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詩가 깃든 삶, 차력사借力師/ 유홍준(1962∼)
돌을 주면
돌을
깼다
쇠를 주면 쇠를 깼다
울면서 깼다 울면서 깼다
소리치면서 깼다
휘발유를 주면 휘발유를
삼켰다
숟가락을 주면 숟가락을 삼켰다
나는 이 세상에 깨러 온 사람,
조일 수 있을 만큼 허리띠를 졸라맸다
사랑도 깼다
사람도 깼다
돌 많은 강가에 나가 나는
깨고
또 깼다
얼마 전에 북한군이 차력을 선보였다는 뉴스가 있었다. 강하다는 걸 보여주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맞다. 차력은 놀랍고, 차력사는 강하다. 요즘에 차력은 무예보다는 묘기에 가깝지만 그래도 힘이 센 사람만이 행할 수 있다. 이런 것은 강한 자의 차력, 그리고 소수의 차력이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약하디 약한 차력사도 있을까. 소수가 아닌 다수가 하는 차력도 있을까. 나는 그런 것이 없길 바랐지만 시는 있다고 말한다. 유홍준의 ‘차력사’에 나와 있다. 이 차력사는 돌을 즐겁게 깨지 않는다. 그는 괴롭게 깬다. 누군가가 돌을 주니까, 깨라고 하니까 깬다. 속으로는 울면서 울면서 깬다. 이 세상에 사랑을 하러 왔으면 참 좋았을 텐데, 차력사는 “이 세상에 깨러 온 사람”이 되어 버렸다. 이상하게도 낯설지 않다. 이 차력사는 바로 우리와 비슷하다. 여기에는 날마다 애쓰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초상이 담겨 있다. 차력이란 아슬아슬한 단어다. 힘을 빌려온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원래의 내 힘으로 하는 게 아니라 남의 힘, 약의 힘까지 다 끌어다가 단련하는 것이 차력이다. 그냥 내 힘만 가지고 살면 좋겠는데 요즘 세상이 어디 그런가. 억지로 힘을 더 모아 돌도 깨고 쇠도 깨야 할 정도로 치열하다. 차력사의 고단함이 참 가련하다. 돌 많은 강가에 사는 우리들 차력사는 얼마나 많은 돌을 깨고 또 깨야 할까.
✺ 시인동네 시인선 127, 유홍준 시집 『너의 이름을 모른다는 건 축복』
✵ 책소개
시인동네 시인선 127권. 1998년 《시와반시》로 등단해 작품 활동을 시작한 유홍준 시인이 세 번째 시집 이후 9년 만에 신작 시집 『너의 이름을 모르는 건 축복』으로 돌아왔다.
“해체시와 민중시 사이에 새로운 길 하나를 내고 있다”는 호평으로 주목 받았던 첫 시집부터 “직접”의 시인을 자처하며 삶 자체로서의 시학을 선보였던 세 번째 시집까지, 유홍준 시인이 그려낸 삶의 불모성과 비극성은 우리의 감각에 강렬한 통증을 심어주었다. 네 번째 시집 또한 그 연장선에 있으면서 조금 더 넓은 보폭으로 한 걸음 나아간다.
시인은 시인의 말을 통해 백정의 마을 섭천에 와 많은 것이 줄고 더 또렷해진 건 눈빛이라고 밝힌다. 우리는 이 사실을 모든 시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시인은 본질이 아닌 것을 하나하나 소거해 마침내 “그 사람이 맞추어놓은 유골”이, “무덤 위에 올라가 사람의 마을을 내려다보는 무덤”이, 매서운 눈빛이 되었고, 시집은 그 유골이, 무덤이, 눈빛이 감각한 세계에 다름 아니다. 이 근원적이고도 엄중한 직관의 방식으로 시인의 시 세계는 다른 차원으로 확장되고 있다.
해설을 쓴 고봉준 평론가는 “갈등과 불화의 장면들은 이번 시집에서 확연히 줄었다. 대신 그 자리를 일상에 대한 성찰, 한 걸음 물러선 자리에서 대상을 응시하는 시선의 여유가 채우고 있다”고 적시한다. 그의 신작 시집을 오랫동안 기다려온 독자들은 그의 시 전편을 통해 “시적 대상 앞에서 그 낯선 세계의 입구를 찾고” 있는 시인의 형형한 눈빛을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 책속에서
“지평선 위에 비가 내린다
문자로 새기지 못하는 시절의 눈물을 대신 울며
첨벙첨벙 젖은 알몸을 드러낸 채 간다
나는 지평선에 잡아먹히는 한 마리
짐승…… 어디까지 갈래
어디까지 가서 죽을래?
강물을 삼킨 지평선이 양미간을 조이며 묻는다
낡아빠진 충고와 똑같은 질문은 싫어!
있는 힘을 다해 나는 지평선을 밀어버린다
―「지평선」 전문”
“개오동나무 꽃이 피어 있었다
죽기 살기로 꽃을 피워도 아무도 봐주지 않는 꽃이 피어 있었다
천령 고개 아래 노인은 그 나무 아래 누런 소를 매어놓고 있 었다
일평생 매여 있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안 태어나도 될 걸 태어난 사람이 살고 있었다
육손이가 살고 있었다
언청이가 살고 있었다
그 고개 밑에 불구를 자식으로 둔 애비 에미가 살고 있었다
그 자식한테 두들겨 맞으며 사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아무도 봐주지 않는 개오동나무 꽃이
그 고개 아래
안 피어도 될 걸 피어 있었다
―「천령」 전문”
“당신의 집은
무덤과 가깝습니까
요즘은 무슨 약을 먹고 계십니까
무덤에서 무덤으로
산책을 하고 있습니까
저도 웅크리면 무덤, 무덤이 됩니까
무덤 위에 올라가 망(望)을 보았습니까
제상(祭床) 위에 밥을 차려놓고
먹습니까
저는 글을 쓰면 비문(碑文)만 씁니다
저는 글을 읽으면 축문(祝文)만 읽습니다
짐승을 수도 없이 죽인 사람의 눈빛, 그 눈빛으로 읽습니다
무덤 파헤치고
유골 수습하는 사람의 손길은 조심스럽습니다
그는 잘 꿰맞추는 사람이지요
그는 살 없이,
내장 없이, 눈 없이
사람을 완성하는 사람이지요
그는 무덤 속 유골을 끄집어내어 맞추는 사람입니다
저는 그 사람이 맞추어놓은 유골
유골입니다
―「유골」 전문”
✵ 시인의 말
제지공장을 지나 정신병원을 지나 북천을 지나
백정의 마을 섭천에 와 있다.
말수도 줄고, 웃음도 줄고, 술도 줄고, 시도 줄었다.
더욱 더 또렷해진 건
내 무서운
눈빛뿐,
2020년 5월
유홍준
✵ 저자 소개
◦ 유흥준 시인은 1962년 경남 산청 출생. 1998년 《시와 반시》로 등단. 시집 『喪家에 모인 구두들』 『나는 웃는다』 『저녁의 슬하』『너의 이름을 모른다는 건 축복』, 시선집 『북천-까마귀』. 한국시인협회 젊은시인상, 시작문학상, 이형기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청마문학상 등 수상.
✵ 목차
◦ 시인의 말
◦ 제1부 지평선 13/차력사 14/잉어 16/대나무 꼭대기에 앉은 새 17/유골 18/천령 20/살구 21/혈거 22/눈빛 24/토막 난 나는, 돌아다닌다 26/샐비어 28/백미러 29/코끼리 타고 부곡하와이 30/석등 32/천도 34
◦ 제2부 손 37/참새 38/조무래기 박새 떼 39/으아리 40/물밥 42/옥천사 흰 눈, 43/내 옛집 지붕은 화관을 쓰고 44/이마 위의 주름을 들여다봄 46/모란 48/산청—당나귀 49/피가 나면 피가 멎을 때까지 50/무덤 52/싸리나무 설법 53/하얀 면장갑 54/벌레의 눈 56/산청—세한도 57/판서(板書 ) 58
◦ 제3부 할미꽃 61/전라도미용실 62/주전자처럼 생긴 새 63/우명(牛鳴) 64/누치 68/미력 69/테이프는 힘이 세다 70/신발 태우는 노인 72/용접공의 눈 73/다족류 74/십자드라이버에 관한 보고서 76/그라목손 78/고령 79/치킨 조립공 80/신발을 물고 달리는 개 82/창틀 밑 하얀 운동화 84/외팔이 86
◦ 제4부 전원 89/죽밥 90/꼬마전구꽃 필 무렵 92/哭의 리듬 94/운동화의 혓바닥 96/저녁의 연속극 97/인월(引月) 98/신발 베고 자는 사람 100/고촌 102/중국집 밥그릇 104/정직하다는 것은 105/궁유 106/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꽃 108/산청의 봄 110/사흘 동안 111/반달 112
◦ 해설 죽음의문장으로쓴삶의비망록 113/고봉준(문학평론가)
[참고문헌 및 자료출처: 동아일보 2021년 10월 16일(토), 〈詩가 깃든 삶, 나민애(문학평론가) 〉, 《시인동네 시인선 127, 유홍준 시집 『너의 이름을 모른다는 건 축복』》/ 생태사진과 글: 이영일 ∙ 고앵자, 생명과학 사진작가 ∙ 채널A 정책사회부 스마트리포터 yil2078@hanmail.net]
첫댓글 고봉산 정현욱 님
괴짜시인이라면 좀 이상하지만 아무턴 특별한 이미지를 풍기는 시인 같네요
자신만이 가진 정신적 정서적 차력을 가차없이 시로 갈겨 쓰고 읽고싶으면 읽고 싫으면 안읽어도 좋다는 배짱을 가진 시인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