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종, 화안(花眼), 53×32㎝, 종이에 먹과 채색, 2021.
■ 파리와 페르라세즈 묘원
아름다운 석관·조각들·꽃다발
산 자와 가까운 ‘영혼들의 마을’
발자크·보들레르·사르트르 등
살아있을때 같이 명패달고 안치
비문 하나 허투루 된 것 없으니
이곳이 또 하나의 묘지 미술관
장자 ‘인간세’ 편에 복경호우(福輕乎羽)라는 말이 나온다. 무릇 복은 새털처럼 가볍다는 뜻이란다. 문득 죽음 또한 그렇게 가벼울 수 있다면, 하고 생각해본다.
몇 년 전 ‘죽음 학교’라는 데에 가서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서울 통의동의 한 작은 한옥에서였는데 초청 강사는 정현채 서울대 의대 교수였다. 주제가 ‘죽음, 벽인가 문인가’였다. 그날 모였던 철학자 이명현 교수, 산림과학자 정헌관 박사, 문화기획자 홍사종 교수, 법조인 이혁, 의사 박인숙, 윤대웅, 장근호 등등이 기억난다.
세상에 많은 학교가 있지만 ‘죽음 학교’라는 곳은 처음이었다. 죽음도 공부하고 배울 수 있는 것임을 그때 처음 알았다. 모두에 그 모임을 주도한 경기대 오연석 교수의 짧은 ‘학교소개’가 있었다. “죽음은 너나없이 어느 날 덮칩니다. 숨어 있던 사자가 한가하게 풀을 뜯고 있는 얼룩말을 덮치듯 그렇게 덮쳐요. 하지만 죽음은 이제 더 이상 언제 올지 알 수 없기에 피해 가야 할 주제가 아닙니다. 그것을 제대로 응시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야 언젠가 걸어오는 그 발자국 소리까지 들을 수가 있습니다. 언젠가 들려올 그 발자국 소리….” 그는 한밤중 좀 으스스한 주제를 자못 시적 메타포를 섞어가며 ‘배우고 공부해야 할 그 무엇’으로 설명해주고 있었다.
그날의 초청 강사인 정 교수는 한국 죽음학의 대가라고나 해야 할 인물이었다. 그는 의학, 철학, 신학, 영화, 문학 등 거의 전 영역을 오가며 가려진 죽음의 얼굴을 하나하나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날 밤 내가 그의 강의를 듣고서 도달한 결론은 ‘그렇다면 죽음은 없다인가?’였다. 그는 죽음 역시 하나의 생명현상이고 다른 차원의 생명으로 변화되는 과정일 뿐이라고 역설했다. 따라서 죽음은 벽이 아닌 문이며, 그 문을 통과해 생명은 계속된다는 설명. 그런 점에서 본다면 정 교수는 사후생(死後生·On Life After Death)의 저자인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여사에 비견될 만한 한국의 남자 퀴블러 로스쯤 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어쨌든 죽음은 한낮의 그림자처럼 삶과 동행하고 있고 그것도 아주 밀착돼 있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라는 것이 그날 새삼스럽게 배운 것이었다.
늦은 밤 긴 한옥 골목을 홀로 걸어 나오면서 어렸을 적 봤던 죽음의 의식들이 떠올랐다. 파란 보리밭 너머로 둥둥 떠가던 오색 상여와 울긋불긋한 만장들. 가랑가랑 멀어지던 상두꾼의 구슬픈 만가와 손종(鐘)소리. 어린 내게 그것은 ‘화려한, 그러나 슬픈 색채의 이별’이었다. 동네 어귀의 솔밭에 조갑지처럼 올망졸망 누워 있던 비석 없는 봉분들. 그리고 할미꽃, 백도라지꽃, 산난초에 민들레며 쑥부쟁이까지 정겹고 햇살 환하던 그곳의 풍경. 그러고 보니 그 시절이야말로 죽음이 삶과 가까이 있었던 셈이다. 내 눈에는 죽음이 새털처럼 가벼운 그 무엇이었고, 떠나기 좋은 한 날 골라 떠나는 화사한 여행 같은 것이었다. 한평생 ‘여기 이곳’에 살다가 미나리밭, 청보리밭 지나 ‘저기 저곳’의 솔밭에들 묻혔으니까. 그리고 장차 ‘그곳’으로 갈 사람들이 풀 뜯는 얼룩말들처럼 지금 ‘이곳’에서들 일하고 있었으니까. 각자의 소유로 금 그어진 논다랑이, 밭다랑이 속에서 그렇게 살다가 시간이 되면 허리를 펴고 일어나 누군가의 손에 잡혀가듯 ‘그곳’으로들 갔으니까. 그림으로 그리려 하면 그려질 만큼 환하게 떠오르는 장면들이었다.
그런데 파리에 처음 갔을 때 속으로 놀란 것은 사실 루브르도 에펠탑도 아니었다. 잘 꾸며진 예술가들의 묘원, 그 ‘죽은 자의 집들’이었다. 아름다운 석관과 비석과 조각들 그리고 골목에서 골목이 꽃다발로 이어지던 풍경이었다. 이 비싼 땅에 이 넓은 묘원이라니, 이 사람들이야말로 삶과 죽음의 값을 동등하게 매기는구나 싶었다.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는 것을 그들은 그 정성스럽고 아름답게 꾸민 유택(幽宅)들로 설명해준 셈이었다.
죽은 자들의 동네가 산 자들의 그곳과 아주 가깝다 못해 뒤섞여 있는 느낌이 들기로는 도쿄(東京) 아카사카의 묘원이었다. 근처에 황홀할 정도의 정원을 품은 네즈 미술관이 있어서 미술관을 둘러보고 길 건너 몇 발짝 가면 닿게 되는 곳이 사과가 주렁주렁 열려 있는 묘원이었다. 하나같이 봉분 아닌 평탄묘이고 십자가 대신 하이쿠(俳句·일본 전통의 짧은 시구)나 가훈, 유언 같은 것을 서예체로 쓴 단아한 묘비석들이 아름다웠다. 드넓은 그 유실수 길에 간간이 놓여 있는 벤치에서는 유독, 햇빛 쨍한 삶의 한가운데에 있는 젊은이들이 많이 보였다. 혹은 책 읽는 중년의 여인도.
그래도 가장 압권은 역시 파리 페르라세즈 묘원이다. 혹 아카사카의 묘원은 그곳을 벤치마킹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삶은, 특히 예술가의 삶은 죽어서도 계속된다”는 것을 이곳만큼 명증하게 보여주는 곳도 없을 것이다.
소설가 오노레 드 발자크와 알퐁스 로데·오스카 와일드에, 시인 샤를 보들레르, 마르셀 프루스트와 극작가 몰리에르,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와 앵그르와 마리 로랑생과 살바도르 달리, 작곡가 프레데리크 쇼팽과 조르주 비제와 조아치노 로시니, 세기의 디바 마리아 칼라스와 샹송가수 에디트 피아프와 이브 몽탕, 록가수 짐 모리슨, 무용가 이사도라 덩컨과 실존주의자 장폴 사르트르와 시몬 드 보부아르까지 그들의 이름은 육신으로 살아있을 때 같이 각각의 명패들을 단 채 그 죽음의 동네에서 살고 있었다.
특이한 것은 국적 불문하고 파리 체재 중 숨진 유명 예술가는 프랑스인 대접을 받으며 그곳에 안치된다는 것인데, 뒤집어 보면 이름난 예술가는 살아서뿐 아니라 죽어서도 사람들을 불러 모을 수 있다는 계산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아닌 게 아니라 몽마르트르 묘원이나 페르라세즈 묘원은 관광객들의 순례지가 된 지 오래다. 그런 만큼 비문 하나, 조각 하나 허투루 된 것이 없으니 그곳이야말로 또 하나의 묘지 미술관인 셈이다.
공자는 흐르는 강물을 보며 “우리 곁을 떠나간 자들도 모두 저렇게 흘러갔다는 말이더냐”라며 눈물지었다 한다. 하지만 이곳은 짧은 삶이 아쉽고 서러워 우리 곁을 떠나갔던 이들이 알고 보니 춥고 어두운 머나먼 북망이 아닌 여기 이렇게나 햇빛 환한 아름다운 동산에 새털처럼 가볍게 떠나와서 현존으로 잠들어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페르라세즈를 둘러보고 나오니 해가 떨어진다. 내 육신의 그림자가 수묵화처럼 기이하게 길다. 귓가에 들리는 내 발자국 소리. 죽음이 음침한 것, 밀쳐두고 피해가야 할 어둠의 그 무엇이 아닌, 다만 육신의 모든 열기가 식어서 서늘해진 그늘 상태 같은 것, 때때로 하찮고 부질없는 그 욕망의 열기가 너무 뜨거워 가끔씩 찾아와 그 이마를 짚어 열기를 식혀 주던 손길에 잡혀, 어느 날 길 떠나는 것, 뒤돌아보이는 못다 한 인연과 눈에 밟히는 풍경들도 훌훌 털고 일어나 그냥 가볍게 길 떠나는 것, 그리하여 푸르스름한 망각의 강변에 이르는 것, 그리고 비로소 그 지점에서 한 번쯤 떠나온 곳을 뒤돌아보는 것, 이름하여 사경호우(死輕乎羽). 죽음이 그 정도로 인식될 때쯤이면 삶의 종장에서 지는 해도 더욱 붉은 빛이리라. 꽃의 눈(花眼)처럼.
페르라세즈가 내게 가르쳐준 교훈이었다.
김병종 화가, 서울대 명예교수
■ ‘페르라세즈’ 어떤 곳
파리시내 정원식 묘지공원
예술가들의 묘원으로 명성
1804년에 처음 문을 연 페르라세즈 묘지공원은 파리 북동쪽 11구에 위치해 있다. 파리시 안에 설치된 최초의 정원식 공동묘지로 제1차 세계대전 추모공원도 겸하고 있다. 파리시 묘원 중 그 규모가 가장 크다. 특히 예술가들의 묘원으로 유명하다. 몽마르트르 묘원에도 화가 드가나 로트레크, 문인 스탕달 등이 묻혀 있지만 다양한 장르의 예술가와 문인, 철학자들이 잠들어 있는 곳으로는 페르라세즈를 꼽고 있다. 이 정원식 묘원은 오늘날 파리의 주요 관광자원 중 하나여서 연중무휴 관광객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