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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올바른역사를사랑하는모임 원문보기 글쓴이: 낙암 (정구복)
2012년 7월에 발견되었다고 하는 집안 고구려비가 위작임을 밝히는 논문을 2014년 6월 14알 고려대학교에서 개최된 한국고대사학회에서 발표했다. 이를 진품으로 알고 중국과 한국에서 20여편의 논문이 쏟아져나왔다. 어떻게 이런 비문을 진품으로 알고 논문을 쓰는지 한심스럽다.
그 발표문은 다음과 같다. 각 주가 부팅이 되지 않아서 미안합니다.
집안 마선향 고려비에 대한 사상사적 검토
정구복(한국학중앙연구원), 조경철(나라이름역사연구소)
목차
1. 머리말
2. 비문의 기초적 검토와 진위 문제
3. 사상사적 자료
4. 맺음말
1. 머리말
‘집안고구려비’(이하 본 비로 약칭하겠다.)가 2012년 7월에 발견된 후 한국고대사학계에서는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연구의 성과가 많이 나오고 있다. 사료의 부족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던 상황에서는 참으로 반가운 자료이었다. 특히 고구려 자료는 삼국사기에서 본기로 서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구려 측의 원 자료가 제대로 전승되지 못한데다가 동북공정으로 고구려 역사를 중국의 지방정권의 역사로 날조하는 상황에서 더욱 중요하다. 더구나 본 비는 한국에서 最古의 확실한 금석문 자료인 광개토대왕릉비(이하대왕릉비로 약칭하겠다)와 연계된 내용을 담고 있어 그 중요성은 倍加되고 있다. (윤용구선생으로부터 중국측 논문자료를 받았다. 감사를 표한다)
본 비는 제 1면에 제1행의 4글자, 제2행과 제3행의 세 글자가 파손되어 있고, 나머지 글자는 마모에 의하여 판독이 어렵지만 10행 총 218자 중 150~160여 자가 판독되고 있어 비문 내용의 개략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본 비는 높이 173cm, 폭 60.6cm, 두께 21~12.5cm, 무게 465kg의 황색화강암이다. 이 돌은 근처에서 채석한 것임이 밝혀졌다. 비문은 앞면과 뒷면이 잘 다듬어진 뒤에 글자를 새겼는데 현재 앞면의 글만 확인되고 뒷면의 글은 마멸로 현재 탐색 중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국고대사학회에서는 탁본자료를 가지고 이에 관한 석독작업을 공동으로 두 차례에 시행하는 작업을 했다. 이는 참으로 귀한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그 결과 중국학자들이 판독하지 못한 글자를 수정하거나 새로이 추가하는 성과를 가져왔다. 2년여 동안 한국학계에서는 20여편의 귀중한 연구가 쏟아져 나왔고 그에 관한 연구사까지 정리되었다.
본 발표자는 한국사학사를 전공해 왔는데 天道라는 용어가 서두에 나오기 때문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고대사에 문외한이기에 고대사 전공자인 조경철 박사와 공동으로 논문을 작성하기로 했다. 본 발표에서는 대왕릉비문과의 비교하여 문체와 내용적 검토를 비교하여 진위를 논하고자 한다. 본 비문에 처음으로 보이는 天道, 元王 등에 대한 소견을 중심으로 밝혀보고자 한다.
본고에서의 이용한 본 비의 판독문은 중국의 耿鐵華와 여호규, 윤용구, 강진원의 판독문을 주로 참조했다.
2. 비문의 기초적 검토
본 비의 진위문제는 한국고대사학계의 연구 경향으로 보아서는 엉뚱한 문제제기라고 할 정도로 누구도 그 진위를 의심하지 않고 있고, 중국의 금석학자 및 역사학자나 일본의 고대사의 전공자인 일본의 학자도 탁본 내용을 보고 진품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야 한다는 말처럼 우리는 이를 활용해 연구하려면 그 진위문제를 확실하게 다루어야 한다는 소신을 가지고 있다. 더구나 완전한 해독이 어려운 금석문이 새로이 나타났을 경우 진위문제는 기초적으로 다루어야할 문제이다.
본 비의 자료가 공개되자 어설픈 위작설이 신문에 공표되었다. 그리고 서영수가 그 문제를 단편적으로 제기한 바 있다. 그러나 위작설은 경철화에 의하여 논해져 이제는 진품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를 다시 들고 나옴은 역사학자가 한번은 반드시 구체적으로 짚고 넘어가야할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 진위문제는 대체로 두 가지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비석 자체에 대한 금석학적 검증이고 다른 하나는 그 비문의 내용과 형식(문체와 서체)등을 검토해야 한다. 이 중 서체연구자가 쓴 연구자는 모두 이를 의심하지 않았다.
금석학적 연구는 전문가인 중국학자들도 엄격하게 검증했을 것으로 이해되지만 한국측 학자는 이에 직접 실물을 보거나 레이저 렌트겐 촬영기로 직접 조사를 하지 못한 상황이다. 전면이 잘 다듬어졌다고 하는데 징으로 돌을 다듬는 수법을 정밀하게 연구할 필요가 있음을 말해두고 싶다.
그 비문의 문체적 특징에 대하여는 깊은 연구가 아직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본 비문은 형식상 국가에서 세운 것이며 어느 한 왕의 묘소에 세운 것이 아니라 전체 왕릉의 수호 등을 위해 세운 수묘인에 관한 비석임은 연구자 대부분의 공통된 의견이다.
본 비에 대한 학계의 연구에서 크게 나뉘는 것은 이 비문이 먼저된 것이냐 대왕릉비문이 먼저 된 것이냐의 문제이고 본 비가 광개토대왕 때에 만들어진 것이냐, 장수왕대에 만들어진 것이냐의 문제이며 본 비의 성격문제가 다양하게 제기되고 있다. 현재 학계에서는 광개토대왕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2. 1. 본 비문에 대한 문체적 검토
본 비의 글은 구조상 서문격인 부분과 본문, 그리고 결어 부분으로 나눠 본다면 서문은 앞의 제3행 또는 제4행의 끝 부분 수묘자를 기록했다까지로 볼 수 있고, 결어는 제8행의 自今以後부터 끝까지로 나눌 수 있고 그 중간 부분이 본문이라고 할 수 있다. 결어의 부분은 다행히 거의 완전히 석독되고 있다. 서문은 다시 세분해보면 선언적인 명제부분으로 제1행의 元王까지이고 이후 고구려의 시조의 거룩한 음덕을 서술하고 계승해왔다는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본 비문의 문체를 대왕릉비문과 비교해보자. 물론 두 비에서 다룬 내용이 다르기 때문에 서사기법이 다를 수 있음은 물론이다. 본 비의 문장은 4자 또는 6자의 대구의 문장법이 두드러진 한문으로 되어 있다. 예컨대 ‘必授天道’, ‘自承元王’, ‘神靈佑護蔽蔭’, ‘開國辟土’, ‘繼胤相承’ ‘四時祭祀’, ‘彌高悠烈’, ‘先聖功勳’, ‘看其碑文’, ‘與其罪過 등이 보이고 있듯이 거의 모든 문장이 4자로 끊어 읽도록 되어 있다. 4자내지 6자로 되지 않는 부분은 석독이 되는 부분에서는 겨우 3-4곳에 불과하다. 대왕릉비에도 대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國富民殷‘ ’五穀豊熟‘ ’紹承基業‘, ’祖王先王‘ 등이 보이고 있으나 이는 극히 일부이고 문장을 莊重하게 쓰기 위해서 쓴 것으로 이해된다. 1800여자에 달하는 장문의 글로서는 그 비중은 극히 약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본 비에는 단어성구가 많이 보이고 있다. 예컨대 ‘祭祀’, ‘慷慨’, ‘賣買’, ‘發令’ ‘碑文’, ‘罪過’ 등 單語 成句가 많이 나오고 있다. 본 비는 개인 왕의 훈적을 기념하기 위한 글이 아니고 전체 왕릉의 수묘인을 팔고 사지 못하도록 고시하는 글이므로 장중한 표현보다는 간결한 표현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대왕릉비와 본 비에는 3개의 표현이 거의 완전히 일치하고 있다. 비록 한 두 글자의 드나듦이 있지만 전체의 문맥은 동일하다. 이를 비교하기 위하여 원문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1)(集) 제1~2행 ●●●●世 必授天道 自承元王 始祖鄒牟王之創基也
●●●□□□子 河伯之孫 神靈祐護蔽蔭 開國辟土
(廣) 1면 제1행 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 出自北夫餘 天帝之子 母河伯女郞 剖卵降世 生而有聖 □□□□□□命駕 巡幸南下 路有夫餘奄利大水 王臨津言曰 我是皇天之子 母河伯女郞 鄒牟王 爲我連葭浮龜 應聲卽爲連葭浮龜 然後造渡 於沸流谷 忽本西 城山上而建都焉
2) (集)제8~9행 各於[先王墓上] 立碑 銘其烟戶頭卄人名 以(垂)示後世
(廣) 4면 제8행 唯國罡上廣開土境好太王 盡爲祖先王 墓上立碑 銘其烟戶 不令差錯
3) (集)제8-10행의 自今以後 守墓之民 不得擅買 更相轉賣 雖有富足之者 亦不得買賣 如有違令者 後世繼嗣□□ 看其碑文 與其罪過
(廣) 4면 제9행 又制 守墓人 自今以後 不得更相轉買 雖有富足之者 亦不得擅買 其有違令 賣者刑之 買人制令守墓之
이 세 개의 문구는 두 비문 중 어느 하나가 援用한 것이다. 두 비문을 상세히 비교 검토한 기존의 논문에서는 본 비의 글을 기초로 대왕릉비를 작성했다고 파악했다. 즉 본 비문이 먼저 만들어져 비로 세워졌고, 대왕릉비에서 이를 이용했다고 파악하고 있다. 국가에서 세운 비석이고, 시기적으로 가까웠으므로 그랬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그랬을 가능성을 열어두고 상호 관련된 두 문장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 가를 검토해보고자 한다.
본 비는 고구려의 전체 왕릉의 수묘인에 대한 매매금지를 목적으로 한 비라고 판단된다. 그런데 왕의 世系의 서술은 없는데 각왕이 대대로 반드시 천도를 받았다는 표현은 대단히 중요한 내용인데 광개토대왕대의 비석에서 왜 이를 삭제하였는지 의심이 간다. 또한 장수왕 2년(414)에 세워진 대왕릉비에는 ‘以道興治’라는 말이 나오는데 광개토왕대에 천도라는 표현을 썼을 가가 의심스럽다. 그리고 시조 추모왕이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였다와 개국벽토했다는 표현에서 창기와 개국은 중복되는 2중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대왕릉비의 옛날 시조추모왕이 창기야의 ‘也’는 종결어미가 아니라 부사구의 어조사로서 ‘국가의 기틀을 열 적에로 해석하여 그가 태어나고 남하하여 엄리대수를 건너 비류곡 홀본 서쪽에 간위에 성을 쌓아 도읍을 건설했다 까지에 걸리는 구절로 해석된다. 그런데 여호규는 본 비의 내용을 부연 설명하였다고 파악했다.
그런데 여기서 지적해야 할 것은 대왕릉비문에는 우리말 순서대로 쓴 한국식 한문표기방식이 사용되었다는 점과 비록 서사적인 서술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4-6자의 문투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해둔다. 본 비문에서 시조 추모왕은 해야 어울리는 표현을 굳이 創基也라는 표현을 썼을 가와 이에는 한국식 한문의 문체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2)의 자료에서 各於[先王墓上] 立碑의 부분은 대왕릉비에 오직 대왕이 ‘盡爲祖先王墓上立碑’라는 부분과 대응된다. 이는 본 비의 문장이 대왕릉비문보다 더욱 간략하게 정리되었다. 그리고 본 비에서는 대왕릉비문보다 ‘頭 20명의 이름’을 새긴다는 것이 추가되어 있다. 이처럼 수묘인제도에 각왕별로 수묘인을 20명씩 조처했다고 하면 왜 이런 중대한 사실을 대왕릉비에서는 이를 전혀 언급하지 않고 각릉의 연호인들을 비석에 새겨 서로 뒤섞이지 않게 하였다고 하였을까? 대왕릉비에서는 수묘인의 연호가 팔고 사는 문제보다도 수묘역을 수행하기는 하되, 맡은 묘를 수묘하지 않고, 다른 묘에 수묘하는 差錯현상이 중요한 문제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대왕릉비에서 두 번이나 수묘인 차착을 언급하고 있음을 통하여 유추할 수 있다. 그런데 광개토대왕 때에 세워졌다고 보는 본 비에서는 이런 문제는 전혀 언급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연호두의 이름을 비에 새겨서 ‘후세에 보인다’는 표현은 어색한 표현이다. 수묘인의 이름을 비석에 새겨 후세에 무엇을 보이겠다는 말인가? 본 비에 나오는 ‘以(垂)示後世’’라는 표현은 대왕릉비에서는 ‘비를 세워 훈적을 새기어 후세에 보이고자 한다’고 한 부분에 나오고 있다. 대왕릉비의 이 표현은 아주 적절하다.
3)의 자료에서 두 비의 차이는 다음과 같다.
A. 守墓之民→守墓人
B. 不得擅買 更相轉賣 →不得更相轉賣
C. 亦不得買賣 → 亦不得擅買
D. (위령자의 경우) 看其碑文 與其罪過 → 賣者刑之 買人守墓之
A의 수묘하는 백성이란 표현은 수묘하는 사람이라는 것과 개념이 약간 다르다. 백성이라고 하면 왕과 백성이라는 관계로 지배한다는 의미를 가질 뿐만 아니라 백성으로 인정을 받는다는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수묘인 중에는 포로로 잡혀와 아직 백성이 되지 못한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대왕릉비에서는 바로 뒤에 ‘舊民’이라는 표현이 나오고 있으나 포로로 잡아온 사람에게는 백성이란 표현을 쓰지 않고 ‘新來韓濊’라고 하여 구별하여 썼다.
B의 차이는 수묘인을 본 비에서는 “함부로 사지도 못하고 서로 轉賣하지도 못한다”고 했다. 이를 대왕릉비에서 서로 轉賣할수 없다고 했다. 본 비가 규정이 더 상세하다고 할지 모르나 擅買와 更相轉賣와는 뜻이 중복된 느낌이다. 엄격한 의미가 중복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그렇게 중복 서술할 이유를 발견하기 쉽지 않다, ‘擅買’는 C의 부유한 사람이라도 함부로 살 수 없다는 대왕릉비에서 옮겨온 표현으로 생각된다. C 본 비문의 부유한 자라도 매매할 수 없다는 표현도 적절하지 못하다. 부유한 사람이라도 함부로 살 수 없다는 대왕릉비의 표현이 적절한 표현이다. 본 비문의 매끄럽지 못한 이 표현을 이를 기초하여 후에 쓴 대왕릉비에서는 바르게 고쳐 썼다고 보아야 할가 아니면 본비에서 대왕릉비의 이 부분의 천매를 앞에 썼기 때문에 뒤의 표현에서는 매매로 바꾸었다고 봄이 합리적일가? 이는 본 비가 대왕릉비의 내용을 알고 있는 사람이 후일에 조작한 자료일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D는 수묘인을 매매하지 못하도록 금지한 영의 위반자에 대한 처벌규정이다. 이 처벌 내용을 언급한 학자는 세 사람이 있다. 공석구는 처벌규정이 없는 것은 그에 관한 율이 아직 정해지지 않았거나 따로 정했을 것이라고 했고, 홍성우는 ‘與罪’의 중국측 전거를 제시했다. 그러나 그가 근거로 든 자료의 ‘與同罪’는 죄를 준다고 해석하기 보다는 앞에 언급된 자의 처벌과 더불어 같은 죄로 처벌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소지도 있고, 당시 고구려에서 前漢의 ‘2년율령’이 알려졌는지도 확인할 수 없다. ‘罪’자는 ‘罰’자와 상통된다. 그런데 죄와 허물을 묻는 것도 논하는 것도 아니고 죄와 허물을 준다고 한 것은 적절한 표현이 아니다.
그런데 죄를 주는 것만이 아니라 죄와 허물을 준다는 표현이 의심스러운 표현이다. 후세 繼嗣 다음의 두 글자가 석독이 불가능 한 자이므로 이를 ‘之王’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그런 표현이 맞는다고 해도 적절한 표현은 아니다. 이를 어긴 자의 후세자손까지 죄과를 묻겠다고 해석될 수 있다.
그리고 ‘看其碑文’은 본 비의 문맥으로 보면 연호두 20명의 이름이 새겨진 비문을 살핀다는 뜻으로 풀이해야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이에 반하여 대왕릉비에서는 令을 어기면 판 사람은 목을 베고, 산 사람은 制令(왕명)으로 묘를 지키게 했다고 명확히 규정했다. 이 형벌은 광개토대왕릉비에 실렸으나 장수왕이 내린 칙령이었다고 해석해야 온당하다고 판단한다. 이에 비하여 본 비는 처벌이 느슨해졌다고 할 수 있지만 그 당사자와 자손까지 罪過를 묻겠다는 것은 연좌제를 적용한 점에서는 더 강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10여년 후에 세워진 대왕릉비에서는 종결부분에 “其有違令 賣者刑之 買人制令守墓之”라고 해서 명확한 표현을 했다. 형지는 목을 자른다는 사형에 처한다는 엄한 형벌이다. 이는 현재 많은 사람이 광개토대왕의 말로 해석되고 있으나 이는 잘못이라고 판단한다. 물론 대왕릉비에 실려 있으나 이 비를 세운 장수왕의 制(칙령)의 부분으로 판단된다.
또한 ‘看其碑文’라는 표현은 그 비문을 육안으로 확인 대조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그 비문은 문맥으로 보아서 각왕의 능에 새겨진 烟戶頭의 이름을 새긴 비문 중 그 위반자가 기록된 비문으로 볼 수 있다. 본 비가 작성된 것을 광개토대왕대로 잡으면 불과 10여년의 차이인데 이처럼 왕명을 어긴 자에게 처벌하는 내용이 판이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없다. ‘看其碑文’은 뒤에 나오는 ‘與其罪過’와 대응하는 작위적인 문투라고 볼 수는 없을까?
그리고 대왕릉비문에서 이두문의 표현도 보이고, 우리말 어순으로 쓴 한국식 표현이 여러 곳에 보이고 있다. 예컨대 於沸流谷 忽本西 城山上而建都焉’과 “王臨津言曰 我是皇天之子 母河伯女郞 鄒牟王”은 우리말 어순에 따라 한문으로 쓴 한국식 한문 표현이다. 왜냐하면 “나는 황천의 아들이고 어머니가 하백여랑인 추모왕이다”로 해석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표현은 서두에도 또한 나오고 있다. ‘存時敎言’이란 어귀도 한국식 표현이다.
그런데 본 비의 문장에서는 이두문의 용례가 보이고 있지 않으며, 한국식 한문의 표현이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우리말 순으로 쓰는 문장은 유창한 한문보다 먼저 출현한다고 할 수 있다.
2.2. 본 비문의 내용적 검토
본 비문이 다루고 있는 내용을 전부 검토하지 않겠다. 대왕릉비와 관련된 부분과 본 비의 전체적 맥락에서 문제점이 되는 것을 다루고자 한다.
본 비는 선왕의 묘소를 수호하는 수묘인을 다룬 것이 중심이었다고 파악한다. 이는 본 비의 제3행에서부터 烟戶라는 문자가 보이고 있고, 제 10행 마지막까지 수묘인에 대한 서술로 종결되고 있다. 그 중간은 문자의 판독이 어려워 정확한 내용은 파악하기 어렵지만 신중한 판독을 제시한 임기환의 판독문에서도 제4행에 轉賣라는 글자를 분명한 글자로 파악하고 있고, 종결부분에서도 전매를 한 경우 죄를 묻겠다고 했다. 중간 부분이 완전히 해독이 되지 않지만 본 비에서 수묘인 제도에 문제점으로 나타난 것은 轉賣현상만을 일관되게 서술하고 있음은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비록 수묘인 제도에 변화가 있다고 해도 문제로 제기된 것은 본 비에서 다룬 초기 수묘인제도에서부터 생긴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
그런데 대왕릉비에서는 수묘인 제도의 문제는 수묘인의 역을 각자 맡은 역을 다른 곳에서 수행하는 소위 差錯현상(역이 섞이는 형산)을 중시했고, 수묘인 전매문제는 장수왕 2년 대왕릉비를 세울 때에 내린 칙령이었다. 이 칙령에서 금지한 轉賣문제는 선조의 묘상에 배치한 수묘인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대왕릉비에서 설정한 수묘인 330가가 생길 앞으로의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광개토대왕이 직접 세웠다고 볼 수밖에 없는 본 비에서 자신이 그토록 중시한 선왕 묘소에 배치한 수묘인의 차착 문제는 전혀 문제로 삼지 않았다.
본 비가 진실을 전하고 있다면 대왕릉비에서 대왕의 말로 인용된 사실이 선조 묘소를 지키는 수묘인의 문제에서 차착이라는 현상은 날조되거나 새로이 추가된 현상으로 해석하거나, 대왕릉비에서 선조 묘소의 수묘인의 전매 문제를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지 않음은 중대한 실수라고 해석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대왕릉비문의 내용은 상세하고 이 부분의 내용이 거의 전부가 정확하게 판독되고 있는 부분이고 그 진설성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따라서 장수왕 2년에 앞으로 일어날 문제인 수묘인의 전매문제를 광개토대왕 이전부터의 중심 문제로 다룬 것은 논리적으로 명백한 모순점이다.
실제로 각 릉에 정해진 수묘인 20명의 경우 이들은 舊民이었을 터인데, 이를 전매한다는 현상은 한정된 좁은 지역에서 그 숫자도 적기 때문에 큰 문제로 발생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국연과 간연 총 330가를 수묘인으로 정해 놓은 후에는 수묘인의 전매 문제가 예상될 수 있는 문제였다. 이의 지속적 유지를 위해 앞으로 생길 문제를 금령으로 조처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또한 각 선왕의 묘 위에 비석을 세워 그 담당 연호두 20명의 이름을 새겨 놓았다고 해서 수묘인이 수묘역을 수행함에 서로 뒤섞이는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닐 것인데 이에 관한 제재 조항은 본 비에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수묘인의 차착 문제는 이미 학계의 연구가 이미 있을 것이나 본고에서는 아직 참고하지 못했다.
수묘인을 매매한다는 것은 수묘인 당사자 人身을 뜻하기도 하고 그 직역을 뜻하기도 할 것으로 생각한다. 직역을 팔고 산다는 것은 그 수묘인에게는 생활기반을 보장하는 약간의 토지 경작권이 주어졌을 것으로 예상하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검토한 본 비의 문체적 특징이나 문장의 표현의 부자연스러움, 내용적으로 전체 논리의 모순점을 대왕릉비와 관련하여 지적했다. 그러나 이는 본 비가 후대에 위작되었을 증거는 첫째, 본비에서 광개도대왕이 선조의 능에 세운 수묘인의 문제를 수묘인의 매매로 파악한 것은 틀린 것이라는 점, 둘째, 수묘인의 매매금지를 중시한 본 비에서 처벌 규정이 모호하다는 점, 셋째, 선왕의 묘소에 입비하여 연호두 20명의 이름을 새겨 후세에 보일려 했다는 표현이 적절하지 못한 점, 그리고 수묘인을 전매하거나 매매할 수 없다는 표현은 대왕릉비문에서 따온 것이라는 점, 넷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비는 내용상 광개토대왕대 이후에 작성되었다고 볼 수 없다는 모순 점, 문체로 보아 고대의 한국식한문이 아니라는 점 등 을 지적할 수 있다.
2.3. 본 비의 명칭문제
지금까지 본 비를 연구한 한국학자는 거의 모두가 중국학자들이 명명한 명칭인 “집안고구려비”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이 비에 대한 공식적인 책자가 이 비명을 ‘집안고구려비’로 쓰고 있음을 따른 것으로 이해된다. 이를 굳이 문제 삼을 것은 없다. 그러나 그 명칭이 합리적인가는 한번 따져볼 필요는 있다. 대왕릉비를 한국에서는 ‘광개토대왕릉비’, 또는 ‘광개토왕릉비’로 칭하고 있고, 중국에서는 ‘호태왕릉비’로 일본에서는 ‘광개토왕릉비’로 달리 칭하고 있는 사례도 있고, 모두루묘지명은 한국학계와는 달리 중국학계에서는 冉牟碑로 달리 칭하고 있다.
더구나 우리나라에서는 신라의 고비의 명칭을 발견지역의 구체적 소지명을 붙여 ‘봉평신라비’, ‘냉수리신라비’ 등으로 발견 마을의 명칭을 붙이는 기존의 예가 있다. 그리고 ‘집안고구려비’라고 하면 개념적으로 ‘대왕릉비’도 포함될 개연성이 있다. 집안에는 11,300기의 고구려 고분이 있고 이곳은 400년간 國都였으므로 앞으로 비석, 묘지명이 더 새로이 나올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우리는 한국의 비명 명칭의 예에 따라 이는 집안 마선향이라는 명칭을 붙여 써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고구려라는 국호는 장수왕 15년경에 고려로 정식 개칭되어 멸망시기까지 사용되었다. 지금도 중국인 중에는 한국을 고려로 칭하는 사람이 많이 있으며, 소련정권에 의하여 우즈베키스탄에 강제 이주된 한국인을 고려인으로 칭하는 것도 왕건 고려가 아니라 고구려의 칭호에 연유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조선의 고려사 편찬자들이나 동국여지승람을 편찬한 관료학자들이 몰라서 고구려를 고려로 칭하지 않은 것을 현재 고구려를 고려로 칭한다면 역사이해에 혼란을 줄 수 있는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고구려의 국호가 고려로 개칭되었다고 해도 현재 고구려를 고려로 칭해야 한다는 필연적 당위성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사 통사나 고구려사를 다룬 역사에서 이를 언급조차 하고 있지 않는 상황과 동북공정이라는 중국과의 역사 전쟁을 치루고 있는 현 상황에서는 우리는 고구려를 고려로 칭함이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본 발표 제목을 집안마선향고려비로 칭하였다. 그러나 이를 굳이 고집할 생각은 없다.
3. 사상사적 검토
만약 본 비문이 고구려 시대에 만들어진 비석임이 금석학적으로 확실시된다면 사상사적인 검토를 하는 시각에 대하여 논하고자 한다. 이 비에 나오는 새로운 용어는 천도(天道), 원왕(元王) 烟戶頭의 세 단어이다. 이 중 앞의 두 용어와 관련된 부분만을 언급하고자 한다. 이 부분은 다행히 석독이 비교적 잘 남아 있는 서문의 3-4행 부분이다.
본 비문의 서문인 제3행까지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1 ? ? ? (世)世 必授天道 自承元王 始祖鄒牟王之創基也
2 (天帝之)子 河伯之孫 神靈祐護蔽蔭 開國辟土 繼胤相承
3 ? ? ? ?(墓上)烟戶 以安河流四時祭祀 然而世悠長 烟
이에서 1행의 네 글자 중 세 번째 글자는 이 비문이 파손으로 확인할 수 없지만 이 비문이 어느 한 왕의 묘소에 세운 비석이 아님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그리고 ‘世’ 앞에 올 한 글자는 ‘世’자로 추독해야 한다는 말도 앞에서 논했다. 석독이 불가능한 부분을 추독하는 것은 주장일 뿐이라는 언급을 한 사람도 있으나 앞의 석자를 상정한다면 ‘惟高麗’ 또는 ‘惟吾國’ 또는 ‘惟天帝’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이상의 3행을 내용에 단락을 다음과 같이 풀이할 수 있다.
(1) [고려(우리나라)왕은] 대대로 반드시 天道가 주어졌으니[天道를 내려주셨으니] 元王으로부터 이어받은 것이다.
(2) 시조 추모왕이 국가의 기틀을 만듦에는 천제의 아들과 하백의 손자로서 신령이 도와주고 음덕을 입어 나라를 열고 땅을 넓혔다.
3) 왕위를 맏아들이 이어서 서로 계승하였다.
4) 묘상의 연호... 하류... 사시 제사를 봉안하였다. 그러나 세대가 오래되어 연호가 ....
1)의 부분은 역대 제왕의 신성성을 뜻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이 왕위의 신성성을 말하는 天道와 원왕은 뒤에서 상세히 검토하겠다. 이는 비문의 선언적 提言이라고 할 수 있으나 종결부에서 이를 다시 다루어야 하나 그렇지 않다.
2)의 서술은 시조 추모왕의 혈통적 신성성과 신령의 도움을 받아 나라를 건국했음을 서술했다. 신령이 천신(천제)과 지신(하백), 인신(원왕)임을 앞의 서술에서 유추할 수 있다.
3)의 서술은 왕위를 장자가 계승하여 지금에 이르렀음을 뜻한다고 해석하고 싶다.
4)의 서술은 문자의 결락으로 분명한 해석을 할 수 없다. 묘상의 연호를 배정해 놓았다고 앞으로 해석되어야 할이지, 연호를 뒷 문장으로 붙여 제사를 받드는 것으로 해석할이지 판단할 수 없는 대목이다. 지금까지의 연구자들은 연호가 제사를 모심과 관련이 있다고 하여 대왕릉비에서 묘소의 청소를 담당한다는 표현과 달라 수묘인의 역할에 기능적 변화가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으나 이는 의심스러운 바이다. 수묘인은 삼국사기 신대왕 15년(179)조에 나오는 명림답부에게 수묘인 20가를 준 이래 그 역할에 큰 변화는 없었다고 생각한다. 수묘인은 묘소의 수호, 단장, 청소, 그리고 제사 때에 심부름 등을 하였을 것을 예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검토하여야할 문제는 제사라는 용어이다. ‘제사’라는 용어는 중국의 문헌에 일찍부터 사용되었으나 동사로 사용되지 않고 명사로 해석하여 왔다는 점이다. 중국에서는 ‘祭地祀天’이라 하여 지신과 천신에 대하여 제와 사라는 동사를 사용해왔던 것으로 알고 있다. 이는 천신과 지신, 인신에 대하여 올리는 행위를 통칭하는 명사임으로 이를 쓸 때에는 앞에 동사가 나와야 하는데 이를 ‘安’자로 보아 편안하게 한다로 제사를 도와준다고 하면 억설일가? 이는 연호가 왕릉의 청소(洒掃)를 맡는다는 대왕릉비의 표현보다 후대의 개념이 아닐가 생각한다.
이런 해석의 기초 위에 사상사적인 문제를 추론해보고자 한다.
3.1. 天道
이는 본인이 한국고대의 역사사상을 신이사관으로 보는 것을 비판하고 ‘天道史觀’으로 규정한 바 있다. 神異史觀은 삼국유사 기이편 서문에서 취한 용어이지만 신이 기사를 중시해 다루었다고 해서 고대인의 역사관을 신이사관으로 명명함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고대의 금석문에서 자료를 찾아보니 대왕릉비문의 ‘以道興治’ 진흥왕순수비의 ‘乾道’와 중원고려비에서는 ‘上下相和守天’로 표현되었다. 그리고 단군신화의 천손강림신화와 추모의 천손강림신화, 신라의 시조신화, 가야의 시조 신화가 천신강림사상을 낳게 하였다는 데에 근거한 것이다. 일연과 이승휴는 고대의 각국의 시조가 천제자인 단군의 아들로 서술된 것과도 관련이 있다고 파악된다.
이런 천도사상은 성리학이 발달한 조선조에 지배층에게는 수면 아래로 가라 앉아 보이지 않다가 민중 속에 침전되어 전하여 왔다. 19세기말 인내천을 주창한 동학의 종교운동이 부활되고 20세기 초 동학은 천도교로 명칭이 바뀌었다. 우리 애국가에 ‘하느님이 보우하사’라는 것으로 지어진 것과도 연관된다. 이에 대한 논의는 본 논지와 연관되면서도 빗나갈 염려가 있으므로 본 비에서 보이는 천도란 표현의 의미를 천착함에 집중하고자 한다.
천도를 중국학자들은 동중서의 천도론과 연관시키고 있고 여호규, 조우연도 원왕을 천왕과 연관시켜 동중서의 천도론과 元氣론으로 해석하였다. 元王이란 용어는 중국문헌에는 보이지 않는 새로운 단어이다. ‘元’자는 여러 가지 뜻이 있으나 으뜸 시작, 하늘이란 뜻이 중심적 기본 의미이다. 고구려인이 지금 사전에 나오는 다양한 뜻을 알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원왕은 왕을 낳게한 첫 왕이라는 뜻이다. 고구려인이 왕조가 망할 때까지 왕이란 칭호, 대왕이라는 칭호를 가지고 황제라 칭하지 않은 것은 중국을 의식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천제를 의식했기 때문으로 생각한다. 중국황제를 의식하지 않았다는 증거는 고구려가 광개토대왕대 이후 계속 독자적 연호를 사용했고 자신들이 다스리는 나라를 천하로 칭한 것으로 입증된다. 또한 천제의 아들 하백의 손자라는 신화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유교적 불교적 세계관을 받아들였다. 발해에 의하여 연호와 천하관이 계승되었으며, 고려조까지 계승되었고 4대 광종은 황제라 칭하기도 했고, 연호를 사용했다. 왕후를 황후, 태자, 制와 詔, 칙이란 중국 황제가 사용하는 용어를 그대로 사용했다. 유교적 정치를 표방한 성종대에 스스로 왕의 용어를 낮추어 사용했다. 천하라는 용어는 지배층에서는 사용하지 않고, 국내, 경내로로 칭하여졌으나, 민중에는 그 의식이 살아남아 계승되어 왔음을 ‘천하장사씨름대회’라는 명칭이 입증해준다.
고구려인은 인간세계를 다스리는 最高의 존재를 ‘왕’으로 인식했고, 태왕 또는 대왕이라는 용어는 왕중왕이란 뜻이다. 하늘님이란 것을 한자로 표현할 때 천제라 했다. 왕이 인간을 다스림에 다스리는 방법, 그 원리를 도라고 표현했다. 고구려에서 하늘님에 대한 제사는 국중대회로 열었다. 천제는 하늘에 계시지만 지상에 내려와 추모와 다리를 놓아 주는 사람을 원왕이라 했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원왕이나 천도는 고구려인의 하늘 숭배사상을 뜻한다고 생각한다.
동중서의 사상을 따온 것이라고 하기에는 고구려에게는 중국의 유교문화의 기반이 약했다. 동중서에서 따왔다면 그의 춘추번로라는 책을 인용할 필요가 없이 한서 동중서 전을 읽어도 천도와 元이라는 용어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한서 그의 전에 나타난 유학사상은 당시 고구려 사회에 적용하기에는 쉽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동중서는 한 무제에게 무치나 법치보다 어진 선비를 기르라고 강조했고, 높은 지위에 있는 무제에게 진시황의 법치나 형벌을 통한 다스림보다 인의예지신의 유교적 원리를 강조했다. 그리고 공자를 여러 번 언급하면서 천하를 다스리는 유교적 방식을 제안했다. 높은 황제를 견제할 수 없으니 자연의 변이가 정치와 연관되어 황제가 자숙할 것을 경고한 것이다.
그런데 고구려에서는 당시 유교의 그런 사상을 수용할 만한 문화적 여건이 성숙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대왕이 다스리는 백성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고구려 나름대로 백성을 다스리는 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고구려에서는 제천대회라는 국중대회를 통해 백성의 마음을 국가와 왕으로 모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시조를 보내준 하늘에 감사하고 농사와 생업을 잘 되게 하기 위해 하늘에 빌었다. 고구려에서는 하늘만이 아니라 지신의 대표자라고 하는 하백의 손이라는 신화를 가지게 되었다. 천손강림사상은 비록 논리적 체계화에는 큰 진전을 보지 못했지만 왕족은 혈통적으로 하늘님과 연계되고 물의 신인 하백과 연계된다는 신념을 가졌고, 이는 고분 벽화에서도 나타났고, 백성들에게도 전파된 것을 모두루묘지명이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고구려의 하늘 숭배는 독자적인 천문관측을 했음이 밝혀지고 있다.
고구려는 왕들의 묘가 중국과는 다른 거대한 적석총으로 이루어졌다. 이를 한자로 표현하자니 墓라고 했다. 아마 당시 고구려인인 읽는 방식은 묘라고 표기하면서도 달리 읽었을 가능성이 높다. 일본서기에서 고구려의 고려를 고마로 읽는다고 했다. 일본어는 종성이 없기 때문에 이는 곰이라고 불렀던 것을 그렇게 읽었다. 곰은 한자로 쓰면 熊이지만 곰이란 신이란 뜻이다. 곰, 감이라는 말이 신을 뜻하는 말이다. 일본에서는 고려를 신의 나라라로 칭했던 것임을 파악할 수 있다. 가야라는 말도 감이란 신이란 뜻에서 나왔다고 한다. 高麗, 貊을 일본서기에서는 모두 고마로 읽는다. 고려의 중국식 발음에 따라 고리라고 읽어야 한다는 것은 후일의 음독을 말할 뿐이다.
우리에게도 신궁제도가 있었음을 고구려와 신라에서 확인할 수 있고, 神祠제도도 고려조에 있었음을 확인되고 있다. 신라에서 종묘제도가 수용되었지만 골품제도가 유지된 멸망 때까지 종묘보다 신궁의 위력은 여전히 지속되었다고 짐작된다. 우리나라는 천손족이라는 중국과는 유형이 다른 천제강림신화를 가지고 있다. 이는 우리만이 아니라 일본, 여진, 몽고의 동이족의 공통된 신앙이었다. 중국은 유교문화의 진전으로 시조신화가 감응신화형태로 나타났다. 천제강림신화는 국왕이 죽으면 崩했다고 쓰지 않고 승하했다고 했다. 이는 한자로 쓴 말이지만 하늘로 돌아갔다. 올라갔다는 뜻을 이렇게 표현했다고 본다.이런 표현이 시조만 남겨두고 ‘붕’으로 구삼국사 단계에서 고쳐 썼고, 삼국사기에서는 시조 외에는 ‘薨’이란 표현으로 고쳐 썼으나 삼국유사에서 왕력에는 왕의 죽음 기사는 없고, 즉위 재위는 몇 년만 기록했으나 기이편에서는 모든 왕의 죽음을 ‘붕’으로 썼다.
거대한 적석총 문화를 가진 국가가 무력만으로는 언제까지 버틸 수 없다. 고구려인이 왕릉을 얼마나 중시하였는가는 왕호를 장지명으로 정한데서 확인된다. 백제와 신라에서 왕의 생존시에 왕의 이름으로 칭했듯이 아마 고구려도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하나 그 증거자료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고구려가 선진문화를 수용해야 하는 데 너무나 고유습속이 강하여 유교문화를 수용함이 어려웠던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 선진문화는 유교, 불교, 도교 및 제자백가 사상이었다. 형식적으로는 선진문화의 수용이 이루어졌음을 고분에서 석가모니불제자가 주공, 공자, 무왕을 부려 자리잡고 날자를 정했다고 했다. 유교는 정치이념으로 작용할 뿐만 아니라 생활 습속까지도 관여하였므로 신앙만을 강조하는 불교에 비하여 그 전체를 수용하기에는 불교보다 유교가 약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유교는 선별적으로 장점을 수용했을 뿐 유교의 기본 정신을 그대로 수용하기에는 신분제나 족장적 유제가 강했던 고대 국가에는 어려웠다고 판단된다.
중국식 제사법을 받아들이는 것은 무덤의 방식을 고수하는 것처럼 생활예속 중 가장 보수적인 성향이 강한 부분이다. 우리는 본 비에 나오는 제사가 어떤 내용인지 어떻게 치러졌는지를 문헌으로는 밝힐 수 없지만 그 특이했다는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아마 사냥을 한 짐승을 차려 놓고 하늘에 대한 제사와 지신인 하백의 신, 그리고 조상 신을 함께 지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천도사상은 이렇게 고구려인이 믿었던 신의 후손이라는 사상, 제천대회의 생활습속을 한자로 요약한 것이 천도라고 생각한다. 대왕릉비에서 유류왕이 도로써 다스렸다는 표현이 하늘의 도라는 표현을 쓴 것과 비교하면 천도가 단순한 도의 표현보다 뒤에 나타난다고 보는 것이 순리하고 생각한다. 그리고 시조 추모왕은 인간이었다. 이를 천제와 연결지으려고 추모의 아버지를 원왕이라고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기존 연구자는 천도와 원왕을 동중서의 춘추번로 라는 책에서 유래했다고 했다. 천제라는 표현이 인격신적인 요소가 강하다면 원왕은 만물의 본원인 원기라는 뜻에서 유래한 표현으로 고구려 건국원천의 심원성을 나타내기 위한 조어로 파악하였다. 또 원이 元氣나 天을 뜻하므로 ‘원왕’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천왕이라 할 수 있으며 「동명왕편」의 天王은 원왕도 상응하는 표현이라 하였다.
춘추번로의 사상과 연관지으려면 이 책이 당시 고구려에 전래되었는가에 대한 서지학적 연구가 뒷받침 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동중서의 춘추번로는 물론 다른 기록에서 元王이란 존재는 보이지 않는다. 또한 원왕과 같은 의미로 파악한 천왕을 원기론으로 설명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본 비에서 말하는 천도는 중국의 천도론의 수용이라기보다는 고구려의 전통적인 습속인 국중대회인 제천대회에서 행하는 ‘하늘 제사’, 천제자의 아들이 직접 강림하였다는 신화, 고분벽화에서 일월지자로 표현되고 설명된 고구려인의 자연천에 대한 믿음과 관련지어 풀어야 한다. 고구려인은 하늘의 도를 철학적 사변적으로 논리를 전개되지 못하였으나 이 세상에서 至高至善의 도를 의미하며 地神과 人神을 포함한 만물의 신을 그 휘하에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비록 고구려에서 천도에 대한 사변적 논리를 전개한 바는 없지만 당시 신민들이 모두 신앙적으로 믿었던 관습적 사상을 한자로 표현하자니 천도라고 지칭했다고 본다. 이는 일본의 神道라는 칭호와 유사한 개념이다.
자연인 하늘을 주재하는 존재로서 하느님을 숭배하는 것은 우리민족 만이 아니라 세계인들의 보편적 경향이었다, 그러나 이런 천손강림 신화는 한곳에 오래 정착한 민족보다는 삶의 터전을 다른 지역으로 옮긴 종족에게 유독 강하였다고 할 수 있다.
중국에서는 학문의 진전으로 이런 자연 천의 개념이 상제인 인격신의 개념으로 설정하여 군주를 제왕으로 명했다는 天命思想으로 발전하지만 고구려에서는 천도 사상을 천명사상으로 풀이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
3.2. 元王
이는 중국의 전고에 나오지 않는 용어이다. 필자는 단군신화의 환인-환웅-단군의 3단 으로의 신화 재편이 5세기에 이루어졌을 가능성을 제기한 바 있었는데, 본 비에서 천제와 추모 사이에 새로이 등장한 원왕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조우연은 원왕의 의미를 ‘원’이라는 시호와 연관을 맺었다. ‘始建國都曰元’이라하여 처음 나라를 세운 왕이나 개국과 연관된 조상을 칭하는 용어로 파악하였다. 그 예로 전한시기 초원왕, 서진의 무원왕, 북연 원황제(풍발의 조부 풍화에게 추존), 북위 원제(도무제시기 拓跋俟에게 추존)를 들었다. 따라서 시조추모왕보다 앞서 언급된 원왕은 북부여 건국자인 해모수일 가능성을 타진하면서, 해모수가 등장하는 고구려의 건국신화가 고구려가 망한 이후가 아닌 그 이전에 형성되었을 가능성도 제기하였다.
원왕은 중국에서도 용례가 몇 안되지만 한국에서는 馬韓 元王이 유일하다. 마한 원왕은 안정복의 동사강목, 부권, 고이, ‘기준자우량모한씨’조에 보인다. 안정복은 덕양기씨보를 인용하여 마한 원왕의 세 아들이 고려, 백제, 신라로 건너가 각각 북원 선우씨, 덕양 기씨, 상당 한씨가 되었다고 서술하였다. 원왕과 같은 의미로 추정되는 元君은 삼국유사 가락국기에서 가락국수로왕을 칭하는 용례로 나온다. 원군은 가락국 시조인 수로왕처럼 건국의 시조에게 붙이는 왕호로 보인다. 단순히 시조라는 뜻만이 아니라 하늘의 혈통을 받았다는 뜻이 내재되어 있다. 가락국기에서는 천도 대신 神道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마한 원왕의 원왕도 마한을 건국한 준왕의 왕호로 볼 수도 있고 준왕의 아버지 왕을 칭할 가능성도 있다. 따라서 집안비의 원왕의 후보자의 하나로 부여 해모수를 상정하는 것은 충분한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기록에 의하면 해모수의 아들이 추모, 단군의 아들이 추모, 해모수의 아들이 부루, 단군의 아들이 부루, 하백녀의 딸이 부루, 해모수와 연계되어 주몽을 낳았다고 하는 여러 가지 전승이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 이는 고구려의 역사계승이 부여와 고조선 양쪽에 닿아있기 때문이다. 전고려에서 고조선을 강조하는 쪽에서는 단군, 부여를 강조하는 쪽에서는 해모수를 내세웠을 것이다. 그 두 전승이 삼국유사 왕력에서는 단군의 아들로, 삼국사기와 동명왕편에서는 해모수로 나타났다. 어쩌면 처음에는 고조선-부여-고려로 이어지는 역사계승관계일 수도 있다. 즉 단군-해모수-주몽의 관계도 설정해 볼 수 있다. 원왕은 해모수나 단군 둘 중에 하나 일 수도 있지만 둘 다 칭하는 용어일 수도 있다.
원왕을 추모에 앞서는 왕으로 보았을 때 본 비는 [천제]-원왕-추모로 이어지는 신화의 3단구조와 능비와 모두루묘지에 보이는 천제-추모로 파악한 2단구조보다 발전된 형태로 보아야 한다. 본 비의 [천제]-원왕-추모의 3단구조는 언젠가 천제-해모수-추모 또는 천제-단군-추모의 3단구조로 발전되었을 것이다. 함경남도 신포시 오매리 절터에서 발굴된 금동명문판의 天孫도 천제-단군/해모수-추모로 이어지는 3단계의 입장에서 왕(족)을 천손이라고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2단구조도 생명력이 길어 삼국사기에서 추모의 아버지를 해모수라고 하면서 서술에는 天帝之子라는 말도 보인다. 동명왕편에는 정확히 추모를 해모수의 자, 천제의 손이라 하고 있다.
3.3. 始祖鄒牟王과 聖王
추모왕은 전고려를 건국한 시조이다. 그에 대한 왕호는 추모왕, 추모성왕, 동명성왕, 동명제 등 다양하다. 지금까지 가장 빠른 왕호는 대왕릉비의 추모왕이다.
반면 집안의 모두루묘지에서는 추모왕을 鄒牟聖王이라고 하고 있다. 묘지의 ‘隨聖王’ ‘國崗上大開土地好太聖王‘의 성왕은 광개토대왕을 말한다. 추모왕과 광개토대왕을 모두 성왕이라 하고 있는데, 이 성왕이란 칭호는 광개토왕 때 혹은 장수왕 때부터 사용 내지 추존된 것으로 보인다. 삼국유사 ’요동성육왕탑‘조에는 요동에 육왕탑을 세운 고려의 성왕을 세간에서는 동명성왕이라고 한다는 내용을 싣고 있다. 물론 육왕탑을 실지로 세운 전고려의 聖王은 고국양왕 혹은 광개토왕대왕으로 추정하고 있다. 성왕의 의미에 대해서는 불교의 전륜성왕 의미로 파악하기도 하지만, 유교의 성왕의 의미도 포함된다. 또한 이규보의 동명왕편에서 동명왕 이야기가 鬼가 아니고 聖이고, 幻이 아니고 神이라고 한데서 알 수 있듯이 전고려 전통의 천도사상에 바탕한 것이기도 하다. 대왕릉비의 生而有聖의 聖도 이에 가깝다. 여러 가지의 聖의 의미가 불교의 전륜성왕이념이 들어오면서 聖王이란 왕호로 모아졌고, 그 전륜성왕의 성왕의 의미에는 유교사상과 천도사상이 함께 녹아 들어있는 것이다.
같은 집안에 위치하고 있는 대왕릉비, 본 비, 모두루묘지에서 추모를 추모왕 또는 추모성왕이라 달리 부른 것은 작성시기의 선후관계로 볼 수 있다. 곧 먼저 세워진 대왕릉비와 본 비에서 추모왕이라 한 것을 모두루묘지에서는 추모성왕으로 격을 높였다고 볼 수 있다.
3.4. 古人之慷慨
집안 고려비의 건립시기와 관련하여 古人之慷慨가 논란이 되었다. 張福有는 본 비의 古人之慷慨는 도연명의 ‘感士不遇賦’의 伊古人之慷慨에서 나온 말로, 그 부의 작성 시기를 고려할 때 본 비는 광개토왕이 아닌 장수왕 때 작성된 것으로 보았다.
이에 대하여 조우연은 도연명의 시가 남북조시기에도 주목받지 못했으며 당나라 때 이르러서야 널리 인정받고 알려지게 되었다고 하면서, 도연명이 은거하던 407년 혹은 416년 무렵에 지은 것으로 알려진 ‘感士不遇賦’가 단기간에 멀리 고려까지 전래되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하였다.
한편 여호규는 ‘感士不遇賦’의 작성시기가 415년 이후라면 비석의 건립시기도 그 때 이후로 볼 수도 있다고 하였다. 하지만 ‘感士不遇賦’의 古人之慷慨의 강개와 비문의 古人之慷慨의 강개는 그 의미가 다르다고 하면서 비문의 찬자가 ‘感士不遇賦’를 참조하지 않았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었다. ‘감사불우부’의 강개는 비분강개[분개]를 뜻하는 반면 비석의 강개는 선왕의 공훈을 추술한 부분에 나오므로 분개보다는 ‘강인하고 굳센 성격’을 뜻한다고 하였다.
도연명의 ‘감사불우부’가 과연 전고려에 언제 알려졌는가의 문제는 쉽게 속단할 문제가 아니다. 남조 양의 소명태자(501~531)가 도연명의 시를 모아 도연명집을 펴냈는데 ‘감사불우부’도 여기에 실려 있다. 소명태자는 또한 문선을 편찬한 것으로 유명한데 여기에는 도연명의 작품이 8편 실려 있다. 물론 문선에는 ‘감사불우부’가 실려 있지 않지만, 적어도 6세기 초에 도연명의 작품이 주목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장복유는 본 비를 427년 장수왕 15년 이후에 작성된 것으로 보고 있어, 그때 도연명의 ‘감사불우부’가 고려에 알려졌을까 주저되는 감이 있지만, 장수왕 때(412~491)때나 그 이후로 비의 제작연대를 내려 본다면 비문의 ‘고인지강개’가 도연명의 ‘감사불우부’에서 따왔을 가능성도 높다.
또한 여호규와 조우연은 ‘감사불우부’를 포함한 도연명의 작품에 나오는 강개는 ‘애탄’ ‘비분’ ‘분개’의 의미로 사용된 반면 비문의 강개는 ‘강인하고 굳센 성격’이라고 하여 의미가 서로 다르므로 비문이 도연명의 ‘감사불우부’를 보았을 가능성은 매우 적다고 하면서 비의 작성 시기를 광개토왕 때로 보고 있다.
그런데 도연명의 작품에 나오는 강개가 과연 그러한지는 재검토가 필요하다. ‘감사불우부’란 말 그대로 ‘선비가 불우한 시대를 만나다’란 뜻이다. 선비가 불우한 시대를 만나 애탄하고 분개하는 분위기가 드러났지만, 그것은 겉에 드러난 모습이다. 선비의 본래의 마음은 ‘강인하고 굳센 성격’이었는데 天道가 행해지지 않아 자기의 뜻을 펼 수 없음을 안타까워 하는 것이다. 도연명은 동중서의 士不遇賦와 사마천의 悲士不遇賦를 읽고 세상에 뜻을 펼치려고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 것에 강개하여 글 속에 나마 이를 남기고자 한다고 하였다. 글 속에서 그는 ‘천도는 치우침이 없다[曰天道之無親]하고 항상 선과 인을 補佑[恒補善而佑仁]한다고 하였는데 가의, 동중서, 백이, 숙제의 예를 들며 하늘의 도는 치우침이 없다는 말이 거짓말인가 두렵구나’라고 반문하고 있다.
비문의 ‘고인지강개’는 ‘追述先聖功勳 彌烋高烈 繼古人之慷慨’란 구절에 들어가 있다. 해석은 ‘고인의 강인하고 굳센 성격을 이어받아’로 되겠는데, 이 해석의 행간에는 天道를 행하고자는 하는 고인의 강인하고 굳센 성격에도 불구하고 이것에 역하는 곧 逆天道하는 무리를 징계하려고 하는 비분강개의 의지가 숨어있다고 볼 수 있다.
4. 맺음말
처음 이 논문을 쓰려고 한 것은 본인이 쓴 한국고대사학사에서 한국고대의 역사관은 천도사관이라고 규정한 자료이었기에 천도사상을 다루고자 함에서 출발하였다. 본 비에 대한 전체적 인상은 마지막 구절인 違令者를 看其碑文하여 與其罪過한다는 대목에서 의심스러워 고대사학계의 두 원로교수에게 진위에 대한 소감을 물어보았다. 그런데 모두 진품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발표를 결심했다. 발표논문을 쓰면서 본 비에 대한 논문을 20여편을 읽어 보았다. 본 발표자 두 사람이 여러 차례 만나 의논을 하는 과정을 가졌다. 최후의 모임에서는 아예 진위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논문으로 전환하는 것이 어떠냐는 의견을 나눈 바 있다. 그러나 탁본도 보지 못하고 현장을 가본 적도 없는 본 발표자들이 본 비문의 위작설을 제기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했다. 본 비문이 진품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대로 긍정 반 부정 반의 형태로 발표하기로 했다. 그래서 본 발표문은 앞뒤가 맞지 않는 어정쩡한 논문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본 비는 대왕릉비의 내용이 알려진 후에 누군가에 의하여 조작된 위작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는 소감을 결론으로 제기하고자 한다.
첫째는 본 비의 문체가 4구 단위로 써졌고, 이에는 한국식 한문형식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둘째는 본 비와 대왕릉비와 대조를 한 결과 선왕묘소의 수묘인에 대한 문제 파악에 큰 문제가 있다는 점을 발견하였다. 이는 본 비는 광개토대왕이 선왕의 묘소에 비석을 세운 수묘인 문제가 대왕릉비에서는 수묘인의 差着문제였는데 본 비는 선대왕의 묘 위에 비석을 세우고 수묘인의 이름을 새기어 놓은 것을 중심으로 다룬 비석으로 전매를 금지함을 알리는 비석이라고 판단했다. 본 비에서 선왕의 묘소에 배치한 수묘인의 문제가 처음부터 轉賣문제인 것으로 서술되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는 대왕릉비문에서는 선왕의 묘소에 배치한 수묘인의 문제는 수묘인들이 차착(뒤섞임)을 문제로 파악하였을 뿐이고, 수묘인의 전매문제는 장수왕이 대왕능비를 세우기 전후 국연, 간연을 합쳐 총 330가의 왕릉 수묘인을 배정한 후 생길 것으로 염려한 문제였다고 파악했다. 이런 파악이 타당하다면 이는 본 비가 가지는 내용적 모순점으로 본 비를 위조된 것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기하는 결정적 단서이다.
금석학적으로 더 확정적인 단서를 잡아야겠으나 이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만약 진품이라면 장수왕대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논리를 개발하여야 하는 데 현재 학계에서는 광개토대왕대에 쓰여진 비석으로 보고 있다. 여러분의 기탄없는 질정을 바란다.
이런 결론을 내면 한국고대사학계에서는 화랑세기의 진품문제로 큰 파문을 일으킨 것과 같은 역현상이 벌어질 것이다. 이런 발표를 해도 한국고대사학계에서는 본 발표의 결과를 좀처럼 긍정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의 학설에 유리한 자료라고 하여 전체를 맥락을 보지 않고 글자 중심으로 천착하는 한국사학계의 학문적 풍토의 개선에 도움을 준다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천도사상은 중국 사상을 도입한 것으로 보는 시각에서 벗어나 고구려의 관습인 제천대회, 천제강림신화, 천손설, 일월지자로 표현된 고분벽화의 사상을 대변해 주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본 논문에서는 중국 학계에 진품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당당한 공개를 요청하는 뜻도 있다. 본 비가 현 소유주는 중국이지만 그 내용은 한국의 것이기 때문이다. (2014.06.10)
붙임1. 본 비 전문
1 ●●●●[世]世必授天道 自承元王 始祖鄒牟王之創基也
2 ●●●[天帝之]子 河伯之孫 神靈祐護蔽蔭 開國辟土 繼胤相承
3 ●●●⼞⼞烟戶 以(安)河流 四時祭祀 然而世悠長 烟
4 (戶守)⼞⼞烟戶⼞⼞⼞富足⼞轉賣⼞⼞守墓者以銘
5 ⼞⼞⼞國崗上太王 ⼞平安⼞王神亡⼞⼞ (興)東西
6 (廟)⼞⼞⼞[世]室 追述先聖功勳 彌高悠烈 繼古人之慷慨
7 ⼞⼞⼞好(太聖)王曰 自戊⼞定律敎⼞ 發令其修復 各於
8 (先王墓上) 立碑銘其烟戶頭卄人名 以示後世 自今以後
9 守墓之民 不得擅(買) 更相轉賣 雖富足之者 亦不得其買
10 賣 如有違令者 後世(繼)嗣⼞⼞ 看其碑文 與其罪過
붙임 2. 광개토대왕릉비문 중 帝勅 부분
自上祖先王 墓上不安立碑 致使守墓人烟戶差錯 唯國罡上廣開土境好太王 盡爲祖先王 墓上立碑 銘記烟戶 不令差錯 又制 守墓人 自今以後 不得更相轉賣 雖有富足之者 亦不得擅買 其有違令 賣者刑之 買人制令守墓之
첫댓글 작년 말에 나온 정구복 선생님의 <집안 고구려비 진위론> 논문 말미가 의미심장합니다.
"추고 본 논문은 한국고대사학회에서 발간하는 한국고대사연구 에 게재신청을 하였으나 심사위원 두 사람이 위작이라면 어떤 동기로 누가 위작한 것인가를 밝혀야 한다는 등의 요지로 다음호에 수정 후 재심사를 받으라는 판정을 받아 게재가 거부되었다. 그러나 그 문제는 본고의 취지에 어긋나는 것이기에 그 심사 결과를 그대로 수용할 수 없다. 그래서 자구의 일부수정을 하여 학계의 질정을 받고자 본 학회지에 제출하며 경철화 씨에게는 본 내용에 대한 학문적 논쟁을 제의하는 바이다."
개인적으로 정선생님이 말씀하신 바와 같이 심사위원들의 지적은 핀트가 어긋났다고 생각합니다. 애시당초 누가 어떤 동기로 위작을 만들었는지 밝히는 게 가능했다면 이 논문은 나올 필요가 없지 않을까요..?
아무튼 정선생님이 지목하신 경철화 선생을 비롯한 중국학계와 집안 고구려비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진지 얼마 안 되어 논문들을 쓰신 한국의 여러 학자 분들의 반응이 궁금해집니다.
@明治好太王 위조를 해서 이익을 얻는 집단에 대한 해석이 있어야 왜 위조를 했는지에 대해서 납득을 할 수 있고 위조가 있었을 개연성이 있는지 없는지 판단이 가능하니까 위조 집단 특정이 필요하죠. '그냥 내 해석에 안맞으니 위조다. 해석이 안되니 위조다. 근데 그런 위조를 왜 했는지는 모르겠다.'라고 하면 모든 금석문은 내 입맛대로 취사선택이 가능하죠.
@버섯모듬 단순히 해석상의 문제가 아니라 집안 고구려비는 고대적인 한문투가 아니라 근대적인 한문투로 진위 여부에 의심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봅니다. 중국의 수많은 위서들 중에서도 누가 그 위서를 만들었는지 알 수 없는 경우도 많습니다. 당장 동천왕 벽비도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지요. 꼭 위서의 저자를 밝힐 수 없더라도 위서로 판단한 데에는 그 내용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다른 학자들의 반론이 기대됩니다.
@明治好太王 논문심사위원을 설득할 수 없었다는 건 일차적으로 논문의 논리 구조가 약했다고 생각해야지 심사위원을 의심하거나 공박하는 자세는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만. 뭐 제가 직접 논문을 본 것도 아니니 더 말씀드리지는 않겠습니다.
심사위원 분들이 논문의 논리 구조가 아니라 핀트에 어긋난 지적을 했기에 정구복 선생이 저러한 언급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논문에서 저런 언급하는 것은 매우 드문 경우인데, 아무쪼록 논문의 일독을 권합니다.
@버섯모듬 한국고대사학계에서 논문심사위원들이 100% 공정하다고 믿는 이 분 생각이 참 순진하군요.
@다물전사 학계가 무슨 양아치 동네 지역구 관리하는 곳도 아닌데 일부러 논문 게재를 막습니까. 그리고 설령 그런 사람이 존재하더라도 논문 에디터가 그걸 걸러낼 권한이 있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