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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성경의 그리스도 진리의 빛의 발자취를 저처럼 몹시 알기 갈망하는 분들이 보시기에 아주 좋은 자료로써 추천합니다. 저는 읽는 내내 너무 좋아서 책을 따로 주문하였습니다. 천천히 보시면 될 것입니다. 주님 진정 알기에 많은 도움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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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율법에 나타난 그리스도
제1장 모세 율법의 도전:
그리스도의 빛으로 해석한 모세
1. 구약 성경의 도전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로 하여금 구약의 몇몇 구절들만을 이해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성경”곧 구약 전체의 의미를 깨닫게 하셨다. 이 성경이 실제로 말씀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스도께서는 ”기록되었으니“(눅 24: 46)라는 말씀을 통해, 제자들에게 구약에 기록된 내용의 요체와 핵심을 가르쳐 주셨다.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 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이며, 또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다“(눅 24:46-47). 전 구약성경의 초점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죽으심 및 부활에 맞추어져 있다.
2. 구약성경 해석을 위한 기본 원칙
첫째로, 그리스도 자신이 구약의 보고를 여는 열쇠가 되신다. 우선, 그리스도는 지극히 영화로우신 주님이요 성부의 독생자로서 태초로부터 하나님과 직접 대면하셨고 하나님과 같이 계셨으며 그가 곧 하나님이시다(요 1 ; 1) 구약의 모든 말씀은 하나님 자신이 하신 말씀이며 (딤후 3:16-17), 하나님은 삼위일체 신 -성부, 성자, 성령-이시다.
둘째로, 구약은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가르쳐 준다. 『누가복음』24장의 이야기가 함축하고 있는 주된 의미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스도는 구약 메시지의 초점이시다. 그분은 구약이 지향하고 가르치며 상징으로 예시하고 있는 분인 것이다.
셋째로, 그리스도는 당신의 말씀으로 우리를 교훈하실 뿐 아니라 우리와 더불어 교통하신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할 때 그분 안에 거하는 것이다(요 15:7).
넷째로, 그리스도는 당신의 말씀을 통해 우리를 변화, 개조시키신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분의 영광을 체험함으로써 그분의 형상으로 변모하게 되는 것이다.
다섯째로, 우리 마음이 변화되면 우리는 예배, 감사, 순종으로 그리스도께 응답하게 된다. 그리스도는 우리 주님이며 스승이신 바, 이는 우리가 그분께 순종해야 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는 구약성경을 읽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을 밝혀 주시고 변화시켜 주시기를 간구해야 한다. 우리는 두 가지 궁극적인 핵심 요소, 곧 겸손과 사랑을 마음에 깊이 새겨두어야 한다. 우리는 자기 재능을 과대 평가하지 않을 만큼 겸손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각이 우리 생각보다 월등하다는 것과 (사 55:9), 우리는 결코 그 측량 못할 깊이에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롬 11 :33-36). 그리스도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골 2:3)있다. 우리는 일체의 깨달음을 얻기 위해 그리스도께로 나아가 한다. 우리는 능력에 한계가 있으므로, 하나님께서 성경을 연구하는 다른 사람들을 통해 허락하신 통찰력에 깊이 감사해야 할 것이다. 그와 동시에 다른 사람들의 견해를 존중할 줄도 알아야한다(엡 4: 12-16)
하나님은 거듭거듭, 그들과 그들의 환경 -우리의 환경이 아니라 -에 적합한 상징과 그림자를 통해 그리스도를 그들에게 증거하셨다. 그것이 바로 구약이 어떤 점에서는 신약과 그토록 현저하게 다른 이유이다. 그러나 양자 모두 한 하나님과 한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있기 때문에 전체적인 방향은 놀랄 만큼 유사한 것이다.
첫째, 모세의 율법을 그 고유한 용어와 역사적 배경 속에서 이해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신약이 구약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역사와 말씀을 어떻게 완성시키고 있는지 이해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들 자신과 우리의 환경에 적용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신약 계시의 중심이시다. 신약은 구약에서 시작된 이야기의 완성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구약에서 예비적인 형태로 증거하기 시작한 -또한 지향해 가는 -중심이신 것이다.
제 2 장 모세의 성막 :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임재의 예표
1. 메시야의 표상으로서의 성막
지상의 장막은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참된 처소의 모형 내지는 그 그림자(히 8:5 ; 9:24)였다. 그것은 하나님의 본래 형상이 어떠한 것과 죄의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었다. 이렇게 해서 성막은 메시야와 그의 사역의 예표가 되었다. 그것은 마치 시간적으로 구약 시대를 배경으로 투영된 메시야의 그림자와 같은 것이었다. 따라서 결코 천상의 하나님의 영광이나 거룩함에 비견될 수 없었다. 황소와 염소로 드리는 지상의 제사는 결코 우리를 죄악에서 영원히 깨끗케 하신 그리스도의 보혈에 비견될 수 없었다. 그들은 그림자를 통해 더 나은 것을 갈망하면서 메시야를 보내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매달렸던 것이다. 약속은 말로써만 아니라 성막 구조와 거기서 행하여지는 제사를 통해 상징적으로 주어졌다. 그리스도께서 희생제사의 상징적 표현을 통해 그들과 만나실 때 그들의 죄를 사해 주셨던 것이다.
2.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거하시는 처소의 상징으로서의 성막
그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당신을 위한 장막 곧 당신이 거하시면서 그들과 만나기 위한 장막을 지으라고 명령하셨다(출 25:8,22). 성막은 황금빛과 청색으로 뒤덮인 위풍당당한 구조물이었다. 그분은 지상에 강림하셔서 그들 가운데 거하려고 하셨다. 그들은 장막에서 살았다. 그래서 그분도 백성들의 장막과 나란히 장막에 거하려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불기둥은 동일한 실재를 더욱 강력하고 초자연적인 형태로 표출한 것이었다.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바로 그들과 함께 “임마누엘”로 계시고자 하셨다.(마 1:23).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영광의 구름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였고, 성막이 완성된 후에는 그위에 임하였다.(출 40 :34-38; 민 9;15-23).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과 함께 거하신다는 주제는 예수그리스도의 초림을 통해 성취되었다. 사실, 장막은 그리스도가 성육신하시어 우리들 가운데 거하시게 되리라는 것의 전조였다. 그리스도의 영광은 빛나는 영광의 구름을 대신하였다.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성령을 마치 불기둥처럼 보내시어 당신의 교회와 백성들이 하나님의 성막을 이루게 하신다(행 2:2-4; 고전 3 :10-17; 6:19). 성막은 하나님의 성품의 또 다른 측면, 즉 그분은 거룩하시며 사람이 감히 접근할 수 없는 분이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이 모든 것을 통해 주님은 성부와 성자간의 사랑의 귀중함을 예시해 주신다. 성막의 상징물들이 그리키는 것은 그리스도이다. 이 상징을 더럽히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독하는 것이 되며, 따라서 하나님의 극렬한 진노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하나님의 거룩성은 너무나 위대하기 때문에 그분에 대한 과실은 죽어 마땅한 것이다. 그리스도 자신은 온전히 거룩하셨다 그러나 그분이 우리 죄악을 담당하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죄가 되시매”(고후 5:21), 성부께서는 그를 죽음에 내어 주셨다. 그리스도는 죽으셔야 했다. 우리가 하늘의 참 장막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임재의 복락을 영원토록 주릴 길은 그것 외에는 달리 없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전전에로 나아가는 길을 가로막는 휘장은 제거 내지는 그리스도의 육체 안에서 완성되었다.
그리스도의 재림시에는 온 세계가 그분의 영광으로 뒤덮일 것이다 (살후 1:7-10).“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삼상 2:30)라는 말씀은 심판 날에도 그대로 적용될 것이다.
3. 천국의 상징으로서의 성막
성전의 기본적인 구조는 성막과 동일하게 장 두 개와 바깥뜰로 되어 있었지만, 가로와 세로의 길이는 각기 성막의 두배로 되어 있었다. 물론 그리스도의 사역이었다. 솔로몬은 다윗의 혈통에서 난 아들이었는데, 그 혈통은 메시야에게로 연결된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교회를 세워 나가실 것의 예표였다 (마 16:18).
솔로몬 자신은 하나님의 참된 거처는 하늘에 있음을 알고 있었다. 하늘은 하나님의 참된 거처이며(왕상 8:30, 43), 그곳에서 하나님은 사람들의 기도를 들으신다.
하나님이 구름 가운데 시내 산에 강림하셨을 때, 그름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과 접근 불가함을 상징하였다. 모세가 하나님을 뵙기 위해 산에 올라간 것은 신인 사이에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의 직능을 예시한다.
우리는 성막을 다시금 살펴본다면 틀림없이 천국을 상징하는 징표를 보게 될 것이다. 증거궤 혹은 언약궤 옆의 두 그룹은 하나님의 보좌를 호위하는 천상적 존재의 모사 물이다(겔 1장; 창 3:24참조). 여러 그룹들의 형상이지성소로 들어가는 길을 지키는 휘장에 수놓아져 있고 (철 26:1). 십계명은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로서 가장 완전한 의미에서 천국의 말씀이다. 그것들은 모세가 산에서 받은 증거판 위에 기록되어 있는데, 산이란 곧 천국의 상징적 모사물이다. 증거판은 성막 전체에 가장 거룩한 물건인 언약궤 안에 들어있다(출 25:21). 그리고 언약궤 위의 공간은 텅비어 있는데, 이는 하나님은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분이시며, 따라서 그분의 형상을 만드는 것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출 33:20; 20:4-5; 신 4:15-19).
성소는 두 방은 서로 특수한 커튼 내지 베일에 의해 분리되어 있는데 이것이『히브리서』에서 말하고 있는 휘장이다(히 10:20).
성막의 이 모든 요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과의 친교 및 그분과 함께 거하는 생활의 의미에 관해 많은 것들을 암시하고 있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임재의 본질과 그분께 가까이 나아가는 방식을 여실히 나타낸다.
성막 뜰은 성격상 좀더 지상적이다. 양자 사이의 관계는 의심의 여지없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에 대비되는 그들의 속된 성품을 암시해 줄 것이다.
두 개의 방은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의 다양한 측면들을 보여 주는 데 필요하다. 내실은 가시적 하늘로부터 분리된 하나님 자신의 보좌에 더 직접적으로 상응하고있다
4. 성막의 기구들
이 같이 가시적인 하늘은 여러 가지 점에서 성소에 상응하며,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불가시적 천국은 지성소에 상응한다. 지상소에는 하나님의 직집적 임재의 상징물들 곧 하나님의 규범을 선포하는 율법과 하나님의 보좌 내지는 발등상을 상징하는 언약궤, 그리고 보좌를 지키는 두 그룹들이 있다.
성소의 한쪽 면에 있는 등대는 밤새도록 빛을 발하고 있다(출27:20; 레 24:1-4).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로써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며 빛을 주시는 분이심을 기억할 것이다. 등대의 일곱 등잔들은 해, 달, 알려져 있는 다섯 혹상 등 하늘의 주된 일곱 발광체들에 상응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자연적 수단을 통해 빛을 발하시는 창조주이실 뿐 아니라 사람들을 애굽으로부터 인도해 낸 구속의 빛을 발하시는 구속주이시기도하다. 이러한 상징은 우리의 창조주이자 구속주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고 있다 (골 1:15-20). 그리스도는 세상을 비추는 피조되지 않은 원초적인 빛이시며, 그분 영광과 순결성은 천체들 가운데 희미하나마 반영되어 있다(요 1:3-5).
등잔이 일곱 개라는 천체들은 “징조와 사시와 알자와 연한이 ” 이루도록 창조되었다(창 1:14). 해와 달과 별들에 의해 표시되는 시간의 전체 주기는 7로 분할된다.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 살고는 지켜보거나 기다리는 시간을 상징하는데, 이는 살고라는 히브리어 단어의 유희에서 비롯된 것이다(렘 1:11-12). ‘살구’라는 히브리어 샤케드는 ‘지켜보다’라는 히브리어 샤카드와 음이 매우 비슷하다.
이 기묘한 나무에는 싹, 봉오리, 꽃, 열매가 모두 함께 달려 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창조, 유지하시는 삭간의 전체 주기를 정적인 영상으로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나무란 생명의 성장을 상징한다. 나무는 열매의 형태로 새로운 빛을 발하며, 반대로 열매는 새로운 나무를 만들어 낸다. 진실로 나무는 빛의 나무인 동시에 생명의 나무이다. 나무의 번식적인 생명력은 그 열매, 곧 지각에서 광채를 발하며 그 성장을 지속시켜 주는 빛에 있다.
이뿐 아니라 나무눈 우리에게 원초적인 생명나무가 자라는 에덴동산을 상기시켜준다. 그러나 이제는 참된 창조의 생명은 범죄함으로 인해 상실되었다. 그것은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해 오신 하나님을 통해 회복된다. 성막은 에덴동산의 갱신된 모습이다.
성소의 다른 면에는 진설병(陳設餅 직역하면 ‘임재의 떡)이 놓인 상이 있다(출 25:23-30). 여기서 말하는 ’임재‘란 하나님의 임재를 말하는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신과 함께 먹고 마시면서 당신의 보호를 마음껏 누리도록 초청하신 것이다. 그러한 특권이 제사장들에게만 제한된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으로 인한 친교의 제한을 의미한다.
그들은 날마다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제공하시는 “하늘에서 내려온 양식”(출 16:4)인 만나를 먹었던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맛에 대해 불평했지만 (민 11:6)실제 그 맛은 달콤했으며(출 16:31), 이는 그들에게 공급자이신 하나님이 감미롭고 선하신 분이심(시 19;10), 을 일깨워 주었다.
따라서 진설병은 하나님께서 번식, 성장, 수확의 과장을 통해 사람들에게 날마다 양식을 공급해 주신다는 사실을 부단히 암시해 주었다. 예수께서는 세상에 오셔서 이러한 상징적 의미를 성취하셨다. 그분은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오천 명을 먹이셨을 뿐 아니라 (요 6:1-13)그 의미를 제자들에게 설명해 주셨다. 열두 덩이의 떡은 하나님께서 양식을 공급하기 위해 허락하시는 파종과 수확의주기인 12개월에 상응한다.
진설병 상이 하늘을 상징하는 성소에 있다는 사실에 유념해야 한다. 예수께서 “나는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실 때 뜻하신 것은 당신이 창조와 구원을 막론하고 이모든 모사물들의 천국적 원형이라는 것이다.
성소에는 또 한 가지 기구-분향단- 가 놓여 있다 (출 30:1-10). 분향단은 겉을 정금으로 씌운 특수한 소형 제단으로서 성소의 가장 외진 구석 지성소로 통하는 휘장 바로 전면에 위치하고 있다. 분향단은 짐승 제물을 태우지 않고 오직 향을 불살랐다(출 30:8-9). 그것은 “지극히 거룩”했으며 이같은 점에서는 실제로는 휘장 바깥에 있었지만 논리적으로는 지성소에 속해 있었다 (히 9:4). 향연과 향기는 내실과 외실 뿐 아니라 성막 전체를 가득 채웠을 것이다. 타오르는 향의 냄새는 특별한 사교모임에 쾌적한 분위기를 더하기 위해 주인들이 사용 하였다. 최고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그같은 접대 물품을 당신의 집에서 사용하게 하신 것이다. 분향단은 비유적으로 말한다면 연기가 가시적 하늘의 꼭대기까지 올라간 후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여 준다. 그것은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지성소로 들어가는 향기로운 냄새가 된다. 하나님은 그 냄새를 맡으시고 기뻐하신다. 제물 자체는 일종의 비언어적인 기도로서 제사장이 백성들을 대신하여 드리는 사죄, 경배, 감사, 중보의 기도인 것이다. 적절하게도 신약에서는 하늘로 올라가는 향연을 성도들의 가도와 명백히 동일시하고 있다(계 5:8; 8:3).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는 세상에 계실 때 기도하셨고(히 5:7) 지금도 하늘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히 7:25) 예수그리스도의 기도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모든 대칭과 복사는 바로 완벽한 규격과 솜씨를 의미한다. 언약궤 안에는 율법이 들어 있는데 이는 성막 전체 식양에 관한 설계를 상징한다. 성막 자체는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의모사에 다름아니며, 외부의 성막 뜰은 땅에 상응한다. 번제단의 고는 5 규빗이 아니라 3 규빗으로서 완전한 일치를 깨뜨리고 있는데, 이는 제사장들로 하여금 너무 힘들이지 않고 직무를 수행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놋제단과 방들 사이에는 세정용 대야 내지는 ‘물두멍’이 놓여 있다. 이 역시 재료가 못쇠인데, 성전 뜰과 마찬가지로 땅과의 연관성을 시사한다. 실상 이것은 지구의 작은 복사판이다. 물두명은 지구의 물들을 상징하며, 이에 비해 물두멍 주위의 공간은 육지를 상징한다. 따라서 못제단은 후대의 성전 부지였던 시온 산 내지는 하나님께서 모세와 만나셨던 시내 산의 소형 복사판으로 생각된다.
물두멍은 제사장들에게 의식상의 세정을 위한 물을 제공한다. 그것은 몸을 정결케 하기 위한 대야이다. 성소로 상징되는 하늘로부터 계절에 따라 비의 형태로 내려오는 물은 생명을 부여하고 쇄신하는 능력으로 지상에 임한다. 그것은 정결케 하고 소생케 하는 생명의 원천이다.
그 다음에는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을 통해 구원받았다. 번제단은 이를 상징한다. 홍해 물은 대적들로부터 그들을 깨끗게 하는 일종의 정결 의식을 뜻하는 것으로서, 그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는데 진설병 상은 이를 상징한다(출 16 ;1-36). 그들은 특별한 성산인 시내 산에 도달했는데, 이는 성막 전체가 상징하고 있다(출16:1)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점진적으로 펼쳐짐에 따라 동일한 구원의 기본 요소들이 형태만 달리하여 거듭 반복되어 나타난다. 우리는 놋제단은 시내 산에 상응하는 것으로, 물두멍은 요단 강을 건너는 것으로, 성막의 방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새로운 에덴 동산이요 성지인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에 상응한다고 불 수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돌아가실 때 한 군병이 그의 옆구리를 찌르자,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요 19:34) 요한은 이를 구약의 다른 구절과 연결시키고 있다(요 19:36-37). 아마도 요한은 우리에게 그 피가 놋제단의 피에, 물은 물두멍의 물에 상응한다는 사실을 이해시키려 했을 것이다.「요한복음」19장 37절이 인용한 대로 「스가랴서」에는 ‘찌를 것’에 대한예언에 (슥12:10) 뒤이어 13장 1절에 다음과 같은 예언의 말씀이 나온다.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그같이 정결케 하는 원천이 예수의 옆구리로부터 흐르는 물로 상징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정결케 하시는 역사에는 영원한 효력이 있다. 나중에 예수께서는 물을 성령과 동일시하셨다.
5. 성막의 분리
이스라엘의 부정함이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접촉하지 못하도록 격리시키려는 목적에서 주의깊게 고안되어 있다. 하나님의 보좌가 놓여 있는 가장 높은 천국은 가시적 하늘과 분리되어 있어서 육안으로는 볼 수 없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은으로 만든 받침들이 성막 전체를 떠받들어 성막의 어느 부분도 땅바닥과 접촉하지 않게끔 되어 있는 것이다. 은으로 만든 받침은 마치고체로 된 휘장과 같아서 하늘과 땅 혹은 하나님과 인간을 분리시키는 기능을 한다. 포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성막 뜰로부터 격리시키는 것으로, 그 자체는 상막 휘장을 약간 저급한 차원에서 모사한 것이다. 번제단과 물두멍의 놋쇠에 상응하여 놋으로 만든 받침들이 포장이 땅과 직접 접촉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이 상장은 성막의 하단인 은제 받침이 성막 뜰의 상단인 은제 가름대와 갈고리에 상응하는 상황을 표현하려는 듯하다. 이는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의 친교가 그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안식하기까지는 여전히 불안전하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그 밖에도 성막의 벽과 주변 성막 뜰 사이의 분리를 생각해 복 수 있다. 여기엔 앙장 뿐 아니라 여러 겹의 덮개가 사용되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갈 길은 하나님 자신이 제시하산 오직 한 길 뿐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 예수께서도 마찬가지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성막은 아카시아나무로 만든 널판으로 지탱되고 있는데, 널판들을 결합시켜 만든 구조물은 하나의 완전한 면을 이루며, 이같은 성막 구조는 솔로몬이 지을 견고한 집인 성전의 내구성을 예시해 준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더 큰 ‘집’ -또는 처소-인 피조된 우주의 안정성을 보여 주고 있다. 널판 구조물 바깥에는 직물로 된 앙장이 있다. 그 앙장은 실제로는 열 폭의 세마포장으로 되어 있는데, 10이란 지상소의 완전수이다(출 26:1-6). 황금 갈고리 -황금은 상막의존귀와 위엄에 상응한다-는 각기 5폭으로 된 2개의 앙장을 이어준다. 여기서 5라는 숫자는 외적으로는 성막 뜰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근본적인 숫자 5의 강조의 시작이다.
50개의 고리와 갈고리가 두 폭의앙장을 결합시키고 있는데, 이는 성막 뜰의 광 50규빗을 연상시킨다. 전체 덮개가 두 부분으로 -세심하게 결합되어 있지만 분리될 가능성을 지닌-나뉘어져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 있다. 이러한 가능성은 성막 뜰과 성소, 성소와 지상소를 가르는 두 폭의 휘장을 통해 더 완전히 성취된다. 상징적으로 보면 이같은 일체의 장식 배열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 휘장이 찢어질 것을 예시한 것이다(마27:51). 이와 아울러 두 폭을 결합시키는 방식은 하나님이 그의 창조와 구원 방식을 하나로 결합시키고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세우실 것을 암시해 준다(골1:17) 그것은 하나의 단일 구조 속에 되어 있는 수많은 연관성들을 떠올리는 아련하고 현란한 시의 한 부분과 같다. 여하튼 실제 우주의 정격이 그와 같으니, 우주는 하나님에 의해 하나의 전체 곧 하나의 우주로 창조되었으면서 동시에 부분들 간에 매혹적이고 무수한 내적 상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본성이 그와 같아서, 그분은 한 인격이면서 그 안에 “신성의 모든 충만” 곧 다양하고 풍성한 지혜와 사랑을 담고 계신다.
성막 세부 사항을 살펴 보기로 하자.
염소털로 짠 두 번째 앙장은 청색 앙장 위에 덧씌워진다(출 26:7-13). 그 식양은 내부의 앙장과 본질상 같으며, 앙장의 재료는 염소털로 짠 피륙인데, 이는 지상작인 재단 희생과의 연관성을 시사해 주며, 또한(아담과하와가) 죽은 짐승가죽으로 나체를 가리운 사건을 연상시킨다(창3:21) 이 앙장이 열폭이 아니라 열한 폭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 또한 불완전성을 암시한다. "붉은 물들인 숫양 가죽“(출 26:14) 덮개가 씌워진다. 붉은 덮개는 성막을 외부의 오염으로부터 격리시키는 짐승 피를 상징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 덮개는 ‘돌고래 가죽’(또는 바다표범 가죽 또는 오소리 가죽)으로 만들어져 있다. 그 재료는 필시 비를 막는 방수 기능을 지니고 있어야 했을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돌고래나 바다표범 가죽이 걸맞았을 것이다. 비와 먼지를 막는 것은 대단히 실제적인 기능이었다. 그러나 이 역시 성막의 외부 세계로부터의 철저한 격리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6. 성막의 상징적인 의미
하나님께서『출애굽기』25장 8절에서 직접 말씀하셨듯이 성막은 무엇보다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이다. 이것만은 부정할 수 없다. 의미에서는 하나님은 어디에나 편재해 계신다. 그분의 성품은 모든 피조물 속에 나타나 있다(롬 1:18-21).
(1) 하나님은 천사들과 수종드는 영들이 있는 거룩한 하늘궁정에 계신다(왕상8:30; 사6:1-2;시 89:7; 욥 1:6; 계 4:1-11)
(2) 온 우주는 마치 집을 짓는 곳과 같은 방식으로 창조되었다(시 102:2-3; 암 9:6; 잠 8:22-31; 사 40:22). 하나님은 그 모든 만물에 충만하시며(렘 23:24), 이러한 의미에서 온 천지가 그분의 초소이다.
(3) 성막과 후대의 솔로몬이 지은 성전은 하나님의 특별한 처소이다.
(4) 에덴 동산은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직접 만나셨던 하나님의 특별한 처소였다(창 2:15-3:80참조). 성막과 성전 상징의 일부는 의심의 여지없이 아담이 에덴 동산에서 주렸던 저 상실된 하나님과의 친교를 회상시키고 있다. 성막의 그룹은 『창세기』3장 24절의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는 그룹을 상기시킨다.
(5) 공동체로서의 하나님의 백성들 역시 하나님의 처소가 된다. 신약에서는 교회를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부르고 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고전3:16; 벧전 2:5).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거하심으로 인해 거룩한 백성으로 칭해졌던 사실 속에 이미 내포되어 있다.
(6) 『고린도전서』6장15절과19절에 따르면 성도들 각자의 몸이 하나님의 처소이다. 오직 이같은 성령의 강림만이 사람들을 온전한 의미에서 성전으로 만든다. 동일한 진리가 이스라엘에서 대제사장의 의복이 성막과 유사하다는 사실 속에 예시되어 있다(제4장 참조). 따라서 대제사장은 일종의 작은 성막이다.
(7) 『요한계시록』21-22장에 묘사된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인간과 함께 거하시는 마지막 처소이다(계 21:3,22). 하나의 도성으로서 새 예루살렘은 원래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체를 의미한다, 이는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처소라는 원리가 구현된 것이다 「위의 (5)항 참조」그러나 새 예루살렘은 동시에 천상의 도성인데 (계 21:2, 10), 그것은 지성소처럼 정확한 정육면체 모양을 갖추고 있는데, 그것이 최후의 성막 내지는 성전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계 21:16, 22). 생명수의 강과 생명 나무, 그리고 모든 저주가 사라진다는 『요한계시록』22정 1-3절의 말씀은, 그것이 또한 하나님이 사람과 만나시는 새로운 에덴 동산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8) 그리스도 자신이 하나님이 사람들과 함께 거하시는 궁극적 처소이다. 『요한복음』1장 14절에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구약의 성막을 암시하는 것이다. 『요한복음』에서 성부와 성자의 상호 내주를 뜻하는 유사한 표현들은 우리에게 궁극적 형태의 내주 곧 삼위일체 위격들 간의 원초적 내주를 보여준다.
하나님은 최고의 의미에서 거룩하시다(사 6:3) 그의 임재와 관계될 경우엔 거룩하다고 창해질 수 있다. 성막과 성전은 거룩하며, 지성소는 하나님의 직접적 임재와 가장 근접해 있기 때문에 더욱 거룩하다, 마찬가지로, 에덴은 신성모독적인 일체의 것들을 제거한 하나님의 산으로서 거룩하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겔 28:13, 16). 제사장들은 거룩하며 그들 자신이 성막의 거룩성을 대표한다(레 21:6). 그리스도는 최고의 의미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요 6:69; 참조 행3:14)이다. 실제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처소들의 최고 원형이이므로 모든 처소들은 그분을 모델로 해야 한다. 즉, 성막은 긍극적으로 [위로는 ]하나님 자신을 가리키고 [시간적으로는 ] 장차 그리스도 안에 나타날 하나남의 계시를 가리키기 때문에,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골 2:9)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막은 그 자체만으로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말해 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성막 안엣 발견되는 모사의 패턴은 하나님의 계시와 역사를 위해 그분이 세우신 계획의 역동적 특성을 말해 준다. 장차 나타날 더 큰 계시는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온 세계를 당신의 천상의 영광으로 충만케 하시려는 -의 성취와 보조를 같이 할 것이다(계 21:22-23).
7. 성막에서 얻을 수 있는 실제적인 교훈
첫째로, 성막은 천국과 상징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참 신이시며 한 지역에만 국한되는 잡신이 아니라 온 천지의 지극히 높으신 주재시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둘째로, 온 천지가 하나님의 집이기 때문에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보살핌이 매일 매일의 환경 가운데 나타 나는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해 주었다.
셋째로, 유일무이한 구조로서의 성막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그들이 유일무이한 특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신약시대에 와서 하나님은 유일무이한 방식으로 교회와 (고전 3:16) 그리스도인 개개인 가운데 거하신다(고전 6:19; 롬 8:9-17). 이같은 내주하심으로 인해 우리는 일반 세상과 구별된다.
넷째로, 성막은 에덴 동산을 상징하고 있으며, 이로써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아담의 후손된 그들의 죄악되고 버림받고 소외된 상향을 상기시켜 주었다. 성막은 타락과 동시에 한 대표자를 통해 죄를 극복하게 되리라는 -궁극적으로 우리의 마지막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히 7:27-28)- 약속을 말해 주고 있다.
다섯째로, 성막은 공동체로서의 하나님의 백성을 상장하였다. 집단으로서의 이스라엘은 성막의 미, 질서, 거룩, 순결을 본받도록 명령받았다. 교회는 지도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을 좇아 조직화되어야 한다.
여섯째로, 성막은 하나님의 백성 개개인을 상징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 몸을 정결하게 간수하도록 명령받았다.
일곱째로, 성막은 장차 하나님이 인간과 함께 거하실 궁극적 처소인 새 예루살렘을 가리킨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미래에 있을 하나님의 구원을 대망하고 그분의 오심을 위해 기도해야 했다.
여덟째로, 성막은 하나님 자신을 상징한다. 성막은 하나님이 장차 인간과 함께 거하실 최종적 처소로서뿐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완전한 신성을 계시하시는 성부와 성령을 가리킨다(골 2:9).
8. 성막 계시를 해석하기 위한 지침
상징의 해석에는 결코 우리의 현대적인 편견이 개입되지 말아야한다. 그러면 성막과 하늘, 땅, 창조와의 연관성이 깨달아지며, 동시에 이스라엘의 과거의 구원과 현재의 체험 사이의 연계성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원래의 역사적 상황에 대한 인상을 얻은 후에는 우리는 그 그림을 확대하여 하나님이 후대의 예언자들과 신약을 통해 당신의 이야기와 계시를 계속 이어가시는 방식을 관찰함으로써 그림의 나머지 부분을 채워 나갈 수 있게 된다. 원래의 역사적 정황과 성경 전체의 포괄적 해석이라는 두 단계는 피차 엄격하게 구분될 수 없다. 양자는 서로 보완적인 관계에 있다. 오직 성경 전체에만 치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달하신 내용 대신 지나치게 자신들의 관념에만 함몰됨으로써 탁상공론에 빠지게 될 때가 많다.
제 3 장 희생제사:
그리스도의 최종적 희생의 예표
1. 성결한 삶으로의 부르심
제사장들은 제사를 드릴 때 감당할 역할을 지시 받아야 했고(레 6-7), 임직받고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기 위해 특별히 성별되어야 했다(레 8-10). 일반 백성들은 성막에 나아가기의해 더러움으로부터 자신을 성별해야 했다(레위기 11-16). 『레위기』의 전체 내용은 원칙적으로 성막과 이로부터 유래하는 정결 의무에 관한 것이다.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게 19:2; 벧전 1:16). 이제는 백성들 자신이 성막의 건축과 봉헌을 통해 하나님의 처소가 되었으므로 하나님의 초소로서의 원리를 보여 주는 삶을 꾸준히 실천해야 했다. 그같은 원리들은 하나님의 마지막 처소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게 구현되었다.
2. 죄로부터의 구속
제사는 백성들과 성막 자체의 더러움을 정화하고 제거하는 수단이다. 그것은 백성들과 성막의 성결을 유지시켜 주며, 이로써 세속의 일들이 하나님의 거룩성을 계속 반영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중심적 수단이 된다. 제물용 짐승들은 결함과 흠이 없어야 했는데, 이는 하니님이 완전성을 요구하심을 상징했다. 피는 성막을 더러움으로부터 깨끗게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짐승의 기름은 가장 맛있고 좋은 부분에 해당되는데, 주님께 바친다는 의미로 제단 위에서 불살랐다. 하나님께서 궁극적 제물을 친히 제공하셔야 한다(창 22:8). 온 나라의 죄악은 ‘햇순’ 또는 다윗의 후손이면서 동시에 대제사장인 한 사람에 의해 단번에 사함을 받고(슥 3:8-9; 사 11:1),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영원히 솟아나는 원천-이 열릴 것이다(슥 13:1). 구약은 인간의 모든 허물을 종식시키고 그 약속을 온전히 성취하실 그리스도를 간절히 갈망하게 된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3. 희생제사의 절차
예배자는 자기 손을 짐승의 머리 위에 얹음으로써 자신을 그것과 동화시킨다. 그리고 나서 그는 동물을 성막 뜰 입구에서 잡는데, 이는 그 짐승이 자기를 대신하여 죽는 것을 의미한다. 제사장은 피 약간을 취하여 제사 형태에 따라 놋제단 사면에 뿌리거나 혹은 제단 뿔이나 분향단 뿔에 바른다. 이 모든 행위는 제단에 짐승이 줄었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로서 항구적인 표시를 하는 것이다. 피로써 하는 이 모든 의식들은 이스라엘의 죄와 부정으로 더럽혀진 성막과 기구들을 다시금 정화해 준다.
온전한 번제의 경우 피는 놋제단 사면에 뿌려지며, 이는 제단을 다시 정결케 함을 의미한다(레위기 1장). 이같은 절차는 성막뜰에 불완전한 인간들이 출현하는 것만으로도 제단이 더러워질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속죄제는 개인이나 공동체가 부지중에라도 뭔가 죄를 범했을 때 드린다(레위기 4장). 피의 일부는 제단 뿔에 바르며, 이로써 제단이 전과 같이 깨끗해졌음을 상징한다. 피의 나머지는 제단 밑에 쏟는데 이는 제단과 그 토대인 대지 사이의 접촉면을 다시 정화한다는 의미가 있다. 쏟은 피는 대지의 일반적인 정화를 상징하며, 이에 비해 제단에 뿌려진 피는 대지 중에서도 특별히 성별된 지점인 제단을 깨끗게 한다는 의미가 있다.
제사장이나 공동체 전체 범죄할 경우엔 놋제단 뿐 아니라 성막 자체 더러워지는데, 이는 제사장은 성막에서 직무를 수행하며 성막은 공동체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속죄제의 피는 일상적인 속죄제의 경우처럼 제단 뿔에만 자르지 아니하고 분향단 뿔에도 바르게 된다(레위기4장). 또한 피는 내실과 외실을 나누는 휘장에도 뿌려진다. 그같은 과정은 제사장이나 나라 전체의 범죄로 인한 부정은 하나님의 하늘 보좌입구에까지 이르게 됨을 보여 준다.
이처럼 피를 쏟고 뿌리는 일체의 과정은 이스라엘의 범죄가 반복되는 것과 하나님께 생명을 희생제물로 바침으로써 끊임없이 이를 정화해야 할 필요성을 거듭 증거해 준다.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에 불과하다(히 9:23). 그렇다면 누가 최종적이 제물을 드릴 것인가?
『스가랴서』3장에서는 더러운 옷을 입은 대제사장 여호수아에 대해 한껏 상징적으로 묘사한 데 뒤이어 신비하게도 여호와의 종 “햇순”에 관해 말하면서, 이를 “내(=전능하신 주님)가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하리라”(슥3:9)는 구절로 연결시킨다. 궁극적인 속죄 제물은 죽임을 당하는 양과 같아야 함과 동시에 희생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과 같아야 한다. 이 마지막 대제사장은 『이사야』53에서는 여호와의 종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사 53:10) 여기서 희막은 가시적인 하늘 전체를 상장한다. 그 다음으로 땅을 상장하는 놋제단에 뿌려진다(레위기16:18), 각각의 정화는 일곱 번씩 피뿌림을 통해 완전해지고 (16:14, 9).온 우주는 그의 희생의 피로써 깨끗해진다(롬 8:20-21; 골 1;20). 땅의 완전한 정화는 그리스도께서 하늘 지상소로부터 나오시어 몸으로 지상에 재림하실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4. 희생제사의 제 유형
『레위기』1-5장은 다섯 가지의 기본적인 제사 유형에 관해 서술하고 있다. 곧 번제 (레위기1장), 소제 (레위기2장), 화목제(레위기 3장), 속죄제(레위기4장),속건제 (레위5장)가 그것이다. 속죄제는 죄를 속하기 위하여 드려진다.(레위기4:35)
화목제의 경우 예배자는 하나님께 바친 짐승의 일부를 먹는 것이 허용된다(레위기 7:15-18).
소제 제물은 예배자가 아닌 제사장들이 먹는다(레위기6:14-18). 이제사가 시사하는 주된 사상은 하나님의 능력과 축복으로 거둬들인 것의 일부를 다시 하나님께 돌려 드린다는 것이다. 『레위기』1장에 기술된 번제는 가장 해석이 어렵다.『레위기』1장 4절과 14장 20절은 번제가 속죄제와 마찬가지로 예배자의 “죄를 속하기 위해” 드려지는 것임을 보여준다.
짐승을 드리는 모든 제사중에 유독 번제만은 완전히 불살라야 한다. 이같이 전체로서 태워 바치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많은 해석자들이 하나님께 완전히 헌신, 성별된다는 의미를 최우선적으로 제시한다. 이는 동시에 완전한 파괴를 뜻하는 것으로도 여겨진다. 짐승은 예배자를 대신하며, 따라서 이는 예배자의 완전한 멸망을 상징한다고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일어난 일은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졌음을 뜻한다. 그러나 이러한 전적인 헌신은 예배자의 온전한 봉헌에 더하여 대속물의 완전한 멸망을 통해 성취되는 것이다.
번제에 관한 이같은 고찰들은 『신명기』13장 16절의 구절에서도 확인된다.
특히 속죄제와 번제는 유사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속죄제와 속건제는 죄의 처벌이나 보응을 강조하고 있다. 번제는 하나님께 대한 헌신을 강조하는데, 여기에는 죄와 불결의 완전한 제거가 포함된다. 소제는 하나님께 감사드림에 있어서 마땅한 대가의 지불을 강조하고 있다. 제물의 음식은 하나님의 거룩성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특별한 성물이다 (레위기22:15-16) 이 모든 측면들은 십자가 위에서 치루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위해 형벌을 감내하셨다(벧전2:24: 사 53:5) 그러므로 그분은 마지막 속죄제물이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진 분이었다. 그는 최후의 번제물이시다. 그는 마지막 소제물이신 것이다. 그리스도는 마지막 화목제물이신 것이다.
제 4 장 제사장과 백성:
그리스도와 성도들 간의 관계의 예표
구약의 제사장들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로서 봉사한다. 그 대신 제사장이 백성들을 대신하여 그들을 위해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 이같이 제사장들은 백성들의 죄악을 씻기 위하여 그것을 하나님께 가지고 나아간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백성들에게 전달한다. 주님은 명확하게 새로운 제사장은 아론의 후손이 아니라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서 알어날 사람이라고 선언하셨다(시 110:4).
1. 제사장과 성막의 유사점
제사장들 자신은 성막의 정화와 관련되는 절차를 통해 정결케 된다. 제사장들은 피로써 깨끗게 되어야 한다. 제사장들이 성직에 임명되는 날, 제일 먼저 그들을 위해 속죄제와 온전한 번제가 드려진다(레위기 8장). 그들은 죄로부터 정결케 되어 상징적으로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진다. 오른쪽은 주요하고 대표적인, 그리고 ‘질서잡힌’ 쪽으로 간주된다. 상체의 돌출부인 귀에 처음으로 손을 대는 것은, 그것이 하늘에 가장 가까운 돌출부이기 때문이다 그 다음으로 제물을 다루고 성막의 땅을 딛는 손가락과 발가락에 바른다. 대제사장은 정금으로 만든 패에 “여호와께 성결” 이라고 새겨넣은 관을 쓰게 된다(출 28:36).대제사장 자신이 사실상 성막의 직립형 모사물인 것이다. 그의 옷은 성막의 휘장에 해당된다. “여호와께 성결”이라고 새겨 넣은 그의 관은 천국을 상징하는 지성소에 해당된다. 이들 제사장들은 마치 성막 자체가 천국의 그림자와 모형인 것처럼 사실상 실체에 대한 그림자와 모형에 불과하다. 우리의 참된 제사장은 하늘로부터 온 사람으로서 참 하나님이자 참 인간이시다(히 1:1-5). 그는 하늘과 땅의 궁극적 연합이며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히1:3)이시다.
2.이교도의 거짓 예배
이교는 항상 참 하나님에 대한 우상숭배적인 대체물을 만들어 내려고 노력한다. 우리는 이 같은 이교 신앙의 위조 과장을 『다니엘』2장에 나오는 느부갓네살 왕의 꿈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 비유의 세부 사항들은『다니엘서』7장에서 다니엘 자신이 훗날 꾼 꿈에서 받은 비유와는 천양지차가 있었다. 느부갓네살의 꿈은 세상 왕국들이 세우려 하는 거짓된 제사장 제도와 거짓 예배를 계시한다. 이들 세상 왕국들은 멸망당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를 대신할 것이다. 다니엘은 그의 꿈 속에서, 새로이 임할 하늘나라의 참된 모습을 네 왕국의 동물적 특성과 대조되는 한 거룩한 사람에게서 보고 있었던 것이다(단 7:13-14).
최종적인 하늘 나라를 “인자 같은 이”(단 7:13)의 보습으로 묘사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단7:13). 이는 하나님 자신의 강림을 상징하는 표현이다.
3. 이스라엘 민족
이스라엘 민족은 “제사장 나라가되며 거룩한 백성이”(출 19:6) 될 것이다.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위 19:2) 라는 근본적인 명령은 모든 사람에 대한 것이다. 사람들은 각자 나름대로 하나님의 거룩성을 모방해야 하며, 만족 전체는 집단적으로 하나님의 모방하는 ‘거룩한 나라’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출애굽기』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고 그들과 친교를 나누셨다. 그들은 하나님의 툴벽한 백성이라는 지위에 걸맞게 생활해야 했다. 그들의 삶의 모든 부문-그들 가운데 특별히 임재해 계신 하나님과의 관계(성막으로 나아가는 것), 미래에 대한 그들의 기대(가나안 땅의 점령), 자만심이나 탐욕(신 8:10-20; 5:21),토지 사용(레위기25:23),성적인 관계(레위18:1-30), 식생활(신 11장),농경(신 24:19-22),금전 사용(신24:17-18; 23:19-20),사회적 관계(레위19:13-18) 등-에 커다란 변화가 왔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이들 분야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모방함으로써 주변 열국에게 본보기가 되어야 했다. 그들은 광의의 ‘제사장들’로서 하나님과 다른 민족들 간에 중보자가 될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북을 얻을 것이니라”(창 12:3)고 약속하셨다. 스가랴는 이같은 목적의 성취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그날에는 방언이 다른 열국 백성 열 명이 유다 사람 하나의 옷자락을 잡을 것이라. 곧 잡고 말하기를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심을 들었나니 우리가 너희와 함께 가려 하노라’ 하리라”(슥8:23).
『이사야서』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종을 일으키겠다고 약속하셨고, 그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셨다(사 49:3).그 종이 희생양으로 죽음으로써 (사53장) 불의와 더러움이 정화될 것이다(사 4:4). 물론 여기서 이사야는 예수 그리스도의 서역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아브라함의 마지막 자손이시다(갈 3:16).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는 참되신 마지막 아들을 모방한 것이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교회는 역으로 그리스도의 충만을 모방하고 있다(엡 4:7-16). 그리스도인들의 체험은 여러 면에서 이스라엘의 체험과 유사하다(고전10:1-13; 히12:14_29; 갈4:21-31). 이스라엘은 무엇보다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모형이며,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교회와 새로운 인류를 알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제 5 장 당신의 백성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예표
1. 성막, 희생 제사, 제사장의 상호 작용
여러 면에서 성막, 희생제사, 제사장 직분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성막은 죄인들을 정화하고 그 앞에 나아가도록 하기 위해 희생제사와 제사장 제도를 갖추어야 한다. 제사장 제도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인격적이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성막 구조 자체는 하나님의 거룩성에는 그분 자신의 계명이나 율법에 부여된 탁월한 규칙성, 건축학적이 질서가 수반된다. 성막에는 모사 혹은 복제의 허다한 실례들이 포함되어 있다. 성막 자체는 촌국적 모형의 모사물이다(히 8:5). 성소는 지성소를 약간 격이 떨어지게 모사한 것이다, 성막 뜰은 어떤 면에서는 성소의 모사물이다. 제사장은 성막의 복사판이다. ‘제사장 나라’ “거룩하라”(출19:6) 희생제는 특별히 백성들의 유익을 위해 발휘되는 하나님의 능력을 구현하고 있다. 하나님의 임재의 특성은 제사장들을 통해 가장 분명하게 나타난다. 하나님의 임재는 언약궤에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다, 언약궤는 구약 전체를 통틀어 하나님의 임재와 가장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하나님은 두 그룹 사이의 공간에 가장 가까이 임재해 계신다고 묘사되어 있다. 하나님의 처소의 질서는 언약궤 속에 넣은 증거판이 가장 여실하게 보여 주고 있다. 하나님의 인격적 임재는 진설병(임재의 떡)에서 엿볼 수 있는데, 이는 그것이 하나님의 ‘임재’를 그 이름으로 사용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과 친교를 나누면서 식사를 나누는 특권을 암시해 주기 때문이다. 저주, 축복, 속죄의 능력은 분향단에 가장 직접적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의 질서는 성소에 비치된 등대에서 엿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소를 비추며 이로써 그 질서를 밝히 드러내기 때문이다. 성막 뜰에서도 하나님의 인격적 임재는 평신도와 제사장 사이의 접촉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난다. 성막 경내의 주요 영역들(성막 뜰, 성소, 지성소)에는 제각기 인간과 동거하시는 하나님의 본질적인 측면들이 상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지성소는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은밀한 처소를 모사하고 있다. 하나님은 지성소에 가장 직접적으로 임재하시며, 따라서 이곳은 하나님의 인격적 임재를 가장 뚜렷하게 상징한다고 말할 수 있다. 성막 뜰은 그곳에서 거행되는 제사와 제의 절차를 통해 속죄를 이루는 하나님의 능력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 온 우주에 부여하신 질서(하늘의 광명, 계절, 농경 등의 질서)를 상장하고 있다. 모세 지신이 적어도 어느 정도는 이세가지 측면들을 몸으로 구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먼저, 인격적 임재라는 주제를 생각해 보자. 한인간으로서 모세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를 증재하였다. 축복과 저주라는 주제를 생각해 보자. 모세는 하나님의 심판의 중보자이다.
2. 계약: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대하시는 방법
성막의 배치와 제사장 제도는 하나님이 계약의 형태로 이스라엘을 대하시는 것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출애굽기』19장 5절 및 기타 다른 구절들에 의하면,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계약 곧 제재 규정이 딸린 격식을 갖춘 약속의 형태로 되어 있었다(출24:7-8; 34:10-28; 신 29:1, 9, 21).모든 계약은 반드시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1) 계약 당사자의 명시 (신분 확인). (2)그들의 상호 의무의 명시(계약 조항). (3) 하나님(다신교의 경우엔 신들)이 준수자룰 어떻게 상주시며 위반자를 어떻게 계약 조항대로 벌주실 것인지를 명시하는 규정(제재 규정). 세 가지 계약 요소는 각각 다음의 원리들을 나타냈다. (1) 인격적 임재. (2) 하나님의 질서. (3) 축복과 저주를 내리고 대속물을 통해 속죄하는 하나님의 능력. 성막 자체는 하나님의 계약을 나타내는 일종의 상징물이다.
헷 족속의 계약은 관습상 여섯 부분으로 대별된다.
(1) 종주의 신분을 확인하는 전문
(2) 봉신과의 이전 관계를 설명하는 역사적인 서론
(3) 봉신의 의무를 상술하는 계약 조항
(4) 봉신의 신전에 계약서를 보관하고 정기적으로 공중 앞에서 낭독할 것에 대한 조항
(5) 계약을 위반하거나 잘 지켰을 경우에 임할 저주 또는 축복들
대체로 볼 때 『신명기』의 문화적 형식 구조는 헷 족속의 계약문과 사실상 일치한다. 그러나 그 일치는 계약 형식의 정확한 모방보다는 느슨하고 자유로운 각색의 결과인 것이다. 계약문의 각 부분들을 수효나 배열이 『신명기』에서도 그대로 보전되는 것은 아니다.
멘델홀과 클라인에 의하면 동일한 계약 형식은 『출애굽기』20장의 십계명 해설에서도 찾아 불 수 있다고 한다. 우선 전문이 나오며(“나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뒤이어 역사적 서론이 나오고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20:2), 계약 조항 (십계명, 20:3-17)과 제재 규정(20:5-6, 7, 12)과 내용 보관에 대한 규정(25:16)이 나온다. 그러나 여기서는 헷 족속의 계약과의 일치성은 더욱 느슨해진다 십계명이 기록된 『출애굽기』20장이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 이스라엘 사이의 계약을 이룬다는 것은 분명하다(출34:8; 신4:13, 23; 5:2; 9:9). 이들 핵심 구절에는『출애굽기』21-23장과 34장 10-26절과 같은 보충과 설명이 추가되는데, 그같은 보충 구절들도 마찬가지 계약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24:7; 34:27).『신명기』전체는 두 번째 계약 갱신의 책으로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직전의 백성들의 상황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다(신 29:1, 9). 전문과 역사적 서론은 하나님의 인격적 임재의 주제를 특히 잘 표현하고 있다. 계약 조항은 그분의 질서를, 제재 규정과 보건 조항은 축복과 저주를 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 주며, 따라서 장래를 위해 말씀을 보전하는 일의 중요성을 보여 준다. 성막은 고정된 정적 상징물이다. 계약 문서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관계의 과거와 미래를 직설적으로 말해 준다. 역사적 서론에서는 과거의 구원 행위를 서술한다. 제재 규정과 문서의 보관 조항은 광의로는 미래에 대해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성막의 건립은 하나님의 승리를 선포하고 그분의 영광을 찬양하는 것으로, 하나의 예배행위로서는 애굽으로부터의 탈출의 클라이막스를 이르는 사건이다. 희생 제사는 가깝게는 유월절 어린 양을, 그리고 좀 더 멀게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비친 사건을 상기시킨다. 성막은 장차 임하게 될 새 예루살렘에 대한 약속을 상징하고 있다. 하나님과 인간의 동거라는 주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성취된다. 우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인격적 임재를 몸소 보여주신다.
첫째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기 위해 특이한 방식으로 찾아오시며,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안에 내주 하신다.
둘째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질서를 나타내는데, 이는 그분의 성품이 의의 완전한 모범이기 때문이다.
셋째로 그리스도는 죄를 속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데, 이는 그가 죄를 위한 마지막 제물로 죽으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모세가 받은 모든 계시의 완성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모세오경 전체에서 이들 세 가지 주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제 6 장 ‘약속의 땅’:
이 땅에 대한 그리스도의 쇄신과 통치의 예표
1. 땅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
우리는 구약 가운데에서 이 약속을 중심으로 짜여진 이야기들을 수없이 발견하게 된다. 『창세기』는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여러 세대에 걸쳐 이 약속이 성취되기를 어떻게 고대하며 살아 왔는지를, 『출애굽기』는 그 약속의 일환으로 그들이 어떻게 애굽 땅에서 구출되었는지를, 그리고 『민수기』는 광야를 방황하며 떠돌던 세대들이 어떻게 ‘약속의 땅’의 문턱에서 한발자국도 더 나아갈 수 없었는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이어서 『신명기』는 ‘약속의 땅’에서 그들이 행하여야 할 바에 대한 지시를 광범위하게 수록하고 있으며, 그들이 그 땅의 입구에 서서 그곳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묘사하는 것으로 끝맺음하고 있다.
‘약속의 땅’은 하나님이 세우신 언약의 핵심적인 내용을 이루고 있기도 하려니와 몇 가지 매우 중요한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이 더욱 뚜렷이 부각된다. 그 땅의 주인은 어디까지나 하나님 자신이었고, 땅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땅, 곧 “나 여호와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거하는” 땅이었다(민 35:34).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으로서 그 땅은 성막이나 성전-좀도 집약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이 거하는 장소인 -과 크게 다를바가 없었으니 땅의 더럽혀짐은 곧 성막의 더럽혀짐이었고, 땅의 정화(민 35:33-34)는 곧 성막의 정화를 의미했다.
2. ‘약속의 땅’의 거룩한 성격과 그 상징적인 의미
(1) 하나님은 천국에 거하신다. 그러면 ‘약속의 땅’은 이 천국에 유비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아브라함 자신이 팔레스타인 땅을 궁극적으로 그와 그의 후손들이 거하게 될 ‘하늘에 있는 본향’의 예표로 보았음을 알 수 있다.
(2) 하나님은 온 우주에 거하신다. 팔레스타인 땅은 온 땅을 대표하는 ‘본보기’가 되기 위한 것이었다(신 4:5-8; 29:22-28).
(3) 하나님은 성막 안에 거하신다.
(4) 하나님은 에덴동산에 거하셨다. 팔레스타인 땅은 에덴동산을 연상케 하는, 풍요로운 점원의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다(신 8:7-9; 7:13-15; 욜2:3; 사51:3; 겔36:35)
(5)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 가운데 거하신다.
(6) 하나님은 성도들의 몸 안에 거하신다.
(7) 하나님께서는 궁극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거하실 것이다.
‘약속의 땅’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선물이자, 그분의 자비와 선하심과 축복의 구체적인 징표였다. 이스라엘의 다른 여러 제도들처럼, ‘땅’은 그들과 하나님 사이를 이어 주는 통로이자 하나님의 선하심과 거룩하심을 드러내는 수단이었다. ‘약속의 땅’은 하나님께서 당신이 하신 약속을 얼마니 신실하게 지키시는지를 웅변적으로 증언하고 있다. ‘약속의 땅’은 신뢰와 책임을 의미하기도 했다. 일종의 ‘아담 집단’ 인 이스라엘에게는 그 땅이 더렵혀지지 않도록 해야 할 책임이 부여되었다. 무엇보다도 그 땅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었다는 사실은, 누구든 그 “토지를 영영히 팔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레위기 25:23-24). 우리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우리를 향한 그분의 자비와 관용을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고후 8:9)
제 7 장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
그리스도의 의의 예표
모세 시대에는 하나님의 율법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교통함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십계명은 율법의 핵으로서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셨지마는 이 십계명만은 시내 산 위에서 그들에게 직접 내려 주셨고(출 20:1-21; 신 4:10-13), 두 돌판에 ‘친히 써서’ 모세에게 전해 주셨다(신 4:13; 10:4).
1. ‘만왕의 왕’께서 주권적으로 세우신 계약으로서의 율법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율법이 지닌 의미를 분명히 이해하고 있었다. 이 율법은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이 그들과 맺으신 계약이었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은 그들에 대한 보호와 은총을 약속하셨으며 그들은 그분께 대한 순종과 충성을 서약하였다. 고대 히타이트 족이 조약을 체결할 때에는, 종주와 봉신이 각각 한 부씩 보관할 수 있도록 두 부의 조약 문서를 만드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으로 되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틀림없이 두 개의 돌판에 같은 내용의 십계명을 각각 기록하셨을 -하나의 십계명을 두 개의 돌판에 나누어 기록하신 게 아니라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두 개의 돌판을 성막에 보관한 것은, 그곳이 종주이신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자 봉신인 이스라엘이 그분을 예배하는 매우 중요한 장소이었기 때문이다. 거룩한 상징물들이 보관되어 있는 성막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제나 함께 계심을 강조하는 한편, 고대 근동의 조약과 비슷한 형태를 띤 율법 조항들은 하나님의 통치가 세상의 왕들이 통치하는 방식과 비슷하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하지만 성막이 천상의 실재와 아울러 이스라엘의 구원 체험을 상징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통치가 세상 왕들의 통치의 원형이라는 점에서, 하나님이 세우신 계약은 단순히 세상의 왕들 사이에 맺어진 조약과는 달리 독특하고도 신성한 성격을 띠게 된다. 언약궤는 왕이 발을 올려놓는 대의 모양을 하고 있으며, 이렇게 성막 안의 각종 상징물들은 하나님께서 우주의 왕이심과 그분께서 맺으신 계약의 신성함을 밝히 드러내고 있다. 등대에서 비취는 빛은 천상의 실재에서 비롯된 자연적인 창조의 빛과, 하나님이 불타는 듯한 구름 속에서 비추어 주시는 초자연적이 구속의 빛이라는 양면성을 띠고 있다. 그리고 진설병은 하나님께서 자연적인 식물의 성장 과정을 통해 공급해 주시는 음식과,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초자연적인 구속의 ‘만나’라는 양면성을 띠고 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자 구속주이실 뿐더러, 구속의역사 자체가 하나의 창조-또는 재창조-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모든 피조물과(롬8:22) 자신과 한 몸이 된 모든 사람들을 (롬 8:29-34) 대표하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역사로 인해 그 상처가 치유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속자 아들인 그리스도의 예표로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에 정착해 살게 되었다.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께서는 능력의 말씀을 통해 세상을 창조하시고 거기에 질서를 부여하셨다. 그분은 또한 모세를 통해 말씀하시고 놀라운 역사를 일을키심으로써 이스라엘(제사장의 나라)을 세우셨다.
율법에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의 원리가 최소한 세 가지 갈래로 표현되어 있다.
첫째, 율법은 의와 질서의 체제-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어떻게 살아 나가야 하는지에 관한-를 천명하고 있다.
둘째, 율법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함과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말씀하시는 분-과 교통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고 있다.
셋째, 율법은 하나님께서 불순종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내릴 심판과 징벌, 그리고 그분께 순종하며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내릴 축복과 보상을 엄숙하게 선언하고 있다.
율법과 성막은 하나님의 성품과 그분의 통치,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친교라는 기본적인 현실을 서로 보완해 가며 표현하는 수단이 되고 있다. 성막은 『출애굽기』25-30장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지시-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율법’-에 제시된 엄격한 규격과 설계에 의해 지어졌다. 십계명이 적힌 두 개의 돌판이 지성소에 보관되었다는 사실로부터, 성막을 지은 주요 목적이 율법을 보관할 장소를 마련하기 위함이었다는 주장을 펼 수도 있다.
십계명이 하나님의 목소리를 통해 직접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려지기는 했어도(신 4:12-13), 이처럼 직접적인 의사전달 방식은 모세의 중재에 정당성을 부여키 위한 극히 예외적인 절차에 속했다(신 4:14; 5;28-30; 출 20:18-19).이는 하나님의 율법 대부분이, 성막안에 있는 그분의 임재를 상징하는 물건들을 통해 전해 졌음을 의미한다. 모세는 성막있는 지성소에서,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흘러나오는 말씀을 통해 율법을 받았을 것이다.
이 보좌로부터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흘러나온다. 성막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들려주시는 모든 말씀이 신성한 기원에서 나오는 것임을 상징한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미, 성막이 ‘임마누엘’(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로서 그리스도께서 이 땅 위에 오실 것을 예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성막은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 누릴 수 있는 하나님과의 화해와 교통을 상징하고 있다. 율법은 ‘만왕의 왕’께서 세우신 계약이며, 그분의 통치는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인해 완전한 것이 되었다. 천국 또는 하나님 나라는 구약에 기록된 구원에 관한 모든 약속의 성취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통치를 가리킨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세우신 모든 계약 또는 언약은, 나중에 그리스도를 통해 세워진 위대한 새 언약의 예표였다(고후 3:1-18) .
2. 삶과 생존의 질서에 관한 규정으로서의 율법.
모세의 율법에는 이스라엘의 삶과 생존의 질서에 관한 상세한 규정이 제시되어 있다.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서 살아가려는 사람들은, 그분이 정하신 규례에 따라 자신들의 삶을 통해 그분의 의와 질서를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의 도덕성은 그분의 의와 순결성에 일치하여야 한다. 십계명은 바로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기본적인 도덕 질서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순종의 일부로서 요구되는 -의 기본적인 측면들을 규정하고 있다.
정한 것과 부정한 것에 관한 규정을 이해하려면
첫째, 우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우주의 모든 생명과 운행법칙의 근원이자 표준이시다. 우주를 일정한 ‘공간’으로 구분하셨다. 온갖 피조물 가운데서도 특별한 존재인 인간은 가장 독특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질서를 구현하게끔 지으심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창 1:26)-받았다.
둘째,『창세기』1-2장에 기술되어 있는 것과 같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는 인류의 타락으로 인해 파괴되기에 이르렀다. 구원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을 그 질서를 다시 회복시켜 주신다. “그런즉 주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팔레스타인 땅은 일종의 ‘새로운 에덴’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인해 자주가 내리는 땅이 되었다. 그 규정들은 하나님께 서 인류의 죄를 어떻게 씻어 주시는지를 예시하고 있으며, 새롭게 다시 태어난 사람은 온갖 죄악을 등지고 오직 하나님의 뜻과 질서에 따라 살아간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이 규정들 가운데 거룩한 것, 깨끗한 것, 더러운 것의 구분 방식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질서의 일면을 나타내고 있다. 창조자이신 하나님은 거룩 그 자체이시며, 모든 생명체-비록 제한된 범의 안에서나마 질서를 창조해 낼 수 있는 -의 기원이시다. 죽음은 죄와 혼돈과 관련되므로, 죽음이나 혼돈과 관련된 것들은 모두 ‘더러운 것’ 으로 분류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 또는 생명의 창조와 밀접히 관련된 피조물들은 ‘거룩한 것’으로 분류되고 있다. 성막은 하나님이 부여하신 질서의 중심이므로 물론 ‘거룩한 것’에 속한다. 그리고 사람의 첫 아이나 짐승의 맏배는 특별히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거룩하게 ’ 취급된다. 사람이나 동물의 사체는 죽음과 직결되어 있기도 하려니와 생명체의 질서 파괴되어 생명이 없는 땅으로 되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부정한 것’으로 취급된다. 표준적인 형태에서 벗어나는 물고기나 짐승들 역시 ‘부정한 것’ 으로 취급된다,
식물을 되새김하며 발굽이 갈라진 동물들은 가장 정상적인 ‘표준적인’ 형태의 짐승으로 간주되는 반면, 이 두 가지 특징을 결여하고 있는 동물들은 비정상적이고 ‘부정한 것’으로 취급된다. 아마도 되새김질을 한다는 것은 음식을 섭취함에 있어서의 땅으로부터의 좀 더 철저한 분리를, 그리고 발굽이 갈라졌다는 것은 땅과의 접촉면에서의 좀 더 철저한 분리를 의미하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는 것 같다. 종류가 다른 것이 섞인 것들 역시 ‘부정한 것’ 으로 취급된다 율법의 전체적인 맥락은 위생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게 아니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하니 너희[이스라엘]도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데 대한 강조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레위기 19:2) 거룩하신 하나님과 교통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올바른 질서와 금기를 광범위하게 기술하고 있다. 신학적인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3. 삶의 양식에 관한 규정으로서의 율법
‘질서’라는 주제는 ‘생명’이라는 주제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질서와 생명은 모두 하나님 한 분에게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은 혼돈으로부터 질서를 ,그리고 생명이 없는 상태에서 생명을 가진 온갖 피조물들을 창조하셨다. 인류의 타락은 생명과 죽음 사이의 냉혹한 분기점이었다.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시므로, 그분께 대한 불순종은 당연히 줄음을 초래할 것이었다(창 2:17), ‘생명’이란 무엇보다도 영적인 생명-하나님과 교통하며 살아가는 진정한 삶-을 의미한다.
『출애굽기』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하시는 새로운 삶의 양식이 제시되어 있다. 하나님은 여기서, 진정한 삶의 근원인 당신 자신만을 섬기라고 그들에게 명하신다(출 20:2-3).율법은 전체적으로, 하나님의 역사로 인해 해방된 민족으로서 살아나가야 할 길을 제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4. ‘성결법’과 신약
신약에서는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의 구분이, 그 성격상 영원한 것으로 간주되지는 않는 다. 예수께서는 이 땅 위에서 가르치실 때 모든 음식이 다 깨끗하다고 하셨으며(막 7:19), 사도 바울 역시 이 가르침을 분명하게 긍정하였다(골 2:20-23; 딤전 4:3-5). ‘부정한 것’을 멀리하라는 일반적인 원칙은 아직도 타당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바울은 우리가 불신자들과 제휴하거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부인하는 사고방식과 타협하는 일을 엄하게 금하고 있다. 구약에서는 성별의 원리가 ‘정한 것’과 ‘부정한 것’ 에 관한 규정을 통해 상징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상징적인 구분은, 인류의 구원이 대체로 상징적이고 애매모호한 형태로 표현되고 있던 당시에만 타당한 것으로, 그리스도와 십자가 위에서의 그분의 희생이라는 명확하고 최종적인 형태로 드러나게 된 신약 시대에 이르러서는 그 타당성의 근거를 잃게 되었다. 땅과 그 위에 사는 모든 피조물들이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깨끗하게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음을 받아야만 했다.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을 명확한 구분하고 ‘부정한 것’들이 지닌 혼돈된 양상을 철저히 거부한 것은, 만물을 다스리시며(히 1:3)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들이 복종하는 (엡1:21) 만주의주, 만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정돈된 질서의 상태를 미리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5. 십계명이 명하는 제 관계
모세 율법의 핵심인 십계명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제 관계에 관한 것으로-‘정한 것’과 ‘부정한 것’에 관한 잠정적인 규정들과는 달리-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사이의 항구적인 의무를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이 피조물의 세계에 부여하신 질서와 피조물들의 삶에 관한 규정이라는 잠에서는 다른 규정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제1계명에서 제3계명까지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따르는 의무에 관한 규정이다. 하나님이 피조물의 세계에 부여하신 질서와 거룩한 본질은 우리와 그분 사이의 관계 속에서 적절한 형태로 구현되어야 하며, 진정한 생명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예배를 통해 드러나야 한다. 첫 번째- 그리고 최상의- 계명은,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의 유일하신 주님이시자 유일하신 창조주 그리고 모든 질서의 근원으로 받아들이기를 명하고 있다(출 20:3)
제2계명은 거짓된 신들을 섬기는 것뿐만이 아니라 참된 하나님의 상을 만들어 섬기는 것조차도 금함으로써 제1계명에서 한발자국 더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계시해 주신 방식에 걸맞아야 할 뿐 아니라, 그분의 명령에 따라 그분의 성품에 어울리게끔 이루어져야 한다.
제 3계명 (출 20:7)은 하나님의 이름- 우리에게 계시된 그분의 성품-을 함부로 부르는 것을 금하고 있으니, 거룩한 것은 반드시 거룩하게 일컬어져야 하며 그 거룩한 성격이 영원히 보존되어야 한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네 번째 계명(출 20:8-11)은 매우 특이한 성격을 띤 계명이다. 이 계명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관계-이웃에 대한 관계가 아니라-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면서도 날짜의 흐름이라는 자연적인 측면을 포함하고 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내용의 다섯 번째 계명(출 20:12)은 아른 사람들이 대한 의무를 규정한 것으로는 첫 번째 것이다. 이 계명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질서 정연한 상태가 가정의 구조 및 부모의 권위라는 형태로 제시되어 있다. 가정은 새로운 생명- 후손-을 창조해 내는 곳이다. 그러므로 가정을 보호하는 것은 곧 인간의 생명-하나님에게서 비롯된-을 보호하는 것을 의미한다. 부모의 권위에 도전한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가장 소중한 유산-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그것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은총의 선물(“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20:12b)을 포기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여섯 번째 계명은 인간의 생명 자체와 그 질서를 존중할 것을 명하고 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은 특별한 형태의 하나님의 질서를 이 땅 위에 구현하는 존재이므로, 인간의 생명을 파괴하는 행위는 곧 그와 같은 하나님의 질서를 파괴하는 행위에 해당된다.
일곱 번째 계명은 인간의 순결한 성 생활을 명하고 있다. 순결성의 요구는 거룩한 삶에 관한 규정으로부터 자연스럽게 파생되어 나온 것으로 보아야 한다.
여덟 번째 계명은 인간의 재산 관계에 있어서의 질서에 관한 것이다. 도둑질은 인간의 소유 관계의 질서를 파괴하는 행위이다.
아홉번째 계명은 인간의 언어생활의 질서에 관한 것이다. 다른 사람을 해칠 목적으로 하는 거짓말은 인간의 언어가 지닌 원래의 기능-의사소통과 다스림-을 왜곡시킨다.
열번째 계명은 인간의 마음과 욕구의 질서에 관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계명을 어기는 모든 행위가 인간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가르치셨다(막 7:20-23)
성막과 율법의 관계는 심지어 그 배열상의 유사성에 의해서도 입증될 수 있다. 성막은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설계와 도본대로 지은 것이므로 (출25:9, 40), 그분의 뜻을 말씀으로 표현한 십계명과 그 형식이 정확히 일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같은 형식과 배열상의 일치는,‘하늘에서 땅으로’의 형태를 띤 십계명의 배열 순서를 ‘안에서 밖으로’의 형태를 띤 성막에 관한 기사들의 배열순서와 비교해 볼 때 분명히 드러난다. 첫 번째 계명은 성막과 언약궤와 하나님의 보좌가 각각 하나라는 사실에 담겨져 있는 메시지와 똑같은 메시지 -진정한 하나님은 오직 한 뿐이시라는 -를 선포하고 있다.
두 번째 계명은 성막의 구조가 가리키고 있는 바, 하나님께서 나아갈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라는 사실을 선포하고 있다.
하나님의 이름에 영광을 돌릴 것을 요구하는 세 번째 계명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장소를 거룩한 곳으로 여겨야 한다는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네 번째 계명은 ‘하늘과 땅 사이’를 이어 주는 역할을 한다.
다섯 번째 계명과 함께 우리는 성막 뜰, 즉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의무와 책임의 영역으로 넘어가게 된다.
여섯 번째 계명에서 열 번째 계명은 모두 ‘수평적’인 계명에 속하므로 구태여 순서를 정할 필요는 없다.
이 모든 계명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를 완벽하게 반영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진정한 하나님이시므로 우리가 본받고 따라야 할 표준 그 자체이시다. 그분은 인간적인 삶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과 기준을 완전히 드러내 보여 주셨다. 그분 위 지상에서의 삶은 십자가 위엣 그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모세의 율법이 그리스도의 의와 절대적인 완전성을 반영 또는 예시하고 있는 것이지. 결코 그리스도의 사역이 율법을 번영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성막과 율법은 하나님과 우리가 교통할 수 있는 길-오직 그리스도께서 이 땅 위에 오시오 우리의 믿음을 통해 그분과 하나가 될 수 있게 해 주실 때에만 완전하게 구현될-을 서로 보완해 가며 가르쳐 주고 있다.
제 8 장 성막과 율법 그리고 약속의 땅:
그리스도의 예표
성막과 율법 그리고 약속의 땅은 모두 그리스도를 예시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예수님 자신도“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눅 24:44)고 말씀하셨다.
1. 성막의 상징과 성서적인 진리
(1)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이 하늘에 있는 궁정의 복제판이다.
(2) 성막은 우주 전체의 모습에 유비 될 수 있다.
(3) 성전은 똑같은 천상의 실재를 성막보다는 좀더 본격적인 규모로 반영한 것이다.
(4) 성막은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만나시던 특별한 장소-에덴동산-를 연상시킨다(창 2:15-3:8)
(5) 성막은 하나님이 가하시는 전이 된 하나님의 백성들의 귀감이다.
(6) 성막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 각자-특히 제사장-에게 귀감이 된다.
(7) 성막은 『요한 계시록』21:22장에 기록된 하나님의 최종적인 처소를 예시하고 있다.
(8) 그리스도 자신을 예시하고 있다.
(9)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연상시킨다.
(10)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를 예시하고 있다.
이 중에서 특히(1)-(8)은 ‘하나님의 처소(1) 과 (2) 그리고 (7)에서 우주적인 차원의 진리 (9)와 (10) 은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시고 만물을 회복시켜 주시는 분이심을 상기시키고 있다. 성막의 상징들 가운데 나타나 있는 이 모든 진리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일관성 있게 전개되고 있다.
2. 율법이 가르치고 있는 성서적인 진리
율법은 위로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가리키고, 아래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켜 나가야 할 삶의 표준을 제시하고 있다.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위 19:2) 율법은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압제에서 구해 내신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가리키고 있다. 마지막으로, 율법은 앞으로 도래할 그 자체의 완벽한 구현과 성취의 시기를 가리키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셨을 뿐더러, 율법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의를 완전하게 구현하셨다(고후 5:21) 그리스도는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 말씀이시자 창조주이시고 의와 평화 그 자체이시며, 거룩한 지혜의 궁극적인 표준이시자 우주 질서의 근원이시다(요 1:1-4) 그분은 EH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며(요 14:6), 모든 실재의 궁극적인 실재이시자 율법이 예시하고 있는 의 그 자체이시다. 율법은 성막이나 약속의 땅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의와 진리와 거룩하심을 표현하고 있다. 비록 참되고 소중한 것이기는 해도 영광된 그리스도의 그림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우리가-성령의 도우심으로-우리의 마음을 가리운 ‘너울’을 벗고, 율법이 진향하는 본래의 목적-그리스도의 영광을 번영하고 예시하는 것-을 분명히 깨듣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고후 3:14-18)
3. ‘도덕법’과 ‘제사법’
도덕법’은 인간의 의로운 삶에 관한 항구적인 표준을 제시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행하여야 할 바를 지시하기 위한 것이며, ‘제사법’은 각종 의식을 통해 그리스도의 구속의 역사를 상징하기 위한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이해되어 왔다. ‘도덕법’은 인간의 행동에 관한 보편적인 규범을 비교적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제사법’은 이스라엘 백성들, 또는 그들 가운데서도 특정인들에게만 해당되는 규정이다. 제사장의 직분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재를 상징하며 그 중재가 이제는 그리스도에 의해 완전히 성취되었다는 점에서, 우리는『레위기』6-7장과 21-22장은 -직접적으로는 -오로지 제사장들에게만 해당되는 규정들이다. 제사장의 직분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재를 상징하며 그 중재가 이제는 그리스도에 의해 완전히 성취되었다는 점에서, 우리는 『레위기』의 이 규정들이 하늘에 계신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사역을 예시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된 이같은 성별된 삶은, 그리스도-이제는 당신의 사역을 통해 모든 음식을 깨끗하게 하신(막 7:19; 딤전 4:4-5)-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성별된 삶의 예표가 되고 있다.
『신명기』의 구성형태에도 ‘도덕법’과 ‘제사법’의 구분이 개략적으로 드러나 있다. 『신명기』에는 “땅에서”라는 말이 거듭해서 등장하고 있으므로 (5:31,33; 6:1, 3, 10, 18, 23; 7:1; 8:1),6장 1절 이후에 기록된 모든 규정들은 일정한 지역-‘약속의 땅’-을 전제로 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의 준수가 이스라엘 백성과 약속의 땅-새로운 에덴 동산-의 독특한 성격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율법의 대부분의 ‘제사법’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성막과 율법은 모두 전체로서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으며, 거기에는 모세가 하나님에게서 받은 계시의 전체적이 맥락이 일관성 있게 드러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맥락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의 길이 열린다는 진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십계명 전체가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충성이라는 축을 중심으로 한 것으로, 이는 다음과 같은 말씀에 의해 생생하게 표현되고 있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출 20:2). 그것은 하나님의 자비와 구원의 역사에 대한 감사를 바탕으로 한 신실한 삶으로의 부르심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원해 주신 사건과 그리스도의 속죄의 사역 사이의 유비를 전제로 하여야만 이 십계명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애굽’은 악으로 가득찬 세상의 전형이자 그 예표이며. 애굽 땅으로부터의 구출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예시한다.
음식에 관한 규정들 속에도 다음과 같은 일반적인 진리가 포함되어 있다.
첫째, 하나님은 모든 생명체를 일정한 법칙과 질서에 따라 창조하셨다.
둘째, 이 법칙과 질서는 인류의 타락으로 인해 큰 손상을 입었다(창 3:17-18).
셋째, 이러한 상태가 회복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쇄신의 역사가 일어나야만 한다.
넷째, 하나님의 제사장들은 타락과 부패로부터 철저히 성별되어야 한다.
율법이 예수 그리스도 한 분에게서 그 목표의 성취와 구현을 기대하고 있을뿐더러, 이스라엘인들 자신들도 율법을 하나의 일관된 체계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오직 한 분 뿐이시니, 그분을 믿고 따르는 자들은 모름지기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바치고 힘을 다 쏟아 그분을 사랑하여야 할 것이다,
율법의 핵으로서 십계명은 하나님에 대한 의무(제1계명-제4계명)와 이웃에 대한 의무(제5계명-제10계명)로 구분 될 수 있으며, 다른 모든 율법 조항들은 이 두 가지 핵심적이 의무에 부수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예수께서도,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과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이 모든 율법의 골자라고 말씀하셨다(마 22:37-40).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관한 이 두 계명은, 이스라엘인들로 하여금 율법의 모든 조항이 똑같이 영원한 가치를 지닌 것은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눈뜨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스라엘인들은 하나님의 율법 및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주변 국가들의 경우와 비교해 볼 때, 자신들의 성별에 관한 율법의 요구가 지닌 의미를 더울 분명하게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십계명의 제1계명의-제4계명과 관련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섬겨야 했던 반면, 다른 나라들은 하나님이 온 세상의 주님이시자 오직 한 분 뿐인 참된 신이시라는 사실을 모르고 다신교적이 우상숭배에 빠져 있었다(시 41-48장; 롬 1:18-32). 십계명의 제5계명-10계명과 관련하여, 다른 나라들도 이오 거의 똑같은 기본적이 삶의 표준을 갖고-비록 그대로 지켜진 것은 아니었지만-있었다. 음식이나 희생제사에 관한 규정에 있어서는 이스라엘과 다른 나라들이 확연히 구분되고 있다(신 14:21) 음식과 희생제사에 관한 규정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이스라엘과 다른 나라들 사이의 구분의 ‘성별됨’과 그들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상징하기 위한 것이었다.
4. 성막과 율법 그리고 ‘약속의 땅’-역설적인 양면성
이스라엘이 성막과 율법과‘땅’을 하나님에게서 받은 것은 그들의 유년 시절-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의 일이었으므로, 그것들은 마치 어린이들에게 구원의 원리를 가르치기 위한 학습 교재와 다를때까지만 유효한 잠정적인 제도라고 묘사한 것은 바로 이러한 까닭에서였다(히 9;8-10; 갈 3:17-25) 성막과 율법 그리고 ‘약속의 땅’은 분명히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다는 점에서 심오한 차원을 지니고 있다. 그것들이 지니고 있는 진정한 의미와 그것들을 통해 그리스도가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만 있다면, 우리 앞에는 매우 심오한 진리의 세계가 풍요롭게 펼쳐질 것이다(고후 3:1-18). 구원은 하나의 선물로서 주어진 것이었지만, 거기에는 그 선물을 주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순종의 의무가 뒤따랐다. 성막은 죄로 인한 상처를 치유 받기 위해서는 우선 깨끗이 받아야 하며, 거기에는 반드시 희생과 제사장의 중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우리는 율법에 감추어져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에 관한 메시지들을 파헤치기 위해서 어떤 낯선 관념 체계를 도입할 필요는 없다. 성막과 율법 그리고 ‘약속의 땅’이 지닌 의미를 깊숙이 파헤칠수록, 그것들이 지닌 역설적인 양면성-‘초등학문’이면서도 심오한 차원의 진리를 내포하고 있다는 -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우선, 성막에 관하여 살펴보도록 하자. 성막은 어린이들에게 ‘초등학문을 가르치기 위한 일종의 ’그림책‘ 같은 것이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다. 우리는 그분께로 가까이 나아갈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중재자와 희생제사가 필요하다. 성막은 그림자-’초등학문‘의 외적인 형태-속에서 진리를 표현한다. 그 주가 예수는 ’임마누엘‘-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또는 우리와 함께 ’장막‘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에 감추어져 있는 깊은 뜻을 완전히 이해 할 수 있겠는가? 또 예수는 -성막 안의 진설병과 등대에 해당하는 -생명의 떡이시요 세상의 빛이시라는 말 속에 감추어져 있는 신비를 이해 할 수 있겠는가?
율법에 관하여 살펴보도록 하자.
앞서 우리는 음식에 관한 규정들에는 상징적인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고 말했거니와, 그 규정들을 지킨다고 해서 양심이 완전하게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히 9:9).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하나의 심오한 진리-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라는 것과 그 분의 백성들은 영적으로 성별되어야 한다는 것-를 상징하고 있다. 탐욕에 관한 계명인 제 10계명은, 살인, 간음, 도적질 등 실제 행위 뿐만이 아니라 악한 의도나 생각 역시 마찬가지로 죄악된 것임을 시사함으로써, 다른 계명들이 지닌 의미에 깊이를 더해 주고 있다. 율법은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음의 껍질을 벗겨 할례를 받으라고 명하면서(신 10:16), 장차 하나님께서 그러한 할례를 베풀어 주시리라고 약속함으로써 (신 30:6) 율법이 ‘속사람’의 깨끗함까지 요구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모든 율법이 의의 왕이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우리가 율법을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드러내는 방편들 가운데 하나로 볼 때, 우리 앞에는 한없이 깊은 진리의 세계가 펼쳐질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성경전체의 맥락 속에서 율법을 읽을 때,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의를 표현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약속의 땅’에 관하여 살펴보도록 하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그 땅이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이자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땅의 모든 족속의 복의 근원-에게 약속하신 유산이었으므로(창 17:4-8) 그 신학적 의미는 대단히 심오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하신 성품의 징표이자 상징으로서의 ‘땅’은, 하나님의 자비와 이스라엘의 선택, 그리고 죄에 대한 그분의 분노에 관한 진리를 풍성하게 펼쳐 보이고 있다(출 34:6-7)
5. 율법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의
성막과 율법은 거의 완벽하리 만큼 엄밀한 체계에 의해 짜여져 있으며, ‘땅’의 분할 역시 엄밀한 기준과 질서에 따라 이루어 졌다(수 13-21장). 이 모든 사실은 하나님이 질서의 근원이시자 모든 질서를 창조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드러내 보여 준다. 이질서의 핵심적이 상징으로서 성막과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따라야 할 삶의 표준을 제시하고 있다. 성막의 거룩한 성격은“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위19:2) 라는 부르심을 받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 가운데서 드러나야 한다. 하나님의 의를 구현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원리는, 그분의 성품을 본받아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으심을 받은 인간에게는 이 피조물의 세계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아 살아가면서 그것을 구현해 나갈 책임이 부여되어 있다. 하나님의 뜻을 본받는 일은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으니, 모든 피조물들에 대한 하나님의 보살피심과 그분의 성품을 본받는 일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으로써 그분의 풍요로움에 참여하는 일이 그것이다.
한편, 제1계명-제3계명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을 뚜렷이 강조하고 있다. 오직 하나님만을 섬긴다는 것은, 당연히 그분께 돌려져야 할 영광을 그분께서 받으시게 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살인, 간음 도적질, 위증을 금지하는 계명들을 인간의 삶을 보호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을 본받으라는 명령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 곡물을 바치는 행위는 그분의 풍요로움에 참여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하나님께 친교제물을 드리는 행위는 피조물들에 대한 그분의 보살피심을 본받는 행위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속죄제는 징벌의 필요성을 상징하는 한편, 번제는 완전한 헌신과 성결의 필요성을 상징하며 그와 같은 헌신과 성결은 죄과의 완전한 소멸을 전제로 한다.
죄에 대한 징벌과 죄과를 소멸시키는 일은 모두가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죄와는 정면으로 반대되는 -을 닮아 가게 하는 데 필요한 일로 해석되어야 하며, 죄로 인해 혼돈에 빠진 상황을 회복함으로써 하나님의 의를 바탕으로 한 질서 있는 상태를 복원시키기 위한 일로 받아 들여져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성품을 본받으셨고(요 5:19-23), 우리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 가는 가운데 그분의 성품을 본받게 된다(고후 3:18). 한편, 그리스도께서 부활을 통해 새로운 생명을 얻으셨고,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칠 수 있어야 한다(롬 12:1-2).
6. 율법에 나타나 있는 축복과 저주
성막은 축복의 근원인 동시에 저주의 근원이기도 했다. 하나님께서는 독특한 방식으로 이스라엘 안에 거하셨고, 그분의 임재는 이스라엘에게 독특한 특권과 축복을 부여해 주었으며, 그분을 통해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물려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성막은 그 거룩함을 범하는 자들에게는 저주의 근원이 되기도 했다.
율법 역시 마찬가지로 축복과 저주의 근원이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내려 주신 규정들과 법규들을 갖게 됨으로써 다른 민족들보다 위대한 민족이 될 수 있었으며(신 4:5-8; 시147:20), 그것들을 지키는 지들에게는 축복이 약속되어 있었다(레 18:5; 출 20:12; 신 28:1-14) 하지만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들에게는 율법이 곧 저주를 의미했다(신27장).『신명기』28장에는 율법-계약-을 지킬 때 받을 축복과 그것을 어길 때 받을 저주가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성막과 율법 그리고 ‘약속의 땅’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땅에서 구출되고 나서 그들에게 주어졌으므로, 이미 구원의 축복을 체험한 자들에게 내린 최상의 축복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순종을 통해 애굽 땅에서 구출된 것이 아닌 것처럼, 그리스도인들 역시 순종함으로 인해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구원은 하나의 선물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축복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려진 땅의 축복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선물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축복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려진 땅의 축복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선물인 것이다. 순종은 그와 같은 선물을 받은 사람에 의해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으려고 하는 노력이나 감사 의식의 형태로 표현되게 마련이다.
성막과 율법 그리고 ‘약속의 땅’은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은총을 가르키며, 그리스도 자신은 성막과 율법과 ‘땅’을 최종적으로 구현한 분이시다. 성막이라는 주제에 의할 경우, 그분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 성전이시다(요 2:21).율법이라는 주제에 의랄 경우, 그분은 우리에게 드러난 하나님의 의 그 자체이시다(고후 5:21). 그리고 ‘약속의 땅’이라는 주제에 의할 경우, 그분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려 주신 가장 풍성한 축복이자 우리의 유업이시며(엡 1:14) 하나님의 모든 약속의 성취이시다(엡 1:3-4 고후 1:20). 우리는 자신의 존재 깊숙한 곳에서 그리스도의 성품을 본받아야 한다.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는 성전이 되고(고전 6:19; 고후 3:18; 4:6),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된다(마 5:5, 10; 6:33), 그리고 우리마음에 새겨진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율법은 (렘31:33) 그리스도인의 의로운 삶을 위한 지표로서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 될 수 있다(시 119:105). 하나님과의 깊이 있는 친교에 대한 갈망은 구약에서는 결코 충족될 수 없다. 성막의 휘장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구약에서는 완전한 죄 사함을 기대할 없다. 동물을 희생제물로 바쳤다고 해서 영원히 마음이 깨끗해지는 것도, 죄과가 완전히 소멸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히 9:9; 10:2). 죄악 된 인간은 이 같은 하나님의 완전성 앞에 나아갈 수 없으며, 언제나 질책과 징벌의 대상이 되게 마련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율법의 저주를 소멸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율법의 저주를 소멸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하나님이 내려 주신 축복으로서 ’땅‘은, 그리스도의 영원한 축복을 예시하고 있었다.
종교개혁자들은 모세 율법의 역할을 세 가지로 제시하였다. 첫째, 율법은 사악한 자들을 제어하는 역할을 한다. 둘째, 율법은 우리를 각성케 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의 길을 발견할 순종의 삶의 표준을 제시한다. 율법은 그리스도의 의를 예시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삶에 지침 역할을 하며, 그리스도를 통한 악에 대한 우주적인 심판을 예고함으로써 아직도 그분 앞에 무릎을 꿇지 않은 사람들조차도 악을 행하지 못하게끔 제어하는 역할을 한다.
7. 『히브리서』에 나타난 모세 율법의 해석
(1)『히브리서』9장 1-14절은 성막을 땅의 성전으로 묘시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하늘의 성전을 상징함과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완성시킬 위대한 사역을 예시하고 있다.
(2)『히브리서』10장1-10절에 의하면, 동물을 바쳐 희생제사를 드리는 것은 인간의 불완전성을 드러내며, 그리스도께서 최종적인 희생 제물로 당신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실 일을 예시하고 있다고 한다.
(3)『히브리서』 7장 1절-8장 6절은 아론의 제사장직은 원래부터 불완전했으므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새롭고 위대한 제사장의 등장이 필요했다고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대제사장이 되셨다.(5:6)
(4) 모세 시대에 이스라엘은 제사장들의 나라가 되었다(출19:5-6).『히브리서』10장 19-25절은,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그리스도를 통해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으므로 제사장이 될 수 있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다고 선언하고 있다.
(5) 『히브리서』4장 8-11절은, ‘약속의 땅’에서의 안식은 우리의 목표인 그리스도와 힘께 하늘에서 누리게 될 안식을 상징한 것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6) 『히브리서』8장 5-13절과 10장 15-18절은 현재 그리스도인들이 누리고 있는 ‘새 언약’의 은총과 모세의 계약을 비교하고 있다.
제 9장 율법의 징벌 규정:
그리스도를 통한 죄과 소멸의 예표
1. 하나님의 징벌과 그분의 의
현대인들이 징벌에 대하여 거부반응을 일으키기 쉬운 것, 그들의 하나님과 죄의 심각성에 대하여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받아 들이기 위해서는 현대 문명이 제시하는 관념들을 단호히 떨쳐 버려야 할 때가 많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지극히 사랑하셨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계획에 따라 예수님은 죽음의 저주를 받으셨다(행 2:23; 4:25-28). 하나님께서는 죄를 지극히 증오하셨기에,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신 예수께서는 엄청난 고통을 받으셔야 했다. 예수님의 죽음이 지닌 이와 같은 성격은, 하나님이 얼마나 의로운 분이신지를 분명히 보여 주고 있다. 하나님의 징벌은 우주의 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것으로, 그분께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사용하신 방법이자 모든 질서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것에 관한 이야기를 똑똑히 듣고 우리 자신의 죄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깨달아야 하며, 거기서 우리를 건져 내 주실 분-그리스도-에게로 달려 나가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같은 징벌을 우리의 유익을 위한 어버이의 ‘사랑의 매’로 받아 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히 12:5-13).“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는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히 12:11)
구약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징벌 규정들은 언제나 그분의 마지막 심판을 예시한다. 희생제사를 통해 동물들을 우리 대신 심판 받게 하는 일은, 죄과의 완전한 소멸과 하나님께 대한 완벽한 헌신-진정으로 그분께 예배드리려는 사람에게서 요구되는 -을 예시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대신 십자가 위에서 징벌을 받으심으로써 우리의 죄과를 소멸시켜 주셨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헌신을 확증하셨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사람들은 지옥의 형벌과 멸망을 직접 체험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징벌은 결코 자의적인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그분의 거룩한 성품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죄에 대한 대가는 징벌과 멸망-동일한 실재의 두 측면으로서-이다. 징벌에는 무기력한 상태-능력의 상실-이, 그리고 멸망에는 성취에 대한 소망의 좌절이 포함된다. 하나님의 징벌을 이해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길은, 그것을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으로 보는 것이다.
‘금단의 영역’이란 하나님의 의롭고 거룩하신 성품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신 분이시므로 세상을 악으로부터 깨끗하게 하려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신다. 하나님의 의에 관한 가장 일반적인 원칙 가운데 하나는 ‘보응의 원칙’이다, “너의 행한 대로 너도 받을 것인즉, 너의 행한 것이 네 머리로 돌아갈 것이라”(옵 15절)
2. 인간에게 주어진 징벌의 권한
‘보응의 원칙’은 하나님의 심판(예를 들어,『요한계시록』18장 6-7절의 바벨론에 대한 심판) 뿐만이 아니라 인간에 의한 심판(예를 들어,『출애굽기』21장24절의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하는 징벌 규정)에도 역시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과 인간의 심판 사이에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심판은 절대적이고 본질적인 성격을 띤 반면, 인간의 모든 권위는 하나님의 권위에서 파생된 것으로 제한된 성격을 띠고 있다.
인간의 통치 기구는 -제아무리 바람직한 형태를 띠고 있다 하더라도-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축복에 불과하다(롬 13:3-5;벧전 2:14). 우리는 구약의 징벌 규정들을 통해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에 관한 원리들을 배울 수 있다. 그러한 규정들은 모두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이기에, 우리는 그것들이 명하고 있는 징벌이 의로운 것임을 알 있다. 그 심판은 오직 하나님의 의와 징벌을 제한된 범위 안에서밖에 반영할 수가 없다. 인간적이 차원에서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짊어지신 주 크신 자비와 의의 행위의 그림자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므로 구약에 기록된 모든 징벌 규정들은, 그리스도의 희생 가운데 드러난 하나님의 의를 가리키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3. 지상에서 이루어지는 정당한 심판의 예-살인과 도둑질
우리는 살인한 자에게 어떠한 징벌이 부과될지를 『창세기』9장 6절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다. 즉, 그 징벌은 그가 행한 범죄의 ‘복사판’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통치 제제에 의해 행하여지는 심판에도 앞서 우리가 살펴 본바와 같으니 하나님의 성품과 의를 본받는 일에 관한 원리가 적용될 수 있다.
이번에는 도둑질의 경우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모세 율법은 물건을 훔친 도둑에게 그물건의 주인에게 그 물건의 주인에게 배상할 것을 명하고 있다. 그 배상액은 두 배, 네 배, 다섯 배 등 경우에 따라 제각기 다르게 나타나 있다(출 22:1, 4, 7). 우리는 이와 같은 단순한 보상의 원리 가운데에도 성막과 하나님의 의에 관한 일반적인 원리가 반영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이 원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질서를 준수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징벌의 원리는 매우 단순하고도 분명히 할 수 있다. 어떠한 징벌이건 원래의 범죄에 상응하는 것이어야 -즉 범죄의 결과를 역으로 되돌려놓아 균형 상태를 회복시킬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징벌은 일종의 ‘회복’이라는 말은 원래 훔친-또는 -빌림-황소를 돌려주는 행위에 대하여만 사용될 수 있음에 유의하여야 한다. 도둑이 황소 주인에게로 추가로 갚아야 할 황소는 ‘징벌’로 간주되는 것이 마땅하다.
도둑질에 대한 이와 같은 징벌은 -인간적인 차원에서는 -우리의 죄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에게 지게 되는 의무를 반영하고 있다. 죄과를 치르기 위해서는 원상 회복과 아울러 징벌을 받아야 한다.
4. 징벌과 피해자의 역할 -하나님과 인간
우리는 배상의 원리와 배상 과정에서의 피해자의 역할을 알게 되었으므로, 인간의 죄에 대한 배상 과정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어떠한 것인지를 탐구할 차례가 되었다.
우리는 지식의 차이와 아울러 피해자의 치아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어떠한 죄이건 하나님께 대한 반역 행위이자 그분의 이름을 더럽힌다는 점에서, 죄의 피해자는 항상 하나님 자신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죄는 하나님의 신성과 주님 되심을 파괴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그분의 권위에서 벗어나려고 시도한다. 죄는 또한 그 자체 또는 어떤 우상을 신격화함으로써 하나님을 영광의 보좌에서 끌어내리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죄인은 하나님을 멸하려고 했으므로, 그에게는 지옥에 떨어져 멸망하게 되는 징벌이 내려지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이 같은 죄인들을 위해 죽으심으로써 그들 대신에 멸망이라는 징벌을 받으셨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심판에 앞서 고난과 죽음과 재앙을 보내심으로써 역사 속에서 죄를 징벌하실 것이다. 우리는 인간의 심판에 대하여는 과연 어떠한 기준을 적용하여야 할 것인가? 하나님에게 죄인을 징벌할 권한이 있다고 해서, 곧 인간에게도 그러한 권한이 인정되는 것은 아니다. 세상의 통치자들이 그러한 권한을 지닌 것은, 오로지 하나님께서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당신을 대신하여 벌을 줄 권한 -비록 제한되기는 했어도 정당한 -을 내려 주셨기 때문이다(롬 13:4)
(저자: 베른 포이트레스/성종현 역, 솔로몬)
첫댓글 좋은 자료 스크랩합니다. 감사합니다.
항상 예수님의 진리의 충만함을 함께 나누고 기뻐하기를 원합니다.^^
요한복음을 읽다가 이 성경구절에서 도저히 진도가 안 나가서 그동안 계속 궁금하던 차에 직접 찾아나서서 발견하였습니다~^^♡
요한복음 5:46 너희가 모세를 믿었더라면 나를 믿었으리니 그는 나에 대하여 기록하였느니라.
서사라목사님 책에도 보시면 모세 이야기가 몇군데 나오는데 저의 궁금증은 거기서 해소되었어요.
함게 나눌 수 있어서 기뻐요^0^
@하늘이슬 모세편도 있죠.책만 있고 읽어보지를 않았지만..ㅋㅋ읽어봤더라면 굳이 안 찾아 헤매도 될 뻔 하였겠네요.ㅋ
내가 찾고 찾다 최근에야 창세기 3:15의 메시아를 발견했는데,서목사님 책에 이미 떡하니 있더라는..;;(창세기편을 이제서야 읽어봄^^ㅋㅋ) 저와 같은 성향의 소중한 회원분을 만나 공유함이 참 기쁘네용^^
@쉐키나 왜 시비입니까? 성경을 잘 알아가고 배워가니 배가 아프십니까?
@별002 이제라도 알게 되어 감사하지용^^
@별002 성경편 2권 모세편이에요
뒷면이구요
@하늘이슬 네..ㅋ집에 고이 있어요.몇년전?에 사놓고 한 글자도 안 읽어봤어요.ㅋㅋ미리 읽어봤으면 이 궁금증이 폭발하지 않았을지도~^^;;
@쉐키나 떡?말이 심하시네요..이런 글을 올려드리고도 이런 말을 듣고 살아야 합니까?제가 뭘 잘 못을 했을까요?
@쉐키나 저 떡 별루 안 좋아하니,말씀 삼가해 주시길~^^
@쉐키나 그런 소리 들을 만큼 님이랑 친근하지도 않고,특별히 잘 못 한 것도 없네요.좋은 글 공유하고도 이런 소리 들으니 좀 허망하군요.
왜 평평댁이에요? ㅎㅎ
방금 책 도착했어요~^^
여기에 첨 공개하네요.따끈따끈 한 것임.^^
좀 어려울 것 같은 느낌이 드네요 ㅎ
늘 주님을 추구하는 맘 가짐이 좋습니다.
주님 은혜 주실 줄 믿습니다.
@하늘이슬 전 구약 속의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가 넘 좋고 사모해서 글 읽는 동안 넘 기뻤어요.숨겨진 곳에 주님 찾는 그 행복감 아실라나?^^ 공유한 글에는 오타도 좀 있고 해서 완전체를 보고 싶어 주문을 하였는데..잘 볼랑가 모르것네요ㅋㅋ 아마 윗 글로도 충분히 내용은 되실 거예요.책에 있는 거 대부분 적힌 듯~^^
@별002 성경속에서 주님 만나는 그 행복감을 이루 말할 수 없지요.
보화를 발견한 것과 같은 그 기쁨이요.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해요♡♡♡
@하늘이슬 맞아요~!! 세상에서 제일 큰 기쁨이죠! 하늘의 기쁨^^ 우와~이렇게 이심전심인 분이 있다뇨~!!^^
솔직하게 2/3를 읽었는데..
딱히 내가 모르는 내용이 보이지 않아서리..
나도 궁금한것 많은데 ..여긴없네요ㅡㅡ
다 읽어보세요.뭐 저도 100%는 아니지만 90%이상은 찾아가요~^^
책도 샀는데 그것보면 쉬~~원하게 풀리려낭?^^ 창 3:15 찾은 게 어디에요? 아담시대부터 이미 계시~님 생각도 나서 올린 것두 있어용.이 글 굉장히 좋은 글이에요.추천이라는 말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는데ㅋㅋ구약~신약 다 아우르는 잘 짜여진 글입니다.끝까지 화이팅~!
히브리서 11:13 이들은 다 믿음 안에서 죽었으며 약속하신 것들을 받지 못하였으되 멀리서 그것들을 보고 확신하며 끌어안았고 또 땅에서는 자기들이 나그네요 순례자라고 고백하였으니
히브리서 11:14 그런 것들을 말하는 자들은 자기들이 본향을 찾고 있음을 분명히 나타내느니라.
히브리서 11:16 이제는 그들이 더 좋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의 본향이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그들의 [하나님]이라 불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분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도시를 예비하셨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