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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20일 연중 제28주간 금요일
제1독서 : 로마 4,1-8
복 음 : 루카 12,1-7
그때에 1 수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서로 밟힐 지경이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바리사이들의 누룩 곧 위선을 조심하여라.
2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3 그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에서 한 말을 사람들이 모두 밝은 데에서 들을 것이다.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속삭인 말은 지붕 위에서 선포될 것이다.
4 나의 벗인 너희에게 말한다.
육신은 죽여도 그 이상 아무것도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5 누구를 두려워해야 할지 너희에게 알려 주겠다.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여라.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바로 그분을 두려워하여라.
6 참새 다섯 마리가 두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하느님께서 잊지 않으신다.
7 더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올해 11월 16일이 2024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있는 날입니다.
이제 한 달도 남지 않은 시간,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을 접고
대신 주님 안에서 평화와 위로의 마음을 갖기를 기도합니다.
수능을 생각하다 보니, 요즘에도 이런 말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학창 시절 때 이런 말을 선생님께 많이 들었습니다.
‘사당오락’ 네 시간을 자면서 공부하면 합격하고,
다섯 시간을 자면서 공부하면 불합격한다는 말입니다.
참, 이런 말도 있었다. ‘한 시간 더 공부하면 마누라(남편) 얼굴이 바뀐다.’,
‘공부 안 하면 거지 된다.’, ‘이 교실에 앉은 애 중 태반은 남의 들러리로 살 게다.’
실제로 많은 학생이 잠을 줄여가면서 또 하고 싶은 것도 꾹 참으면서 열심히 공부합니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열심히 공부해라.”라는 말을 듣게 되지요.
힘든 시간을 보내고 대학교에 들어갑니다. 이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이제는 취업 공부에 진입하게 됩니다. 취업에 성공한 뒤에도 끝이 아니지요.
이제 직장에 들어가 승진 시험 속에 빠지게 된다고 합니다.
보이지 않는 행복의 실체 안에서 행복과는 더 멀어지는 것만 같다고 말하는 많은 젊은이를 봅니다.
행복은 언제 올까요?
지금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행복할 가능성은 없습니다.
“행복은 체험이다.”라는 말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행복을 많이 겪어본 사람만이 더 자주, 더 쉽게 행복을 겪게 된다는 것입니다.
미래의 행복을 위해 스펙을 쌓고, 미래의 행복을 위해 종잣돈을 모으고,
미래의 행복을 위해 적금을 붓고, 미래의 행복을 위해 재테크에 뛰어들며,
미래의 행복을 위해 대출을 받아 집을 사고,
미래의 행복을 위해 불합리한 일과 고된 노동을 참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행복을 찾기 위해 지금 전혀 노력하지 않고,
또 지금 행복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이 과연 그런 준비를 했다고 미래에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막연한 미래가 아닌 확실하고 구체적인 미래를 살펴볼 수 있어야 지금 행복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신은 죽여도 그 이상 아무것도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고 말씀하십니다.
대신 육신이 죽은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라고 하시지요.
바로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하느님의 사랑 안에 굳은 믿음을 두고 있는 사람만이
두려움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 안에서 두려움을 갖습니다.
그러나 그 두려움의 대상은 하느님보다 결코 클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전지전능을 뛰어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느님 사랑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지금의 행복을 만들어 가면서,
하느님과 함께 할 미래를 꿈꾸면서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머리카락 숫자까지도 다 세어 두실 정도로 사랑 그 자체이신 분이십니다.
오늘의 명언:
낙관적인 사람은 고난에서 기회를 보고 비관적인 사람은 기회에서 고난을 본다(윈스턴 처칠).
은총을 많이 받았다고요?
반영억 라파엘 신부
무엇인지 몰라서 말하지 않는 것은 사람을 답답하게 하고,
알면서도 말하지 못하면 조바심이 나고, 알지만 말하지 않는다면 힘이 든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침묵을 압니다. 하느님 안에서 고요를 찾는 것입니다.
모르면 모르는 대로, 알면 아는 대로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하며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선택합니다.
그래서 하소연도 감사도 침묵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침묵은 곧 기도입니다.
누가 알아주지 않고 인정해 주지 않아도 서운함 없이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신(루카12,7)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의 주님은 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위선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소위 잘나고 똑똑한 그들은 그들의 내면적인 모습과는 달리
어떤 것을 아는 체, 가지고 있는 체하기 때문입니다.
향을 싼 종이에서는 향내가 나고 생선을 싼 종이에서는 비린내가 나기 마련입니다.
생선을 만져놓고서는 향내가 나기를 바랄 수는 없는 법입니다.
마찬가지로 내적으로 변하지 않고 겉꾸민다면 그와 다를 바 없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 없습니다.
들은 바를 가슴에 새기고 또 가르치며, 가르치는 바를 살아야 할 소명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1,22).
본당 생활을 하다 보면 피정이나 기도회에 열심히 참여하는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중의 어떤 사람은 하느님의 은총을 많이 받았다고 호들갑을 떨며
다른 사람에게 자랑하고 벅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오히려 많은 사람에게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은총을 많이 받았다고 하면서도 겸손이 보이지 않고 그들의 삶은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더 교만해지고 뻣뻣해지며 다른 사람보다 내가 더 낫다는 마음이 은연중에 자리하게 됩니다.
받은 은총을 말하지 못해 조바심을 내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은총을 받았는지는 그가 말하지 않아도 삶의 태도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사실 “사람의 길이 제 눈에는 모두 바르게 보여도 마음을 살피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잠언21,2)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은총을 받은 만큼 삶의 모범을 드러내야 합니다.
은총을 증거하지 못한다면 바리사이의 위선이 우리 안에 자리하게 될 것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주 하신 말씀 중에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믿음이 약하냐는 것입니다.
두려움과 믿음은 반비례하는 것 같습니다.
두려움이 큰 사람은 믿음이 약하고, 믿음이 강한 사람은 두려움이 적습니다.
복음서에 제자들이 두려워했던 장면들이 몇 번 있습니다.
첫 번째는 베드로와 어부들입니다.
밤을 새워 그물을 던졌지만 한 마리도 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더 깊은 곳으로 그물을 던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와 어부들은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기쁨보다는 두려움에 떨며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에게서 떠나주십시오.”
이때의 두려움은 강한 힘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마치 고양이 앞에 있는 쥐와 같습니다.
두 번째는 풍랑을 마주한 제자들입니다.
거센 풍랑 속에서도 예수님은 편안히 잠을 자고 있었는데
제자들은 배가 뒤집힐 것 같은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이때의 두려움은 시련과 고난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바람이 불면 파도가 치듯이, 우리의 삶에는 시련과 고난의 파도가 몰아치기 마련입니다.
세 번째는 물 위를 걷던 베드로입니다.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께 베드로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주님 저도 물 위를 걷게 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여라.”
물 위를 걷던 베드로는 예수님을 보지 않고 자신의 발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내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이때의 두려움은 ‘근심과 걱정’입니다.
‘미득선수실(未得先愁失) 당환이작비(當歡已作悲)’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직 근심이 오지도 않았는데 기쁨이 먼저 떠나간다는 뜻입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란다.’는 말과 비슷합니다.
네 번째는 다락방에 숨어 있던 제자들입니다.
이때의 두려움은 ‘죽음’에 대한 공포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허망하게 죽은 것을 알았습니다.
자신들도 예수님처럼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죽음이 두려운 것은 아무도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두려운 것은 사랑하는 이들과의 이별이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두려움에 숨어 있던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셨습니다.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셨습니다.
복음서에서 제자들이 느꼈던 두려움은 4가지입니다.
강력한 힘에 대한 두려움, 시련과 고난에 따른 두려움,
근심과 걱정에 따른 두려움, 죽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이런 두려움을 극복하는 길이 있습니다.
강력한 힘을 가지셨지만, 자비로우신 하느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되찾은 동전, 되찾은 양, 돌아온 아들의 비유를 통해서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는 성한 사람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하나를 더욱 기뻐한다고 하셨습니다.
시련과 고난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이 드러난다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혈하던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방인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죄가 커서 시련과 고난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시련과 고난은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표징이라고 하셨습니다.
근심과 걱정을 주님께 의탁하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짐 진 자들은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나의 짐은 가볍고, 나의 멍에는 편하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에로 옮겨감이라는 믿음입니다. 이것이 부활신앙 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육신은 죽여도 그 이상 아무것도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세 번이나 넘어지셨고, 창에 찔리시는 고통을 받았습니다.
육신은 죽으셨지만 부활하여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초대하셨습니다.
초대교회의 제자들도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순교의 길을 떠났습니다.
사도들은 모두 두려움 없이 순교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화려한 건물과 제도를 통해서 2000년을 이어온 것이 아닙니다.
두려움 없이 믿음의 길을 걸었던 분들을 통해서 2000년을 이어온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한 전도여행 중에,
제자들의 믿음을 굳건히 세우기 위하여 교육하시는 장면입니다.
그 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곧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누룩, 곧 위선을 조심해야 한다(루카 12,1)는 것과
그들로부터 장차 어떤 핍박을 당하더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로지 한 분 하느님만을 두려워하라(12,2-7)는 것입니다.
오늘은 두 번째 내용만 보고자 합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진정 두려워해야 할 분이 누구인지,
그리고 왜 그분을 두려워해야 하는지를 깨우쳐 줍니다.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여라.”(루카 12,5)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해야 할 분은 육신을 핍박하고 죽일 수 있는 이가 아니라,
죽은 뒤의 권한까지 가지신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이시라고 가르쳐주십니다.
사실 당신께서 당시의 종교 지도자나 정치 지도자를 두려워하지 않으시고,
오직 아버지만을 진정 사랑으로 두려워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두려움을 히브리서 작가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으로 이 세상에 계실 때에
당신을 죽음에서 구하실 수 있는 분에게 큰 소리와 눈물로 간구하셨고,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보시고 그 간구를 들어 주셨습니다.”(히브 5,7)
그렇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분은 오직 한 분, 아버지 하느님뿐인 것입니다.
이러한 두려움에 대해 시편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주님께 대한 두려움은 순결하고 영원히 남는다.”(시편 18,10)
그래서 집회서와 시편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함이 주님을 사랑함의 시작이며, 주님에 대한 사랑의 시작은 믿음이다.”(집회 25,12)
“하느님을 경외함이 지혜의 근원이요 그대로 사는 사람이 슬기를 깨친 사람이다.”(시편 111,10)
이처럼 성경에서는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과 사랑이 서로 모순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하느님만을 "두려워하여라."(루카 12,5)고 하시면서,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두려워하지 마라”(루카 12,7)고도 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도 낱낱이 세어 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루카 12,7)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귀하고 소중히 여기시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귀한 존재들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목숨을 바쳐 사랑 할만 한 가치가 있는 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니 그 어떤 핍박이 닥친다 하더라도 우리를 귀하게 여기시는 하느님께서 구해주실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의 길을 가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두려워하되 주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두려워하고,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되
우리를 소중히 여기시는 주님에 대한 믿음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두려워하지 마라.”(루카 12,7)
주님!
받아들여지지 않더라도 박해를 받더라도 두려워하지 않게 하소서!
진리이신 당신께 희망을 두고, 주님이신 당신께 믿음을 두게 하소서!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어 두신 당신의 사랑으로 제 두려움을 몰아내소서.
아멘.
너희가 두려워해야 할 분은...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바리사이들의 누룩 곧 위선을 조심하여라.”(1절) 말씀하신다.
그들의 누룩이란 그들의 겉꾸밈, 즉 위선을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해야 할 대상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 말씀하신다.
“나의 벗인 너희에게 말한다.
육신은 죽여도 그 이상 아무것도 못 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누구를 두려워해야 할지 너희에게 알려 주겠다.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여라.”(4-5절).
그분은 “지옥에서 멸망시킬 수 있는”(마태 10,28) 분이시다.
그분만이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셨다.
그러므로 육신을 죽일 수 있을 뿐인 자를 두려워하고,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을 그분은 지옥에 던져버릴 것이다.
그분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우리가 그분 자녀의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할까,
혹은 하느님의 말씀을 올바로 실천하지 못할까 나 자신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참으로 그분을 두려워할 때,
즉 당신의 말씀과 뜻 그리고 당신의 일을 올바로 선택할 수 있을 때,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지혜를 차지할 수 있게,
당신의 생명에 참여하게 해주실 것이다.
율법 교사나 바리사이들의 위선적인 삶이 아니라,
참으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랑을 실천하며
세상을 아름답게 변화시키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주님께서는 단돈 두 닢에 팔리는 참새 다섯 마리조차
하느님께서 돌보아 주신다고 하신다.
그러면서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고 하신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자상하게 보살펴 주시는지 알 수 있다.
미물까지 보살펴 주시는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잊지 않으신다.
그분은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우리를 찾아오신 분이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얼마나 그분을 알고 또 올바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우리는 여러 가지 구실 때문에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하느님을 외면하고 있지나 않은지?
아니, 외면하고 있는 것조차도 모르고 있지나 않은지?
우리의 신앙생활 안에 바리사이파 사람의 모습이 재현되지나 않는지?
그분을 안다고 하지만 우리의 삶을 통하여 진정으로 그분을 알고 증언하고 있는지?
이러한 여러 가지를 반성하면서 우리의 삶을 이루어 가야 할 것이다.
하느님을 선택하고 사랑해 드리는 것이 우리의 성소이며,
하느님의 참된 자녀로서 하느님의 모습을 완성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이다.
내 죄악 내 머리칼보다도 많사오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저희 피정 센터를 찾는 형제자매님들 중에,
가끔 레지오나 반모임, 꾸르실료 등 본당 활동 중에 만난 형제자매들이
열두 서너 명 소규모로 피정을 오십니다.
얼마나 분위기가 좋은지 모릅니다. 깨가 쏟아지고 이박삼일이 순식간에 지나갑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신앙 안에서 만나니 그렇게 우애가 깊은 듯합니다.
친형제 자매 ‘저리 가라.’ 입니다. 세월이 삼십 년 사십 년 흘러도 그 우정은 변함이 없습니다.
이래서 신앙이 좋은 것이로구나 새삼 확인하게 됩니다.
저희 수도 공동체 형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랜만에 만나면 나이 불문하고 시간이 ‘순삭’입니다. 그
동안 겪었던 이런저런 재미있는 이야기들, 그간 갈고 닦은 아재 개그들을 나누다 보면
금방 시계 바늘이 자정을 넘깁니다.
나름 수도 생활 연식이 오래된 형제들끼리 만나면 더 재미있습니다.
솜털이 보송보송하던 꽃미남 젊은 시절의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이제는 영락없는 영감님들입니다.
아랫배도 불룩 튀어나오고, 머리도 희끗희끗, 무엇보다도 제일 큰 관심사요 대화 주제는
현저하게 줄어든 머리카락입니다. 그나마 아슬아슬 남아 있는 서로의 머리숱을 바라보며,
‘관리 좀 하지 어쩌다 이렇게 됐냐?’ ‘이 샴푸를 써보라.’ ‘저 피부과로 가보라.’ 의견이 분분합니다.
현저하게 머리숱이 결핍된 형제 중에 한 분은 대뜸 성경 구절을 들이대며 깔깔 웃습니다.
“내 죄악 내 머리칼보다도 많사오며.” 자신은 머리숱이 적으니 그만큼 죄가 적다며, 위안을 삼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머리숱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새롭게 풀이하면 이렇습니다.
“그대의 삶은 분명 가치가 있습니다. 그대의 인생은 엄청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대는 있는 그대로, 살아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내 사랑을 듬뿍 받고 있습니다.
그대는 존귀합니다. 그대는 일어서야 합니다.”
주변을 돌아보니 많은 분들이 힘겹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방이 높은 벽으로 가로막힌 막다른 골목에 주저앉아 울고 있습니다.
울며 애통해하는데 그 누구 하나 위로하는 사람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된 우리들, 그분의 사상, 가치관, 행동 방식이
삶의 기준이 되어야 할 우리 그리스도인들입니다.
2천 년 전 예수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손을 내밀어야겠습니다.
따뜻한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말아야겠습니다.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느님
박상대 마르코 신부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책망과 불행 선언의 대단원이 막을 내렸다.
그런데 예수님으로부터 크게 꾸지람을 들은 그들의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다.
물론 책망이나 질타를 듣고 기분 좋을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지만,
충고에 감사하는 자세도 美德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바리사이와 율사들은 예수께 앙심을 품고 질문 공세를 펴
대답에서 트집을 잡으려는 등 반격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11,53-54)
예수께서 모욕적인 언사를 통하여 바리사이와 율사들의 기세를 꺾었다는
소식이 삽시간에 주위로 퍼져나간 모양이다.
오늘 복음의 시작 부분이 언급하듯이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서로 짓밟힐 지경이 되었다니 말이다.
예수께서는 人山人海를 이룬 군중을 둘러보시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첫 번째 가르침은 우선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관련된 것으로서,
그들의 누룩과 위선을 조심하고 경계하라는 것이다.(1절)
여기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있다.
그것은 예수께서 비록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책망하고 그들에게 불행과 화를 예고하셨지만,
조심해야 할 것은, 그 사람들 자체가 아니라 그 사람들의 누룩과 위선이라고 말씀하신 점이다.
역시 예수께서는 사람보다는 사람의 죄를 미워하신다.
누룩이란 사람에게 유익한 것으로서 원래 술을 만들 때 사용하는 발효제이다.
누룩은 미소한 양이라도 전체에 큰 효과를 내는 역할을 한다.
바로 이 점을 바리사이들의 고질적인 형식주의에 빗대어 ‘누룩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런 누룩에 한 번 젖어 들면 전체를 주체하기 힘들어지기 마련이다.
두 번째 가르침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이
지금은 감춰진 듯 제한된 장소와 시간의 범주 안에서 이루어지지만,
머지않아 온 세상에 선포될 것이라는 점이다.(2-3절)
오늘 우리가 성서를 통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다면, 이것이 바로 증거가 될 것이다.
예수께서 선포하시는 복음의 진리는 세상 모든 사람들을 향한 것이며
또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선포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과정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복음의 진리는 있으나 이를 선포할 사람도 있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제자들은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서서히 깨닫는다.
세 번째는 제자들이 진정 두려워해야 할 존재가 누구인지에 관한 가르침이다.(4-7절)
그 존재는 당연히 하느님이시다.
하느님께서는 靈과 肉의 모든 세계를 지배하시고 이를 권능으로 다스리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제자들을 참새보다 훨씬 더 귀하게 여기시고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실 정도로 사랑하신다.
따라서 제자들은 자신들을 박해하는 자는 물론, 세상의 어떤 것에서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다.
그렇다고 제자들이 하느님 외에 다른 무엇을 겁 없이 여기거나 업신여기라는 말은 아니다.
하느님과 세상과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당신 외아들을 보내주신 일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민동규 다니엘 신부
찬미 예수님,
주님께서는 어제 ‘그동안의 예언자들이 피에 대한 책임을 이 세대가 져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셔서인지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우리를 한없이 위로하십니다.
매우 미안하셨나 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안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하느님께서는 너무나 사랑하셔서 우리들의 머리카락까지도 세어놓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 주기 마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바리사이들이 범하는 악행을 조심하고 그들을 닮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악행은 이런 것입니다.
그들은 하느님 앞에 겸손하지 않습니다.
유다의 스승으로 불리면서 겉으로는 깨끗한 척하지만, 속으로는 많은 교만을 저질렀습니다.
그렇게 그들 자신도 하늘나라에 들어갈 길을 막고서는 그 길로 들어서는 사람들,
즉 선함과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는 사람들까지도 막아섰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따라가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베풀어 주시고 또 베풀어 주고 계십니다.
만약 우리가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것을 느끼지 못하거나 기억하지 못한다면
차분한 시간에 우리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십시오.
혹은 노트에 그간의 일들을 써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손길과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걸으셨던 발자국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머리카락까지 세어놓으신 하느님 아버지 안에서 오늘 하루 잘 보내시기를 기도합니다.
개성주악
개성주악이라고 들어보셨을까요?
찹쌀가루에 멥쌀가루나 밀가루를 섞은 뒤
막걸리나 소주를 넣고 반죽하여 둥글게 빚은 것을 기름에 지진 뒤
조청, 꿀등을 이용해 약과처럼 집청해서 만든 한과의 일종입니다.〔나무위키〕
재료나 조리법은 딱 현대의 도넛을 생각나게 합니다.
물론 생긴 모양도 도넛과 비슷합니다.
집청까지 해 놓으면 마치 도넛에 시럽으로 글레이즈 입힌 것과 비슷합니다.
저는 아직 못 먹어봤습니다.
먹어보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보다는 만들어 보고 싶습니다.
언젠가 꼭 개성주악에 도전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에게도 도전하고 싶은 무언가가 있을까요?
그것이 무엇이더라도
작더라도 혹은 크더라도 꼭 도전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늘 도전이라는 신선한 바람이 우리 즐거움을 선물하길 바랍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