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6년 미국 대선은 미국 대선 역사상 유명한 선거 중 하나일 것입니다. 득표수도 박빙이었지만 당락을 결정짓는 선거인단의 숫자가 딱 한 명 차이나는 초박빙 접전이었기 때문입니다. 1876년은 링컨-존슨-그랜트 3명의 대통령의 재임기를 지난 시기로 전임 그랜트 대통령은 남북전쟁의 영웅으로 부통령으로서 대통령을 승계한 전전대 존슨이 인기가 없어 그 대신 출마한 대통령이었는데 전쟁영웅이었던 만큼 인기도 많았고 당시 야당인 민주당이 지리멸렬한 관계로 쉽게 대통령이 되었지만 그 다음이 문제였습니다. 본인은 연루되지 않았지만 본인이 임명한 인사들이 죄다 문제를 일으키는 바람에 그랜트 행정부는 미국 역사상 가장 부패한 행정부 중 하나였고 이러한 부패에 질린 대중들은 민주당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화당은 청렴한 정치인인 리더퍼드 B. 헤이스를 대통령 후보로 내세우게 되었고 민주당은 새뮤얼 J. 틸던을 내세워 두 후보, 두 당은 격돌하게 됩니다. 민주당 입장에서는 뷰캐넌 이래 16년만의 여당 지위를 얻어볼 기회였기에 정말 열성적으로 선거에 임해서 공화당이 7번이나 투표하고서야 후보를 정한데 비해 민주당은 단 두 번만에 틸던을 후보로 세울 정도였습니다.
문제는 대선에서 두 당의 공약 차이가 재건 정책 종료와 공무원 개혁 정도다 보니 별 차이가 없었고 두 당은 서로 한방씩 찌를 수단이 있는 반면 그렇다고 상대당을 압도할 수준은 되지 못했습니다. 공화당은 민주당을 남북전쟁을 초래한 원흉이라 공격했고 민주당은 공화당을 부패정당이라고 공격해서 이 선거는 전형적인 네거티브 전략전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렇게 해서 벌어진 투표 결과 틸던이 과반 득표에 성공하게 됩니다. 이제 선거인단만 과반이 넘으면 완벽한 승리였는데 선거인단에서도 184:166으로 틸던이 18표 앞서고 있었습니다만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남부주였던 텍사스, 미시시피, 버지니아 3개주에서 선거인단이 결정되지 않은 것으로 여기의 표는 총 19표, 그리고 미국의 유닛 룰 시스템에 따라 1주 1당이었기에 3개 지역에서 모두 승리하면 공화당의 승리가 되고 한 지역에서라도 민주당이 이기면 민주당의 승리가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문제는 3개 지역의 개표에서 논란이 벌어졌다는 것입니다. 개표-재개표-재검표를 했는데 모두 결과가 다르게 나와서 문제가 되었습니다. 당시 개표방식은 수개표라 오차가 나올 순 있어도 결과까지 다르게 나와버리고 이게 수십번이나 반복되며 결론이 안 나니 서로 자기가 이겼다고 주장하였고 이를 해결하고자 총 15명의 특별개표위원회가 만들어졌고 이중 공화당 소속이 7명 민주당 소속이 7명이었고 나머지 1명이 될 데이비스은 당적이 없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민주당은 데이비스를 상원의원으로 선출해 민주당 8 공화당 7의 상황으로 만들려고 했으나 데이비스는 상원의원이 되는 대신 그냥 특위에서 빠지기로 결정했고 남은 한 자리를 공화당이 상원 다수당 자격으로 넣게 되면서 공화당 8 민주당 7의 상황이 되어 공화당의 유리한 주장이 받아들여져 185:184로 공화당의 승리로 선언하게 됩니다.
하지만 워낙에 논란이 많었던 대선이었던지라 불복하게 되는 이들이 나오게 되는데 바로 남부주였습니다. 남북전쟁 당시 남부연합에 가맹한 주들은 남북전쟁 후 그 징벌로서 군정을 받게 되었고 남부주 출신들은 연방정부에 대한 충성맹세가 없으면 참정권도 제한되는 지경이었습니다.
그나마 이 때에 남부 3개주(앞서 말한 주들)이 연방정부와의 타협으로 제한없는 참정권을 받은 상태였고 공직 진출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이 와중에 전통적으로 친민주당 성향이었던 남부에서는 대통령 자리까지 도둑맞았다고 생각하니까 폭동을 일으키겠다며 협박하였습니다.
문제의 결정조차 새 대통령이 취임식 이틀 전에 이뤄졌는데 폭동까지 터져버리면 대통령 취임식이 제때 일어나지 못할 판이라 결국 공화당과 민주당은 헤이스를 대통령으로 인정하는 대신 군정 종료, 민주당에게 각료 배분(엽관제 얘기 참조), 남부인의 공직 임명 가능, 재선 불출마라는 대가를 주는 것으로 타협을 마무리 합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저 역사의 헤프닝 정도로 여길 수 있겠지만 그 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렇지 못합니다. 남북전쟁의 근본적 원인은 흑인노예 해방 문제였고 비록 전쟁은 북부의 승리가 끝나고 흑인노예들은 해방되었지만 남부인들은 여전히 흑인을 열등하다 여기며 그들의 인권을 무시하였고 군정은 남부인에 대한 징벌이기도 했지만 남부인들의 폭주를 막아주는 억제장치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억제장치가 사라지자 남부인들은 흑인들을 마음껏 유린하기 시작하였고 흑인들이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들은 1950~1960년대의 흑인민권운동이 일어나기 전까지 수십년 동안 탄압받게 됩니다. 흑인들 입장에서는 정말 억울한 것이 흑인들은 링컨을 이유로 공화당의 편을 들었기 때문에 공화당이 당선되는 대가로 자신들은 버림받은 꼴이었기 때문입니다.
현대의 추정으로 만일 흑인들이 제대로 된 투표를 할 수 있었다면 3개 주 중에 1개 주에서는 민주당이 이겼을 것이지만 다른 민주당이 이긴 주에서 흑인표로 인해 공화당이 이겼을 것이기에 득표수든 선거인단이든 공화당이 이기는데는 문제가 없었을 것이로 여기고 있습니다.(그럼에도 문제가 생긴 이유는 남부 백인들이 흑인이 투표를 하는걸 방해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지금도 간간이 벌어지는거라서 어느정도는 현재진행형입니다.) 이 때문인지 이 사건은 1876년의 타협이라 하여 미국 3대 부패한 거래 중 하나로 꼽히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