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1.6.20이후 적용 자세한사항은 공지확인하시라예
출처: 안전보건공단블로그(http://blog.naver.com/koshablog?Redirect=Log&logNo=10154774904)
엔하위키(http://ko.wikipedia.org/wiki/%EC%84%9C%ED%95%B4%ED%9B%BC%EB%A6%AC%ED%98%B8_%EC%B9%A8%EB%AA%B0_%EC%82%AC%EA%B3%A0),
서해 훼리호 침몰 사고
전북 부안군 위도 파장금항에서 진리 쪽으로 향하는 해안 언덕에는 높이 7m 너비 8m 위령탑이 서있다. 탑에는 292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바로 1993년 서해 훼리호 침몰 사고로 희생된 이들이다. 위령탑은 지금도 그날의 참사 현장을 넌지시 지켜보고 있다.
362명을 태운 서해 훼리호는 1993년 10월 10일 10시 10분 전북 부안군 위도 앞바다에서 침몰했다. 희생자들은 대부분 주말을 이용해 바다낚시를 즐기러 온 낚시꾼들로 구명조끼 등을 제대로 입지 못해 희생자가 크게 늘어났다. 사고 이후 언론은 ‘일어나서는 안 될 후진국형 인재’로 규정했다.
출항 당시 기상은 북서풍이 초당 10~14m, 파고 2~3m로 좋지 않았다. 폭풍주의보 등 기상특보가 내려지지는 않았지만 여객선이 출항하기에는 악천후였다. 특보가 내려지면 선박들에 대해 항구별 어선 신고소에서 입·출항을 통제한다. 사고 당일처럼 기상특보 기준을 초과하지 않으면 선박 관계자들의 판단에 따라 운항을 결정한다. 항해 안전운행 지침에 따르면 ‘파고 2.5m 바람속도 10m 이상일 때는 여객선의 운항이 금지되지만 다만 선장이 안전하다고 판단될 때는 운항이 가능하다’라고 되어 있었다. 당시 기상 상황을 고려하면 선장은 출항을 해서는 안 되었지만, 출발예정 시간인 9시를 지나 9시40분에 무리하게 출항했다.
출항 후 파도가 예상보다 높아지자, 선장은 뱃머리로 파도를 받으며 운항했다. 더 이상 항해가 불가능해지자 위도로 회항하려고 선수를 돌리는 순간, 선체가 심한 너울파도에 맞아 기우뚱거렸고 승객과 화물이 한쪽으로 쏠리면서 침몰했다. 생존자들은 “배가 두 번 오른쪽으로 기우뚱거린 뒤 파도가 선체 옆구리를 때리는 순간 천둥소리와 같은 굉음과 함께 순식간에 침몰했다”라며 “승객들로 초만원을 이뤄 파도가 칠 때마다 배가 심하게 흔들렸다”라고 증언했다.
생존자 증언처럼 이날 서해 훼리호는 정원을 초과해 운항했다. 정원(221명)보다 141명이나 더 태웠고 배의 앞부분에는 짐이 가득 실려 있었다. 사고 초기에 몇 명이나 탔는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관련법규에 따르면 선박은 출항 전에 여객의 이름, 주민등록번호, 주소 등을 적은 승객명부를 작성해 1부를 매표소에 보관해야 한다. 그러나 서해 훼리호는 군산해운항만청에 승객자수만 무전으로 보고하고 승선자 명단은 보고하지 않았고 한 달에 한번 꼴로 사후 보고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정원을 넘겨 승객을 태운 이유는 서해 훼리호의 운영난 때문이었다. 정부 지원을 받는, 이른바 낙도 보조항로를 운항하는 서해 훼리호는 예산부족을 이유로 국가 보조금이 끊기자, 운영난 타개를 위해 정원초과 등 무리한 운행을 감행했다.
무리한 운행 뿐 아니라 부실 운행 행태도 사고의 원인이었다. 서해 훼리호에는 승선원 12명이 승선토록 규정하고 있었다. 평상시 10명이 근무해왔고 사고 당일에는 승선원 7명만이 탑승했다. 승객들이 한쪽으로 몰려 타지 않도록 유도하고, 비상시 구명장비를 사용법 등을 알려야 할 안전요원은 단 2명이었다. 사고 당시 생존자들은 구명장비가 어디 있는지 몰라 허둥댔고, 아이스박스 등에 매달려 겨우 목숨을 건졌다.
특히 사고 당일에는 항해사마저 탑승하지 않았다. 선박의 항로를 결정하고 안전 항해, 해상 운송 등 선박의 길라잡이 노릇을 하는 항해사가 휴가를 이유로 타지 않은 것이다. 회사는 예비 항해사를 탑승시키지 않고 갑판장이 항해사 노릇을 하게 했다.
침몰 뒤 구조가 늦어진 점도 희생자가 늘어난 이유였다. 사고가 나자 사고현장에 가장 먼저 달려가 구조에 나선 이들은 근처에서 조업중이던 어선들이었다. 이들이 조난 승객들을 구조했다. 반면 군과 경찰의 구조선은 사고 발생 뒤 1시간이나 지나서 현장에 도착했다. 군산해양경찰서가 신고를 받은 것은 사건발생 5분 만이었다. 그러나 30분이 지나서야 전북경찰청 헬기 1대가 출동했고, 사고 현장에는 사고발생 55분만에야 도착했다. 또 해양경찰서 소속 경비함정도 현장 도착에 1시간이나 걸렸다. 경찰헬기와 경비함은 단 한사람의 생존자도 구출하지 못했다. 사실상 재난 구조 시스템에 구멍이 생긴 것이다.
사고 후 여러 기관으로 흩어져 있던 여객선 안전관리 업무를 해양경찰청이 모두 넘겨 받았다. 여객선이나 유조선의 안전관리업무 창구가 해양경찰청으로 단일화된 것이다. 이후 해경은 여객선 항로 일일 순찰 경비를 강화했고, 사고 원인 중 하나였던 여객 승선원에 대한 과적·과승 행위를 철저하게 감독하고 있다. 또 재난 구조 시스템 점검을 위해 해경 주도로 모의 훈련을 통해 선박 사고의 대응력을 높이고 있다.
(+ 엔하위키부분 추가)
피해자들의 대부분은 섬지역에서 살던 주민들이었다. 당시 여객선 회사에서는 승객을 너무 많이 태워서 시체가 무리지어서 발견되는 등 인명 피해가 심했기 때문에, 당시 신문에 죽음의 신이 여객선을 유혹하는 장면의 풍자만화가 실리기도 했다.
(+사진추가)



(+ 추가 : 대한민국의 해양 사건 및 사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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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리호 침몰사건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 여시들 있을까봐 최대한 조사해서 옴.
그리고 조사하다가 엔하위키에서 우리나라 해양사고들 목록있어서 끌어옴.
난 우리나라에서 이렇게 기름유출사고나 그런거 빼고
몰랐던 침몰사건들이 이렇게 많을 줄 정말 상상도 못함.
이렇게 침몰사건들이 많았는데 도대체 왜 사고수습과 인명구조를 이따구로 밖에 못하는거지?
정말 속상하고 눈물밖에안나정말... |
첫댓글 엑박이야ㅠㅠ
사진 다시 첨부했는데 아직 엑박이야?
삭제된 댓글 입니다.
사진 수정했어. 엑박이면 다시 말해줘
아까 올라온 44년전 일어난 남영호사건도...20년주기로 똑같이 반복되고 있어.. 도대체 뭐가 바뀌었지? 20년뒤에도 또 일어날까...끔찍하다
20년이 지났어도....
이런일이있고 15일뒤에내가태어났다니....정말아무것도모른체로태어났을내가너무밉다....죄송하고..
발전이 없는 나라구나
언니 사진 안 나와요ㅠ
왜 자꾸 이런 일이 벌어지게 가만히 있지?ㅠㅠ 영원히 배 못 탈 것 같다 나는...
겉만 선진국 진짜 개같다
진짜 부끄럽다,21년이 전이나 지금이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진짜 어이없어서 웃음밖에 안나온다 진짜 !! 씨발 !!
달라진게 없네
지금 상황과 다른게 하나도 없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면 안된다
맙소사...1년에한번꼴로 사고가나....
결국제자리구나모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