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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의 사랑스러운 연인들 이야기!-
페르낭드 올리비에, 에바 구엘, 올가 코클로바, 마리 테라즈, 도라 마르, 프랑스와즈 질로, 자클린 로크
피카소가 1904년 파리 몽마르트 언덕, 세탁선에 정착하면서 입체주의 작품이 탄생하기까지의 소개 글입니다.
[입체주의(큐비즘) 작품] 피카소 세탁선에서 시작된 현대 미술! 브라크의 에스타크의 집들, 피카소의 거투르드
초상화, 페르낭드, 죽은 새들, 만돌린을 든 소녀, 등나무가 있는 정물
몽마르트 라 비앙가 13번지 허름한 목조 건물. 이곳에 파블로 피카소의 아틀리에가 있었습니다. 건물주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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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ainter and His Model(화가와 모델, 1964)/ 피카소는 화가와 모델을 주제로 한 그림을 다수 그리는데,
발가벗은 여성 앞에서 그림을 그리는 피카소는 자신의 예술적 능력과 남성적 능력에 대한 확신을 갖고자 한 것이다.
피카소가 청색시대의 우울에서 벗어나 화사한 장미 시대를 열게 한 주인공이 페르낭드 올리비에(Fermande Olivier, 1881~1966)입니다. 입체주의 초기인 1905~1910년 5년간으로 피카소의 입체주의가 탄생한 바토
라브아르(세탁선)에서 피카소의 모델이자 연인이 된 그녀는 입체주의의 탄생을 바로 옆에서 지켜봤습니다.
피카소에게는 첫사랑이었으며 그들의 사랑은 열정적이었고 기쁨이 넘쳤다고 합니다.
잠자는 페르낭드를 바라보는 작가 자신을 그렸다. 평온해 보이는 모습에서 사랑이 넘친다. 페르낭드는 키가 크고, 붉은 머리카락의 아름다운 여인으로 피카소는 그녀에게 첫눈에 사로잡혀 사랑에 빠지면서 청색시대를 마감하고 장밋빛 시대를 열게 된다.
피카소는 평생 공식적으로만 7명이 넘는 숱하게 많은 여인들과 관계를 맺으며 자신의 창작열을 불태웠는데요, 피카소에게 연인들은 생명력의 원천이자 삶의 활력소였으며 그녀들을 통해서만 그림을 그릴 수 있었고 자신의 창조적인 천재성을 발휘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피카소에게 여자들이란 회화에서 붓과 같은 것으로 없어서는 안 되며, 본질적이고 치명적인 것이었다'라고 페르낭드 올리비에는 말합니다.
아비뇽의 처녀들(1907, 뉴욕 현대 미술관)/ 피카소의 세탁선에서 페르낭드 올리비에를 모델로 그린 이 그림은 큐비즘의 시작을 알리며, 피카소의 예술적 전환점을 가져왔다.
피카소는 1909년 피카소와 페르낭드는 세탁선을 떠나 클리시 대로 11번지에 있는 아파트로 이사 가는데, 피카소는 중산층의 넉넉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되자 어려울 때 함께한 페르낭드 올리비에를 떠납니다. 이 시기 피카소는
추상화되어 가는 자신의 회화세계에 몰입하고. 콜라주의 발명으로 브라크와 피카소는 다양한 입체주의 작품의
시도와 도전으로 성공 가도를 달리며 모더니즘을 이끌었습니다.
피카소는 새로운 애인 에바 구엘(Eva Gouel, 1885~1915 본명 마르셀 윙베르)과 함께 예술가들의 밀집 지역인
몽파르나스로 이사 가는데요, 피카소 나이 33세에 돈을 잘 버는 화가로 성공을 거둡니다. 하지만 피카소의 아버지, 호세 루이스가 세상을 떠나고 에바 구엘 또한 2년간의 짧은 열애를 마감하며 결핵으로 사망했으며 1914년은
세계 1차 대전의 발발로 친구들이 징집되거나 부상을 당하는 등 암울한 분위기에 놓이게 됩니다. 그 당시 피카소의 삶은 마치 지옥과 같았다고 피카소의 화상인 거투르드 스타인이 전하고 있습니다. 이 시기에 피카소는 분석적
입체주의에 몰두하던 때로 에바는 주로 기타와 바이올린 등의 악기와 함께 표현되었는데요, 피카소는 '나의 사랑, Ma jolie'라는 작품을 그려 에바에 대한 사랑을 표현했습니다.
Femme assise dans un fauteuil(1913)/안락의자에 앉아 있는 여인으로 에바를 모델로 그렸다.
Ma Jolie(My Pretty one, 1912, 뉴욕 현대 미술관)/ 에바는 단아하고 조용한 성격의 여성으로 피카소가
결혼하려고 했던 여인이었으나 결핵으로 사망하는 불운을 겪었다.
Olga in an Arm chair(1918)/신고전주의 양식으로 그린 올가의 초상화다.
피카소는 전쟁으로 어수선한 파리를 떠나 1917년 로마로 거처를 옮기는데요, 이곳에서 피카소는 로마의 고전주의 미술과 조각품에 매료되고. 어린 나이의 러시아 발레단의 무용수 올가 코클로바(Olga Khokhlova, 1891~1955)를 만나 사랑합니다. 이들은 이듬해 결혼해 파리의 라 보에티 거리에 있는 두 층짜리 넓은 아파트로 이사하면서
피카소는 생활의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되는데... 피카소는 이제 신사복에 모자를 썼으며 금 시계를 찼고 올가는
살롱을 운영하는 호사스러운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림은 로마에서의 경험으로 아카데미의 고전주의 양식으로
그렸습니다. 1920년대 피카소의 변화된 그림 양식에 대한 비판도 있었지만 피카소의 입체주의 구성과 신고전주의 양식 그림들은 모두 비싼 값에 팔려나갔습니다.
Large Nude in a Red Arm Chair(1929)/피카소의 첫 아내 올가의 아름다움을 그린 누드 작품
Paul en Arlequin(1924)/ 아들 파올로의 초상으로 처음에는 자상한 아버지였으나 아이들이 사춘기를
넘어가면서는 아이들을 모델로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고 한다. 파울로는 집안의 불행 때문인지 1975년
알코올중독으로 사망한다.
피카소와 올가 사이에 아들 파울로가 태어났지만 피카소는 아들을 사랑하면서도 부담을 느꼈다고 합니다. 한
여자에게 만족하지 못하는 피카소의 기질 때문일까요? 그의 그림에서도 가족들에 대한 공격성을 드러내는 등
올가와의 불화가 지속되는 가운데... 피카소는 새로운 금발의 동그스름한 얼굴의 새 여인, 17세의 마리 테레즈
발테르(Marie Therese Waiter, 1909~1977)와 밀월을 즐깁니다. 올가는 뒤늦게 피카소의 외도에 분노, 이혼을 요구하며 17년의 결혼 생활의 막을 내리지만 재산 문제로 피카소는 이혼을 거부합니다. 1955년 생을 마감할 때까지 올가는 기록상 피카소의 부인으로 남았습니다. 마리 테레즈는 1930년대 피카소 작품의 주인공이었으며, 피카소의 딸 마야가 태어납니다. 이 시기 피카소의 작품은 초현실주의의 독특한 작품들을 선보이고, 마리 테레즈는 밝은
색상의 에로틱한 여인으로 작품에 등장합니다.
키스(1925)/ 색채와 형태가 뒤섞이며 초현실적인 경향이 드러난다. 이 시기에 에스파냐 출신의 대표적 초현실주의 화가인 호안 미로와 서로 영감을 주고받으며 비슷한 양식의 그림을 다수 그리게 된다.
Nude, Green Leaves and Bust(1932)/ 2010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경매 사상 최고가인 1억 640만 원을
기록했다. 마리 테레즈의 누드 초상화로 누드, 녹색 잎과 상반신이라는 작품.
The Dream, Le Reve(1932)/ '꿈'으로 널리 알려진 이 작품은 마리 테레즈가 피카소의 딸 마야를 임신했을 당시 그림으로 2013년 한 카지노 재벌이 1억 5,500만 달러에 매수했다.
마리 테레즈의 초상(1937)
팔짱을 끼고 있는 여인(1937)/마리 테레즈를 그렸지만 우울하고 측은함이 가득하다. 피카소는 1937년 마리
테라즈를 떠난다. 마리테레즈는 피카소가 죽고 4년 후 피카소를 그리워하며 목을 매 자살했다.
Maya A la Poupee Et Au Cheval(1938)/'말과 인형을 든 마야'로 마리 테레즈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피카소의 딸, 마야를 모델로 그렸다.
장기간 계속되던 스페인 내전 중 1936년 스페인 북부 작은 농촌 마을인 게르니카에 독일군의 융단 폭격이 가해지는 끔찍한 일이 벌어지자 피카소는 이를 고발하기 위해 '게르니카'를 그리게 되는데요, 마침 파리 만국박람회 출품작을 그리려던 중 주제를 바꿔 게르니카를 한 달만에 완성하게 됩니다. 이 작품은 반전 예술의 상징으로 그의 회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작품이 되었습니다.
게르니카(1937, 마드리드 국립 소피아 왕비 미술관)/ 7.8mx3.5m/ 1937년 4월 26일 독일군 히틀러의 무차별적인 융단폭격을 맞아 전쟁의 비극적 상징이 된 이 그림은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의 작은 마을이 그 무대다. 당시 스페인은 인민 전선파와 공화파 간의 내전 중이었으며 독일이 프랑코가 이끄는 인민 전선파를 지원한다는 명분으로
마을에 폭격을 가했다.
도라 마르(Dora Maar)와 파블로 피카소
세계 2차 대전의 힘들고 위험한 생활을 거치면서 피카소는 마리 테레즈와의 생활을 끝내고 유고슬라비아 출신의
사진작가, 도라 마르(Dora Maar, 1907~1997)를 만나게 되는데요, 도라 마르는 예술에 관해 서로 의견을
교환하는 등 매우 똑똑한 여성이었으며 피카소의 '게르니카' 작업을 옆에서 지켜보며 그의 작품을 세상에 알리는데 함께 노력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 사이에는 늘 긴장감이 흘렀고 그녀의 신경질적인 질투는 피카소의
'우는 여인'연작을 그리는 영감을 주게 됩니다.
Portrait of Dora Maar(1937)
Weeping Woman(1937)
프랑스와즈 질로(Francoise Gilot)
1945년 프랑스와즈 질로(Francoise Gilot, 1921~2023)가 피카소의 작품에 새로이 등장하는데요, 프랑스와즈
질로는 21세에 64세가 된 피카소의 새 연인이 되었습니다. 프랑스와즈는 프랑스의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과 프랑스 소르본 대학에서 법학, 철학을 공부하지만 진로를 바꿔 미술학도가 됩니다. 이들의
관계는 10년간 지속되었으며 클로드와 팔로마 두 아이를 낳았지만 그녀는 피카소를 유일하게 버리고 떠난 여자로 피카소를 떠나 101세까지 만수를 누렸습니다. 프랑스와 질로 또한 수채화와 도자기 분야의 뛰어난 예술가였으며 1964년 피카소와의 회고록 '피카소와 함께 한 삶'을 쓰자 피카소는 출판을 막기 위해 소송전을 벌였지만 100만 부 이상이 전 세계에 판매되었습니다. 피카소는 이 일로 모욕감을 호소하며 아이들과도 인연을 끊겠다고 했지만
이 책은 클로드와 팔로마가 피카소의 합법적인 상속인이 되는데 사용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Woman in a Armchair(1947)/프랑스와즈 질로의 초상
Claude et Paloma Dessinart(1954)/ 그림을 그리는 클로드와 팔로마
Claud with a Ball(1948)와 Paloma Picasso(1956)/ 프랑스와즈 질로와의 사이에 낳은 딸 팔로마와 클로드. 팔로마는 비둘기라는 뜻의 이름.
Woman with a Baby Carriage(1950) 피카소는 여러 오브제와 아이들의 장난감을 모아 청동 작품으로
제작했다.
자클린 로크(Jacqueline Roque)
피카소는 1955년 남프랑스 라 칼리포르니 빌라에서 조용한 생활을 즐기지만, 프랑수와즈가 떠나면서 정신적 충격에
빠져 있을 즈음 도자기 공장에서 일하던 스페인 출신의 27세 여인 자클린 로크(Jacqueline Roque, 1926~1986)를 만나는데요, 1955년 올가가 사망하자 74세가 된 피카소는 자클린 로크와 결혼합니다. 자클린은 피카소의
두 번째 아내가 되어 피카소의 말년을 함께 합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청년과 결혼했다고 말하던
자클린은 피카소에게 매우 헌신적인 사랑을 바치며 정성을 다했다고 합니다.
Jacqueline in Turkish Costume(1955)
피카소는 1955년 프랑스의 낭만주의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의 1834년 작품 <알제리 여인>을 오마주한 회화 작품 15점(알파벳 A-O)을 선보이는데요, 피카소는 그가 그토록 많은 습작을 하는 이유가 내가 그림 그리는 방식이라며 열정을 보입니다.
Les Femmes d' Alger(Version O)(1955)/<알제리의 여인들> 연작 마지막 작품으로 2015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1,950억 원에 낙찰돼 미술품 경매 최고가를 기록했다. 물 담배를 피우는 여인은 자클린 로크를 닮았으나
프랑스와즈 질로라는 견해도 있다. 계단을 내려오는 여인의 누드는 프랑스의 화가 마르셸 뒤샹을 오마주한 것이다.
피카소는 프랑스 남부 생 빅투아르 산의 기슭에 보브나르그 성을 인수하는데요, 세잔이 시점의 소실을 실험하며
그림에만 몰두했던 곳으로 피카소는 그의 우상인 세잔과 함께 살고 있다며 애착을 보인 곳입니다. 피카소는 말년에 자클린 로크에게 의지하며 작업에 몰두하는데요, 자클린은 피카소의 변덕스러운 성격을 받아주며 섬세한 아내의
역할을 다했다고 합니다.피카소는 자클린에게 애정을 담아 그녀를 주제로 400여 점의 회화를 남겼습니다. 피카소도 나이는 이기지 못하는 듯 위 수술과 각종 노인성 질환에 시달리며 외부 생활을 할 수 없게 되었지만 그는 화화와
판화, 소묘 작업을 계속하며 그의 건재함을 과시했습니다.
Portrait of Jacqueline Roque with Her Hands Crossed(1954)/ 자클린 로크의 각진 옆얼굴이 인상적이다.
Jacqueline Reading(1957)
피카소는 산속의 거처가 생활하기에 적합하지 않자 1961년 칸 근처의 노트르담 비에 저택을 구해 이사하는데요,
피카소는 생을 떠나기 직전 자신의 자화상을 남기고 1973년 4월 8일 91세에 생을 마감합니다. 피카소는
'보브나르그 공원'에 묻혔으며, 자클린은 피카소가 죽은 지 13년 후인 1986년 피카소의 무덤가에서 권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데요, 피카소 옆에 영원히 묻혔다고 합니다.
Self Portrait Facing Death(1972)/ 피카소의 자화상으로 91세 모습이다.
La Family(1970)/ 노년의 피카소가 그린 가족
옮겨온 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