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웅렬신부님복음묵상
살아계신 하느님
╋ 찬미 예수님!
2주일 동안 안녕하셨어요?
이제 여러분 쪽에서 오른쪽으로
스테인 글라스를 보면
빛이 제대로 들어와요.
진드기가 잔뜩 붙어있던
측백나무를 네그루를 쳐 냈어요.
수녀원도 측백나무 때문에 대낮에도
불을 안 켜면 굴속이었대요.
그런데 측백나무를 자르다가
깜짝 놀랐어요.
측백나무를 자르다 보니
가지와 가지 사이에 움푹 들어간 데서
뭔가 하얀 것이 보여.
뭔가 했더니 성모자상이
그 안에 끼어 있는 것에요.
그게 몇 십 년 전 것인지 모르죠.
비바람 맞으면서 아기 예수님을
꼭 붙들고 있는데,
나무가 자라서 안 빠졌어요.
살살 비틀면서 빼냈더니,
손바닥보다 조금 더 큰 모자상이에요.
그런데 발목 밑이 없어요.
아마 성모님 발목이 부러져
성당에 묻으려 가져왔다가
그곳에 끼어 놓은 것 같아요.
혹시 이 중에 안 계십니까?
깜짝 놀랐어요. 사진은 찍어서
느티나무카페에 올렸어요.
그 성모님은 발목도 없으신 분이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어요?
그래도 끝까지
아들 예수님 떨어뜨릴까봐
두 손으로 아기 예수님을 붙들고,
지나가는 누가 눈길이라도
한 번이라도 주기를 바라며
나무속에 갇혀 계셨던 것에요.
내가 이 나무들을 베려고
한 것에도 뜻이 있었어.
모자 한 분 살리시려고!
세상 빛 보게 하시려고!
‘그 좁은 데서 사셨으니,
이제는 말씀과 성체가 만들어지는
제단에 모시겠습니다.’
하고 깨끗하게 닦아드렸더니
얼마나 정교하게 만든
모자상이지 몰라요.
이제 본격적으로 화요일부터
공사가 시작됩니다.
성지에 걸맞게 거룩하게
성형수술 해야 돼요.
오늘 복음의 얘기는 여러 관점에서
볼 수 있고 많은 묵상거리를 줍니다.
아버지의 관점,
큰 아들의 관점,
돌아온 작은 아들의 관점 등.
작은 아들이 돌아왔을 때
제일 손해를 본 것은
살진 송아지였다는 우스갯소리가
전해 내려옵니다.
우리 민법에는 어떻게
되어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유대에서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장자는 재산의 2/3,
둘째는 1/3을 줬어요.
그리고 아버지 사후 분배가 원칙이었는데,
특별한 경우는 생전에 가능했어요.
그런데 문제는 둘째는
아버지가 줄 의사도 없었고
아버지가 죽은 것도 아닌데,
먼저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받을 몫의 재산을 미리 주시오.
이곳을 떠나겠소.’
협박, 공갈을 해요.
자기 몫의 재산을 챙겨서 떠났죠.
이 매정하고 몰인정한 둘째 아들의
태도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첫 번째로 이 아들은 살아 계신
아버지를 죽은 아버지 대하듯 합니다.
부활이라는 것은 내 안,
내 가정 안, 내 본당 안에서
살아계신 하느님을 찾는 것에요.
신앙생활을 하며 한 번도
살아계신 하느님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면 비극이에요.
하느님은 컴퓨터가 아니고
목석이 아니고 돌멩이가 아니죠.
살아계신 하느님이에요.
유명한 철학자요, 물리학자였던
파스칼은 양피지에 글을 써
양복 안단에 붙였대요.
아브라함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이삭의 하느님 그리고
나 파스칼의 하느님을 언제 만났다.’
파스칼은 죽을 때까지
양복 안단에 살아계신 하느님을
만났던 그날을 기억했던 거죠.
여러분 각자 각자에게
하느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느님이 살아계신다는 것을
느끼십니까?
하느님은 당신이 살아있는
존재라는 것을 적어도
세 통로를 통해 알려주고 계세요.
첫 번째 말씀,
두 번째 성사,
세 번째 체험을 통하여
내가 죽은 하느님이 아니라
너에게 살아있는 하느님,
너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돌보는
자비하신 하느님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에 그 유명하고
우리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고 어떤 칼날보다도
끝이 날카롭다고 했습니다.
그 말씀의 칼날에 찔리면
변화가 되어야합니다.
아파서 소리를 질러야 됩니다.
마귀의 화살을 막아내고
악마의 심장을 찌를 수 있는 것이
바로 말씀의 칼날입니다.
반드시 말씀이 내 안에서
살아 움직이고 힘이 있으려면
성령의 도움을 받아야 됩니다.
성령이 내 안에 계시면
성경을 읽을 때 꿀처럼
달 수 있습니다.
사제의 강론을 들을 때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살아서
내 안에 박힙니다.
그리고 그렇게 외우려고 해도
안 외워지던 성경 구절이
저절로 외워집니다.
무엇보다도 말씀을
잘 전하게 됩니다.
살아계신 하느님을 체험합니다.
말씀을 통해서 끊임없이
내가 죽은 하느님이 아니라
너희 가운데 매일같이
부활하는 하느님이요,
또 너희의 입을 통하여
남을 부활시키려고 애쓰는
하느님이라는 것을 말해주십니다.
그런데 말씀의 불감증 환자들은
말씀 근처를 가지도 않습니다.
죽을 때까지 본당에서 피정과
세미나가 수백 번이 열렸어도
한 번도 가지를 않습니다.
집에 있는 성서를 펼쳐볼
생각도 안 합니다.
온종일 텔레비전 앞에 앉아
허송세월을 보낼지언정
말씀과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주일 날
사제가 하는 강론을 새기고
적어서 가는 것도 아닙니다.
반면 두 번 째 말씀의 불감증 환자는
어느 누구보다도 말씀을 가까이 합니다.
피정, 세미나, 매일같이
성경을 읽고 쓰고, 성서 40주간,
100주간 열심히 팝니다.
유명한 사제의 피정강론 CD는
수십 번 들어 외울 정도지만,
문제는 머리만 커집니다.
그래서 열매를 맺지 못 합니다.
듣고 배운 말씀이
겸손의 재료가 되지 않고
오히려 교만의 재료가 되어
바벨탑을 쌓고 늘 주워들은
그것을 가지고 늘 사람들을
판단합니다.
이렇게 누구보다도 말씀을
잘 전하는 사람들에게도
이 불감증의 어둠은 찾아옵니다.
사제들도 말씀의 불감증 환자가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됩니다.
특히 피정지도로 한 평생을 살았던
저 같은 경우는 다른 사제들과
다르게 살았습니다.
입만 열면 좋은 말이 나왔고
그 강론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변화가 왔겠습니까?
다른 사람을 변화시켜도
말씀을 전하는 본인이
내 말씀을 따르려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불감증 환자입니다.
물론 종이 반으로 접어 두 코가
맞게끔 딱 부러지게 못 삽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 신부님 강론 때
하신 말을 지키려고 무던히도
애쓰고 사는 분이야’
라는 말은 들어야지,
‘신부님 강론 때 하는 말과
사는 것은 전혀 달라.’
이것은 불감증 환자입니다.
특히 말씀을 가까이 하고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은
이 불감증에 걸리기가 쉽습니다.
말씀을 통해 살아계시고
나를 변화시키는 하느님을
만나기보다 지식으로만 만납니다.
‘요것을 배워서 누구를 가르쳐야지.
누구를 훈계해야지.’
이런 마음이 먼저 듭니다.
두 번째로 하느님이
당신이 살아계심을 성사를
통해서 알려주십니다.
우리 신자들은 몸이 많이 약해지거나
죽음에 가까이 올 때
병자성사를 청합니다.
예전에는 종부성사라고 해서
마치 죽기 전에 받는 성사로 생각했죠.
어감이 그래서 병자성사로 바뀌었어요.
사람의 의식과 모든 의지가 제일
약할 때가 죽기 직전이라고 그래요.
그때는 정신도 혼비해지고
심장도 멈춰가고 온 몸이
식어 가는데 귀만 살아있어요.
십자가상의 예수님처럼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100%
수동의 상태가 되어 있을 때,
마귀가 귀에 대고 속삭여요.
‘너 이제껏 헛것으로 살았어.
하느님이 어딨어?
하느님이 있다면 이렇게 젊은 나이에
너를 죽게 내버려두겠니?
없어. 하느님을 실컷 욕하고 죽어.’
가장 흔들릴 때라고 그러죠.
그래서 그때는 기도하는 신자와 가족,
무엇보다도 병자성사 할
사제가 있어야 돼요.
환자의 이마와 양 손목에
성유를 바르면서 ‘마귀 이놈.
어디 내 양들을 건드리느냐?
내가 지킬 거다.’
이게 바로 병자성사에요.
죽어가면서도 그분은 살아계신
하느님을 체험합니다.
안타깝게도 세례 받고 살다가
병자성사 받고 죽는 신자가
30프로가 안 돼요.
냉담한 신자들은 사제를 부를
생각도 안 하죠?
다행히 가족 중 열심한 사람이 있으면
그나마 병자성사 받고 돌아가시죠.
그러나 온 식구가 냉담자고
할아버지 혼자 성당 다니다 쓰러지면,
자식들은 성사 몰라요.
임종할 때 병자성사 받는 것도
큰 은총이에요.
여러분들의 기도에 늘 한 부분을
차지해야 될 것은 ‘나중에 주님 곁에
가기 전에 병자성자로
도유되게 해 주소서!
사제가 이 불쌍한 영혼을
지키게 해 주소서!’
사제의 강복과 안수, 기
름 도유로 마귀들을
꼬리를 감추고 내빼요.
그만큼 힘이 있는 것이
병자성사에요.
꼭 임종하기 전에만 받는 것
아닌 것 아시죠?
몸이 많이 허약하다든지,
수술하러 가기 전이라든지,
젊어도 큰 병에 걸릴 수 있어요.
그런 분들은 언제든지
병자성사를 청하실 수 있어요.
사제의 불문율 가운데 하나가
어느 시간이라도 어느 누군가
병자성사를 청하면 반드시
바로 줘야 되고 가능한
빠른 시일 내에 줘야 돼요.
거부하면 직무유기에요.
큰 벌 받아요.
또 고백성사를 통하여
살아 계신 하느님을 체험하죠.
성체성사를 통해 살아 계신 하느님과
내가 동일화가 된다는 것을 체험합니다.
내가 아는 어떤 회장님은
정신과 의사인데 천주교 개종하기 전에
개신교 권사였어요.
그런데 정신과 의사며
심리학자로 논문을 쓰는데,
짚고 넘어갈 것이 고백성사였대요.
신자가 아니니 고백성사가
뭔지 몰라 명동성당 고백소 앞에서
6개월을 관찰했대요.
줄 서 있는 사람들.
죄 고백하러 들어가니
얼굴이 밝을 리가 없죠.
그것을 지켜보면서 정신과 의사로서
‘음, 저 정도 인상이면 5개월은
치유해야 돼.’
그런데 그 조그만 골방에 들어가서
5분 만에 나오는데 천사가 되어서 나와!
‘저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기에
마귀 얼굴로 들어갔던 사람이
천사 얼굴로 나올까?’
1년을 관찰해도 그 논문의 끝을
맺을 수가 없어서 개종을 했대요.
예비자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고 한 달 후
첫 고백 보라는 엽서가 왔어요.
자기도 면담하는 전문가지만,
고백성사 보라는 쪽지를 받자
가슴이 두근반 세근 반.
그날 줄을 서서 기다렸대요.
얼마나 심장이 뛰는지!
자기 차례에 들어가니
조그만 문이 하나있고,
안에서 신부님이 “고백하십시오.”
사제는 안 보이지만 희미하게
실루엣은 보였는데,
신부님 옆에 누가 서 있더래요.
첫 고백하면서 예수님을 본 거에요.
그 순간 눈물이 쏟아지면서
통곡하고 울었대요.
내 죄를 듣는 분이 사제가 아니라
고백소에 예수님이 서 계시구나!
그때부터 그분은 살아계신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정성껏
성사 준비를 합니다.
여러분들은 고백소에
정말 살아계신 하느님을
만난 적이 있으십니까?
없다면 준비 안 하고 들어가신 겁니다.
고백성사 때 살아계신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을 만난 그 힘으로 살아계신
주님의 몸과 피를
우리는 영하게 되는 거죠.
세 번째로 체험을 통해서
살아계신 하느님을 느끼게 합니다.
기쁜 체험이 아니라 시련과
고통이라고 하는 체험을 통해서
우리를 성화시킵니다.
예상치 못했던 고독과 고통을 통해
우리는 더 깊이 살아계신
하느님을 체험합니다.
영성 중에서 실패의 영성은
하느님께로 가는 큰 다리라고
성인들은 얘기하십니다.
밑바닥까지 떨어져보지 않은 사람이
어찌 하느님이 살아계시다
말할 수 있겠는가?
예수님의 삶은 실패의 밑바닥까지
내려간 그런 삶처럼 보였습니다.
실패의 영성!
다윗 왕이 우리아의 아내를 탐냈죠.
그리고 간음을 했어요.
나중에 나단 예언자가 나타나서
다윗에게 호통을 칩니다.
‘네가 어찌 이럴 수 있느냐?’
다윗 왕은 옷을 찢으면서 뉘우치고
재 위에 앉아서 회개를 했어요.
다윗 왕이 남의 아내를 탐했던
그 뼈아픈 사건을 통해
거룩한 성왕이 되었던 것처럼,
모세가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은 곳이
꽃밭이 아니라 가시덤불 속에서,
그것도 40년 동안 광야에서의
고독을 통하여 가나안 땅을 갔듯이,
베드로가 세 번의 배반이라고 하는
치욕적인 사건을 통하여
으뜸 사도가 되었듯이
우리는 실패의 영성을 통해서
살아계신 하느님을 알게 됩니다.
작은 아들의 가장 큰 실수는
살아계신 아버지를
죽은 아버지 취급한 것입니다.
김웅열 신부에게도 하느님은
살아계셔야만 참다운 목자의
삶을 마칠 겁니다.
여러분 각자도 나무 떼기로 만든
움직이지 않은 그런 목석의
하느님이 아니라,
성사생활을 통하여,
말씀을 통하여,
그리고 체험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그때그때 마다
메시지를 주십니다.
“내가 바로 살아있는 야훼다.
나를 믿고 나를 붙들어라.”
오늘 이 자리에도 하느님은
말씀을 통하여 여러분의
심령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또 잠시 후에는 주님의 몸이,
살아계신 몸이 여러분을
부활시켜 주실 것을 믿습니다. 아멘.
2019년 사순 제4주일(03/31)
(서운동성당)
-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