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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21일 연중 제28주간 토요일
제1독서 : 로마 4,13.16-18
복 음 : 루카 12,8-12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9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는 자는,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10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모두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11 너희는 회당이나 관청이나 관아에 끌려갈 때,
어떻게 답변할까, 무엇으로 답변할까, 또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12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 주실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운전하다가 라디오에서 ‘고마리’라는 식물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 이름의 유래는 너무 번식력이 강해서 ‘그만, ’고만‘에서 비롯되었다고 하고,
또 하나는 더러운 물을 정화해 준다고 해서 ’고마운, ‘고마우리’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이 식물은 더러운 시궁창에서도 잘 자란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더러운 시궁창의 물을 깨끗하게 정화해 준다는 것입니다.
문득 ‘고마리’도 깨끗하고 모든 환경 조건이 만족스러운 곳을 좋아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환경이 아니더라도 ‘여기는 도저히 못 살겠어.’라면서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오히려 자기 주변을 정화하면서 변화시킵니다.
물을 깨끗하게 하고, 그래서 벌이 날아오게 하면서 자연을 아름답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우리 곁에도 ‘고마리’의 모습을 닮은 사람이 참 많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자기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기보다는 스스로 노력해서 자기 주변을 변화시키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리고 어떤 시련과 어려움이 찾아와도 포기하지 않으면서 주변을 아름답게 만들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이런 분이었지요. 이 세상에 악이 얼마나 많이 판치고 있습니까?
그 ‘악함’ 속에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강림하신 예수님,
그리고 당신의 사랑을 통해 악을 이기고 세상을 더 아름답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직접 모범을 보여 주셨다고 했습니다.
이는 우리도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시궁창처럼 더럽고 냄새나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좌절하지 않으면서
철저한 사랑의 실천으로 아름다운 곳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저희에게는 그런 힘이 없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세상의 악이 우리를 박해하면서 온갖 고통과 시련을 주더라도
성령께서 함께하시기에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무엇으로 답변할까, 또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 주실 것이다.”
주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의 삶을 우리는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아픔과 상처를 남기는 많은 말과 행동이 우리를 힘들게 하지만,
성령께서 함께하시기에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말씀도 하시지요.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모두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성령의 움직임을 무시하고, 성령의 능력을 믿지 않거나,
자신뿐 아니라 세상 사람들을 희망 없는 절망으로 몰아넣는 이는 절대 용서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앞서 고마리의 모습처럼, 용기 있게 주님 사랑을 이 세상에 나갈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한 기본적인 조건은 희망이다.
희망이 없다면 우리는 시들어 결국 말라 죽고 만다(세스 고딘).
하늘은 지상에서 열립니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가끔 낯선 곳을 가면 다른 사람이 먼저 나를 알아주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내가 누구라고 먼저 소개하며 인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색한 분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은 적극적으로 자기를 알리는 것입니다. 그래야 상대방도 편안해합니다.
그리고 어떤 처지에서든지 당당히 자기를 알리고 그 이름에 걸맞은 품위를 지키는 것이 필요합니다.
더욱이 신자로서 신자임을 드러내고 다른 사람에게 다가간다면
나의 모든 것이 예수님의 손길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루카12,8).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안다고 말하면 예수님께서도 그를 안다고 하시겠다는 의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의 잇속을 차리려고 누구를 잘 아는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안다고 하는 것은 손해가 오더라도 그를 안다는 마음에 변함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선조들은 하느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히고 많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하느님을 모른다고 한마디만 하면 자유를 누릴 수 있는데도 목숨을 걸었습니다.
사랑하는 하느님의 마음을 상해드리지 않기 위해 자기의 목숨을 내놓았습니다.
신앙을 지킨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때로는 믿지 않는 사람으로부터 무안을 당할 수도 있고, 자존심에 상처를 입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때야말로 믿음을 드러낼 때입니다.
간혹 식당에서 보면 십자성호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을 보게 됩니다.
다른 사람이 볼까 조심스럽게 가슴에 열 십자를 긋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표현은 확실히 해야 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하고 성호경을 하면서 십자가를 긋는 것은 신앙 고백입니다.
따라서 십자성호를 할 때 믿음을 담아 바르게, 당당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에 걸맞은 품위를 지켜야 합니다.
마태복음 18장 1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하셨습니다.
우리가 땅에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하늘나라가 결정된다는 뜻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는 것’은 이미 이 세상에서의 삶이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이 순간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여기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합니다.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마태16,27).
하늘은 이미 땅에서 열립니다.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이 지상에서의 삶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못한다면
바로 그 순간이 성령을 모독하는 때입니다.
하느님의 거룩한 영이 뜻하는 바를 삶으로 거부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하느님을 고의로 거부하는 것은 그분의 선물을 팽개치는 것입니다.
그 자유조차 존중해 주십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의 품위를
지금 여기서부터 지키며 행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2023년 ‘한가위’는 ‘미카엘, 가브리엘, 라파엘’ 축일과 겹쳐진 날이었습니다.
그날 미사는 축일 미사 대신에 ‘한가위’ 미사로 하였습니다.
‘한가위’는 우리 민족의 명절이기에 천사들의 축일이 양보하였습니다.
명절에 밀려서 축일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명절을 축하하기 위해서
천사들이 기꺼이 양보하였다고 생각하니 착한 일을 한 것이 알려진 것처럼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날 강론에서 신부님은 ‘한가위’의 의미를 이야기하였습니다.
한가위는 다가올 겨울을 준비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봄에 씨를 뿌린 농부가 첫 수확을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수확한 것을 이웃들에게 나누는 것이 한가위인 것처럼
우리들의 삶도 영원한 생명을 준비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부자가 자신의 재물을 창고에 쌓아놓고 이웃과 나누지 않는다면 하늘나라에 갈 수 없듯이,
우리는 재물을 하늘의 창고에 쌓아야 합니다.
하늘의 창고는 우리 중에 가장 가난하고, 가장 헐벗고, 가장 굶주린 이들 가운데 있습니다.
2023년 한가위에 ‘이민자들들 위한 행사’가 있었습니다.
이민자들이 많은 브루클린 교구에서 이민자들의 공동체를 초대해서
공동체를 위해 헌신한 봉사자를 시상하는 행사입니다.
브루클린 교구에는 한인 공동체가 4곳이 있습니다.
가장 크고 역사가 깊은 퀸즈 정하상 바오로 성당, 베이사이드 성당,
우드사이드 성당, 브루클린 성 유진길 아우구스티노 성당이 있습니다.
이날 오후 6시에 있는 행사가 우천으로 취소되었습니다.
모두들 저녁 시간을 비워 놓았기 때문에 신부님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였습니다.
자연스럽게 축일 축하파티가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이민자들을 위한 행사가 저에게 천사 축일에게 자리를 양보해 준 것처럼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생각지도 못한 시간에,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천사 축일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비가 많이 와서 지하에 물이 고였습니다.
어떻게 청소를할까 막막했는데 신부님들이 팔을 걷고 도와주었습니다.
내리던 비도 그치고 그렇게 한가위와 천사 축일이 지나갔습니다.
어제 저는 두려움과 믿음을 이야기하였습니다.
두려움과 믿음은 반비례한다고 하였습니다.
두려움이 크면 믿음은 작아지고, 믿음이 크면 두려움이 작아진다고 하였습니다.
오늘은 믿음과 희망을 말하고 싶습니다. 믿음과 희망은 비례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은 희망을 간직하며 살아갑니다.
희망이 있는 사람은 믿음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강했기에 낯선 곳에서도 희망을 간직하였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강했기에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칠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희망이 없는 곳에서도 희망을 간직하였고,
하느님께서는 그런 아브라함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희망은 모든 것이 평탄하게 이루어지는 곳에 있지 않습니다.
믿음은 모든 것이 충족되는 곳에 있지 않습니다.
뜨거운 사막에도 오아시스가 있다고 믿는 것이 희망입니다.
형제의 잘못을 일곱 번씩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는 것이 믿음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을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나이가 많았기에 자식에 대한 희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주셨고, 하늘의 별처럼 많아질 것이라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늙은 나이에 귀하게 얻은 아들 이사악을 하느님의 뜻에 따라 제물로 바치려고 하였습니다.
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아브라함에게 민족들의 아버지가 된다는 희망은 없었습니다.
다만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민족들의 아버지가 될 것이라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희망은 믿음이라는 뿌리에서 피어나는 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과 계명을 잘 아는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을 칭찬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한 말씀이면 종의 병이 치유될 것이라는 백인대장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구원의 역사는 놀라운 능력과 업적을 지닌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구원의 역사는 때로 부족하고, 나약한 사람들의 신앙 이야기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완벽함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은 능력과 업적으로 드러나는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부족함에도 감사하는 이들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결함이 있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들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잘못을 했지만, 뉘우치는 이들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회당이나 관청이나 관아에 끌려갈 때,
어떻게 답변할까, 무엇으로 답변할까, 또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주실 것입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말씀은 아주 짧지만 아주 강력한 당부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상에서의 마지막 때를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제자들에게 깊은 애정과 사랑으로 가르치십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사람들 앞에서 증언하면
하느님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증언하실 것을 약속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루카 12,10)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신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용서받지 못할 자’가 있다. 하시니 말입니다.
혹 하느님의 자비에 한계가 있다는 말일까요?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원이 한계가 있다는 말일까요?
우리는 이 문장의 뜻을 잘 알아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용서하시지 않으신다’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께서는 ‘용서하셔도 인간 편에서 용서를 받지 못한다’는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용서받지 못함은 용서하시는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는 인간으로 말미암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완고함으로 용서받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이 성령의 활동을 무시하고 모욕한 바람에 초래한 결과라 할 것입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란,
우선적으로 성령의 활동을 의지적으로 거스르고 배척하고 비난하거나,
단죄하거나 방해하거나 핍박하거나, 혹은 성령의 활동을 사칭하여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 등을 말할 수 있습니다.
또 성령의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고 고집을 피우는 완고함을 포함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고집’과 ‘완고함’은 참으로 무서운 결과를 초래합니다.
사무엘은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사울의 완고함을 꾸짖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1사무 15,23)
이는 ‘고집’이 성령을 거스르고 배척하고 무시하는 신성모독에 해당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용서하시는 성령의 활동을 가로막아서는 안 될 일입니다.
용서를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또한 용서해야 할 일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성령께서는 고난과 박해 속에서 도와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너희는 회당이나 관청이나 관아에 끌려갈 때,
어떻게 답변할까, 무엇으로 답변할까, 또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 주실 것이다.” (루카 12,11)
이는 진리의 성령께서 증언해 주시리라는 약속입니다.
그러니 반대하는 무리들이 박해를 한다 하더라도
두려워하거나 걱정하지 말고 성령께 의탁하라는 말씀입니다.
성령께서 당신을 증언할 모든 것을 그때에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 영을 따라 살게 하소서.
더 이상 어둠에 머물기를 고집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루카 12,10)
주님!
당신께서는 용서하시는데 제 스스로가 받아들이지 않는 일이 없게 하소서.
당신께서는 빛으로의 초대하시는데 제 스스로가 어둠에 머물기를 고집하지 않게 하소서.
더 이상은 새 생명으로 태어나기를 거부하면서 당신의 영을 모독하지 않게 하소서.
제 안에서 활동하시는 당신을 수락하게 하시고, 당신의 자비와 용서에 승복하게 하소서!
아멘.
어떻게 항변할까 걱정하지 말라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순수한 신앙의 힘에 대해 말씀하신다.
영원한 생명은 구원을 주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주어진다.
우리 신앙인들이 복음을 올바로 받아들이고 살아간다면,
복음과 반대되는 행동을 할 수가 없다. 순수한 신앙의 힘은 위대하다.
자신의 믿음과 희망과 덕과 영광을 온전히 그리스도 안에 둔 사람은
누구도 그리스도를 거스르는 말이나 행동을 하지 않는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8절)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을 증언하면 받는 보상이 바로 이 말씀이다.
우리는 그분을 어떻게 알까?
그분이 말씀하신 대로 행하고 그분의 명령을 따르고, 입술로만이 아니라,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함으로써 아는 것이며, 그것이 증언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성령을 모독하는 것이 인간이 범할 수 있는 가장 나쁜 죄라고 가르치셨다.
당신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용서받겠지만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한다고 하신다.
이 말씀은 인간이 저지르는 어떠한 죄들도 용서받을 수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이며,
이는 그분의 자비와 크신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면 성령을 거스르는, 그래서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무엇인가?
성령을 모독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믿지 않는 것이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사랑의 관계를 말한다.
이 사랑은 인간의 모든 것을 받아주시고 품어주시는 사랑이며,
그래서 항상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해 주시는 사랑인데,
그것을 믿지 않아 하느님 앞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면 영원히 용서받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이 성령 모독죄이다.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 알려주실 것이다.”(12절)
성령께서는 순교자들에게 그 위험한 순간에도 당신을 증언할 힘을 주신다.
성령을 통하지 않고서는 누구도 그리스도를 위한 순교자로서 그분을 증언할 수 없다.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할 수 없습니다.”(1코린 12,3)
성령을 통하지 않고서는 예수님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을 수 없다.
우리는 주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고 이끌어 주실 것을 믿고,
신앙을 전파하고 생활로써 증거 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청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가 비록 나약하지만, 성령께서 함께하시니 강건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돌아보니 젊은 시절 저는 쓸데없는 근심 걱정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늘 삶에 여유가 없고 팍팍했습니다.
인생이 늘 우울하고 울적했고, 긴장과 초조의 연속이었습니다.
날씨가 흐리면 흐리다고 걱정, 비가 오면 비가 온다고 걱정, 시험 잘못 볼까봐, 걱정,
만남의 상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걱정, 혹시라도 내 꿈이 좌절되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
그리고 어떤 날은 걱정이 없어서 걱정, 특히 남 앞에 설 때, 뭔가를 발표해야 할 때,
근심 걱정을 증폭되었습니다.
‘목숨이 아홉 있다는 고양이조차도 근심 때문에 죽는다.’는 속담이 남의 말이 아니었습니다.
근심 걱정의 연속이었던 어느 잔뜩 흐리고 우울한 날, 겨우겨우 몸을 일으켜 세수를 하다가,
세면대 거울을 들여다봤는데, 정말이지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나이보다 열살은 더 들어 보이는 아주 낯선 제 얼굴이 거기 들어 있었습니다.
요즘은 정말이지 많이 변했습니다. 웬만한 일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습니다.
큰일이 생겨도 ‘하늘 아래 별의 별일이 다 생기는 거 당연하지.’하며 흘려버립니다.
수백 명 청중 앞에서도 그럭저럭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말씀하시는 분은 내가 아니라 성령이심을 굳게 믿고 그분께 맡기니 그런 것 같습니다.
물론 직무상 갖게 되는 작은 근심 걱정이 없지는 않습니다.
이번에 오시는 분들 식사 메뉴는 어떤 걸로 해야 하나 하는 걱정 정도,
때때로 식사며 침실이며, 준비가 하나도 안 되었는데,
팔십 명의 아이들이 버스 두 대로 밀고 올라오는 꿈도 꾸기도 합니다.
오늘도 많은 분들이 한 보따리 걱정을 이고 지고 살아갑니다.
‘내가 과연 잘 해낼 수 있겠는가?’ ‘혹시라도 사람들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어쩌지?’
‘나는 말주변이 없는데’ ‘나는 체력이 약한데’ ‘나는 남들 앞에 서면 완전히 쫄아 드는데’
이런 우리를 향해 세상 자상하신 예수님께서는 달래듯이 타이르듯이 말씀을 건네십니다.
“회당이나 관청이나 관아에 끌려갈 때, 어떻게 답변할까, 무엇으로 답변할까,
또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주실 것이다.”
우리를 파견하시지만, 절대로 홀로 보내시는 주님이 아닙니다.
든든한 동반자, 강력한 협조자, 하느님의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걸어가십니다.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의식, 내 뒤에 그분께서 받쳐주고 계신다는 생각,
그분께서 지속적으로 도와주실 것이라는 확신이야말로
복음 선포자가 지녀야 할 최우선적인 마음 자세입니다.
우리가 비록 나약하지만, 성령께서 함께하시니 강건합니다.
우리가 비록 무지하지만, 성령께서 함께하시니 지혜롭습니다.
우리가 비록 죄인이지만 성령께서 함께하시니 성스럽습니다.
우리가 비록 죽음을 향해 걸어가지만, 성령께서 함께하시니 영원히 살 것입니다.
복음 선포와 성령의 활동
박상대 마르코 신부
어제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포함한 많은 군중을 향하여
첫째, 바리사이들의 누룩을 조심할 것,
둘째, 하늘 아래 세상에서 감추어진 것이라고는 없으므로
예수님의 복음 선포가 언젠가는 세상천지에 알려질 것, 그리고
셋째, 세상에서 가장 두려워해야 할 분은
靈과 肉의 세계를 모두 다스리시는 하느님이심을 가르쳐 주셨다.
오늘 복음은 서로 관계가 없어 보이는 세 가지의 단절어를 전해주고 있다.
첫째는 세상에서 예수를 안다고 증언하는 사람은
예수께서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해 주실 것이나,
모른다고 하면 예수께서도 모른다고 증언하실 것이라는
종말론적 同態 보상률에 관한 말씀이다.(8-9절)
좀 인색하게 들리겠지만, 누구든지 예수를 위해 노력한 만큼의 보상을 받는다는 것이다.
둘째는 사람의 아들을 거역한 죄는 용서받지만,
성령을 모독한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는 단호한 말씀이다.(10절)
셋째는 박해하는 자들 앞에서 항변할 언변을 성령께서 일러주신다는 말씀이다.(11-12절)
자세히 살펴보면 오늘 복음의 세 가지 단절어는
어제 복음의 두 번째 가르침에 해당하는 복음 선포와 관련이 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성령의 활동과 복음 선포의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시대에는 예수님 스스로 하늘나라가 도래했다는 기쁜 소식을 선포하셨다.
이 복음 선포에는 예수님의 기적적인 활동도 포함된다.
아직은 베일에 가려있지만,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右便에 앉아
아버지와 함께 세상에 성령을 보내주실 것이다.
하느님 성령은 성자의 구원 사업을 오직 교회와 그 구성원을 통하여
계속하실 것이고, 未久에는 완성하실 것이다.
따라서 성령 하느님의 활동은 복음 선포와 선포자 활동의 내적 원리이다.
요한 복음이 성령 하느님을 선포되는 복음의 핵심인 ‘진리’의 성령이요,
복음 선포자의 내적 ‘협조자’로 계시하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요한 14,15-17; 15,26-27; 16,7-16)
요한 복음의 이 대목들과 마태오 복음의 관련대목(마태10,17-33)을 잘 읽어보면
오늘 복음에 관한 의문의 반 이상은 해결된다.
남은 문제는 사람의 아들을 거역한 죄는 용서받지만,
성령을 모독한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는 단호한 말씀이다.(10절)
이 단절어는 마태오 복음과 마르코 복음에도 똑같이 발견된다.
그러나 문맥상 다른 곳에 배치되어 있고, 좀 다른 의미로 언급되어 있다.
두 복음사가는 예수께서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는 적수들의 모함에
대적하는 의미로 용서받지 못할 성령께 대한 독성죄를 보도하고 있다.(마태 12,24; 마르 3,22)
실제로 마르코는 예수께서
“나는 분명히 말한다.
사람들이 어떤 죄를 짓든 입으로 어떤 욕설을 하든, 그것은 다용서 받을 수 있으나,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은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것이며,
그 죄는 영원히 벗어날 길이 없을 것이다.”고 말씀하셨으며,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사람들이 예수를 더러운 악령에 사로잡혔다고 비방했기 때문이라고 한다.(마르 3,28-30)
마태오는 여기에 ‘인자를 거역하여 죄를 범한 사람은 용서받을 수 있으나,
성령을 거슬러 범한 독성죄는 현세에서도 내세에서도 용서받지 못할 것’임을 덧붙였다. (마태 12,32)
왜 루카 복음사가는 성령 독성죄에 관한 말씀을 오늘 복음에 배치해 놓았을까?
그 이유는 다시금 ‘복음 선포와 성령 하느님의 활동’안에서 발견된다.
많은 사람들, 특히 유대인들은 하느님 나라에 관한
원초적인 복음 선포자인 예수님을 거역하는 범죄를 저질렀다.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까지 했다.
하느님을 죽인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 예수는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아나셨다.
하느님은 영과 육의 모든 세계를 지배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성령강림 사건은 이 땅에, 성령 하느님 시대를 열었다.
따라서 이제는 하느님 아버지와 성자의 세상에 대한 모든 활동은 진리이시며
협조자이신 성령 하느님의 활동으로 계속되며,
그 주된 활동이 바로 세상 끝까지를 향한 복음 선포인 것이다.
성자는 비록 세상의 손에 죽었다.
세상이 계속해서 복음 선포자를 죽일 수는 있어도, 더 이상 하느님을 죽일 수는 없다.
세상이 할 일은 복음 선포자가 성령과 함께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이든지 않든지 하는 것이다.
이때 세상은 수용과 거부의 자유를 가진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세상이 복음을 수용하는 행위는 성령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복음을 거부하는 행위는 곧 성령을 거역하는 것임을 아는 것이다.
그렇다고 교회나 우리가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을 두고
성령 모독죄를 운운할 자격을 가진 것은 아니다. 아무에게도 그런 권한은 없다.
오직 人子만이 유죄와 무죄를 선언할 것이며, 그분만이 구원의 可否를 판가름하실 것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민동규 다니엘 신부
찬미 예수님,
유치원 아이들과 동물원에 갔습니다.
그 동물원에는 동물을 만져보며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었다고 합니다.
아이들은 저마다 안대를 하고 새끼 코끼리를 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체험이 끝난 후 아이들은 저마다 자기가 만져본 코끼리를 도화지에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한 아이는 큰 기둥 같은 다리를 그렸고, 어떤 아이는 호스 같은 코끼리의 코를 그렸습니다.
다른 아이는 귀를 만지고 나서 코끼리는 날개가 있다고 생각하며 그림을 그렸습니다.
같은 코끼리를 만지고서도 다른 그림을 그렸습니다.
아마 우리도 이와 같을 것입니다.
우리는 저마다 하느님의 일부분을 체험하고 경험하며 만납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느님이라고 말합니다. 내가 만난 하느님을 이런 분이라고 말합니다.
코도, 다리도, 귀도, 꼬리도, 몸통도….
모두를 만져봐야지만 코끼리를 정확히 그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야 코끼리를 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한 번의 만남으로 누군가를 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한 번의 대화로 그를 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자주 만나고 대화하고 교감해야 비로소 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늘 문 앞에서 주님을 안다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을 만나고 그분과 대화하고 교감하며
주님을 알아가는 하루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능소화
저는 능소화를 좋아합니다.
능소화는 7월부터 9월에 피는 꽃입니다.
꽃말은 이렇습니다.
‘업신여길 능’, ‘하늘 소’ 자를 씁니다.
하늘을 업신여긴다는 말입니다.
이런 거친 이름을 가졌을까요?
능소화의 만개 시기는 8월입니다.
비와 태풍과 더위가 기승을 부릴 그때
능소화는 피어납니다.
식물에게는 저주와 같은 그 시기에 말입니다.
오히려 능소화는
태풍 한 줌
더위 한 모금으로 피어나는 듯합니다.
능소화는 8월에 꽃피우며 계절을 향해 말합니다.
아무리 난리 쳐봐라. 나는 그래도 피어난다.
능소화! 꼭 우리 주님 닮은 꽃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