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우리의 십자가라는 진정한 뜻이 무엇인지 제대로 아는 사람이 드뭅니다.
일반적으로 십자가라면 짐이나 처지라고 간단히 생각하는 사람 많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미는 하늘 뜻과 세상 뜻이 어긋남이란 무게 일테죠.
인생의 최종 목적을 위해 지금 사는 방법이 주는 무게를 말하는 겁니다.
인생의 최종 목적이 세상 죽음이냐 영원한 삶이냐에 따라 달라질 겁니다.
신앙인은 세상 삶의 최종 목적지는 영원한 삶이고 세상이 아니란 겁니다.
이제 내 인생 목적을 영원한 하늘나라 삶에 둘 것인지 아닌지 정해야죠.
내 인생을 목숨이 세상 떠나는 순간까지라고 안다면 잘 못 사는 겁니다.
가톨릭알림 말: 인간이라면 자기의 사는 목적을 하늘로 가 살 걱정이어야죠.(이기정신부)
●스마트폰 액정과 전원이 나가면서 두 가지를 체험했습니다. 하나는 모델의 사양입니다. 임시로 사용하는 모델인 ‘갤럭시노트 나인’은 오래된 모델이라서 보안이 중요한 앱은 내려받지 못했습니다. 은행 앱과 자동차 앱은 다운이 안 된다고 합니다. 그런 앱을 다운받으려면 좀 더 최신의 기종을 사용해야 한다고 합니다. 다른 하나는 데이터 옮기는 작업입니다. 뉴욕에서 사용하던 스마트폰에 있는 데이터를 임시로 사용하는 스마트폰에 옮기는 작업을 했습니다. 마치 헌혈하듯이 두 개의 스마트폰을 연결하니 뉴욕에서 사용하던 스마트폰의 데이터가 모두 임시로 사용하는 스마트폰으로 옮겨갔습니다. 모든 데이터를 넘겨주었어도 뉴욕에서 사용하던 스마트폰의 자료는 그대로 있었습니다. 이제 새로운 모델이 나오면 임시로 사용하는 스마트폰의 데이터를 옮기려고 합니다.
신앙 안에서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받으려는 자세가 되어 있지 않으면 아무리 은총이 폭포수처럼 내려도 받지 못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받으려면 우선 내 마음이 열려 있어야 합니다. 시기와 질투는 하느님의 은총이 들어오지 못하게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립니다. 욕심과 욕망은 성공과 명예 그리고 권력을 받으려고 하느님의 은총이 옆에 있어도 무시합니다. 원망과 분노는 하느님의 은총을 외면합니다. 이웃의 허물과 잘못을 찾기에도 바쁘기 때문입니다. 절망과 두려움은 마음의 문을 꼭 닫아 버리기에 하느님의 은총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자신의 데이터를 기꺼이 내어주는 오래된 스마트폰을 보면서 하늘의 별이 된 신앙인들을 생각했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성인은 자신을 총으로 쏜 젊은이를 찾아가서 용서하였습니다. 이태석 신부님은 아프리카에서 온 정성을 다해서 선교하였습니다. 콜롬비아에 있는 후배 신부님도 어느덧 12년 넘게 선교사로 있습니다.
이제 곧 교구는 인사이동을 시작합니다. 늘 가까이에서 형제처럼 지내던 신부님도 이번 인사이동으로 한국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새롭게 부임한 사제는 지난 기록을 볼 수 있습니다. 명확하게 잘못된 것은 분명 수정하고 정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자신을 드러내거나, 전임 사제를 깎아내리는 목적으로 이용하려고 하면 문제가 있습니다. 기록을 담당하는 책임자도 사제가 바뀔 때마다 원칙과 소신을 바꾼다면 그것 또한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의 사관들이 양심과 신념에 따라서, 때로는 목숨을 걸고서 기록을 남겼기에 조선왕조실록은 국가의 보물이 될 수 있었고,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 될 수 있었습니다. 세네카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인생을 망치는 사람의 실수는 남을 깎아내리면 내가 돋보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새로 온 사제는 신자들을 위한 사목과 본당 어려움을 해결하는 능력과 업적으로 평가받는 것이 좋습니다. 전임 사제의 허물과 잘못을 밝혀내는 것도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주어진 현안을 해결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이것은 모든 책임자가 마음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하십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원하는 일만 할 수 없습니다. 때로 원하지 않았던 일을 하기도 하고, 자신의 십자가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갈 때, 우리는 주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을 받을 수 있고, 그것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께서 이렇게 이야기 하십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얻어도 목숨을 잃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십자가는 우리 구원의 열쇠입니다. 주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우리도 충실하게 지고 가야 하겠습니다. 나무는 뿌리가 있어야 가뭄도 견디고, 바람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집도 기둥이 있어야만 오랜 세월 지탱할 수 있습니다. 나무의 뿌리와 같은 사람, 건물의 기둥과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봉사자들입니다. 저는 겉으로 드러난 꽃이라면 봉사자들은 어둠 속에서 양분을 찾는 뿌리와 같은 분이셨습니다. 남을 험담하고, 시기하고, 깎아내리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인의 태도가 아닙니다.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주님만을 믿고 충실하게 지고 가는 것이 참다운 신앙인의 삶입니다.(조재형신부)
●오늘의 묵상(매일미사)
우리는 ‘때문에’라는 말을 자주 씁니다. 어떤 일의 이유를 말할 때나 의미를 부여할 때, 변명할 때 씁니다. ‘방이 넓기 때문에 청소기를 산다.’, ‘쉬고 싶기 때문에 휴가를 쓴다.’, ‘아프기 때문에 오늘 일을 할 수가 없다.’, ‘당신이기 때문에 나는 너무 좋다.’, ‘사랑하기 때문에 견딜 수 있다.’ 등과 같이요.
오늘 복음에서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6,25)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 봅니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묻습니다. 과연 나는 이런저런 까닭이 아니라 ‘주님 때문에’ 살아가고 있는가? 주님 때문에 살아가고 있다면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나는 무엇 때문에, 누구 때문에 살아가는가?’라는 물음에 답할 수 있다면 그것이 곧 내가 존재하는 이유가 될 것입니다.
저마다 살아가는 이유나 생각하고 말하며 행동하는 이유가 다르겠지만, 마음 저 깊은 곳에서부터 ‘주님 때문에’라고 답할 수 있다면 우리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주님께서도 나를 사랑하시어 당신 자신을 내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 주님 때문에 숨 쉬고 움직이며 살아갈 수 있음을 고백하면 좋겠습니다. (유청 안셀모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영성 생활의 핵심입니다.
그리스도를 나의 주인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지금까지의 나의 주인이었던 자아를 죽여야만 합니다.
가리옷 유다는 자기를 비우지 못하고 돈을 섬겨서 예수님을 모실 수 없었습니다.
누구든 누구를 받아들이기 위해 상대를 품을 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늘보다 큰 하느님을 모시기 위해서는 이 세상 어떤 것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영향을 받는 그 대상이 내가 섬기는 우상입니다.
그런데 내가 세상 것들에 영향을 받지 않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아주 커지거나 아주 작아지면 됩니다.
온 우주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동시에 어떤 것도 쪼갤 수 없는 수준으로 작아지면 그것도 아무것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영화 중에서 우주에서 괴생명체가 지구에 추락하여 결국 그것들이 지구를 멸망시키게 되는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지구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 우주를 멸망시킬 수는 없습니다.
지구로 보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것들이지만, 온 우주로 보면 작디작은 먼지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내가 커져서 세상 것에 영향을 받지 않으려는 노력을 ‘명상’이라고 합니다.
명상은 나에게 일어나는 일을 나보다 더 큰 자아를 만들어서 그것을 제삼자가 보듯 객관적으로 보려는 노력입니다.
명상할 때 호흡이나 감각에 먼저 집중하라고 하는데 이는 나를 제삼자로 바라보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나의 감정에 빠지지 말고 나에게서 벗어나 더 큰 나를 나로 의식하며 나를 바라보는 방식입니다.
전직 방송인 김상운 씨의 『마음을 비우면 얻어지는 것들』에는 이러한 사례가 나옵니다.
한 여인이 심한 두통으로 직장까지 그만두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의사들의 처방은 진통제와 수면제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복용량은 갈수록 증가했고 그렇게 삶은 더 피폐해져 갔습니다.
그분이 이것을 치유한 것은 약물이 아니었습니다.
친구의 소개로 찾아가 만난 한 의사는 약물 대신 명상을 시켰습니다.
“눈을 감으시고 머리 안에 곧 터져버릴 것만 같은 고통 덩어리가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나의 머리는 그것으로 가득 차서 그것 때문에 머리가 아픈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제 나의 머리가 1m로 커졌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다음은 10m, 다음은 이 도시만큼, 우리나라, 더 나아가 지구와 온 우주 크기만큼 커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 명상을 매일 조금씩 해보시기를 바랍니다.”
한 달 뒤 두통이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참으로 멋진 아이디어입니다.
결국 불교의 명상도 이와 같습니다.
세상 것에 영향을 받는 나 자신을 아주 작게 만들거나 없게 만들기 위해 진짜 나를 우주의 크기만큼 확장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명상에는 약점이 하나 있습니다.
내가 눈을 뜨면 다시 자아가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그 효과는 분명히 있지만, 그리 지속적일 수 없습니다.
다시 나로 살면 욕심이 생겨나고 욕망이 올라옵니다.
이는 ‘나’로부터 나오는데 나를 아무리 의식적으로 온 우주만큼 확장하려 해도 결국 이 세상에서 살려면 나라는 정체성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정체성이 발목을 잡는 것입니다.
기도도 산에 오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나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는 나 스스로 커지려는 노력이 아니라 오히려 작아지려는 노력입니다.
자녀가 부모의 사랑 앞에서 작아지는 것과 같습니다.
대신 부모의 눈으로 나와 세상을 보게 됩니다.
그렇기에 나에게 닥치는 것들을 제삼자, 곧 부모의 눈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기도가 이와 같습니다.
은총과 진리로 작아져 하느님의 눈으로 나와 세상을 바라봅니다.
하느님은 온 우주보다 큰 분이십니다.
유튜브 ‘우와한 비디오’에 ‘16년 전 방송출연하였던 아기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란 사연이 있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아버지 혼자 아들을 키웠는데 그 아들마저도 눈이 잘 보이지 않지만 아버지에게 감사하며 사는 내용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새로운 눈을 주었습니다.
아들은 자신의 처지에 감사해합니다.
이를 위해 아들은 먼저 아들은 아버지가 자신을 위해 얼마나 고생했는지를 보아야 하며 그렇게 자신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말을 들어야 했습니다.
이 은총과 진리가 아들에게 새로운 눈을 줍니다.
아들은 아버지가 자신을 키우며 고생하고 미안하다고 말하는 오래된 동영상을 보며 눈물을 흘립니다.
아버지가 없으면 자신은 아무 존재도 아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아들은 이제 아버지의 눈으로 자신과 세상을 보게 됩니다.
자신이 얼마나 사랑받는 소중한 존재인지, 그리고 불우한 환경과 신체를 지니고 태어났지만, 그것 또한 얼마나 감사한지를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 대건이는 눈이 보이지 않는 아버지 대신 세상을 아버지 눈으로 봅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이는 마치 탈출기에서 파라오가 속해 있던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들 성막 안에 하느님을 품고
하느님의 눈으로 자신들의 처지와 세상을 바라보게 된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마치 밀떡으로 부서져서 그 안에 하느님을 담은 성체와 같습니다.
비록 가장 작은 모습이지만, 온 우주보다 큰 분을 담고 계십니다.
그렇게 나는 영향을 받지 않고 내 안의 참 주인이신 분의 감정에만 집중하며 살게 됩니다.
이것이 고통에서 탈출하여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만드는 기도의 목적입니다. (전삼용신부)

첫댓글 원망과 분노는 하느님의 은총을 외면합니다. 이웃의 허물과 잘못을 찾기에도 바쁘기 때문입니다. 절망과 두려움은 마음의 문을 꼭 닫아 버리기에 하느님의 은총을 알아보지 못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