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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22일 연중 제29주일
제1독서 : 이사 2,1-5
제2독서 : 로마 10,9-18
복 음 : 마태 28,16-20
그때에 16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
17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18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르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몇 년 전, 친구 아버님께서 선종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장례식장을 찾아갔던 기억이 납니다.
이 장례식장에서 저는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글쎄 조문객들이 너무 많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중에 제 고등학교 동창들도 참 많았습니다.
상주는 저의 고등학교 동창인데, 당시에는 그렇게 특별하지 않았던 친구였습니다.
공부도 잘하지 못했고, 운동도 영 시원찮았습니다.
그렇다고 언변이 좋아서 인기 있는 친구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 친구는 늘 웃었습니다.
화도 낼 수 있는 상황인데도 늘 웃으면서 주변의 사람들을 편하게 해주었습니다.
고등학교 때, 이렇게 웃는 것이 큰 장점이란 생각을 해보지 않았습니다.
공부를 잘하고, 그 밖의 특별한 능력과 재주가 있어야 장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30년도 훨씬 지난 지금에 와서 보니, 당시의 능력과 재주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음을 깨닫습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잘 맺는 것이었습니다.
행복은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 더 크게 자리 잡는다고 합니다.
단순히 자기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 것에서 얻는 행복은
순간적인 만족에 그칠 뿐 오랫동안 간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관계 안에서 얻는 행복은 훨씬 더 오래 갑니다.
이런 실험이 생각납니다.
영상을 보여 주고는 여기에 등장하는 배우를 따라 웃는 표정을 지으라는 집단,
그냥 단순히 손으로 입꼬리를 올리라는 집단,
마지막으로 펜을 입에 물고 웃는 표정을 짓는 집단으로 나눈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행복도 변화를 조사했습니다.
배우를 따라 웃는 표정을 지은 사람은 전보다 32% 행복감이 상승했고,
손으로 입꼬리를 올린 집단도 22% 상승했습니다.
그에 반해 펜을 입에 물고 웃는 표정을 지은 집단은 1.8%의 상승에 그쳤습니다.
표정에 따라 기분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이 웃는 모습을 본 사람도 행복도가 올라갔습니다.
오늘은 전교주일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선교 사명을 깨닫고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해 기도하는 날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라면서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이 말씀이 이 세상 삶을 모두 마치시고 승천하시기 직전에 하신 마지막 당부임을 기억하면,
우리 역시 당연히 지켜야 함을 깨닫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주님을 세상에 알릴 수 있을까요?
가두 선교를 하면서 알리는 것도 있겠지만, 사람들과의 관계를 잘 맺는 것도 훌륭한 선교입니다.
즉, 사랑 안에서 행복감을 전달할 때, 주님의 말씀은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나의 이웃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모든 민족들의 복음화는 여기에서 시작되지 않을까요?
오늘의 명언:
명확한 목적이 있는 사람은 가장 험난한 길에서조차도 앞으로 나아가고,
아무런 목적이 없는 사람은 가장 순탄한 길에서조차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토머스 칼라일).
믿고 감당하면 눈이 열린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모두가 구원받고,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당신께서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 시간 전교의 사명에 대해서 생각하는 가운데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모든 이가 구원을 받는다는 기쁜 소식,
곧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의무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주님께서 명한 것을 지키고, 가르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리고 믿음은 들음에서 오기 때문에 말씀은 선포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듣게 되고 들음으로써 주님께 문을 두드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부르짖음이 우리 안에 숨겨지지 않도록
우리 각자의 능력에 따라 구원의 진리를 전해야 합니다.
많은 분이 나는 말을 잘 못한다. 아는 게 없다고 하면서
개신교 신자들의 전교 열정과 성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 말 잘하는 것을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운동을 잘하려면 운동을 꾸준히 해야 합니다.
농구든 야구든, 피아노를 치든 잘하려면, 그만큼 노력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기도를 잘하려면 자꾸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면서 기도를 배우게 됩니다.
성경을 읽음으로써 하느님을 더 잘 알게 됩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예수님을 다른 사람에게 전함으로써 더 전할 수 있는 용기,
잘 전할 수 있는 지혜도 얻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에 대한 수고 없이 잘하려고 하니 문제입니다.
솔직히 여러분이 말을 잘 못하십니까? 남 얘기하는 데는 뒤떨어지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아는 게 없습니까? 여러분이 좋아하는 것에는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텔레비전 연속극, 트로트 가수의 이름뿐 아니라 사생활 일거수일투족을 꿰뚫고 있는 분도 계십니다.
그런데 성경에 대해서는 얼마나 관심이 있으신가요?
쓸데없는 것으로 가득 채우면 꼭 필요한 것이 들어갈 데가 없습니다.
사실 주님을 전하는 것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 고 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베풀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말재주로 하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말재주로 전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뜻을 잃고 맙니다”(1코린1,17).
“말로도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지만, 행동으로 모범을 보인다면 훨씬 더 큰 영향력을 지니게 됩니다.
신앙은 말로 선포된 복음을 충실히 살아가는 이들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큰 매력을 느끼게 되고 이를 통해 더욱 전파되게 됩니다.”
“교회는 매력과 증거로 성장합니다.”
세례받은 이가 복음의 향기를 풍기는 삶의 증거를 통하여
선교에 나서고 복음화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프란치스코 교황).
나는 가족 구성원에게, 이웃에게 어떤 매력을 주고 있을까요?
저는 예수님을 알고 있어요. 당신도 예수님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말할 때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어떤 사람이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사람을 대하는 그의 친절, 헌신, 사랑, 희생이 감동이야!
역시 성당 다니는 사람은 달라’ 한다면, 이 순간이 예수님을 보여 주는 행동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내가 먼저, 복음화 되어야 합니다. 기쁨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실,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더 큰 믿음을 얻게 됩니다.
믿음이 있어야 따를 수 있기도 하지만 따름으로써 믿음을 다지게 됩니다.
구역 반모임에서 성경 통독을 합니다. 아직은 부족하지만, 반응이 다양합니다.
큰 감동이 있다고 하시는 분도 계시고 살맛이 난다고 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계속 이어지고 더 많은 분이 함께할 수 있길 희망합니다.
어제는 구역 미사를 봉헌했는데 40여 명이 함께 하셨습니다.
선한 일을 하면 우리가 감히 상상하지 못한 은총으로 넘치도록 채워질 것입니다.
우리가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28,20).하신
주님의 약속을 믿고 맡겨진 일을 성실히 감당할 때 이윽고 믿음의 눈이 더 크게 열리게 됩니다.
사도행전이 그것을 증언합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다락방에 숨어 지내던 사도들이 어떻게 변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1코린 2장 4절에 보면
“나의 말과 나의 복음 선포는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느님의 힘에 바탕을 두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능력을 믿고 전교하시길 바랍니다. 때로는 실패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패는 늦춰진 성공일 뿐입니다. 더 큰 결실을 위한 믿음의 단련 시기입니다.
그러므로 상대방의 반응 여하에 실망하지 말고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하느님의 뜻을 전하시길 바랍니다.
온 세상이 우리의 활동 무대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주저하지 말고 나아가십시오.
“우리가 예수님에게 이끌려 그분을 기쁘게 따른다면 다른 이들도 이를 알아차릴 것입니다”(프란치스코).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교회는 하느님처럼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언제나 바깥으로 나가야 합니다.
교회가 바깥으로 나가지 않을 때, 교회 내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악 때문에
교회는 병들고 맙니다. 왜 교회 내에 이런 병페가 있는 것일까요?
바같으로 나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바깥으로 나갈 때 사고의 위험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안에 갇힌 채 병든 교회가 되는 것보다,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바깥으로 나가
사고를 당하는 교회가 더 낫습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바깥으로 나가십니다.
하느님은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사랑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이와 동일하게 행동해야 합니다. 언제나 바깥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복음은 거만함 없이 오직 겸손을 통해 선포되어야 합니다.”
베드로 전서 3장 15절의 말씀을 보면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거룩히 모시십시오.
여러분이 지닌 희망에 관하여 누가 물어도 대답할 수 있도록 언제나 준비해 두십시오.
그러나 바른 양심을 가지고 온유하고 공손하게 대답하십시오.”라고 적고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주님의 말씀으로 무장 되어있어야 주님을 제대로 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자주 읽고 또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주님을 깊이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몇 년 전부터 한국에서는 개신교신자가 줄고 있다고 합니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사회봉사 및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데 인색하고,
전도활동이 지나쳐서 혐오감을 주며 헌금을 너무 강조한다.
진리 추구보다 교세 확장에 집착하고 너무 시끄럽고 요란하다. 물량주의에 물들어 있다.
도덕적으로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이원규. 감신대.종교사회학교수).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러한 전철을 밟지 말아야 합니다.
천주교에서도 경계의 목소리가 나옵니다.
“천주교인들이 개인화하고 있고, 부유해지고 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관한 관심이 줄어들고 점점 보수화, 권력화하고 있다.”고 합니다.
거리 홍보나 공연, 작품활동을 통한 문화 선교를 개신교에서 배우는 것은, 긍정적인데
기존의 좋은 것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반성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의 말씀을 통한 새 삶을 살아감으로써
주님을 증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전교주일을 보내면서 무엇보다는 내 마음을 풍요롭게 하시길 빕니다.
기회가 좋든 그렇지 않든 소명 의식을 가지고 밖으로 나가야 하겠습니다.
세례를 받은 지 몇 년이 되었든 나를 통해서
성당을 찾아 세례를 받은 사람이 있다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그것은 열매를 맺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이 되었으면서도 나의 영향으로 하느님을 찾게 된 사람이 아직 없다면
나는 열매를 맺지 못한 것입니다.
들꽃이나 과일나무도 일 년에 한 번 열매를 맺는데
우리가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구원의 은혜를 이웃과 더불어 나누는 가운데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길 바랍니다.
지난 주일에 19명이 세례성사를 받았습니다.
축하드리며 아울러 다시 예비자 모집에 마음을 모아주시길 당부드립니다.
우리의 삶이 예수님을 닮아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은 “민족들의 복음화 주일”입니다.
‘전교’ 혹은 ‘복음화’라는 말을 떠올릴 때 주의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곧 ‘전교’ 혹은 ‘복음화’를 교회의 대형화와 거대화처럼,
몸집 부풀리기로 알아들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왜냐하면, 복음화는 커져 가고 중심이 되어가고 힘을 길러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나누어지고 쪼개져서 번져가는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양적으로 물리적으로 늘려가는 것만이 아니라
나아가서는 이미 복음을 받아들이는 이들의 진정한 내면화와
성숙, 신앙의 실천도 포괄적 의미에서 복음화에 포함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이미 신자가 된 우리 역시 여전히 복음화의 대상이라 할 수 있으며,
‘새 복음화’, ‘자기 복음화’라는 말을 떠올려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어
그들이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을 이사야의 환시를 통해 보여 줍니다.
<제2독서>에서는 바오로 사도가 복음이 전파되어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들에게 구원이 베풀어질 것을 선포합니다.
<복음>은 스승을 잃고 슬픔에 빠져 아직도 두려워하고 의심하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새로운 신원과 복음 전파의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절망하고 의심에 떨어져 있는 제자들에게 꾸짖고 책망할 만도 한데,
오히려 새로운 신원과 사명을 주십니다.
그만큼 당신께서는 언제나 제자들보다 더 사랑하시고, 더 믿고, 더 희망하십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항상 우리의 사랑보다 더 크신 우리 주님의 사랑을 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항상 우리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십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말씀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부분은 “전권선언”이요, 두 번째 부분은 “전도명령”이요, 세 번째 부분은 “현존약속”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마태 28,18)고 전권을 선언하십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자신이 지니신 권능으로 가르치시고, 죄를 용서하시고,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부활하신 후, 이 모든 권한으로 세상을 통치하심을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전권으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면서
새로운 사명과 함께 새로운 신원을 부여하십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치고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9-20)
이는 제자들에게 있어, 두 가지 의미의 어마어마한 사실이었습니다.
곧 제자들의 새로운 신원과 새로운 사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단지 복음의 선포자로만이 아니라
사람들을 ‘제자로 삼는’ 새로운 신원인 ‘스승’으로의 사명을 주어 파견하십니다.
곧 “모든 민족”, 유다 민족이나 이방 민족이나 우방이나 적국이나 구별 없이 모든 민족에게로 가서,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복음을 선포하라는 새로운 사명입니다.
그리고 그 사명, 곧 제자로 삼는 사명을 구체적으로 두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하나>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마태 28,19) 제자로 삼는 일이요,
<또 하나>는 “주님께서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마태 29,19) 제자로 삼는 일입니다.
곧 자신의 주장이나 의견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파견하신 분께서
“명령하신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일이요,
자신들의 제자가 아니라 파견하신 분의 제자로 삼는 일입니다.
이처럼, 말씀을 실행하는 일이 곧 제자가 되고, 동시에 스승이 되는 일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일을 위해서 당신께서는 언제나 제자들과 동행하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이는 ‘항상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이신 당신 존재의 정체성에 대한 계시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당신의 동행에 대한 약속이요, 항상 우리와 함께 일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당신이 부여하신 사명을 동행하십니다.
복음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이지, 우리 자신으로부터 우러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사실은 ‘복음을 선포하는 일’이 곧 자기 자신을 복음화시키는 일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만약 자신이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자신 역시 복음화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곧 제자 되는 길이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먼저 참된 제자가 되는 이가 참된 스승이 됩니다.
오늘 우리는 “전교주일”인 “민족들의 복음화 주일”을 맞이하여,
특별히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하신 말씀 하나를 되새겨 봅니다.
‘우리가 가난한 이들에게 다가가야 하는 것은 우리가 그들을 복음화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우리를 복음화 시켜주기 때문이다.’ 아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20)
<오늘의 말⋅샘 기도>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20)
주님!
가르치기에 앞서 먼저 가르침을 배워 익히고 지키는 자 되게 하소서!
당신께 뿌리박고 살아가게 하소서!
무엇을 하더라도 당신과 함께하게 하시고,
어디에 있더라도 당신께 눈을 떼지 않고 당신께 속한 자 되게 하소서!
당신의 숨결이 되고 당신의 생명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오늘은 전교주일이다.
오늘 독서와 복음의 주제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복음선포이다.
복음선포를 통하여 모든 민족이 복음화되어
하느님 안에 진정한 평화와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세상의 변화를 이룩하기로 하는 날이다.
더욱이 우리는 분단의 현실을 갖고 있다.
오늘, 이 미사를 통해 온 민족의 염원인 평화적 통일을 기원하며
민족 복음화를 위하여 기도하여야 하겠다.
“교회는 그 본성상 선교하는 것을 사명으로 한다.”(선교 2항).
선교야말로 교회가 이 세상에 존재해야 할 확실한 이유임을 분명하게 천명한 선언이다.
‘본성상 선교해야 하는 교회’라는 말 안에는,
교회는 “믿지 않는 만백성의 빛이 되고 구원이 되기 위해 파견된 자”임을
의식하고 있다는 뜻이 내포된 것이 아니겠는가?
사실 “교회는 예수님과 열두 사도의 복음 선교 활동에서 생겨났고,
그 활동의 당연한 결과요, 그 활동이 원한 것이며, 그 활동에 가장 가까울 뿐만 아니라
그 활동에서 볼 수 있는 결과가 교회인 것”이다(현대의 복음 선교 15항).
이처럼 교회는 예수님과 같은 사명 완수를 위해 예수께로부터 파견되었으며,
「떠나셨지만 머물러 계신」 예수님의 새로운 현존에 대한 명백한 표징으로 계속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교회는 성령의 인도 아래 그리스도의 사명을 이 세상에서 계속 수행하기 위해 불린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 파견의 연장(延長)이다.
“교회는 그 본성상 선교하는 것을 사명으로 하니,
이것은 성부의 계획을 따라 교회가 성자의 파견과 성신의 파견에서 그 기원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교회는 성부의 구원계획을 이루기 위해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의해 파견되며,
궁극적으로 성자와 성령을 파견하신 성부의 「샘솟는 분출적 사랑」을 파견의 최종 근거로서 인식하며,
마르지 않고 끊이지 않는 샘물인 이 「원천적 사랑」에서 끊이지 않고 활력과 열성을 길어내는 것이다.
“선(善)은 자기 확산성(自己擴散性)을 지닌다.”(Bonum est diffusivum sui).
“샘 같은(원천적) 사랑”이신 하느님의 사랑이
끊임없이 자신(사랑)을 확산시켜 나가기를 바랄 것은 당연한 결론이다.
왜 성부의 “원천적(샘 같은) 사랑”이 선교의 최종 근거가 될 수 있는지,
그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지 않은가? 조금 더 들어보자.
“선은 자기를 확산시킨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선하면 선할수록 자신을 더욱 확산시켜 나가야 마땅하다.
따라서 하느님은 선의 최상의 결과를 위해서 자신을 최대한으로 확산시켜야 했다.
그런데 하느님이 할 수 있는 선의 최상의 결과는 무엇일까? 인류의 구원사업이었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인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을 최대한으로 쏟아부으며
최상의 결과를 기대할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그러므로 선교는 <하느님의 자기확산>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의 자기확산인 선교는 <선=사랑=하느님>에 너무 잘 어울리고,
“기원을 갖지 않으시는 기원”이신 성부의 사랑에까지 거슬러 올라가 귀속되는 것이 당연하다.
따라서 선교의 최종 근거는 결국 성부의 자기 확산적인 “분출적 사랑”에 귀착된다.
하느님은 만선의 근원이요 사랑 자체이시다.
지선(至善)하신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은 그 본성상 선과 사랑을 확산시키지 않을 수 없는 분이시다.
선과 사랑은 합일시키고 합성시키는 힘일 뿐 아니라 동시에 자신을 확산시키는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
최고선이요 최고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자기확산의 일환으로 하신 최상의 사업이
바로 “만민 구원”이 아니겠는가?
이처럼 “만민 구원”은 하느님의 “샘 같은 분출적 사랑”에서 나오고,
하느님은 당신 사업의 성취를 위하여 최고의 방법으로 성자와 성령을 파견하시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교회의 파견이 이루어지고, 이로써 하느님은 ‘선교하는 하느님’이 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교라는 것은 바로 하느님을 확산시키는 일이다.
이 세상의 모든 이들이 하느님을 우리와 같이 아버지로 부를 수 있도록 확산시키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모두 한 형제요, 자매로서 구원의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복음: 마태 28,16-20: 모든 사람을 내 제자로 삼아라.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후 갈릴래아에 나타나셔서
만민에게 세례를 베풀고 당신의 계명을 지키도록 가르침으로써 만민을 제자로 삼으라고 명하신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세상 끝까지 교회 공동체와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신다.
구약에서 야훼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계셨듯이,
이제 부활하신 예수께서 하느님의 새 백성인 교회 공동체와 함께 계시는 것이다.
그러기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 임마누엘”(1,23)이시다.
그러기에 교회는 모든 민족을 주님의 제자로 삼아 세례를 베풀고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한다.
우리가 처한 위치에서 자기 자신의 본분과 책임, 의무를 다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이 시기는 그것이 더 필요한 때이다.
특히 오늘 우리의 삶과 신앙의 현주소를 다시 한번 되돌아보며
복음화의 소명을 새롭게 하도록 하자. 이러한 모든 은총을 주님께 청하여야 하겠다.
참담한 현실 속에서도 눈부시게 환한 미소를 지으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요즘 예전에 저희 수도원이나 청소년 시설 주방에서 근무하시던 자매님들의 얼굴이 자주 떠오릅니다.
제가 요즘 동종업계에 종사하다 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똑같은 식재료를 반복해서 씻고 다듬고 지지고 볶고 하다 보면
팔이며 어깨며, 여기저기 쑤시고 결리고,
그러다 보니 쉬는 날에는 어김없이 한의원으로 침 맞으러 가고...
한 며칠 침 맞으러 한의원을 갔습니다. 의사 선생님께서 얼마나 친절하고 자상하신지 모릅니다.
세월의 연륜 앞에 어찌할 도리없이 여기저기 고장 나서 찾아오는 환자들을
얼마나 따뜻이 맞이해주시는지, 놀랄 정도입니다. 그러다 보니 병원은 언제나 문전성시를 이룹니다.
침을 맞으며 생각했습니다.
우리의 인간미 넘치는 삶, 극진한 환대의 자세, 진심이 담긴 다정다감한 말 한마디...
이런 것들이 얼마나 중요한 이웃 전교의 바탕인지 모릅니다.
전교주일이자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를 봉헌하는 오늘
우리 교회에는 다양한 유형의 선교사들이 필요합니다.
청춘을 바치고 목숨을 바치며 머나먼 타국으로 건너가,
그 나라 백성들에게 또 다른 그리스도가 되고,
그 나라 땅에 뼈를 묻는 위대한 선교사들도 필요합니다.
저처럼 주님의 말씀을 쉽게 풀어서 양떼들에게 전하는 유랑 선교사들도 필요합니다.
어깨띠를 두르고 직접 거리로 나가서 지나가는 행인들을
교회로 초대하는 적극적인 가두 선교사들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닙니다.
실제 삶 속에서, 자신이 행하는 매일의 직무 안에서, 이웃들에게 감동과 기쁨,
희망과 위로를 선사하는 일상의 선교사, 삶 속에서의 선교사도 필요합니다.
자신이 몸 담고 있는 직장이나 단체, 각종 모임에서 기쁘게 희생하고 봉사하십니까?
모임 안에서 이방인이나 걸림돌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겸손한 리더로서 헌신하고 있습니까?
어떻게서든 조직이 복음적이고 인간적으로 돌아가도록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습니까?
모임 안에서 친교와 나눔의 중심이 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참으로 훌륭한 선교사이십니다.
더없이 비관적이고 참담한 현실 속에서도 눈부시게 환한 미소를 지으며 살아가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주님께서 크게 칭찬하실 위대한 선교사이십니다.
내게 결코 호의적이지 않은 상황, 숱한 도전들과 걸림돌들이 즐비한 여행길이지만,
마치 소풍 나온 소녀처럼 환하게 웃으며 걷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역시 훌륭한 선교사이십니다.
이웃 전교는 우리가 지은 죄를 보속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도구요,
하느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향기로운 선물입니다.
선교는 그리스도교 신앙인으로서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 사항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만 하는 필수 사항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믿는 하느님, 우리가 지니고 있는 신앙은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대상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을 통해 우리는 구원이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으며,
그토록 염원하던 하느님 나라에 입국할 수 있고,
하느님을 만나 뵐 수 있는 가능성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따지고 보니 억만금을 준다 하더라도 버리지 말아야 할 대상,
우리 삶 속에서 첫 번째 가치가 곧 신앙인 것입니다.
이토록 좋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이웃들, 특히 가까운 사람들,
가족들에게 전하지 않고 공유하지 않는다는 것,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전교주일인 오늘, 용기를 한번 내보면 좋겠습니다.
주변에 지금 누가 홀로 외로워하며 울고 있습니까?
그는 가장 좋은 선교의 대상입니다.
주변에 누가 갑작스러운 병고나 사고로 힘겨워하고 있습니까?
그는 가장 시급한 선교의 대상입니다.
서공석 요한 세례자 신부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내가 너희에게 며안 모든 것을 가르쳐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라고 「마태오 복음서」가 알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실천이 이제부터는 하늘을 위해서나 땅의 모든 민족을 위해서나
하느님을 향한 결정적 길이라고 선포하는 말씀입니다.
초기 그리스도 신앙인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삶을 배워 실천하면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들 안에 살아계신다고 믿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님에 대해 가르치겠다는
「마태오 복음서」 공동체의 決意도 담긴 오늘의 말씀입니다.
오늘은 宣敎에 대해 생각하는 날입니다.
유럽 中世 사회는 그리스도 신앙을 근본이념으로 받아들인 사회였습니다.
유럽의 그리스도인들이 아시아를 알게 된 것은 16세기,
交易을 위한 商船들과 더불어 선교사들이 중국과 일본에 오면서였습니다.
그 시대 유럽의 기술문명은 아시아의 것보다 우월하였습니다.
유럽 출신의 선교사들은 기술문명의 우월함과 白人이라는 민족적 우월감에 젖은 시선으로
아시아 현지의 종교들을 바라보았습니다.
‘교회 밖에 구원 없다.’는 유럽 중세의 格言은 그들에게 萬古의 진리로 생각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보기에 아시아의 종교들은 모두 迷信에 불과하였습니다.
선교는 구원받지 못할 불쌍한 有色人들에게
구원의 말씀을 전하는 施惠的인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의 복음 선포는 우월감에 젖어 있었고, 권위주의적이었습니다.
오늘도 거리나 전철 안에서 ‘예수 믿고 구원 받으라.’고 외치는 사람들의 독선적 태도에서
우리는 그 우월감과 그 권위주의의 殘在를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우월감과 권위주의는 19세기에 들어오면서 타민족을 지배하는 植民主義로 표현되었습니다.
유럽 각국은 경쟁적으로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무력으로 점령하고,
식민지로 삼으면서 原住民들에게 혜택을 준다고 생각하였습니다.
19세기에 유럽 문물을 전폭적으로 수용한 일본이 20세기 초에
한국과 중국을 식민지화하려 했던 것은 유럽의 식민주의에서 한 수 배운 소행이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식민주의가 퇴색하면서,
유럽의 신앙인들은 처음으로 편견 없이 아시아의 문화권을 보기 시작하였습니다.
과학기술 문명에 있어서는 유럽 사회보다 뒤졌었지만,
精神文化에 있어서 아시아는 그들이 상상하던 것과 같이 열등하지 않을 뿐 아니라,
깊은 靈的 가치들이 살아있다는 사실도 깨달았습니다.
그러면서 ‘교회 밖에 구원 없다.’는 유럽 중세의 격언이
더 이상 통용될 수 없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복음에 대한 이해도 발전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유대교에만 구원이 있다는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의 가르침을 거부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을 하느님 안에 하나로 모으지 못하는 유대교 지도자들을 보면서
예수님은 이스라엘을 ‘목자 없는 양 떼 같다.’(마르 6,34)고 비판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사람도 버리지 않으시는 하느님을 믿고 가르쳤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죄인들을 하느님이 버린다고 가르치던 유대교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죄인들과도 어울리면서, 옹졸하고 배타적인 유대교의 集團利己主義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셨습니다.
예수님에게 하느님은 모든 사람을 위하고, 아끼고, 배려하시는 아버지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우리의 이웃을 신앙으로 인도하는 것은,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신앙인이 아니면서도 신앙인보다 더 관대하게 이웃을 사랑하며
이웃을 위해 희생적으로 봉사하는 이들도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보살핌 안에 하느님의 일을 보아야 한다고 믿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사람들을 보살피셨습니다.
우리가 하는 선교는 사랑과 섬김이 하느님의 생명이 하시는 일이고,
보살핌을 실천하는 데에 인간의 참다운 자유가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일입니다.
어느 종교 혹은 어느 敎派에 속하는 신앙인이 되느냐는 문제는
각자가 사는 환경과 관계가 있습니다.
길에서 보험 가입을 권유하듯이, 신앙으로 사람들을 유인할 수는 없습니다.
신앙으로 말미암은 사랑과 섬김의 실천, 곧 보살핌을 스스로는 실천하지 않으면서
이웃에게 신앙을 권할 수도 없습니다.
복음화는 敎勢擴張이나 信者倍加 운동과 같은 말로 표현되지 않아야 합니다.
企業이 기업의 수입을 올리기 위해 社勢擴張하고 제품 판매 倍加 운동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종교나 교회는 기업이 아닙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가르친 하느님을 믿고, 그분의 사랑과 섬김을 배워서 실천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오늘 우리의 사회를 위해 사랑과 섬김을 표현하고 있는지,
또 보살핌을 실천하는 동기가 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국방부가 알아서 결정하고 만들어야 할 해군기지 조성을
신앙의 이름으로 가로막고 나서는 愚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인은 국 방이나 국제관계 전문가가 아닙니다.
특정 기업의 노사 분규에 개입하고, 騷擾를 부채질하는 것이 신앙이라고 착각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의 행동 原理와 樣式은 사랑과 섬김입니다.
“사랑은 너그럽고.... 허세를 부리지 않는다.”(1코린 13,4)는 바울로 사도의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强者가 승리하고, 다스리고, 통치하지 않습니다.
오늘의 세상은 배려와 보살핌을 소중히 생각합니다.
동물에서 進化하여 인류가 출현하는 데에 배려와 보살핌이 결정적 원동력으로 작용하였다는
최근 어느 진화론자의 연구 발표도 있습니다.
보살핌이 진화 과정에 인류를 출현시킨 힘이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병자를 고쳐주고, 마귀를 쫓는 배려와 보살핌을 실천하면서
그것이 하느님의 일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굶주린 이에게 먹을 것을, 목마른 이에게 마실 것을 주는 배려가
하느님이 인간을 판단하시는 결정적 기준이라고도 가르쳤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루카 10,29-37)는
궁지에 빠진 이웃을 정성껏 보살펴서 그 사람의 이웃이 되어주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 신앙공동체는 이웃을 위한 배려와 보살핌을
스스로 실천하지 않으면서 복음화를 말할 수는 없습니다.
신앙은 來世를 위한 보험가입이 아닙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현세에서도, 내세에서도 잘살아 보겠다는 處世術도 아닙니다.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해 노력하는 신앙인은
하느님이 사랑이고 섬김이라는 사실을 예수님에게 배워서, 이웃을 보살피는 실천을 하면서
그것이 인간 생명을 참으로 자유롭게 사는 길이라는 사실을 보여 줄 것입니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