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7월 10일(주일)
고린도후서 2:12-17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내는 성도
바울이 에베소를 떠나 드로아에 이르자, 복음의 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마음은 편치 않았습니다. 바울은 이미 고린도 교회에 ‘눈물로 쓴 편지(4절)’을 보냈습니다. 바울은 형제 디도를 통해 고린도 교회의 소식을 듣기 원했습니다. 이를 위해 바울은 드로아 성도들과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건너갔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보낸 네 번째 편지(고린도후서)에서 이같이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자신의 사랑을 나타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의 약함을 성도들에게 진실하게 드러내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향한 자신의 사랑이 진실했음을 그들이 알기 원했습니다.
이런 면에서, 정말 바울은 가식이 없는 목회자였고, 목회의 기술(테크닉)보다 진솔하게 자신의 삶을 드러내는 목회자였습니다. 오늘날에는 이러한 목회자가 오히려 인기가 없을지 모르지만, 목회자 바울은 진실과 가식 없는 사랑으로 성도들을 감화시켰습니다.
바울은 우리로 항상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14절). 여기서“승리하다.”는 헬라어 동사 ‘쓰리암뷰오’는 로마의 개선 행진과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로마의 장군은 머리에 월계관을 쓰고 화려하게 장식된 마차 위에서 로마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습니다.
장군이 탄 마차 앞에는 전쟁에서 탈취한 전리품들이 전시되고, 나팔수들은 나팔을 불었으며, 향료를 뿌리는 사람들은 향기를 진동시키며 그 뒤를 따랐습니다. 대열의 맨 뒤에는 전쟁 포로들이 쇠사슬에 매여 끌려 왔고, 그들 대부분은 행렬이 끝난 뒤에 로마의 신들에게 제물로 바쳐졌습니다(생명의 삶 플러스, 2022년 7월호, 94).
아마도 바울은 자신의 모습을 마차 위에서 영광을 누리는 개선장군의 모습이 아니라, 쇠사슬에 매여 끌려가는 전쟁포로의 모습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바울은 일관되게 자신의 강함을 주장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약함을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바울에게 승리를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은 연약했던 바울을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이기게 하셨습니다.
바울이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고백했을 때, “향기”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향기 나는 제물을 연상시킵니다. 바울은 자신을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로 드렸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 향기로운 제물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제물이 죽어 제단 위에서 불살라져야 했습니다(레 1:13).
그러나 고린도 교회 안에 있던 바울의 반대자들은 자신을 전쟁에서 승리한 개선장군으로 여겼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였는데, 이는 포도주에 물을 타거나, 거짓 저울을 사용해 물건을 판매하는 상인과도 같았습니다(위의 책, 95).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 당시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그러한 유혹에 넘어가는 설교자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대중의 인기에 편승하며, 성공 지향적인 목회철학을 추구하지만 정작 하나님의 말씀이 혼잡하게 전해지는 것을 가장 두려워해야 합니다.
이러한 유혹을 이기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순전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말씀을 전할 때 하나님 앞에서 말해야 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말해야 합니다.
우리가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아 말씀을 전할 때, 그 말씀은 어떤 사람에게는 사망에 이르는 냄새가 될 것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생명에 이르는 냄새가 될 것입니다. 과연 누가 이런 일들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서, 저는 목양자로서 과연 가식 없는 사랑으로 성도들을 사랑하고 있는지를 점검해 봅니다. 그리고 제가 설교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않고, 순전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있는지 점검해 봅니다.
제가 말씀 묵상을 통해 순전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 원합니다. 그리고 제가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