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7대 대통령은 앤드류 잭슨으로 그는 이전까지 모든 미국 대통령들과는 다른 인물이었습니다. 이전까지 미국은 형식적으로는 민주공화정 국가였지만 실질적으로는 부유한 소수의 가문들의 뜻에 좌우되는 과두정 국가에 더 가까웠으며 미국의 대통령들 또한 잭슨 이전까지는 모두 부유층 가문 출신이었습니다. 당연히 학연, 혈연, 지연 모두 빵빵한 사람들 뿐으로 5대 대통령인 제임스 먼로를 제외한 나머지 5명의 대통령들은 서로 연이 아주 깊은 인물들이었습니다.(1~4대는 같은 건국의 아버지들, 6대는 2대 대통령 아들) 그러나 사상 최초로 이 틀을 깬 인물이 잭슨이었습니다.
잭슨은 앞서 말한 대통령들과는 달리 13개 식민지 지역보다 (그 당시 기준으로) 서쪽의 테네시 주에서 태어났으며 주류인 앵글로색슨계가 아닌 스코트랜드-아일랜드계에 정규교육은 못 받았고 가난한 흙수저였으며 부모를 비롯한 모든 가족이 독립전쟁에서 사망해 14살에 고아가 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독학하여 변호사가 되고 여러 자리를 전전하다가 미영전쟁에서 가장 치열했던 뉴올리언스 전투를 지휘하였고 이 전투를 대승으로 이끌어 전국구 스타가 되어 1824년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던 집안 출신이면서 덜컥 대선후보가 되는 쾌거를 이룩하고 자신의 당 민주당을 이끌고 정적이었던 존 퀸시 애덤스(2대 대통령 존 애덤스 아들)에게 패배합니다.
그러나 잭슨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도전해 1828년, 다시 도전하는데 마침 이 때의 선거는 '백인 부유층 남성'에게만 선거권이 주어졌던 것에서 '백인 남성 모두'에게로 투표권이 확대되어 서민표를 긁어모을 수 있는 잭슨이 유리했고 마침내 존 퀸시 애덤스를 꺾고 대통령에 당선되어 미국 역사상 최초로 서민출신 대통령으로 등극합니다. 잭슨 이후 부유층 출신이 줄어드는데 이 역시도 잭슨의 영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잭슨 다음 8대 대통령은 마틴 밴 뷰런으로 잭슨과 마찬가지로 민주당이자 그의 참모 겸 측근으로 잭슨과는 달리 동부에서 태어났지만 그 또한 선술집 집안에서 태어나 별볼것 없는 출신이라 비슷한 입장이었던 잭슨을 지지하게 된 사람으로 잭슨처럼 독학 후 변호사가 된 사람으로서 잭슨 재임기에는 부통령이었고 그 뒤 잭슨의 지지로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뷰런이 정치사에 남긴 족적은 '양당정치'와 '계파정치'의 시조라는 것으로 두 거대 양당이 대결하고 당 내에서는 여러 정치계파(혹은 정치파벌)가 대립, 공조하는 현 정치시스템은 뷰런이 그 시작이었으며 한국의 보수정당 VS 민주당의 양당정치, 친윤계, 친이재명계, 친이낙연계 같은 명칭도 계파 같은 것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즉 잭슨은 서민 출신도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걸 보여주었다면 뷰런은 어떻게 대통령에 당선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 9대 대통령 윌리엄 헨리 해리슨은 대통령 재임기간이 1개월밖에 되지 않아 대통령으로서의 업적은 전무하지만 그 또한 정치사에 큰 족적을 남겼습니다. 해리슨은 위의 두 인물보다는 1~6대 대통령과 비슷하면서도 잭슨이 섞인 인물로 출신은 1~6대 대통령과 같은 부유층 출신이지만 그가 대통령이 되게 만든 것은 잭슨과 마찬가지로 전쟁영웅으로서의 명성 때문이었습니다.
해리슨은 잭슨과 비슷한 궤적을 달렸지만 순서가 반대로 주의원이었다 전쟁영웅이 된 잭슨과 달리 해리슨은 전쟁영웅이 되어 정계에 입문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뷰런이 대선에 나갈 때 경쟁했던 인물로 이 때는 잭슨이 워낙 인기가 많아 후임자인 뷰런이 당선되는데 문제가 없었지만 통치에 큰 문제없던 잭슨과는 달리 뷰런은 재임 중 지독한 경제불황에 고생해야 해서 인기가 떨어져 해리슨에게도 기회가 찾아옵니다. 이 때 해리슨은 뷰런을 이기기 위해서 온갖 수를 생각해냅니다.
잭슨 이후 당선을 위해서는 소수 부유층 표가 아닌 다수 서민표가 더 중요해졌으나 해리슨은 부유층 출신으로 이미지만 놓고 보면 뷰런에 경쟁할 바가 못 되었습니다. 그래서 해리슨은 '거친 사과술과 통나무집' 이라는 표어를 내걸었는데 이는 당시 서민들의 즐겨찾는 사과술과 대표적인 집인 통나무집을 내걸어 자신이 비록 태어나기는 부유층에서 태어났으나 서민들의 동반자임을 어필했고 전쟁영웅으로서 인기몰이했던 잭슨을 본받아 '티퍼카누와 타일로도' 즉 자신이 승리를 거둔 티퍼카누 전투에서의 활약을 강조하는 구호를 내걸었습니다. 현대로 치면 대통령 후보들이 선거철이 되면 시장 돌아다니며 유세하고 시장 음식 먹방하는 것과 비슷한 일인데 해리슨이 시초인 셈입니다.
마지막으로 10대 대통령인 존 타일러는 조지 워싱턴이 역사상 최초의 대통령, 역사상 최초로 재선 성공 대통령이라면 타일러는 역사상 최초로 승계받은 대통령입니다. 해리슨의 갑작스런 죽음은 미국을 당황하게 만든 것이었습니다. 해리슨 이전까지 모든 대통령은 임기를 채우고 내려왔고 해리슨처럼 임기중 죽는 사례가 없었기에 미국은 한 가지 고민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미국은 이러한 상황에 대비해 대통령이 갑자기 유고 시 대통령의 모든 권한은 부통령에게 이양된다고 정해놓았고 타일러는 해리슨의 부통령이었기에 죽은 해리슨의 뒤를 이어 대통령의 권한을 이양받아야 했습니다. 문제는 '권한을 이양한다'가 매우 애매한 문구였던 겁니다.
이 이양이 단순 업무만을 말하는 것이라면 타일러는 부통령이라는 직함을 유지한 채 대통령의 업무를 이행해야 했지만 단순히 업무만이 아닌 직함까지 이양받는 것이라고 해석한다면 타일러는 해리슨이 가졌던 업무 뿐 아니라 대통령이라는 직함까지 고스란히 승계받는 것, 다시 말해 대통령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아무튼 이러한 문제 때문에 대통령이 죽고 혼자 남은 타일러는 당시 백악관이 아닌 고향에 잠시 내려가 있었기에 대통령이 죽었다는 소식에 부랴부랴 워싱턴 D,C로 돌아왔는데 이 때 내각인사들은 그를 '부통령'이라 호칭하였고 내각은 논의 끝에 타일러를 '대통령 권한대행 부통령'으로 대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이 때 타일러는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오늘부로 '권한대행 타일러'나 '부통령 타일러'라는 이름으로 내게 온 문서는 절대 열어보지 않을 것이오!"
이 말과 함께 타일러는 그대로 대통령이 되었고 대통령으로서 첫 국무회의를 열게 되었는데 이 때 내각은 자기들이 정한 '권한대행 부통령'이 묵살당한 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는데 이에 그들을 대표해 국무장관이 전임 해리슨 대통령은 중요한 정책을 다수결로 결정하셨다는, 자기 멋대로 대통령이 된 타일러를 디스하는 말을 했는데 이 때 타일러는 말했습니다.
"죄송합니다만 여러분, 저는 스스로 공히 능력을 증명하신 여러분 같은 정치인들이 내각에 계셔서 기쁘고, 또 기꺼이 여러분의 조언과 충고를 듣고자 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저는 제가 무엇을 할지 말지에 대해서 이래라저래라 지시받는 데 동의할 수 없습니다. 나는 대통령으로서 행정부를 통솔할 권한이 있습니다. 이곳에서 나오는 조치들을 이행하는 데 있어 여러분의 적극적 협조를 바랍니다. 이러한 점에 여러분이 동의하시는 한, 저는 기쁜 마음으로 여러분과 일하고자 할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사직서를 수리하는 바입니다."
요약하면 니들이 뭐라하든 난 대통령이고 내 뜻에 동의하지 않으면 모가지 날아갈 줄 알아라 정도가 되겠는데 이렇게 타일러가 대통령이 죽거나/탄핵당하거나/중병을 앓거나 같은 상황이 벌어지면 부통령이 대통령이 된다.는 원칙을 세웠고 이후로도 이에 따라 대통령이 임기 중 죽으면 부통령이 승계했고 이 때문에 당시까지만 해도 잉여나 다름없던 부통령이 중요한 위치에 서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한편으로 부통령으로서 대통령직을 승계한 만큼 재임중에 부통령은 없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일은 간접적으로 한국의 4.19 혁명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어쨌든 대통령이 임기 중 일이 생기면 부통령이 승계하게 되는 만큼 대통령과 부통령이 모두 있던 1공 시절에는 이 원칙도 함께 수입했습니다. 그런데 미국과는 달리 대통령 선거와 부통령 선거가 분리된 까닭에 대통령은 여당 출신인데 부통령은 야당 출신이 나올 수 있는 환경이었습니다.
그리고 4.19 혁명을 촉발한 3.15 부정선거 당시 여당 자유당 대통령인 이승만은 85세 노인이라 지금 기준으로도 언제 죽어도 모를 나이였던 반면 하필 당시 부통령은 야당 민주당의 장면이었고 그는이승만보다는 나이가 적었기 때문에 1960년 대선에서 만일 또 장면이 재선한다면 이승만의 재선과는 상관없이 임기 중 이승만이 죽는다면 정권이 민주당에게 넘어갈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자유당은 3.15 부정선거를 저지른 것으로 실제로 이 때의 부정선거에서 대통령 후보는 이승만밖에 없어(민주당 후보 조병옥은 선거 직전 병사) 부정을 저지르든 말든 당선 확정이었지만 부통령은 1956년 선거에서 후보로 나왔던 이기붕이 장면에게 패배한지라 부정선거라도 저지르지 않는다면 낙선 가능성을 높게 점쳐볼 수 있는 상태였습니다. 즉 '부통령이 대통령을 승계한다'는 원칙, 대통령과 부통령의 소속 당이 다른 이유가 3.15 부정선거, 나아가 4,19 혁명을 촉발하게 된 원인이었습니다.(정치적으론)
첫댓글 잭슨: 최초의 서민대통령
뷰런: 양당정치와 계파정치를 연 대통령
해리슨: 이미지 정치의 시작
타일러: 최초의 대통령직 승계 부통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