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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용근 전 사법연수원장의 고향을 찾아서
주머니 속의 손전화가 진동을 한다. 손전화를 켜니 들려오는 손용근 전 사법연수원장님의 목소리. “폭우가 쏟아진다는데 괜찮겠습니까?” 순간 내 마음도 ‘이런 비에 어찌 가겠느냐?’ 하지만, 내 입은 “예정대로 진행하겠습니다.” ‘부처님 오신 날’에 손원장님과 함께 손원장님의 고향 전남 강진군 병영면의 수인산을 오르기로 하였는데, 하필이면 일기예보는 이 날 전국적으로 비가 오고, 특히 남부지방에는 폭우가 예상된다고 한다.
그러나 월간중앙의 원고 마감일 전에 손원장님과 다시 서로의 일정을 맞추기는 쉽지 않다. 나는 또 한 번의 하나님의 은혜를 믿어보기로 하였다. 저번 4. 30. 내장산 갈 때에도 이번처럼 폭우가 쏟아진다고 하였고 내려가는 고속도로까지 비는 계속 ‘이래도 올거냐?’며 차창을 두들겼지만, 우리가 고집스레 내장산으로 들어가니 하나님은 잠시 비 푸대를 잠가주지 않았는가?
나주에서 케이티엑스(KTX) 열차를 내리니 손원장님의 고향 후배인 김옥 사장이 차를 갖고 마중나왔다. 김사장은 전주에서 건설회사를 한다는데 손원장님이 모처럼 고향에 오신다고 하니까 전주에서 달려오셨다. 김사장의 형님이 손원장님과 둘도 없는 부랄 친구였단다. 그런데 그 형님이 1993. 7. 26. 목포공항에 내리던 아시아나 비행기가 해남 화원면 마천리 운거산에 추락할 때에 하필이면 그 비행기에 타고 계시다가 운명을 달리 하셨단다. 이런! ㅠ.ㅠ;; 김사장은 지금은 죽은 형을 대신하여 손원장님을 친형처럼 여기고 있다고...
차가 강진군 옴천면과 병영면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기알재를 넘어간다. 옴천면? 면 이름에 ‘옴’자가 들어가는 것은 처음 들어보는 것 같다. 옴천면(唵川面)의 ‘옴(唵)’은 맑은 시냇물 졸졸 흐르는 소리를 나타내거나, 범어 ‘om'을 한자로 표현한 것으로 주문이나 진언(眞言, 만트라)을 말한다고 한다. 지난 2월 네팔 카트만두의 보다나트 사원에 들렀을 때 ‘옴 마니 반메 홈’이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것을 들었는데, 그 ‘옴’이 우리나라 면 이름에 들어가 있을 줄이야? 어떻게 면 이름에 ‘唵’이 들어갔을까? 진언을 나타낸 것이라면 무언가 옴천면에 그 이름 유래가 되는 절이라든가 불교 관련 유물이 있어야 할 텐데, 옴천면에는 특별히 그런 것도 보이지 않는다. 어찌 된 것일까? 뭔가 특별한 사연이 있을 것도 같은데...
차가 고개를 넘어가는데 길에는 오직 우리 차가 내뿜는 헤드라이트 불빛만 반짝일 뿐, 지나다니는 차의 불빛은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적막하기만 한 고개는 높지는 않은데도 꽤나 길게 넘어가고 있다. 원장님이 기알재 고개 이름의 유래를 얘기해준다. 예전에 병영성에 불려가 고초를 겪고 풀려나 이 고개에 당도하면 비로소 ‘살았구나’ 하며 안도의 한숨을 쉬기에 살아 돌아왔다 하여(歸活) 귀활재라고 한 것이 기알재로 음운 변화를 일으킨 것이라고... 병영성이 민초들에겐 얼마나 두려움의 대상이었으면 고개에 이런 이름까지 붙었을까?
기알재를 내려간 차는 어둠 속에서도 성벽이 희끗희끗 하는 병영성을 밭을 격(隔)하며 지나간다. 병영면 역시 옴천면 못지않게 특이한 이름이다. 언뜻 이름만 들어도 옛날 이곳에 병영(兵營)이 있었겠다는 생각이 단박에 든다. 조선은 1417년(태종 17)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이곳에 병영을 설치하여 초대병사 마천목 장군이 지금 지나가고 있는 전라병영성을 축조하여 전라남북도와 제주도를 포함한 53주 6진을 통할하였단다. 지명에 ‘병영’이 들어가는 곳에 울산시 병영동이 또 있다. 이곳도 왜구 침입을 막기 위한 경상좌도 병마도절제사 군영이 있었기에 동네 이름이 병영동이 된 것이다. 이런 이름의 유대감으로 병영면과 병영동은 서로 자매결연을 맺었다.
8시가 넘어 와보랑께 박물관 마당으로 들어서니, 박물관장 김성우씨가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다. 차에서 내린 손원장님이 관장님과 반가운 악수를 나누고는 자신의 그림 한 점을 관장님께 선물하신다. 손원장님은 서예가 석계 김태균 선생에게 글씨를 배우시고, 허백련 선생의 손자인 직헌 허달제 화백에게 그림을 배워 이미 몇 차례 전시회도 가질 만큼 글씨와 그림에 일가견을 이루셨다.
원장님은 아침 8시에 다시 오시겠다고 하고, 어머님이 기다리고 계시는 고향 생가로 돌아가신다. 나는 처음에 원장님이 와보랑께 박물관에 가자고 하실 때에는 “이 늦은 시간에도 박물관을 하나?” 하면서, 내일은 시간이 별로 없으니 오늘 미리 박물관 구경을 하자는 알았는데, 우리가 오늘밤 몸을 누일 숙소였다. 시골의 사설 박물관이니 민박도 겸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동행한 박상문 월간중앙 사진부장과 함께 방에 짐을 부리고 박물관 구경을 하였다. 조그만 2층 건물에 들어서니 온갖 잡동사니가 다 전시되어 있다. 농기구, 옛날 책, 그림, 오래된 재봉틀, 악기, 베개, 그릇... 도저히 일일이 열거할 수가 없다. 이렇게 만물상처럼 우리의 지나간 시대의 모든 것을 전시하자니, 한마디로 딱 설명할 수가 없어서 일단 와서 보라고 하여 ‘와보랑께 박물관’으로 이름 붙인 것은 아닐까? 둘러보다보니 한 벽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1973년 원단(元旦)에 쓴 ‘國力培養’이라는 서예작품도 걸려있다. 박대통령 글씨가 어떻게 여기까지 흘러들어왔을까?
전시품중 나의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전시물 - 옛날 석탄을 때던 난로 위에는 곰보가 된 도시락이 올려져 있다. 그렇지! 나 또한 학교 다닐 때 겨울이면 이렇게 난로 위에는 같은 반 친구들의 도시락이 하나, 둘 올라갔지. 수업시간에도 구수하게 밥 익는 냄새와 반찬 냄새에 우리의 신경은 자꾸 그쪽으로 달려가, 결국 우리의 도시락은 점심시간이 되기 전에 다 비워지고 말았지. 이제는 심지가 온전히 남아 있을까 하는 석유곤로도 있다. 저 곤로도 나의 추억을 불러일으킨다. 내가 의정부 지원에서 판시 시보 생활을 할 때, 곤로를 켜는데 불이 잘 올라오지를 않아 이상하다 싶어 계속 작동을 시도하면서 머리를 곤로 가까이 숙이는 순간 불이 확 올라왔지. 그 때문에 나는 한동안 눈썹 없는 남자로 지내야 했고...
방에 들어가니 관장님이 맥주에 과일과 안주를 갖다놓으셨다. 감사한 마음으로 박부장님과 술잔을 기울이면서 오늘 하루를 접는다.
알람을 맞춰놓고 잤지만 굳이 알람이 필요 없다. 박물관 바둑이 녀석이 알람이 울리기 1시간 전부터 짖어대니 눈을 더 이상 붙이고 누워있을 수 없었던 것. 박부장님은 새벽에 천둥, 번개와 함께 많은 비가 왔다고 한다. “그랬나?” 저번에 내장산 가는 새벽에는 천둥, 번개로 3시부터 잠을 깨어 엎치락뒤치락 했는데, 어찌 오늘은 그것도 모르고 그냥 뻗어버렸을까? 밖에 나오니 다행히 비는 멈추었다. 시골의 맑은 공기를 가슴 그득히 집어넣으며 어제 둘러보았던 박물관 앞으로 오니 주변에는 전라도 사투리를 써놓은 목판이 여기저기 서있다. 와보랑께 박물관의 또 하나의 특징은 바로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를 모아놓은 것.
‘아따 구신 씨나락 까먹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궁뎅이가 킁께 새끼는 잘 났겄구먼’
‘그라고 때작때작 뭐 염빙하고 있냐’
‘아야 몬지낭께 쩌그가서 털어야’
‘고 가스나그를 우짜면 조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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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많이도 모아놓았다. 그런데 마당 저쪽 한편에는 구수한 와보랑께 박물관의 이미지와는 달리 현대의 미술작품이 있다. 한 빨간 사내가 쇠막대를 얼기설기 쳐놓은 안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것. 포르투칼의 작가 안나 마노의 ‘탈출하거나 머물거나... 그것은 당신의 선택’이라는 작품이다. “아니? 김관장님이 어떻게 서양 작가의 이런 현대적 작품까지 수집을 하셨는가?” 2010. 7. 23.부터 8. 22.까지 한 달간에 걸쳐 ‘347년만의 재회-뉴하멜 표류기’라는 제목으로 이곳에서 강진 국제 레지던시 프로그램이 펼쳐졌단다.
제주로 표류해왔던 하멜 일행이 13년간 한국에 머무는 동안 마지막 8년간을 이곳 병영면에 있었단다. 그들은 이곳을 탈출하여 일본 나가사키를 거쳐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347년 만에 새로운 하멜들(참여 작가들)이 이곳을 찾아온 것. 레지던시 프로그램이란 작가들이 한군데에 머물면서 그곳에서 얻은 영감을 그곳에서 작품으로 표현해내는 프로그램이라는데, 뉴하멜중 한분인 안나 마노는 떠나갔지만 그가 만든 작품은 여전히 이곳에 남아있는 것이다. 가만있자... ‘탈출하거나 머물거나... 그것은 당신의 선택’이라더니 저 통 안의 빨간 남자는 고민 고민하더니 저렇게 머물러 있는 것이고 지금도 저렇게 고민하고 있구나. 쯧! 쯧!
8시가 못 되어 김사장이 몰고 온 차에서 손원장님이 따뜻한 미소와 함께 내리신다. 와보랑께 박물관에서 바로 얼마 안 떨어진 곳에 손원장님이 다니시던 동병영 초등학교가 있다. 자연 발길은 그리로 향한다. 교문도 이미 떨어져 나간 문으로 들어서니 운동장 저편에는 퇴락한 교사가 나무들에 몸을 숨기고 있고, 운동장도 잡초들의 푸른색으로 덮여있다. 손원장님이 졸업하시고 이 학교도 결국 학생 수가 줄어드는 다른 시골학교와 마찬가지 운명을 겪었구나. 손원장님은 나중에 뜻 맞는 친구들과 힘을 모아 이 학교를 사고 싶다는 희망을 피력하나, 김원장님은 이미 팔려버렸다며 손원장님의 희망을 꺾어버리네.
뉴하멜이 머물던 도룡리 마을 안쪽으로도 들어가본다. 골목을 돌아가니 어느 집 앞의 안내판은 ‘호식한터’. 호랑이가 사람을 물어갔다고 하여 사람이 살지 않게 된 곳이란다. 병영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지라 전라병영이 들어섰지만, 이런 천혜의 요새지는 반대로 호랑이에 둘러싸인 형세였나? 이렇게 마을에까지 호랑이가 내려와 사람을 물어가다니... 그래서 사람들은 호랑이가 제일 무서워하는 대나무로 긴 장대를 만들어 방문 앞에 놓아두기도 하였단다.
또 하나의 골목을 돌아가니 이번에 나타나는 것은 ‘들독거리’라는 팻말과 그 옆에 놓인 큰 돌. 옛날에는 이 돌을 들어야 어른 대접을 받아 술도 얻어먹었지만, 그렇지 못하면 무시당했다고... 그리고 마을간 힘겨루기 시합에서도 이 들독을 누가 더 높이 오래 드는지를 가지고 승패를 지었단다. 힘겨루기가 있는 날이면 승패를 떠나 술자리와 즐거운 춤판이 벌어지는 한마당 축제가 벌어졌고...
파들이 물씬 자란 파밭을 지나는데 손원장님이 파밭 건너편을 가리킨다. 풍성한 빨간 꽃이 활짝 펴있다. 모란이다. 모란을 보자니 퍼뜩 강진이 낳은 시인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이 떠오른다. 예전에 김영랑 생가를 방문하였을 때 마당 한편에 ‘모란이 피기까지는’ 시비(詩碑)를 본 것 같은데... 영랑도 저런 모란꽃을 보며 시를 구상하였을까? 멀리서 봐도 모란은 정말 탐스럽게 크다. 저렇게 탐스러우니 모란은 부귀의 상징으로 불리우지.
소치 허련도 부잣집의 주문을 받아 모란 그림을 많이 그렸기에 허모란이란 별명을 얻었다고 하지. 소치 허련의 손자인 남농 허건이 바로 이곳 병영면의 병영초등학교를 3학년까지 다녔단다. 왜 여기서? 당시 병영면은 지금보다 큰 고을이라, 화가도 그림 팔아먹고 살아야겠기에 미산은 아들 남농을 데리고 이리로 이사온 것이라고...
개울가 옆의 집 담벼락에는 연작 그림이 그려져 있다. 뉴하멜인 프랑스 에스피38이 그린 ‘347년간의 유배’라는 벽화 작품. 하멜이 표류하여 탈출하기까지의 과정을 연작으로 그렸는데, 연작 그림을 필름처럼 나타내어 시간적 순서로 나아가는 것을 보이고 있다.
이제 아침밥을 먹으러 가야지. 가는 길에 손원장님이 다니신 병영중학교도 잠시 들러보았다. 바로 옆은 병영정보과학고등학교인데 원장님이 중학교 다니실 때의 학교 이름은 병영상고였단다. 원장님은 교문으로 들어가 왼쪽 화단 앞의 정진홍 선생 공덕비를 가리키신다. 중학교 다닐 때 교감 선생님이셨다는데, 교감 선생님은 손원장님이 고교 진학할 때 병영상고 갈 것을 적극 권유하였다고 한다. 병영상고를 나와 한국은행에 수석으로 들어가면 학교의 명예를 드높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신 것이라는데, 병영교회의 김성래 장로님이 극구 반대하여 광주일고로 진학하였다는 것. 손원장님은 그 때 병영상고로 진학하였더라면 전혀 다른 길을 걸었을 거라며 잠시 그 때의 일을 회상하시는 듯하다.
수인관이라는 식당 앞에 내렸다. 손원장님의 초등학교 동창이 하는 식당이라는데, 원래 아침은 하지 않지만 원장님을 위해서 특별히 준비하였다. 식탁 위에 올라있는 막걸리는 설성 막걸리. 설성(雪城)은 병영성을 뜻하는 것이란다. 왜 병영성을 눈의 성이라고 불렀던 것일까? 마장군이 처음에 성을 쌓을 때 꿈속에서 계시를 받아 눈의 자국을 따라 성을 쌓았기에 설성이라고도 불리고 있다는 것. 그 설성이 이곳 막걸리 상표에도 등장하게 되었구나.
서울 성곽에도 설성이라는 별명이 있지. 성벽을 쌓을 때 인왕산 선바위를 성 안에 둘 것인가 바깥에 둘 것인가를 두고 무학대사와 정도전이 다툴 때에 이성계의 꿈에 나타난 눈이 녹는 경계를 따라서 성벽을 쌓도록 하여 선바위가 성벽 밖으로 밀려나게 되었다지. 이 때문에 무학대사는 앞으로 중들은 선비들 책보따리나 짊어지고 다니는 신세가 된다고 한탄하였다고 하고...
식사를 마치고 이제 수인산으로 가면서 한골목을 통과하여 간다. 골목이 크고 길다하여 한골목이라고 하였다는데, 지금도 차가 다닐 수 있을 정도이니 그 당시로서는 큰 골목이라 하겠고, 이렇게 차로 이동하는 데도 금방 골목 끝이 보이지 않으니 긴 골목이라는 뜻도 같이 하여 충분히 한골목이라 부를 만하겠다.
양옆으로는 예전 담장이 이어지는데, 우리네 전통 담장과는 조금 다르다. 담장을 이루는 납작한 돌들은 한층은 오른쪽으로 15도 정도 기울어 촘촘히 나아가고, 그 위와 아래층은 다시 반대로 15도 정도 기울어 촘촘히 나아가는 게, 언뜻 석기 시대의 빗살무늬 토기의 무늬를 생각하게 한다. 여기서는 이를 ‘하멜식 담쌓기’라고 부른단다. 하멜이 이곳에 머무는 동안 우리 군에 서양식 무기 제조법만 가르쳐 준 것이 아니라, 자기네식 담쌓기 방법도 전수하여 ‘하멜식 담쌓기’로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는 것이란다. 예전에는 병영의 군관들이 수인산성을 순시하러 오갈 때에 한골목을 통행하여 한골목 안 사람들은 담장을 높이 쌓았다고 하는데, 병영이 없어지면서 담장도 내려갔다.
김옥 사장은 수인산 밑자락 홈골제 제방 둑을 비스듬하게 타고 올라가 저수지를 타고 가다가 멈춰 선다. 우리는 산을 넘어 가기로 했기에 김사장은 반대편으로 가 우리를 기다리기로 했고, 여기서부터는 손원장님의 중학동창 김용남 선생과 동행한다. 홈골제는 홈골에 있는 저수지라 홈골제라 부르는 모양. 홈골제를 지나 홈골로 더 들어가 등산로가 시작되는 곳에 수인사라는 조그만 절이 있다. 절로 다가가는데 택시가 손님을 내려주고 돌아가면 조금 있다가 또 다른 택시가 온다. 그렇지. 오늘이 부처님 오신 날이지.
절 안으로 들어가본다. 하멜 보고서에는 수인사의 스님들이 친절하게 대해주어 절을 자주 찾았다는 기록이 있다는데, 그 수인사가 여기인가? 그러나 건물은 예전에 병화(兵禍)로 다 없어졌는지 지금 보이는 건물은 요즈음 건물이다. 극락보전의 편액 글씨는 일붕 서경보 선생의 글씨다. 일붕이라면 1988년 일붕선교종을 창시하고, 1992년에 세계법왕청을 설립하여 초대법왕에 오른 분 아닌가? 그럼 여기 절도 일붕선교종 소속 절인 모양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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