때 豆莫婁族의 거주지역은 마땅히 지금의 눈강嫩江 유역인데, 당唐 때까지는 큰 변화가 없었다. 당 때 豆莫婁族의 활동범위가 변하는 바《新唐書•流鬼傳》에:
“<達姤>[部], <室韋>種也. 在<那河>陰, <涷末河>之東, 西接<黃頭室韋>, 東北距<達末婁>云” 라 했다.
검토하면, 여기서 “那河”는 오늘날의 송화강松花江 하류 기슭이며, “涷末”은 “涑末”의 잘못으로 粟末水를 가리키는 바 이 또한 현재의 송화강을 가리킨다. 達姤部는 모두 지금의 송화강 하류 이남 및 이동 지역에 있었다. 黃頭室韋는 지금의 송화강과 눈강이 합류하여 내려가는 강의 북녁에 있었다. 豆莫婁는 達姤部의 동북, 즉 응당 지금의 흑룡강黑龍江과 송화강의 합류지점에 있었다. 그 활동범위는 북조北朝때에 비하여 작아져버렸다.
《魏書•豆莫婁傳》과 《北史•豆莫婁傳》에 실려있는 豆莫婁族의 민족, 사회의 특징 및 거주지역의 지리조건은 《三國志•東夷傳》의 夫餘族에 관한 기재와 기본적으로 일치한다.
《魏書•豆莫婁傳》:
豆莫婁國, 在勿吉國北千里, 去洛六千里, 舊北扶餘也. 在失韋之東, 東至於海, 方二千里. 其人土著, 有宮室倉庫. 多山陵廣澤, 於東夷之域最爲平敞. 地宜五穀, 不生五果. 其人長大, 性強勇, 謹厚, 不寇抄. 其君長皆以六畜名官, 邑落有豪帥. 飮食亦用俎豆. 有麻布衣, 制類高麗而幅大, 其國大人, 以金銀飾之. 用刑嚴急, 殺人者死, 沒其家人爲奴婢. 俗淫, 尤惡妬婦, 妬者殺之, 尸其國南山上至腐. 女家欲得, 輸牛馬乃與之. 或言本穢貊之地也.
[역자 해석:] 두막루국은 물길국의 북녁 1천리에 있는데, 낙[양]에서 6천리 떨어져있다. [두막루국은] 옛 북부여다. 실위의 동녁에 있고, 동쪽은 바다에 이르니 방方(고대 면적단위. 땅덩어리를 방형(사각형)으로 보았을때 그 한 변의 길이다. 그 총둘레는 周라 한다.)은 2천리다. [두막루] 사람들은 토착이며 궁실宮室(집)과 곳집[倉庫]이 있다. 산과 언덕이 많고, 넓은 못도 [많으며] 동이 땅 중에서 가장 판판하다. 땅에는 오곡(쌀, 보리, 조, 콩, 기장)은 잘되나 오과(복숭아, 자두, 살구, 밤, 대추)는 나지 않는다. [두막루] 사람들은 허우대가 우람하며, 성깔은 굳세고, 몸가짐을 삼가하여 얌전하니 소드락질을 하지 않는다. [두막루의] 중앙 우두머리[君長]는 여섯 가축의 [이름을] 벼슬 이름으로 삼으며, 읍락[마다] 지방 우두머리[豪帥]가 있다. 먹고 마실때는 또한 조俎와 두豆 (제기의 일종)를 쓴다. 삼베옷이 있는데 마름질꼴은 고[구]려와 비슷하나 가선(?)[幅]이 크다. 그 나라의 [신분이] 높은 사람[大人]은 금은으로 [옷을] 꾸민다. 형벌을 씀이 매서운데 사람을 죽인이는 죽이되 그 가족은 [신분을] 빼앗아 노비로 삼는다. 풍속은 [중국인이 보기엔] 예의에 어긋난데[淫], 시샘하는 부녀자는 더더욱 나쁘다하여 시샘하는 이는 죽이되 주검은 그 나라 남쪽 산에서 썩힌다. [죽은] 여자의 집(친정)에서 [주검을] 거두길 바래서 소, 말을 보내면 [주검을] [여자집에게] 넘겨준다. [어떤 두막루땅은] 본디 예맥의 땅이라 말하기도 한다.
풍가승은, “《魏書•豆莫婁傳》의 90%는《三國志》의 글을 그대로 받아 쓴것이다. 《三國志》에 없는 글은 앞부분 다섯 구절에 지나지 않는다.” 고 했다. 이렇게 무턱대고 똑같이 쓴것에는 당연히 원인이 있다. 豆莫婁와 夫餘는 뿌리가 같은 민족이며 모두 東夷의 후손이다. 비록 豆莫婁族은 夫餘族에 비해 뒤늦게 민족을 형성하였으나, 그들은 몹시 오랜동안 그 땅에서 夫餘와 살아왔으며, 어떤이는 또한 夫餘에 속해 있었다하니, 즉 이는 역사적 사실임을 알 수 있다. 이로써 豆莫婁와 夫餘는 다방면에서 성격이 일치하는 까닭을 쉽사리 이해했다.
《魏書》등의 기재를 따르면 당시 豆莫婁는 이미 자기 민족 정권을 세웠으며 노예제였음을 알 수 있다. 夫餘族과 마찬가지로 “六畜名官”하니 이는 무릇 馬加, 猪加, 牛加, 狗加 같은 것이다. 지방관은 읍락에 있는 호수豪帥다. ‘형벌이 매섭고, 조두俎豆을 써서 먹으며, 삼베옷을 입되 금은으로 꾸민다’ 는 말은 경제가 비교적 발달했으며 문명 수준도 비교적 높았음을 설명하는 것으로, 豆莫婁는 당시 동북지구 강국의 하나였다.
3. 豆莫婁의 향방
豆莫婁족은 북조北朝로부터 당唐 개원開元 년간까지 수차례 중원에 와 조공하여 藩屬번속의 책무를 다했다. 특히 당 개원 년간에는 대수령은 [속하] 모두 스스로 무리를 이끌고 몸소 조공하게 허용했다. 그들과 중앙왕조간의 밀접한 관계를 반영한다.
당 개원 이후, 豆莫婁는 두번 다시 역사에서 보이지 않는다. 그 주변에 突厥, 室韋, 黑水靺鞨, 渤海, 契丹 등 강한 민족이 앞뒤차를 두고 발돋음했기 때문이다. 豆莫婁族은 늘상 부속적 지위로 빠져들고 말았다. 끝내는 대개 室韋族과 黑水靺鞨에 잠식되었을 것이다.
서론[導論]
제1절 역사상의 중국동북지구
중국 동북지구란 현재의 3성 (요녕, 길림, 흑룡강) 및 내몽고 자치구의 3시1맹 (적봉시, 통요시, 호륜패이시, 흥안맹)을 한데 묶은 지리개념이다. 관습상 또한 ‘동북(東北)’. ‘동삼성(東三省)’, ‘동성(東省)’, ‘관외(關外)’, ‘관동(關東)’ 등의 여러 호칭이 있다. 중국 동북지구 지리개념은 역사상 변화가 있었고, 오랜 시기에 걸쳐 지금의 조선반도 대부분, 일본해-오오츠크해 좌안(左岸)지구, 그리고 사할린섬 등까지도 아울렀었는데 또한 다 중국 동북의 범위에 속한다. 따라서 명백히, 이러한 지구에서 생활한 고민족(古民族)은 다 중국의 역사민족이며 다 중국 동북고민족사 연구의 범주 안에 들어간다.
동북지구는 태고이래 중국영토와 뗄래야 뗄 수 없는 일부였다.
고대 사료를 근거로, 요순시대 조기부터 이미 지금의 요녕성지구는 유주(幽州)와 영주(營州) 2주의 관할이 되어갔다. 당시 정황은 이러하다.: “남으로 교지와 북발을, 서로 융, 석지, 거수, 저, 그리고 강을, 북으로 산융, 발, 그리고 식신, 동으로 장(長)과 도이를 어루만지니 사해(四海) 안은 다 순(舜)임금의 공을 덮어썼다.(南撫交阯•北發, 西戎•析枝•渠廋•氐•羌, 北山戎•發•息愼, 東長•鳥夷, 四海之內咸戴帝舜之功, 《사기·오제본기》)”. “옛날 순임금[虞舜]이 하늘의 덕으로써 요임금[堯]의 뒤를 이었을 적, …… 해외의 숙신, 북발, 거수, 저, 그리고 강이 찾아와서 (신하로서) 복종했다. (昔虞舜以天德嗣堯, …… 海外肅愼•北發•渠搜•氐•羌來服. 《대재례기·소한편》)”. 이 시기의 숙신족(肅愼族)은 지금의 요서지구에 거주했고 발족(發族)은 지금의 길림 남부에 있었다.
하•상(夏商)시기엔 동북지구에 대한 관리를 더욱 강화하여 유주•영주 2주를 분할해 기주(冀州)•청주(靑州) 2주의 관할에 들어가게 하였다. 숙신, 고죽(孤竹), 고조선(古朝鮮) 등으로 대표되는 동북민족과 중원왕조의 관계는 더욱 밀접해졌는데, 사료가 말하는 것과 같다 — “성탕(成湯)이 마침내 천명을 받고……해외의 숙신, 북발, 거수, 저, 그리고 강이 찾아와서 (신하로서) 복종했다. (成湯卒受天命 …… 海之外肅愼•北發•渠搜•氐•羌來服.《대재례기·소한편》)”.
주(周)대에 이르러, 무왕(武王)이 상(商)을 꺽자 숙신족이 가장 먼저 축하하러 왔고, 이후 또 많이 찾아와 “호시석노(楛矢石砮, 자작나무(?) 화살과 돌촉)”를 조공했다. 이 시기 숙신족은 지금의 목단강(牧丹江)과 흑룡강(黑龍江) 유역으로 이주해 있었다. 또한 주 초기의 “성주지회(成周之會)”에서 동북지구의 무릇 10 민족이 다 중원에 방물(方物, 토산물)을 헌납하여 신복(臣服)함을 표시했었다. 그래서 주왕조는 명확하게 선포했다 — “숙신, 연(燕), 박(亳)은 내 북녁 땅이노라(肅愼•燕•亳, 吾北土也). (《좌전·소공9년》)”. 주대가 관할한 동북지구의 그 동부는 이미 지금의 흑룡강 유역에 달했고 남부는 지금의 조선반도 대부분을 아울러 동북강역의 기초를 어느 정도 다졌다.
전국시대에 연나라가 동호(東胡)를 격퇴하고 고조선을 통치하게 되자 동북지구에 요동(遼東), 요서(遼西), 우북평(右北平) 3군(郡)을 설치했는데, 이로부터 동북지구에 군(郡)이 설치되기 시작했다. 이 3군의 관할범위는 지금의 조선반도, 요녕 전부, 길림 남부 등의 지역을 포함했다. 이는 고대 중국정권이 첫 번째로 이 지구를 정식으로 관리한 것이다.
한(漢)은 요동, 낙랑, 현도, 진번 4군을 설치하고 군 밑으로 현(縣)을 설치하여 동북지구에 발전된 행정을 완비했는데, 관리의 효력이 미치는 지역 안엔 동북지구의 고구려, 부여, 선비, 오환, 읍루, 예, 옥저, 맥, 두막루 등의 민족이 있었을 것이다. 관할범위는 전대보다 확대된 것이다. 그 후, 비록 중원정권은 끊임없이 바뀌었지만 동북지구에 대한 왕조의 관리는 항상 유효했으며, 역대 왕조는 계속해서 진•한(秦漢)의 군현제를 많이 답습했다.
수당(隋唐)시기, 국력은 강성했고 동북지구의 강역은 한층 더 확대되었다. 당조(唐朝)는 고구려 지방민족정권이 소멸된 뒤에 먼저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여 밑으로 9 도독부(都督府), 41 주(州), 100 현(縣)을 두어 지금의 요녕성 전 경내와 조선반도 대동강 이북지구를 관할했다. 또 지금의 흑룡강 하류지구에 흑수도독부(黑水都督府)를 설치하여 해당 지역의 부족 수령을 도독(都督) 및 여러 주(州)의 자사(刺史)로 삼았다. 때문에 말갈족의 수령인 대조영을 좌효위원외대장군 발해군왕(左驍衛員外大將軍 渤海郡王)으로 책봉하고 홀한주도독(忽汗洲都督)으로 삼되, 조정은 장사(長史)를 두어 그 부락을 감독하게 했다. 또 지금의 우수리강[烏蘇里江] 하구에 발리주(勃利州)를 설치했는데, 지금의 러시아쪽 해변 지구에 월희도독부(越喜都督府)를 두었다. 여기에 이르러, 당왕조는 이미 서쪽 지금의 바이칼호[貝加爾湖]으로부터 동쪽 오호츠크해 및 지금의 사할린섬까지 움켜쥐었으며, 북쪽 지금의 아무르강[勒拿河] 중하류역으로부터 남쪽 지금의 조선반도 한강 유역까지 이르는 광대한 지구를 직접 관할하에 두었다. 이로부터 고대중국 동북강역의 기본은 쭉 고정되었다.
요(遼)•금(金) 왕조는 동북지구에서 발흥하여 당대(唐代) 동북의 강역을 계승했다.
원조(元朝) 건립 후, 요양(遼陽)에 행중서성(行中書省)을 설치하였는데 따로 영북행성(嶺北行省)을 설치하여 동북의 전 경내를 관할했다. 행성(行省) 밑으로는 또한 로(路), 부(府), 주(州), 현(縣)을 설치했다. 이리하여 동북지구의 행정 설치는 더욱 완비되어 동북의 강역을 더욱 더 견고하게 했다.
명조(明朝)는 몽고족과 여진족을 방어하기 위해 홍무(洪武) 14년(1381) 대장(大將)인 서달(徐達)에 명하여 지금의 산해관장성(山海關長城)이 있는 곳에 관성(關城)을 수축했는데, 관성은 산을 등에 지고 바다에 임해 한몸처럼 연결되었기 때문에 “산해관(山海關)”이란 이름이 붙었다. 이 뒤로부터 산해관은 관(關) 안팎을 잇는 길을 인공적으로 가르는 경계선이 되어 새(塞) 안팎의 경계선이 되었다. 관내(關內)는 내지(內地)로서 관습적으로 “관리(關里)”라고 호칭되었으며, 관외(關外)는 즉 동북(東北)으로서 “새외(塞外)” 또는 “관동(關東)”이라고도 호칭되었다. 이밖에 명조가 강화한 동북지구에 대한 관할은 북으로는 개원(開原)까지, 남으로는 여순(旅順)까지, 동으로는 압록강까지, 서로는 산해관까지 이르렀는데, 대체로 지금의 요녕성 경내이며, 요양에 요동도사(遼東都司)를 설치하여 아래로 25위(衛)와 2주(州)를 두었다. 흑룡강 하류 유역의 특림(特林)지방엔 노아간도사(奴兒干都司)를 설치하여 400 여 위(衛)를 두어 개원 이북을 관할했는데, 대흥안령 안팎까지 이르는 광대한 지구였다.
청조(淸朝) 건립 후, 관리의 편의상 차례대로 동북을 쪼개 3성(省)으로 만들었다. 순치(順治) 6년(1649)에 설치한 봉천앙방장경(奉天昂邦章京)이 요녕성 설치의 시작인데, 후에 “진수성경등처장군(鎭守盛京等處將軍)”으로 개칭했다. 길림성의 설치는 순치 10년에 시작되었는데 “영고탑장군(寧古塔將軍)”으로 호칭되어 흑룡강도 관할했고, 후에 치소를 지금의 길림시로 이전하면서 “길림장군(吉林將軍)”으로 명명했다. 그리고 흑룡강성의 설치는 강희(康熙) 22년(1683)에 시작되어 “흑룡강장군(黑龍江將軍)”으로 호칭했는데, 먼저 치소는 아이훈[璦琿]에 있었으나 뒤에 치소를 지금의 치치헐[齊齊哈爾]로 이전했다.
1850년대, 러시아 침략세력이 동쪽을 향해 확장될 때, 함풍(咸豊) 9년(1860) 청왕조는 러시아와 불평등한 협정인 중•러《아이훈조약(璦琿條約)》을 맺어 흑룡강 이북의 큰 조각은 러시아에 의해 강점되었다. 2년 뒤에 또 협정을 강요받아 불평등한 중•러《북경조약(北京條約)》을 맺어 우수리강으로부터 동쪽으로 사할린섬까지 이르는 큰 조각의 영토를 재차 러시아에게 읽어버리고 말았다. 이로부터 중국 동북지구 북부와 동부의 변계(邊界)는 줄어드는 꼴이 되었다.
동북지구 남부인 조선반도는 비교적 특별하다.
고구려 멸망 후 조선반도 한강 이북의 강역은 그 땅이 안동도호부의 관할에 귀속되는 정황에 있었다. 뒤에 와서 부분적으로 신라 김씨왕조에 의해 잠식되었으되, 신라는 당조(唐朝)의 번속(藩屬)이었으므로 잠식된 영토를 당조는 적극적으로 수복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반도북부에 대한 주권은 당왕조에 있었음은 물리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몽고는 흥기(興起)한 뒤, 조선반도의 고려 왕씨왕조를 통치했다. 몽고칸국은 전대 동북의 강역을 계승하여 1259년에 군대가 조선에 주둔했으며 1270년에 그 땅에 다루가치[達魯花赤, 지방행정장관]를 두어 행정관리를 행사했다. 반도북부는 또다시 중앙왕조에 귀속되어 직접 관할되었다. 그러나 몽고 관원의 민족압박정책 추진에 말미암은 야만적인 통치는 350년대에 조선반도로부터 축출되고 말았다. 왕씨고려 역시 뒤이어 멸망하였다.
명조(明朝) 건립 후, 이씨조선왕국 또한 뒤이어 건립되었는데 명왕조의 번속(藩屬)이 되었다. 명조와 이씨조선왕국은 상의하여 오늘날의 압록강과 도문강(圖們江)의 중심선을 갈라서 남쪽은 조선이 관리하고 북쪽은 명조가 관리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이러한 중심선의 목적은 양 지역사람들이 중심선을 넘어 생산에 종사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조선은 명조의 속국이었으므로 당시로부터 청대(淸代) 1712년 목극등(穆克登)이 변(邊)을 조사할 때까지 압록강과 도문강의 한 중심선은 여전히 근현대 이래 국경선이 갖는 의미를 구비하지는 못했었다.
20세기 초, 이씨조선은 청왕조와 철저하게 번속관계로부터 이탈했었는데, 러시아의 종용 하에 조선의 사병(士兵)이 끊임없이 도문강 북안(北岸)의 청조 관할 구역으로 진입하자 쌍방은 교섭을 해서 1904년에 《중조변계선후장정(中朝邊界善後章程)》를 체결하여 “도문강을 경계로 하여 각자 목적지[汛地]를 지킨다. (以圖們江爲界, 各守汛地)”고 규정하였다. 이것이 중국과 조선의 정식 경계 구획의 기초다.
청(淸) 선통(宣統) 원년(1909) 9월 4일,《중조변계선후장정》을 기초로 청과 조선은 정식으로 변계(邊界)를 구획하였다. 경계 조약인《도문강중한계무조관(圖們江中韓界務條款)》 에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규정되어있다. : “도문강을 중국과 대한제국 두 나라의 경계로 한다. 이 강이 발원하는 지방에 있는 정계비로부터 석을수(石乙水)까지를 경계로 한다. (以圖們江爲中韓兩國界, 其江源地方自定界碑至石乙水爲界)”. 이렇게 조선반도 한강 이북 지구가 먼저 정식조약의 형식으로 구획되어 조선 소유로 귀속되었다. 중국동북지구의 남계(南界)는 이것을 따라서 압록강과 도문강 중심선 이북으로 고정되었다.
지금까지 논한 것을 종합해 보면, 기나 긴 역사발전 과정을 거치면서 중국동북지구 강역의 변화는 매우 컸음을 볼 수 있다. 근대 이래 강역의 발걸음은 작아졌는데, 만청(滿淸)왕조의 부패한 정치 하의 중국사회가 오랫동안 가난하고 약함이 쌓인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서론] 제 2 절 동북고민족의 기원
여기서 말하는 동북고민족이란 일반적으로 중국의 광대한 동북지구에서 역사상 생활한 각종 인류공동체를 가리킨다. 선진(先秦)부터 명청(明淸)까지의 역대 사서에 기재된 숙신, 진번, 읍루, 물길, 흑수말갈, 속말말갈, 여진, 예, 맥, 기(箕), 고조선, 고이(高夷), 부여, 고구려, 고리(藁離), 양이(良夷), 발족(發族), 백이(白夷), 옥저, 두막루, 산융, 동호, 선비, 오환, 해(奚), 거란, 실위, 몽고, 오락혼(烏洛渾), 고연족(古燕族), 고죽, 냉지, 유인(兪人), 도하(屠河), 청구(靑丘), 주두(周頭), 습(霫), 지두우, 구도매(驅度寐), 국(鞠), 유절(兪折), 박마(駮馬), 대한족(大漢族), 유귀(流鬼), 구국(狗國), 길랴크족[吉里迷] 등등과 화하(華夏)—한민족(漢民族)—도 포함한 거의 50 개가 동북고민족의 대열에 속한다. 현재 동북지구의 만주족[滿族], 몽고족, 다허르족(達斡爾族), 에벵키족[鄂溫克族], 오류존족(鄂倫春族), 시버족(錫伯族), 나나이족[赫哲族], 조선족, 한족 일부[部分漢族] 등은 많은 것이 동북고민족의 발전 및 변천으로 말미암아 나왔다.
1. 현재까지 동북지구에서 알려진 가장 이른 시기의 고인류는 구석기시대 조기의 만기 원인(猿人, 유인원)에 속하는 “묘후산인(廟後山人)”이다. 지금부터 45만년전에 살았는데 유명한 “북경원인(北京猿人)”과 동시대이며, 생활지점은 지금의 요녕성 양하(陽河) 주변이었다. “묘후산인”의 뒤를 이어 지금부터 약 20만년 전 ∼ 15만년 전 무렵에는, 요녕 영구(營口)의 “금우산인(金牛山人)”과 객나심좌익(喀喇沁左翼) 몽고족자치현—약칭: 객좌(喀左)—의 “합자동인(鴿子洞人)” 및 건평(建平)의 “건평인(建平人)”이 있다. “금우산인”, “합자동인”, “건평인”은 고고학상 구석기시대 중기에 속하는데 이들은 이미 씨족제의 과도기를 개시하였다.
5만년전으로부터 1만년전까지인 고고학상 구석기 시대 만기에 동북의 고인류는 모계 씨족사회의 조기단계에 처해 있었다. 이 시대에 생활했던 만기지인(晩期知人, 호모 사피엔스?)으로는 “유수인(楡樹人)”, “안도인(安圖人)”, 객이빈인(喀爾濱人)”, 청산두인(靑山頭人)”, “전양인(前陽人)” 등이 있다. 그 발자취는 이미 동북지구의 남부와 중•동부에 분포했었다.
동북지구의 고민족은 이러한 고인류와 관계가 있을까? 다시 말해서 구석기시대 조기 만기의 원인으로부터 구석기시대 만기의 만기지인까지 전부 혹은 일부라도 역사시기의 동북고민족으로 변화-발전했을까는 현재 회답하기 어려운 문제다.
지금부터 1만∼4•5천년 전 무렵, 하(夏)왕조가 건립되기 전인 중국사회는 부락 및 부락연맹시기였으며 고고학상 신석시기대이기도 했는데, 동북지구에서는 “찰뢰낙리인(札賚諾爾人)”이 발견되었고 앙앙계(昂昂溪)문화, 신개류(新開流)문화, 요하소남산(饒河小南山)문화, 홍산(紅山)문화, 신락(新樂)문화, 소주산(小珠山)문화, 부하(富河)문화, 소하연(小河沿)문화 등등이 있었다.
이상을 종합해 보면, 동북지구의 수많은 신석기시대 유적의 문화내용은 지금의 황회(黃淮, 황하와 회수) 및 강남지구의 고고학문화—주요한 것은 북신(北辛)문화, 대문구(大汶口)문화, 산동용산(山東龍山)문화와 악석(岳石)문화 등—의 문화내용과 광범위한 공통 특징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때문에 소겸기(蘇兼琦)와 은위장(殷瑋璋)은 “가령 장도(長島)의 출토물을 요동반도의 여순(旅順) 곽가촌(郭家村) 그리고 장해(長海) 광록(廣鹿) 등지의 출토물과 비교해서 파악해보면, 오히려 양자가 서로 닮은 곳이 매우 많음을 발견할 수 있다. (1981)”고 지적했다.
이런 폭넓은 공통된 특징으로 주요한 것은 아래와 같은 방면에서다.
첫째, 석기의 형식이 서로 닮았다. 요동반도에서 고고학적으로 발굴된 석기의 형식은 산동용산문화와 성질을 함께하는 것이 몹시 많다. 예를 들어 평면상에 직인(直刃, 곧은 칼)과 사인(斜刃, 비스듬한 칼) 위주로 가로면은 직사각형이다. 사각형 위주인데, 세로면쪽은 날이 하나거나 가파른 양 날로 된 것이 많다. “산동 및 요동반도의 어떤 돌도끼[石斧]와 돌자귀[石錛]는 공동 특징이 있다. 북쪽으론 철령(鐵嶺) 철모산(鐵帽山)까지, 동쪽으론 압록강 주변의 환인(桓仁)까지, 서쪽으론 신민(新民)의 사강(沙崗)까지 다 산동반도의 석기유형과 서로 닮았고, 따라서 다 산동용산문화의 어느 요소도 반영하고 있다. (佟冬等, 1990)”
둘째, 단각흑도(蛋殼黑陶) 등의 기구(器具)가 서로 닮았다. 잘 알듯이 단각흑도는 격(鬲), 규(鬹), 두(豆) 등의 기형(器形)과 함께 산동 용산문화의 주요 표지(標志)의 하나이다. 이것들은 동북지구에도 많이 존재한다. 대련(大連) 곽가촌상층(郭家村上層)유적의 누공두(鏤孔豆), 대파배(大把杯), 환족기(環足器), 환량기(環梁器) 등은 산동용산문화 중의 어느 기물류이다. 여대(旅大)지구의 소주산중층(小珠山中層)과 곽가촌하층(郭家村下層)유적에도 대문구문화 조기와 중기의 어느 기물류가 있는데, 예를 들어 삼족고형기(三足觚形器), 분형정(盆形鼎), 실족규(實足鬹) 등 같은 것이다 (許玉林 등, 1982). 또 하가점하층(夏家店下層)문화 중의 북표(北票) 풍하제5층(豊下第五層)에서 출토한 도기(陶器)는 산동용산문화의 풍격을 짙게 갖추고 있으며 마광니질흑도(磨光泥質黑陶)가 몹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어떤 관(罐), 두(豆)의 기형은 기본적으로 서로 동일하며 일부 분(盆), 호(壺), 정(鼎) 등 또한 다 뚜렷한 산동용산문화의 특징이 있다.
셋째, 대문구, 산동 용산문화 등의 기물조형은 새[鳥] 모양을 본뜬 것이 가장 두드러진다. 이런 류의 기물은 동북지구에도 역시 흔히 보인다. 예를 들어 소하연문화의 적봉시 석붕산(石棚山)유적에서 출토한 새 모양 단지[鳥形壺]에서는 짧은 꼬리에 비스듬한 등 그리고 조아린 머리에 뻗쳐있는 부리의 작은 새가 지저귀고 있다. 홍산문화 조양(朝陽) 팔보묘(八寶廟)유적에서 출토한 오리모양 단지[鴨形壺]는 가슴이 둥그렇고 꼬리는 치켜세우고 있는데, 태연자약한 것이 오리가 물에서 노니는 것과 닮았다. 신락(新樂)문화의 신락하층(新樂下層)유적에서 출토한 한 나무지팡이[木杖]는 길고 가느다라며 평평한데, 손잡이 부분을 조각하여 새대가리 형상을 이루고 있다. 밀산(密山) 신개류(新開流)유적의 매[鷹] 대가리 조각은 눈매가 날카롭고 부리는 예리하며 극히 신령스런 생김새는 씩씩하고 힘차다. 홍산문화에 속하는 동산취(東山嘴)유적, 복흥(福興)유적, 호두구(胡頭溝)유적 등에서 다 수 많은 옥조(玉鳥)가 출토했다. 이들 옥조는 “옥룡(玉龍)과 마찬가지로 숭배를 받는 동물 우상의 하나이다. (佟冬等, 1990)”라고 추측하는 학자도 있다.
넷째, 채도(彩陶)의 풍격(風格)이 서로 닮았음이 드러났다. 동북지구에서 출토한 채도는 대문구문화와 산동용산문화에서 출토한 채도와 풍격상 몹시 닮았다. 예를 들어 홍산채도의 갖춤은 대문구문화와 서로 닮은 구엽원점문(勾葉圓點紋)이 있다. 홍산문화 부신(阜新) 호두구, 객좌 동산취, 능원(凌源) 삼관전자(三官甸子) 등 유적의 그 호형삼각쌍구과문(弧形三角雙勾渦紋) 채회(彩繪)는 강소(江蘇) 동해현(東海縣) 역성조어대(䔉城釣魚臺) 그리고 산동 봉래(蓬萊) 자형산하층(紫荊山下層)과 기본적으로 일치한다. 소하연문화 중에서는 특색이 극히 대문구문화의 팔각성채회(八角星彩繪) 디자인에 속하는 것이 풍부하게 발견되었다. 대련 소주산중층 채도의 화문(花紋) 중에 원점구련화문(圓點勾連花紋)이 있는데, 원점구련화문은 대문구 채도의 주제가 되는 화문의 하나이다.
다섯째, 대량의 옥예기(玉禮器) 및 장식품이 있다. 대문구문화와 산동 용산문화 등은 한가지 도드라진 특징으로 정교하고 아름다운 골제(骨制) 및 옥제(玉制) 공예가 보편적으로 출현하는데 결(玦, 한쪽이 터진 고리), 환(環, 고리), 황(璜, 반원형의 옥), 종(琮, 가운데 구멍이 뚫린 옥그릇), 벽(璧, 둥근 옥) 등의 예기(禮器) 및 대량의 장식품이 출토했다. 이런 것은 동북지구에서도 대량으로 발견되었다. 홍산(紅山)문화의 정교하고 아름다운 옥제 공예는 세상에 이름을 떨쳤는데, 옥조각품이 출토한 주요 유적은 호두구, 동산취, 삼관관자, 건평(建平) 우하량(牛河梁), 옹우특기(翁牛特旗) 삼성타랍(三星他拉) 등지이다. 기물의 조형 소재로 용, 말, 거북, 물고기 등의 동물류가 쓰인 것이 사람들의 주목을 가장 끌었다. 이밖에도 옥잔[玉杯], 옥황(玉璜), 옥벽(玉璧), 옥귀걸이[玉墜], 옥봉(玉棒), 구운형(勾雲形) 옥패(玉佩), 말굽형 옥가락지[玉箍] 등의 예기가 있다.
바로 이러한 까닭으로 고고학자들은 중국 신석기시대의 고고학문화체계를 총괄할 때 요동반도를 중심으로한 동북지구는 대문구—청련강(靑蓮崗)문화 체계 안에 들어간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구체적인 유형상으로는 대문구문화와 산동용산문화에 속한다. 제기하기를 “대문구—청련강 문화계통은 동북—동—동남—남방의 녹색지대를 따르는데, 강, 호수, 바다가 많고 물이 흐르는 저습지다. 이 두 큰 문화계통의—다른 한 계통은 반파 앙소문화체계를 지칭— 접촉선은 황토고원(黃土高原)의 동측, 그리고 태행산맥(太行山脈) 기슭과 화북평원(華北平原)이 만나는 기남(冀南) 예북(豫北) 지구를 따라서 북쪽 및 동북쪽을 향하여 요하(遼河) 상류의 적봉(赤峰)지구까지 이른다. (石興邦, 1986)”고 했다.
고고학상 문화체계와 민족학상 민족 공동체의 속뜻은 서로 동일함을 우리는 알고 있다. 말을 바꾸면, 한 공동된 고고학문화체계의 귀속에 따라 분류하면 고고학적 공동문화체계의 민족공동체를 솎아내 만들 수 있다. 물론 서로 멀리 떨어져 있다 해도 다 서로 같은 족원(族源)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동북지구의 고고학 문화와 황회지구의 고고학적 문화가 동일한 한가지 계통에 속한다는 추론은 광범위한 공통된 특성으로 뒷받침할 수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양 지구의 고고학적 문화의 주인은 서로 동일한 기원임이 필연적으로 정해진다.
산동(山東) 등지의 신석기시대 문화의 주인은 동이족계의 각 민족이거나 갈래[支族]이다. 그리고 동북지구 신석기시대 문화의 주인의 상당히 많은 부분은 역사시기 동북지구의 각 민족의 조상[先人]이다. 따라서 고고학적으로 문화를 살펴보면 동북 고대 각개 민족은 동이족계에 근원을 두고 있다. 대체로 “신석기시대 조기가 개시되면서부터 동이족의 일부 갈래[支族]가 거주지를 옮겨가기 시작했는데, 동북지구를 향해 조금 옮겨간 일지(一支)가 이와 같다. (李德山, 1995)”. 이 뒤로부터 끊임없이 동북지구로 이주한 각개 갈래[支族]의 주(主)된 존재는 동이족계 중의 주루족(邾婁族)인 듯한데, 국부지구에서 변천-융합을 거쳐 최종적으로 발전한 수 많은 무리는 서로 동일한 근원을 갖추고 있을 뿐 더러 서로 문화적으로 근접한 각 민족을 이루었다.
2. 역사문헌기재를 보면 동북고민족의 연원은 동이족계이다.
동이(東夷)란 중국 고대 화하민족이 동방민족을 총칭해서 부른 말이다.《주례•직방지》에 “그 나라땅을 도비(都鄙, 왕족이나 공경대부 등에게 수여된 영지), 4이(四夷), 8만(八蠻), 7민(七閩), 5융(五戎), 6적(六狄)의 사람들로 구분한다. (辨其邦國, 都鄙, 四夷, 八蠻, 七閩, 五戎, 六狄之人民.)” 주: “동방(東方)을 이(夷)라고 말하는데, 머리털을 풀어헤치고 몸에 무늬를 입히며, 불에 익혀 먹지 않는 놈들이라고 한다. (東方曰夷, 被髮文身, 有不火食者矣)” 고 했다. 여기서 “동이”라고 불리는 족계(族系)는 지금의 황회(黃淮, 황화 및 회수) 및 일부 강남(江南) 지구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그 북쪽 경계는 지금의 하북(河北) 남부이고 서쪽 경계는 지금의 하남(河南) 동부이며, 남쪽 경계는 이미 지금의 절강(浙江)까지 달했다. 이 지구의 토착족계이다. 이 거대한 족계(族系)내에서 수많은 뿌리가 같은 씨족 및 부족이 민족으로 엉켰는데, 동이족계는 “족공동체(族共同體)상에 있던 각 성씨집단간의 통혼이 서로서로 스며들면서 이주 및 왕래가 민족공동체의 자아의식을 나날이 깊어가게 했고, (결국) 선명한 정체특징이 대외적으로 깊이 형성되었다. (王振中, 1990)”
하(夏)로부터 주(周)까지는 또한 그 범칭으로 9이(九夷)라고 했다.《금본죽서기년(今本竹書紀年)》에서는 이 이름을 칭하여: 견이(畎夷), 우이(于夷), 방이(方夷), 황이(黄夷), 백이(白夷), 적이(赤夷), 풍이(風夷), 양이(陽夷), 현이(玄夷)라고 했다. 이외에도 람이(藍夷)란 이름도 덧붙여 숫자의 형식에 얽매인 듯한 결과로 ‘10이(十夷)’라고도 쓰였다.《국어(國語)•노어(魯語)》: “옛날에 무왕(武王)은 상(商)을 꺽고 9이 및 백만(百蠻)까지 길을 열었다 (昔武王克商, 通道於九夷•百蠻). 위소(韋昭) 주: 9이는 동이 아홉 나라다. (九夷, 東夷九國也.).” 여기서 아홉 (혹은 열) 지족(支族)은 대체로 동이족 계통의 근간이다. 동이민족은 화하민족과 함께 공동으로 중화민족의 상고문명을 엮어 만들었다.
고대 동북지구의 각 민족은 시간적으로 비교하여 동이(東夷)보다 늦게 역사문헌 중에 출현하였지만 각 종(種)이 기재되었을 뿐 더러 이른 시기에 숙신, 예, 동호, 산융, 고조선, 고죽, 기(箕) 등이 나타났고, 또한 중간시기엔 선비, 오환, 실위, 고구려, 부여, 읍루, 말갈 등이, 늦은 시기엔 몽고, 거란, 여진, 만족 등이 몽땅 “이(夷)” 혹은 “동이(東夷)”라고 호칭되었다. 많은 정사(正史)에서 이들의 전기를 적을 때 다 직접 “동이전(東夷傳)”이라고 앞머리에 덧붙였으며, 이들을 “동북이(東北夷)”라고 호칭했다.
이것으로부터 중국의 역대 학자는 동북고민족의 연원은 동이족계라는 한 관점상에 있었음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드넓은 공통인식이다.
3. 풍속 및 습관 측면에서 보면 고대의 동북민족은 또한 동이족계와 강렬한 공통 특징이 있다. 간단히 말하면:
(1) 두 지역의 사람엔 모두 두골을 인공으로 변형하는 습속이 유행했는데, 이른바 속칭 “수편두(睡扁頭, 눌러 납작하게 만든 머리)”다. (2) 동이족계는 준거(蹲踞, 쭈그리고 앉기)를 예의로 삼았는데 동북의 각 민족도 마찬가지로 준거 혹은 기거(箕踞, 다리를 뻗고 앉기)의 습속이 유행했다. (3) 동이족계는 중국의 음악 및 가무(歌舞)의 발명자인데 (逄振鎬, 1987), 동북 각 민족 또한 다 노래와 춤을 잘하는 민족이다. (4) 두 지역의 사람들의 점복(占卜) 습관은 서로 같다. (5) 동이족계는 중국의 매서운 병기인 여러 전시(箭矢), 도(刀), 모(矛) 같은 것의 발명자인데, 동북 각 민족도 마찬가지로 그것들로 천하에 이름을 날렸다. (6) 양 지역은 모두 동일하게 고인돌[石棚] 묘장 풍습이 유행했다. (7) 양 지역은 다 돼지[豕], 개[狗], 양 등의 가축을 순장했다. (8) 두 지역은 모두 동일하게 시조의 난생(卵生)신화가 유행했다. (9) 양 지역은 모두 동일하게 말, 개, 거북이, 용 등의 동물을 숭배했다. (10) 두 지역은 모두 동일하게 왼쪽으로 여미는[左衽] 복식 특징이 있다. (11) 다 주로 머리를 풀어헤쳤다[披髮]. (12) 다 조선 및 항해기술 이 발달했다. 등등.
이처럼 풍속-습관상 고찰로부터 시공간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인 내용 혹은 주요 특징에는 큰 변화가 발생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쌍방의 족명(族名)을 보면, 절대 다수가 다 대응되는 관계에 있다. 족명은 표면상으로는 같지 않지만 만일 고대 음운에 의해 바로 잡는다면 즉시 그들 사이에 서로 같은 곳을 발견할 수 있다. 관계되는 이 방면의 내용은 이 책의 각 편 및 장에서 다 상세하게 논하고 있으므로 여기서는 자세한 서술은 하지 않는다.
앞에서 논한 것을 쉽게 간추리자면, 고대 동북지구의 민족은 몹시 많고 그 기원도 복잡하지 않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들 민족의 주요 원류는 다 동이족계의 지역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고대동북지구의 각 민족이 다 중국의 고민족(古民族)이며 다 중화민족 역사상 불가결한 일원이라고 설명한다. 상술한 것들이 가장 주요한 몇몇 역사적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제3절 동북고민족의 융합과 변혁
습관상, 사람들은 중국동북지구의 고민족(古民族)을 크게 4계통으로 나눠 파악한다. 첫째는 한족(漢族), 둘째는 숙신계, 셋째는 예맥계, 넷째는 동호계다.
이처럼 구분되는 주요한 여러 원인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그들의 거주지가 다르다. 한족의 주요 거주지는 동북의 남부이고, 숙신계는 동북의 동부에 거주하며, 예맥계는 동북의 중부 및 조선반도의 북부에 거주하고, 동호계는 동북의 북부에서 거주했다. 둘째는 그들의 경제유형이 다르다. 한족은 농사에 힘썼고, 숙신계는 어업과 수렵이 주업이었으며, 예맥계는 농경이 주업이고, 동호계는 유목이 주업이었다. 넷째는 그들의 갈래[別類]로부터 파악하는 것인데, 각자 계통이 있어 연구의 방편이 된다.
이상의 원인을 제외하고는 기타 문제를 이처럼 구분하여 설명할 수 없다. 족계(族系) 사이는 딱 잘라 끊을 수 없음이 뚜렷하고 분명한 관계인데, 너 안에 있는 나, 나 안에 있는 너의 관계이다. 다만, 거주지구가 다르므로 지리환경의 변화가 발생한 뒤에야 상호간에 비로소 일정한 차이가 생긴다. 우리가 고대동북민족의 기원, 발전, 변천의 여러 문제를 연구함에 있어 특히 주의할 점이다. 기왕 같지않은 족계의 차이를 보았다면, 같지않은 족계간의 여러 많은 일치점도 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
1. 숙신계 각 족(族)은 일반적으로 숙신, 진번, 읍루, 물길, 흑수말갈, 속말말갈, 여진, 만주 등의 민족을 포함한다. 4천년에 가까운 기나 긴 세월과 더불어 역사는 복잡한 발전 및 변화를 거쳤다. 이 각 족계(族系) 중에는 한 번 그리고 또 한 번의 지역 분화가 나와 앞서간 부분을 더하면서 한 시기의 변혁과 발전을 거쳤고, 들락날락 이주하면서 차례대로 분별되는 기타 민족과 융합되었다.
숙신족은 중국 동북지구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기록에서 보이는 민족의 하나이다. 일찍이 선사 전설 연대의 요순(堯舜)시기에 숙신족은 이미 중원지구의 건립과 연관이 있었다.
한대(漢代) 이후, 그들을 계승하여 읍루가 일어났는데 주로 농업생산에 종사했으며 돼지치기도 잘했다. 그 특산은 “읍루 담비[挹婁貂]”였는데 전•후한, 삼국, 남북조 시기의 중원인에게 깊은 사랑을 얻었다.
북조(北朝)∼수당(隋唐)때, 역사책에선 또한 “물길”과 “말갈”로 분별하여 숙신과 읍루의 후예를 호칭했다. 수조(隋朝)때 말갈족은 이미 속말(粟末), 백산(白山), 백돌(伯咄), 안차골(安車骨), 비날(拂捏), 호실(號室), 흑수(黑水) 등의 7대부(七大部)로 발전하여 동쪽은 대해(大海)—지금의 일본해—에 임했고 서쪽은 눈강(嫩江)에 이르렀으며 남쪽은 지금의 길림시까지 북쪽은 흑룡강 이북에 달하는 광활한 지구에 분포했다.
당(唐) 성력(聖曆) 원년(698), 속말부의 수령인 대조영(大祚榮)은 지금의 송화강(松花江) 상류지대 및 장백산(長白山, 백두산) 북쪽 기슭 일대에서 진국(震國)—또는 “진(振)”—이라는 정권을 건립했는데, 당조(唐朝)가 대조영을 책봉하여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삼았기 때문에 국호는 “발해”가 되었다. 발해국의 국도(國都)는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인데 지금의 흑룡강성 영안현(寧安縣)의 동경성(東京城)이다. 중당(中唐) 이후 국세가 강성하여 10만 호(戶)나 되었다. 관할이 미치는 지경은 남쪽으론 조선반도 북부까지, 동쪽은 일본해까지, 북쪽은 송화강 하류지대까지, 서남쪽은 지금의 요녕성 개원현(開元縣)로부터 단동(丹東)시까지 가로지르는 선을 경계로 했다. 발해국왕의 정치와 군사 그리고 문화제도는 당나라의 제도를 두루두루 살펴 건립되었다. 발해왕은 왕위를 계승할 때 마다 늘 당조(唐朝)의 책봉을 받았는데 경제와 문화가 고도로 발달하여 당시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고 칭찬을 들었다. 발해는 200 여 년을 누리다가 거란족의 요(遼)나라에게 멸망되었다. 발해 유민의 절대다수가 남녁으로 요하(遼河) 유역까지 이주하여 한족(漢族), 거란족, 해(奚)족 등과 섞여 살았는데, 후에 점차 한족에 동화되었다.
발해 멸망 후, 흑수말갈이 뒤이어 흥기했는데 거란인은 이들을 “여진(女眞)”이라고 불렀고, 이후 ‘여진’이란 칭호가 ‘말갈’을 대체하게 되었다. 요조(遼朝)는 여진인을 생(生), 숙(熟) 두 부(部)로 나누어서 파악했다. 그 중 “생여진(生女眞)”은 송화강 북안 및 흑룡강 중하류에 분포하여 동쪽은 지금의 오호츠크해까지 달했는데, 사회발전은 여전히 비교적 뒤처진 단계에 처해있었다. 서기 10세기말, 생여진 중의 완안부(完顔部)는 안출호수(按出虎水)—지금의 흑룡강성 아시강[阿什河] 유역—까지 이주했는데 이로부터 100년 간은 생산력이 몹시 빨랐으며 끊임없는 전쟁을 통해 여진의 각 부락을 점차 통일했다. 서기 1115년, 완안부가 핵심이 된 여진인은 수령인 아골타(阿骨打)의 통솔 아래 금조(金朝)를 건립했다. 이후, 차례대로 요(遼)와 북송(北宋)을 멸망시키고 연경(燕京)—지금의 북경(北京)—으로 천도했는데, 대부분의 여진족도 또한 잇달아서 중원에 거처를 정했다. 금조(金朝) 후기가 되자, 중원지구에 들어와 거주하던 여진족은 이미 완전히 한족(漢族)과 융합되고 말았다.
한편 동북에서 눌러 살고 있던 여진족은 명조(明朝)때 건주(建州), 해서(海西) 그리고 동해(東海)—야인여진(野人女眞)—의 3대부(三大部)로 나눠있었다. 명조 중엽 이후, 건주 및 해서여진은 흑룡강과 송화강유역으로부터 남쪽으로 이주하여 휘발하(輝發河)와 혼하(渾河) 유역에 거주지를 정했는데, 경제-문화가 신속히 발전하여 각 부(部) 가운데 수준이 앞서갔다. 16세기 하반엽, 누루하치[努爾哈赤]가 통솔하는 건주여진은 여진의 각 부(部)를 통일하고 아울러 핵심이 되어 기타 많은 족(族)을 흡수하여 새로운 민족을 형성했다. 서기 1636년, 누루하치의 아들인 홍타이지[皇太極]는 국호를 “청(淸)”으로 고치고 본족(本族)의 족명(族名)을 “만주(滿州)”라고 정했는데, 여진족은 이리하여 만족(滿族)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후 청나라 병사가 산어관(山漁關, 산해관?)에 들어와 청조(淸朝)를 건립했는데, 청조는 중국을 260 여 년이나 오래 통치했던 중국 역사상 마지막 봉건왕조가 되었다. 그리고 당시 또한 일부 억지로 만족공동체에 편입되었던 여진인과 멀리 변경지구에 있던 여진부락은 거듭 발전-변화하여 지금의 오로첸족[鄂倫春族], 에벵키족[鄂溫克族], 나나이족[赫哲族, 헤쩬족] 등의 민족이 되었고, 아울러 니브히[尼夫赫], 우디헤[烏德盖], 네기달[涅吉達爾] 등은 현재 국경밖[境外] 민족에 속해있다.
2. 예맥계 각 족에는 일반적으로 예(穢), 맥(貊), 고조선, 고이(高夷), 고리(藁離), 양이(良夷), 발족(發族), 백민(白民), 부여, 고구려, 옥저, 두막루 등의 민족이 포함된다. 예맥계의 역사는 숙신계와 마찬가지로 오래되었으며 문명수준 또한 상대적으로 비교적 높았다.
한대(漢代), 부여족은 지금의 동북 중부에 부여국(夫餘國)을 건립했다. 부여국은 농업 위주였는데, 축목업 또한 비교적 발달하여 좋은 말과 각종 모피의 생산이 성행했다. 서기 5세기 말, 부여는 물길(勿吉)에게 멸망했다. 부여족의 일부는 변화-발전하여 한족(漢族)이 되었는데, 또 다른 일부는 동북지구의 기타 고대민족 가운데로 녹아 들어 갔다.
이 일족 계통 중에서 별도로 세운 한 나라가 고구려다. 고구려는 서한(西漢) 후기에 건립되었는데, 그 국민은 예맥계 중의 각 민족과 부락이 두루두루 포함되어 있었다. 고구려왕국은 동북의 남부 및 조선반도 북부에 위치했는데, 평소 동북아지구에서 국력이 강성하다는 말을 들었으며, 나라가 세운지 무려 700 년이나 달했고, 서기 668년에 당조(唐朝)에게 멸망했다. 그 국민의 대부분은 왕족과 함께 내지(內地)로 이주 당했고, 뒤에 한족 속으로 녹아 들어 갔다. 또한 작은 일부는 돌궐, 말갈 등의 민족으로 들어갔다. 또한 극히 작은 일부는 남쪽의 신라로 달아났는데, 이 신라 및 백제 등과 함께 발전-변화하여 현재의 조선민족이 되었다.
부여와 고구려왕국이 멸망한 후, 예맥계 중 쓸쓸이 남은 민족은 차츰 쇠미해지고 말았고, 요금(遼金)시기에는 이미 이 족계(族系)에 관한 기록을 볼 수 없다.
3. 동호계 각 족에는 일반적으로 산융(山戎), 동호(東胡), 오환(烏桓), 선비(鮮卑), 해족(奚族), 실위(室韋), 거란(契丹), 오락혼(烏洛渾), 몽고(蒙古) 등의 민족이 포함된다. 동호계 각 족의 역사는 꽤 오래되었다.
전국시기, 동호족은 연(燕)나라와 여러 차례 전쟁이 발생했다. 수당 이전, 오환과 선비가 전후해서 동북에서 일어났는데 삼국시기 조조(曹操)는 요동, 요서, 우북평 3군에서 살던 오환 1만 여 호를 중원 내지(內地)로 이주시켰다. 이 사람들은 이후 한인(漢人)과 섞여 살았고, 발전-변화하여 한족(漢族)의 일부분이 되었다. 선비는 단석괴(檀石槐)의 통솔 하에 자기 정권을 건립했다. 뒤에 선비족은 탁발(拓跋), 우문(宇文), 모용(慕容), 은(殷), 독발(禿髮), 걸복(乞伏), 유연(柔然), 철불(鐵弗), 토곡혼(土谷渾) 등의 9부로 분화되었는데, 각자 나름대로 정권을 세우면서 오랫동안 중국 북부지구에서 활동했다. 특히 탁발씨가 세운 북위(北魏)정권은 중국북부라는 강산의 절반을 통치하면서 140 여 년을 누렸다. 이 기간 동안 큰 힘을 기울인 한화(漢化)정책이 진행되어 광대한 선비 사람을 한족에 녹아 들어가게 했다. 잔류해 살고 있던 동북의 선비족은 한족 외에도 일부는 몽고, 거란 등의 민족으로 들어갔으며 또한 일부는 발전하여 현재의 시버족(錫伯族)이 되었다.
수당-오대 시기, 오환과 선비에 뒤이어 실위, 해, 거란이 일어났다. 실위는 처음엔 눈강 및 흑룡강 유역에서 활동했는데 그 중의 한 갈래인 “몽올실위(蒙兀室韋)”는 뒷날 서쪽으로 이주하여 몽고족으로 발전-변화했다. 몽고칸국과 원왕조(元王朝)가 건립됨에 따라서 중국은 남북분열 국면을 벗어나 결속되었다. 원왕조는 역사상 중국의 판도가 최대였던 왕조로서, 현재 중국판도의 기반을 설정했다. 원(元)이 망하자 몽고민족은 몽고초원으로 물러나 현재의 몽고민족을 형성했다.
한편 거란족은 서기 916년에 요(遼)왕조를 건립하여 중국 북방을 200 여 년이나 통치했다. 이 기간에 있어, 중국 북방사회의 정치, 경제, 문화는 다 장족의 발전을 했고, 따라서 거란민족은 함께 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만들어 내는데 중요한 공헌을 했다. 요조(遼朝)가 멸망한 후에 거란족의 대다수가 한족에 녹아 들어 갔는데, 여진족과 몽고족 중에서 그들의 한 갈래가 발전-변화하여 현재의 다허르족(達斡爾族)이 되었다.
한족 및 그 조상인 화하족은 선진(先秦)시기부터 동북지구로 진입한 뒤에 장기간에 걸쳐 발전을 했는데, 청대(淸代) 중후기에 이르러서는 동북지구에서 사람수가 가장 많은 민족으로 뛰어올랐다.
간단히 본다면 동북고민족의 발전-변화의 경향은 그 수량으로 말 할 수 있는데, 시대의 변화에 따라 오르락 내리락하면서 고대의 몇 십 개가 변혁으로 말미암아 현재는 몇 개로 되어있다. 그 귀속으로부터 설명하면 한족(漢族)에 녹아 들어간 것이 가장 많고, 그 다음은 만족과 몽고족이다. 이 한가지는 중국과 그 기타지구의 고대민족의 발전-변혁 규칙과 완전히 일치한다.
역사상의 한 민족은 소실되도 그 후예마저 단절되는 것은 아니라 그네들은 마땅히 녹아 들어가 다시금 한 강대한 민족공동체를 이루고, 그래서 이 강대한 민족공동체의 문화를 더욱 높이고 사회도 거듭 발전시킨다. 이것이 한 진보적 현상이다. 역사상 동북민족의 발전과 변혁은 이런 한가지 궤적을 따라서 진행되었다. 이를 근거로 앞일을 내다볼 수 있는데, 금후 더욱 크게 거듭 많이 융합되는 다민족공동체—중화민족과 거듭 높아지는 다민족문화 (사이의 융합)—인 중화민족문화는 장차 중국민족발전을 강대한 쪽으로 기울일 것이다. 이를 한 방면에서 증명한 것이 현재 우리 중화민족의 단결과 통일인데, 이는 복잡한 역사과정과 견실한 역사기초를 거쳐 이루어진 것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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