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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19일 연중 제28주간 목요일
제1독서 : 로마 3,21-30ㄱ
복 음 : 루카 11,47-54
그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47 “너희는 불행하여라! 바로 너희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너희가 만들기 때문이다.
48 이렇게 너희 조상들은 예언자들을 죽이고 너희는 그들의 무덤을 만들고 있으니,
조상들이 저지른 소행을 너희가 증언하고 또 동조하는 것이다.
49 그래서 하느님의 지혜도, ‘내가 예언자들과 사도들을 그들에게 보낼 터인데,
그들은 이들 가운데에서 더러는 죽이고 더러는 박해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50 그러니 세상 창조 이래 쏟아진 모든 예언자의 피에 대한 책임을 이 세대가 져야 할 것이다.
51 아벨의 피부터, 제단과 성소 사이에서 죽어 간 즈카르야의 피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52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교사들아!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리고서,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
53 예수님께서 그 집을 나오시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독한 앙심을 품고 많은 질문으로 그분을 몰아대기 시작하였다.
54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그분을 옭아매려고 노렸던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예전에 어느 가정을 방문했던 적이 있습니다.
제가 워낙 책을 좋아해서인지 습관처럼 방문한 집의 책장을 주의 깊게 봅니다.
이 집의 책장에는 대부분 의학서적, 그리고 건강에 관한 책이 가득했습니다.
의료 관련 일을 하는 사람이 가족 중에 있나 싶었습니다.
그래서 “자녀가 의료 관련 일을 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아뇨. 제 아내가 암 환자거든요. 그러다 보니 이런 책만 보게 됩니다.”
아내의 건강을 생각하면서, 의료 관련 서적과 건강에 관한 책들을 계속 읽었던 것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아내의 병을 알려는 그 형제님의 모습에서 큰 감명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언젠가 이런 말을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사랑한다는 건 그에 대해 알고 싶다는 것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아내의 병을 더 알고 싶었던 것이고,
사랑하기 때문에 건강이 좋아지는 음식이나 운동 등을 알고 싶었던 것입니다.
만약 사랑하지 않는다면 어떠할까요? ‘왜 나 힘들게 아픈 거야?’라면서 짜증만 낼 것입니다.
아내의 고통을 알려고 하기보다는 피하려고 할 것입니다.
아내의 고통보다 자기 고통이 더 크다고 착각합니다.
문제는 아픈 아내에게만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향해서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는 당시 종교 지도자들을 향해서
“불행하여라.”라면서 따끔한 회초리를 날리십니다. 그들의 위선과 교만을 꾸짖는 것입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을 비롯한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유다 사회에서 분명히 존경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누구도 그들에게 쓴소리를 내뱉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말과 행동은 모두 하느님의 말씀이고 하느님의 뜻이라고 그냥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이런 종교 지도자들을 향해
“불행하여라.”라면서 불행 선언의 주인공이라고 하십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런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지요. 오히려 앙심을 품고 예수님을 없애려고 모의합니다.
주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셨던 ‘사랑’을 받아들였다면 더 알려고 노력했을 것입니다.
그 사랑의 대상인 이웃을 바라면서 그 이웃을 알려고 노력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위선과 교만이 가득했습니다.
그 위선과 교만으로 인해 사랑을 보지 않았고, 사랑의 대상을 알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그에 대해 알고 싶다는 것’이라는 점을 기억하면서,
좀 더 알려고 노력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자기 자신만 최고라는 위선과 교만을 벗어버리고 사랑의 대상인 이웃을 알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으로부터 ‘불행 선언’의 주인공이 아닌, ‘행복 선언’의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인간은 자신의 모습이 완성됐다고 착각하지만,
누구나 미완성의 존재다. 지금까지 당신이 경험한 대로
현재의 당신 모습은 일시적이고 순간적이며 금방 바뀐다. (대니얼 길버트).
트집을 잡는 사람
반영억 라파엘 신부
“소경 개천 나무래 무엇하나?”라는 옛말이 있습니다.
소경이 개천에 빠진 것은 자기 눈이 먼 탓인데 개천을 나무란들 소용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즉 자기 잘못이나 한탄하지, 남을 원망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남의 허물을 보면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것이요, 모범을 보면 한 수 배워야 할 것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앙심을 품고 몰아붙이며 트집을 잡으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의 잘못을 지적당함으로써 마음이 상했고
하느님을 아는 지식과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을 자기들만이 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신들의 지혜가 최고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했으니, 예수님은 욕을 먹을 짓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에 구애받지 않으시고 하실 말씀을 분명히 하시는 분이십니다.
당신의 말씀이 진리이니 거침이 없으십니다.
“너희는 불행하여라!”(루카11,47).
요즘 정치 현실을 보면, 할 말을 당당하게 하는 세상이 아니라
속이고, 감추고, 덮어씌우고, 발뺌하는 모습이 너무도 자연스러워졌습니다.
자기만 살면 되지 국민은 안중에도 없는 행태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을 우리가 뽑았으니 할 말이 없습니다. 그래서 불행합니다.
그 불행을 발판 삼아 행복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런 노력조차 하지 않아서 문제입니다.
내년 총선에는 꼭 기도하고, 주님 마음에 드는 사람을 선택했으면 좋겠습니다.
“소설은 거짓을 가지고 진실을 이야기하고, 전기는 진실을 가지고 허구를 말한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진실을 포장하려고 하다가 진실을 잃고 맙니다.
진실은 그저 진실로 아름답습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해야 새 삶이 시작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제 잘난 멋에 살고 슬기로운 사람은 충고를 받아들이는 법입니다.
주님의 지적을 받아들였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들이 순종하여 그분을 섬기면 자기의 나날을 행복 속에서,
자기의 해들을 즐거움 속에서 마칩니다”
(그들의 나날은 행복으로 뿌듯하고 즐거움이 해마다 철철 넘칠 것이오)(욥기36,11).
그러나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제가 잘못하고 도리어
예수님께 트집을 잡고 성을 내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자신들의 지혜를 모든 것의 중심에 내세우며 주님의 말씀을 거부하였고,
율법을 가르치고 해석하면서도 자신들은 지키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무거운 짐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도 말씀의 참뜻을 알아듣지 못하였고 성경을 알려고 하는 이들까지도 가로막았습니다.
스스로 눈이 멀었을 뿐 아니라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하였습니다.
조상들을 스승 삼아 전철을 밟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러니 혼이 나는 것은 당연합니다.
오늘도 다르지 않습니다. 세상의 많은 재난을 접하면서 하느님을 원망합니다.
사랑의 하느님이 그러실 수 있느냐고 항변합니다.
그렇지만 인간이 자초한 재앙이 얼마나 많습니까?
자연을 훼손하고 편리함을 추구하다가 결국은 자연의 순리를 역행하고
그것이 결국 지구 온난화, 환경파괴로 인한 기상이변, 생명 존중의 가치관 결여 등등으로
인간에게 고스란히 되돌아오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평화를 외치면서도 전쟁물자를 얼마나 많이 만들고 있는지요? 세상은 전쟁 중입니다.
트집을 잡기에 앞서 주님의 견책에 귀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시고 아들로 인정하시는 모든 이를 채찍질하신다.”고 말합니다.
“시련을 훈육으로 여겨 견디어 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자녀로 대하십니다.
아버지에게서 훈육을 받지 않는 아들이 어디 있습니까?
모든 자녀가 다 받는 훈육을 받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사생아지 자녀가 아닙니다”(히브12,6-7).
묵시록 3장 19절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나는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 그러므로 열성을 다하고 회개하여라.”
이웃에게 트집을 잡기 전 그 트집이 주님께서 기뻐하실 트집인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미주 지역은 사는 곳이 넓고, 시차도 있기에 한곳에 모여서 강의를 듣기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팬데믹의 터널을 지나면서 미주 가톨릭평화신문은 ‘줌으로 하는 신앙강좌 기획팀’을 발족하였고,
한국과 미국을 연결하면서 강좌를 기획하고 준비하였습니다.
바쁘신 중에도 좋은 강의를 준비해 주시는 강사님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영적인 목마름을 채우기 위해서 줌으로 하는 신앙강좌에 함께 해 주시는 분들에게도 감사드립니다.
무엇보다 열정과 헌신으로 모든것을 준비해 주시는 ‘기획팀’에게 감사드립니다.
지난 9월에는 정민 교수님의 ‘조선 초기 교회의 신앙 활동과 교회조직’에 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교수님은 구체적인 사료와 자료를 바탕으로 강의를 해 주었습니다.
당시 조선 정부에서 작성한 ‘사학징의(邪學懲義)와 형추문목(刑推問目)’에는
천주교인들의 현황과 활동을 알 수 있는 상세한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교수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초대 한국천주교회의 뜨거운 신앙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조선 정부에서 압수한 물품에는 다양한 성물과 책이 있었다고 합니다.
책은 한문과 한글로 되어 있었는데 대부분의 책은 한글로 번역된 책이었다고 합니다.
교우들은 책을 통해서 교리를 배웠고, 신앙생활의 규범을 배웠습니다.
교우들은 성물을 통해서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이미 순교한 신앙인들의 머리카락과 그들의 피가 묻은 나무 조각을 소중하게 간직하였으며
순교자들의 신앙을 따를 것을 다짐하였습니다.
교회를 이끌었던 지도자들은 여성과 양민이 많았다고 합니다.
중국인 선교사 주문모 야고보 신부님은 ‘명도회(明道會)’를 조직하여 교회를 발전시켰습니다.
명도회는 오늘날 사목회와 비슷한 조직인데 명도회의 목적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첫째는 천주의 영광을 밝게 드러냄(明顯天主光榮),
둘째는 성모의 공덕을 찬송함(頌揚聖母功德),
셋째는 어리석은 이를 가르침(訓誨愚蒙),
넷째는 냉담자를 일깨움(提醒冷淡),
다섯째는 곧 죽을 어린이에게 대세를 줌(洗將死之孩),
여섯째는 임종의 어려움을 도와줌(助臨終之險),
일곱째는 이단의 주장을 물리침(闢除異說),
여덟째는 미혹한 길을 열어 인도함(開導迷途)이다.”
선교사 없이 시작된 조선교회가 100년간의 박해를 견딜 수 있었던 것은,
10,000명이 넘는 순교자가 신앙을 증거할 수 있었던 것은 믿음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다르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행복은 세상이 주는 행복과 다르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생명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세상으로 옮겨감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깊은 산골의 교우촌에서도, 감옥에서도, 죽음을 앞둔 형장에서도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었습니다.
최양업 신부님이 주교님께 보낸 편지에서 교우들의 뜨거운 신앙을 느낄 수 있습니다.
최양업 신부님은 이렇게 보고 하였습니다.
“교우들은 고백성사를 보기 위해서 2박 3일을 걸어왔습니다.
고백성사를 마치면 다시 2박 3일을 걸어갑니다.
고백성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교우들의 모습이 그렇게 밝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신앙이 있었기에 박해의 모진 바람을 이겨내고
103위 성인과 124위 복자를 모시는 교회가 될 수 있었습니다.
200년이 지난 오늘날의 교회를 성찰해 봅니다.
박해가 있는 것도 아닌데 주일미사 참례자의 비율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80%가 넘는 교우들이 주일미사 참례의 의무를 소홀히 하고 있습니다.
각 본당마다 예비자들의 수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박해의 광풍이 불 때도 선교했는데 선교의 의지가 약해지고 있습니다.
사제성소가 줄고 있습니다.
박해의 시간에도 신학생을 선발하였고, 멀리 마카오까지 보냈던 교회입니다.
환영의 꽃다발이 아닌 포도청의 몽둥이가 기다릴지라도 굳센 믿음으로 사제가 되었던 교회입니다.
모든 것이 풍요로운 이 시대에 교회의 활력이 약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가장 큰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준엄하게 꾸짖고 있습니다.
“이 세대가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교사들아!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리고서,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불행한 사람들을 이야기하셨습니다.
부족해서 불행한 것이 아닙니다. 배우지 못해서 불행한 것도 아닙니다.
‘욕심, 원망, 불평, 교만’한 사람들이 불행한 것입니다.
사실 사람은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그분을 옭아매려고 노렸습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앞부분에 이어, 오늘 <복음>은 율법학자들에 대한
<두 번째>와 <세 번째> 경고 말씀과 그에 대한 그들의 반응입니다.
<두 번째> 경고는 이렇습니다.
“너희는 불행하여라!
바로 너희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의 무덤을 너희가 만들기 때문이다.”(루카 11,47)
이는 율법 교사들이 진리를 핍박하고 있음에 대한 질타입니다.
그들이 죽은 예언자들은 기념하면서도 살아있는 예언자를 죽이는 모순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곧 그들은 조상들이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였듯이,
여전히 지금도 지혜이신 예수님을 핍박하였던 것입니다.
<세 번째> 경고는 이렇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교사들아! 너희는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리고서,
자기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버렸기 때문이다.”(루카 11,52)
“지식의 열쇠”란 율법을 해석하고 여는 열쇠로, 곧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묵시록>에서는 말합니다.
“다윗의 열쇠를 가진 이, 열면 닫을 자 없고,
닫으면 열 자 없는 이가 이렇게 말한다.”(묵시 3,7)
사실, 성경의 모든 말씀이 그분을 가리키고, 그분에 관하여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성경에 영원한 생명을 찾아 얻겠다는 생각으로 성경을 연구한다.
바로 그 성경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요한 5,39).
또 “너희가 모세를 믿었으면 나를 믿었을 것이다.
그가 나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하였기 때문이다.”(요한 5,46)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언에 담겨 있는 그리스도 오심에 관한 지식을 숨겼습니다.
곧 율법의 “열쇠”인 그리스도를 숨기고 구원으로 들어가는 문을 닫아버렸던 것입니다.
문을 열어주어야 할 사명을 갖고 있는 그들이 오히려 문을 닫아버렸던 것입니다.
마치 진리의 말씀을 들어야 했던 선조들이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들을 거역하고 죽였듯이,
그들도 그렇게 한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당시 유대 사회에 횡행했던 도둑이나 살인이나 간음보다
종교지도자들의 형식주의와 거짓과 위선을 더 많이 질책하셨습니다.
이는 종교 지도자들의 죄악은 자신들뿐만 아니라,
마치 전염병처럼 그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까지도 파멸로 인도하였기 때문입니다.
한편,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은 경고를 받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반응을 전해줍니다.
“그들은 독한 앙심을 품고, 예수님을 몰아대며,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그분을 옭아매려고 노렸습니다.”(루카 11,53)
우리는 어떨까요? 혹 우리가 질책당할 때, 어떻게 하는지 들여다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 질책을 받아들이고 겸손하게 회개하는지, 아니면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처럼,
광분하여 화를 내며 앙갚음하려고 기회를 노리는지 말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
“불행하여라.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루카 11,52)
주님!
말씀을 치워버리는 일이 없게 하시고,
말씀을 선포하면서도 행하지는 않은 까닭에
자신만이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막아버리는 일이 없게 하소서.
말씀의 실행이 당신의 나라를 여는 열쇠이오니,
선포한 바를 실천하게 하소서!
오, 주님! 제게는 당신의 말씀이 있으니,
바로 이 이유로 행복하게 하소서. 아멘.
모든 예언자가 흘린 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이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그들의 조상들을 단죄했지만,
비슷한 행동을 본받음으로써 자신들이 불의를 저지른 조상들의 자손임을 드러내고 있다고 하신다.
하느님의 아드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조상들보다 더 나쁜 죄를 짓는 그들이다.
하느님을 폭행하는 것보다 더 악한 죄는 없으므로 주님께서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짓을 마저 하여라.”(마태 23,32)라고 하신다.
유다인들의 조상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며 바른길을 제시한 예언자들을 죽이기도 했다.
이제 그 후손들은 이 예언자들을 거룩하고 존경할 만한 분들임을 알았고
그에 맞는 영예를 바치고자 무덤을 만들어 그들을 죽인 조상들을 단죄한다.
이렇게 자기 선조들을 살인자로 단죄한 사람들이 그들보다 더 악한 범죄를 저지르려 하고 있다.
그들은 생명의 주관자, 세상의 구세주를 죽였다.
그들은 그분께 저지른 악에다 또 다른 살인까지 한다.
나쁜 짓이라고는 한 적도 없고 다만 성경 말씀으로 자기들을 권면한 스테파노를 죽였다.
또한, 구원의 복음을 전한 다른 사도들에게도 모두 흉악한 짓을 저질렀다. 주님께서는
“세상 창조 이래 쏟아진 모든 예언자의 피에 대한 책임을 이 세대가 져야 할 것이다.”(50절)
이것은 그들이 의인의 죽음을 되갚아 주시는 분을 죽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인 아벨의 피부터, 너희가 성소와 제단 사이에서 살해한
베레크야의 아들 즈카르야의 피에 이르기까지”(마태 23,35)라는 말씀도 하셨다.
이런 일은 그때까지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에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
이 말씀은 그들을 책망하시는 것이지만 그들에게 회개하라는 권고의 말씀이기도 하다.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교사들아!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리고서,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버렸기 때문이다.”(62절)
율법 교사들과 바리사이들은 율법 열쇠를 쥐고 있었다.
그러나 그 나라로 들어가는 문이시며, 생명의 문이신 그분을 믿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 문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면서 그 문으로, 그리스도께로 가고자 하는 사람도 못 가게 한 것이다.
이들이 그러했다면 우리는 어떠한 모습인가?
우리도 외적인 형식이나 규정에 매달려 그 근본 뜻은 알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나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하느님께 나아가는 데 걸림돌이 되지나 않는지 반성하여야 한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진노하시는 예수님,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진노하시는 예수님,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루카 복음서는 자비와 치유의 주님이신 예수님의 뜨거운 사랑이 흘러넘치는 은혜로운 복음서입니다.
죄인인 우리 각자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뜨거운지,
읽을 때마다 저절로 눈시울이 뜨거워지기도 합니다.
치유사화 한 대목 한 대목 접할 때마다,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똑같은 환자인 바로 나를 눈여겨보시고,
나에게 다가오시고, 나를 굽어보시고, 나와 접촉하신다는 느낌에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그러나 요즘 우리가 계속 봉독하는 복음에 등장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사뭇 다릅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교사들아!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리고서,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대놓고 율법교사들을 도발하시며,
'어디 한번 해볼테면 해보아라.'는 식의 강력한 도전장을 던지십니다.
불의와 위선, 사악함과 이중성을 도무지 못 견뎌 하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그토록 부드럽고 따뜻했던 모습은 사라지고 마치 싸움닭 같은 모습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공개적인 질타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독한 앙심을 품었습니다.
눈에 독기를 품고 복수심으로 이글거리며
어떻게든 예수님의 목에 올가미를 씌우려고 많은 질문을 던지며 그분을 코너로 몰고 갔습니다.
진노하시는 예수님!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하느님의 얼굴은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도 다양한 얼굴을 지니고 있습니다.
때로 안쓰러운 마음에 우리를 꼭 끌어안으시기도 하지만
끝까지 정신 못 차리고 당신께로 돌아서지 않을 때 우리를 당신 품에서 떼어놓으십니다.
따지고 보니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강력한 경고의 말씀이나
섬뜩한 질책 역시 그분 사랑의 발로입니다.
어서 정신 차리라는!
빨리 당신 품으로 돌아오라는!
땅만 쳐다보지 말고 하늘을 올려다보라는!
나쁜 습관이 장애물이다.
박상대 마르코 신부
루카 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에 대한
불행 선언을 다시 한번 정리하여 보자.
우선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내려지는 세 가지 불행 선언의 이유는
① 십일조의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소홀히 한다.(42절)
② 회당에서 높은 자리와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한다.(43절)
③ 사람들이 모르고 그 위를 밟고 지나가는 무덤과 같다(44절)는 것이다.
그리고 율법학자들에게 내려지는 세 가지 불행 선언의 이유는
① 남에게 어려운 짐을 지우고 자신은 손가락도 대지 않는다.(46절)
②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꾸미면서 죽음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 한다.(47-51절)
③ 지식의 열쇠를 치워버려 자신도 들어가지 않으면서 들어가려는 사람마저 막는다.(52절)는 것이다.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 이어 율법교사들에 대한 나머지 두 가지 불행 선언을 전해주고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여섯 가지 불행 선언은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 모두에게 적용된다고 할 수 있겠다.
율사들은 모세의 율법을 해석하여 무수한 세칙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이 되게 하였고,
바리사이들은 즐거움으로 이를 마지막 하나까지 지키려는 충성심을 보였다.
바리사이들은 율사들이 만들어 낸 율법의 細目까지도 철저히 지킨다는 형식적인 순수함을 근거로 해서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고 그들로부터 자신들의 우월성을 고취하여 특수층으로 자처한 사람들로서
예수님 당대 최고의 세력을 이루고 있던 집단이 아니었던가?
후대의 랍비들은 바리사이파를 이스라엘 율법과 전통의 진정한 옹호자로 찬양하였다.
우리가 잘 아는 “탈무드”의 랍비들은 바리사이파의 정신적 후예들로 간주할 수 있다.
율사들은 사람들이 율법의 세목을 지키는데
얼마나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에 대한 사정은 알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들 관심 밖의 일이었다.(46절)
그들은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통탄의 마음으로 꾸미는 척하지만,
조상들의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아벨의 피(창세 4,8-10)부터 모든 예언자들이 흘린 피와
제단과 성소 사이에서 피살된 즈가리야의 피(2역대 24,20-22)에 이르기까지
모든 피에 대한 책임을 물으신다.(47-51절)
율사들은 머지않아 예수님과 그 추종자들을 죽인 책임까지 져야 할 것이다.
율사들의 최종적인 잘못은 새로운 “지식”에 대한 통로를 차단하는 데 있다.(52절)
여기서 새로운 지식이란,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제공하는 하느님 나라의 새로운 복음을 말한다.
율사들은 사람들이 이 복음을 듣고 예수께 믿음을 가질 수 없도록 방해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예수께 진정한 예언자요 하느님 지혜의 선생으로 등장하신다.
그분 스스로가 율법의 성취자이며, 하느님 나라의 새로운 복음이며 지식이다.
그분은 율법을 복잡하고 어렵게 만든 율사들과는 달리, 율법을 단순하고 쉽게 만드신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습니다.”(마태 11,30)라고 하셨다.
율법학자들은 무엇 때문에,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내려주신 율법을 두고
밤낮없이 연구하고 정진하였던가?
왜 그들은 율법을 공부하면서 그 속에 담겨 있는
하느님의 참다운 정신과 정의와 사랑을 깨닫지 못했던 것일까?
왜 그들은 율법의 참된 지혜가 그들 바로 앞에 서 계신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일까?
그것은 이미 그들 몸에 배어 들은 위선과 착취와 탐욕의 습관 때문이다.
이런 나쁜 습관들은 자신을 변화시키고, 새로운 것을 수용하는 데 있어서
누구에게나 큰 장애물이 될 것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민동규 다니엘 신부
찬미 예수님,
오늘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세상 창조 이래 쏟아진 모든 예언자의 피에 대한 책임을 이 세대가 져야 할 것이다.
왜 주님께서는 유독 주님 시대의 사람들에게 책임에 관해 이야기하셨을까요?
이 대목에서 우리는 한가지 주님께서 들려주신 예화를 기억할 수 있습니다.
포도밭의 소작인들에게 주인이 밭의 임대료를 받아 오라고 종들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소작인들은 그 종들을 더러는 때리고 더러는 죽였습니다.
주인은 마지막으로 자기 아들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소작인들은 아들마저 죽였습니다.
기억나시나요? 주인이 보낸 아들이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이전의 종들을 때리고 죽인 책임도 져야 하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아들마저 알아보지 못한 소작인들의 모습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피에 대한 책임, 즉 아들을 알아보지 못한 소작인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우리 신앙의 길 위에 많은 주님의 종들이 다녀갔습니다.
더러는 우리가 알아볼 수 있었을 것이고 더러는 알아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더러는 감사의 기도를 봉헌했을 것이고, 더러는 감사보다는 책망과 후회로 보냈을지 모릅니다.
오늘도 주님의 종이 혹은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실 것입니다.
그 순간을 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매일이 행복할 수는 없지만 매일에 숨어 있는 행복을 만나기를 희망합니다.
함께 걷기의 힘
어제는 근처 본당에 있는 친구 신부님과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
식사 메뉴는 닭볶음탕.
사실 둘이 나가서 사 먹으려 했는데
집밥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식사를 한 후
걸었습니다.
걸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렇게 걷다 보니 한 시간을 걸었습니다.
그래서 차를 한잔 마시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시간을 걸어왔습니다.
돌아보니 멀리 걸었습니다.
그런데 걷던 그 순간에는 멀다고 느끼지 못했습니다.
왜일까요?
함께 걸어서입니다. 함께 걷는다는 건 그런 힘이 있는 것 같습니다.
힘든 것을 힘든지 모르게 하는 힘 말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