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공직자가 우리에게 있었기에
[이런 공직자가 그립다]
오 제 도(1978년 4월15일 퇴계로 대한극장 옆 행복 예식장에서 올린,
신랑 이재갑 君과 신부 채영옥 孃의 결혼식 집례 (주례)
대한민국의 법조인이자 정치인.
본관ㆍ해주 오씨
출생ㆍ1917년 11월 15일, 평안남도 안주군(現안주시)
사망ㆍ2001년 7월 1일 (향년 83세), 서울특별시
묘소ㆍ국립대전현충원 국가사회공헌자 묘역-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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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 독도 사랑회 사무총장 <박철효배상>
<오제도 검사와 홍민표 그리고 박헌영>
건국 초기에 반공 검사로 유명했던 오제도 검사의 이야기를 한 토막을 소개해 보고자 한다.
남로당 괴수 박헌영은 북에 도망가 있으면서 자기를 대신하여 남한에 남아서 남로당 잔당을 지휘하고 있는 김삼룡에게 서울시당위원장 홍민표로 하여금 1949년 4월에 총궐기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김삼룡은 홍민표에게 현금 2천만 원을 주면서 서울시당 당원 6만 명을 동원하여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라고 하였다.
그러나 폭동 계획이 계속 지연되다가 6천여 개의 수류탄을 경찰에 압수당하고 폭동 계획이 탄로나게 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김삼룡은 홍민표에게 평양의 소환장을 보여 주면서 빨리 평양으로 가라고 등을 떠밀었다.
홍민표는 평양으로 소환되면 그것은 죽음의 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홍민표는 일부러 나를 잡아가시오 라며 서울 시경 앞을 활보하고 다니다 경찰에 붙잡혔다.
오제도 검찰부장은 홍민표를 1차 취조하고 나서 저녁을 사줄 테니 나가자고 하였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일이지만 검사가 간 크게 남로당 서울시당 위원장이라는 거물 공산주의자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 식사를 함께 한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다.
홍민표는 나는 서울의 고급식당이라는 곳은 다 둘러봤고 맛있는 메뉴는 다 먹어봤다.
저는 집밥이 먹고 싶다 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오제도 검사는 그 자리에서 집에 있는 부인에게 손님 한 분하고 같이 갈 테니 저녁 준비를 해 달라고 전화하였다.
오제도 검사는 홍민표와 함께 차를 타고 집으로 갔다.
오제도 검사 집에 도착한 홍민표는 부인의 검소한 복장과 집안 분위기에 감동하였으며 오제도 검사가 쓰는 책상이나 옷장 같은 것이 너무 소박한 것에 또 한번 감동하였다.
조금 후에 부인이 저녁상을 들고 들어왔는 데 김치찌게 하나와 김치 콩나물 등 서너 가지 반찬이 전부였다.
오제도 검사는 홍민표 보기가 좀 미안했던 지 부인에게 여보 생선이라도 좀 굽지 그랬느냐 고 불평을 하자 그 부인은 아! 당신 봉급이 얼만데 그런 말씀을 하세요라고 하였다.
홍민표는 생각하기를 검찰부장 정도 되면 굉장한 고급주택에 살고 쇠고기국에 잘 먹고 잘 사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자기가 겪어본 지도자급 공산주의자들은 사는 집도 최고급이요 먹는 것도 최고급 이었다.
말은 노동자와 농민을 위해 혁명을 해야 한다고 하면서도 하는 짓은 정반대로 하는 것에 홍민표는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남한의 이름난 오제도 검사의 집을 구경하고 싶었던 것이다.
여기서 홍민표는 전향할 것을 결심하고 오제도 검사에게 며칠 후에 서울시경 회의실에 자리를 잡아주시면 서울시당 간부들을 소집하여 전향서를 쓰도록 하겠다 라고 하였다.
이렇게 하여 집합한 16명의 남로당 서울시당 간부들이 홍민표 서울시당 위원장의 설득으로 모두 전향서를 쓰고 전향하였으며 1949년 11월 말까지 전국적으로 33만 명의 남로당 당원들이 전향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저는 홍민표가 전향을 단행하게 된 동기를
첫째 자신이 평소에 박헌영이나 김삼룡 같은 고위급 공산주의자들의 위선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던 점
두 번째는 평양으로 소환되어서 죽으나 남한 공안당국에 잡혀서 죽으나 죽기는 마찬가지라는 점
세 번째는 오제도 검사의 검소한 사생활 자세를 보고 감동한 점 등 이 세 가지로 압축해 보았다.
세 가지 동기 중에서도 크게 돋보이는 것은 오제도 검사가 홍민표에게 보여준 검소한 고위 공직자의 생활 자세였다.
홍민표의 큰 결단으로 33만 명의 남로당 당원들이 전향함으로써 6.25 남침과 동시에 전국에서 남로당 빨치산이 남한 전역에서 폭동을 일으킬 것이라는 박헌영의 큰소리가 황당무계하게 되었다.
그래서 착하고 검소하게 살았던 오제도 검사는 의외로 커다란 전과를 올렸고 악을 저질렀던 박헌영은 김일성에게 가장 험악한 방법으로 숙청되어 많은 군중 앞에서 공개 총살 당하였다.
지금 정말 오제도 같은 공직자 그리고 이런 검사가 필요한 때이다.
오제도 검사는 반공의 아버지였다.
오늘도 현직에 있는 판검사는 오제도 검사의 평범한 기개를 본 받아서 대한민국의 국민들이 올바르게 살 수 있도록 인도하는 화요일이 되시기를 응원합니다.
78년 4월15일 그 날은 김일성이 죽기 전 생신 날,
우리 결혼식 주례를 당연히 나 다니는 뚝섬 일심교회 오광언 목사님께서 집례키로 됐는데 ㆍㆍ
10 여개월 前, 작년 77년 6월 서울 종로ㆍ중구 국회의원 장기영의원(사망) 과 정일형의원이 동시에
(명동성당위장결혼)모두 유고됨으로 재ㆍ보궐선거를 실시, 건국 공로자 오제도 변호사님과 정일형 의원님의 아들 정대철 후보가 모두 무소속으로 출전, 당선됐지.
77년 6월 오제도 변호사님 선거캠프에서 나를 불러 오 후보님 대변인처럼 열심히 뛴 결과 당선되신 오제도 후보께서 당선되신지 몇 개월지나 내 결혼날자가 잡혀 의원 내외분께 결혼 전 인사드리러 갔더니 반가워 하시며 사모님께서는 "너희들은 둘이 얼굴이 꼭 닮았다"고 하셨는데 그 후 결혼식 날자를 불과 며칠 앞두고 의원님께서 날 부르신다는 연락을 받고 뭘 주시려나? 혼자 갔더니 "자네 결혼식이 다가 오는데 주례는 어느분이 맡으셨는가?" 물으시길래 당시 의원님이 영락교회 원로 장로이시기에 자랑 삼아 "제가 다니는 뚝섬 일심교회 오광언 목사님이 맡으시죠"했더니 옆에 사모님도 앉아 계신데 "李君! 목사님께 내가 말 하더라고, 내 말을 전하게. 자네 주례는 내가 맡을테니 목사님께선 사회자가 집례선언 후 먼저 나를 소개하면 내가 하객들께 인사말씀 드린 후 오 목사님을 주례석으로 모셔 祝禱부터 올리도록 소개 말씀 드릴테니 그날 자네 결혼식 먼저 '하나님께 축도부터 해주십사'부탁 드리더라고 말씀 전하게" 입장 난처해서 며칠 끙끙 대다가 결혼 불과 며칠 앞두고 주일예배 후 청년부 회의를 식당에서 하는데 그 자리에서 걱정을 털어 놨더니 누군가 나의 애타는 (?)前後사정을 목사님께 전했던가 목사님께서 날 부른다기에 왼일인가? 봉투주시려나 달려갔더니 날 맞이 하시는 목사님 내외분께서 날 보자마자
破顔大笑를 하시더니
"이 집사! 오 장로님께서 그러시던가? 아주 잘됐어요.
주례는 의원님께서맡으시고 나는 式前에 祝禱를 드리는 게 모양이 훨씬 좋아요"
1978년 4월15일 오후 3시 반 내가 운영하던 학원도로 퇴계로 중간 대한극장옆에 자리한 행복예식장에서 목사님 祝禱와 오제도 의원님 주례로 우리는 이렇게 결혼식을 올렸죠.
https://naver.me/FlxxsF02
(결혼식 그 날도 오전부터 오후 2시경까지 일반인 연설지도)
식 후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가면서 비행기표도 예약치 않고 공항에 나갔다가 어떻게 비행기를 탔는지 처음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에 가서 첫 날 밤을 두들겼다우.
우리 결혼식집례를 맡아주신 오제도 어른 내외분과 우리가 낳아 키운 큰 애 귀염이의 결혼집례를 맡아주신 청렴제독 전 해군 참모총장 김홍일 제독(舒川
中 7년 선배님)두 분 모두 국가 유공자로 예우 받아 대전 현충원에 모셨기에 몇 해 前 참배 다녀 왔으니 며칠 후 다시 가서 참배 해야지.
巨山총재 비서실장과 정당의 일선전사들 교육시키는 연수원장을 거쳐 국회의원 마친 후엔 헌정회장을 맡으셨던 충북출신 신경식 의원님 께서도 저를 염려ㆍ사랑하셔 인자하시고 든든한 지도자로 제 몸에 각인 되셨어유.
結婚式 執禮 맡으신 오제도 주례님께서 주례사 前에 오광언 목사님께 祝禱부터 하시도록 提言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