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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24일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제1독서 : 로마 5,12.15ㄴ.17-19.20ㄴ-21
복 음 : 루카 12,35-3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5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36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37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38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35년째 보고 있는 책이 있습니다.
분명히 매일 보고 있고, 처음부터 끝까지 1년에 한 번씩은 다 봅니다.
그러나 멈추지 않고 지금도 계속 보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볼 때마다 새로운 느낌을 받게 됩니다. 이 책은 어떤 책일까요?
바로 성무일도입니다.
신학교 들어가면서부터 바치기 시작했던 성무일도,
그 책을 한 번도 바꾸지 않고 여전히 사용하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함께해서 많이 낡았고 성무일도 안에는 많은 밑줄이 그어 있지만,
이 성무일도를 오래되었다고 버릴 수가 없습니다.
사실 세상의 책은 몇 번 보고 나면(몇 번 계속 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도 합니다)
지겨워서 펼치지도 않게 되지요. 하지만 성무일도는 다릅니다.
성경책도 그렇습니다.
지금 본당에서 매주 금요일에 성경 강의를 하고 있기에 계속 성경을 읽고 공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신부님은 성경 많이 읽었고 공부도 많이 하셨으니까
강의하는데 그렇게 어렵지 않지요?”라고 이야기하십니다.
분명 많이 읽었고 또 공부도 계속하고 있지만, 그럴수록 모르는 것투성이입니다.
마치 처음 보는 책인 것처럼 늘 새롭게 다가옵니다.
주님의 말씀은 과거 일회적으로 하신 말씀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지금도 생생하게 울려 퍼지는 살아있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을 지금 우리의 삶에 비추어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을 단순한 옛날이야기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 보입니다.
지루하고 시대에 맞지 않는 주님의 말씀이 절대로 아닙니다. 따라서 계속 읽고 묵상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분명 당시에는 당연히 그렇게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현대에 그렇게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서 ‘알람’ 기능을 충분히 이용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이 말씀이 지금 우리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것이라 말씀하시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 말씀은 지금의 우리에게 생생하게 울려 퍼지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언제 오실지 모를 예수님을 끊임없이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주인을 기다리는 종의 모습처럼,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을 갖추고서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으라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이집트 탈출 때의 모습을 상기시켜 줍니다.
구원이 닥칠 때 곧바로 그분을 따라나서려는 것이었습니다.
허리에 띠를 매는 것은 깨어서 잘 준비해야 한다는 의미 말고도
구원의 때가 가까이 다가왔음도 뜻합니다. 그래서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은 기뻐합니다.
오실 주님을 잘 맞이할 준비를 지금 하고 있나요?
주님의 말씀은 과거의 일회적인 말씀이 전혀 아닙니다.
오늘의 명언:
작은 변화가 일어날 때 진정한 삶을 살게 된다(레프 톨스토이).
행복하여라, 깨어있는 종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적대자 악마가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누구를 삼킬까 하고 찾아 돌아다닙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굳건히 하여 악마에게 대항하십시오”(1베드5,8-9).라고 한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생각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잠시라도 한눈을 팔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누구나 자기의 몫이 있는데 그 몫에 충실하지 않으면 생각지도 않은 어둠이 우리를 지배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이만하면 됐다’는 안일함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생이 다하여 하느님 안에 편히 쉬기까지 최선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방심이나 어중간은 없습니다.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깨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깨어 있는 사람은 미래를 준비하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축복을 받게 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주인을 충실히 기다리는 종에게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바와는 전혀 다른 일이 일어납니다.
종이 주인처럼 대접받으며 주인이 그의 종처럼 처신합니다.
결국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 축복이 주어진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영원히 살 것처럼, 그러면서도 내일 당장 떠날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음이 행복입니다.
가끔 예고 없는 가정방문을 합니다.
“사람의 아들도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올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늘 준비하고 있어라”(마태24,44).는
예수님의 말씀을 핑계로 그렇게 합니다.
그러면 행복해하는 분도 있지만 당황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집 정리를 잘해놓으신 분은 더없이 기뻐했고,
그렇지 못한 분은 신부에게 자기 속을 다 보인 것 같아서 무안해했습니다.
그러나 소위 ‘열심하다.’는 분의 가정에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면 제가 오히려 미안해했습니다.
물론 집 정리가 잘 되었다고 마음도 꼭 맑은 것은 아닙니다만 신앙생활을 충실히 하는 사람은
그만큼 가족 구성원 누구에게도 짐을 지워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늘 준비된 모습이 가정 안에 화목함과 평화를 이루는 원동력이 됩니다.
그리고 서로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모습에서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사실 집 정리를 못해서 부끄러운 건 그래도 다행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 앞에 서 있는 우리의 마음이 부끄럽지 않아야 합니다.
따라서 잠시라도 악마에게 틈을 주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마음의 준비와 영혼의 깨어 있음은 하느님께 시선을 고정하는 것입니다.
깨어 있어서 행복한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주인이 돌아왔을 때 벌어지는 일들은 종들 각자의 행동에 따라 결정됩니다.
항상 깨어 안팎으로 정리 정돈을 하며 주인을 잘 맞이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난 10월 1일에 퀸즈성당에서 본당 설립 50주년 기념 음악회가 있었습니다.
어린이, 청소년, 청년, 성인 성가대에서 음악회를 준비하였습니다.
그날 제게 가장 큰 감동을 준 것은 ‘고향의 봄과 아리랑’이었습니다.
고향의 봄과 아리랑은 멀리 타국에서 들으니 더욱 가슴이 찡하였습니다.
청소년 오케스트라에서 ‘아리랑 랩소디’를 연주하였는데
그동안 들었던 아리랑과는 달리 역동적이었고, 경쾌하였습니다.
청소년들은 같은 아리랑이지만 한과 우수에 젖은 아리랑이 아니라
한류의 힘과 발랄함을 표현하였습니다.
성인 성가대는 ‘나는 천주교인이요와 아베 마리아’를 들려주었습니다.
웅장하고, 장엄한 노래도 좋았지만, 더욱 좋았던 것은 제가 성가대원들을 잘 아는 것이었습니다.
유명한 합창단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잘 아는 분들이기에 감동이 더 컸습니다.
그분들은 미국 뉴욕으로 이민 와서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세탁소를 하는 분, 차량 정비소를 하는 분, 음식점을 하는 분, 부동산 중개업을 하는 분,
핸드폰 대리점을 하는 분, 통증 병원을 하는 분, 변호사를 하는 분,
학생을 가르치는 분도 있었지만, 모두가 성가를 통해서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아쉽게도 음악회를 다 감상하지 못하고 저는 한국행 비행기를 탔습니다.
한국 성지순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뉴욕에서 새벽 0시 50분 비행기를 탔고, 시차가 있기에
다음 날 새벽 5시 30분에 인천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인천에서 다시 김포공항으로 갔고, 거기서 제주도로 가는 비행기를 탔습니다.
뉴욕, 인천, 김포, 제주로 가는 여정이었고, 길은 멀었지만 4년 만에 가는 한국이라 기분이 좋았습니다.
제주의 첫날 황사평 순교자 묘지와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 순교자 기념관을 순례하였습니다.
황사평 순교자 묘지에는 무명 순교자 27명과 4명의 유명 순교자가 모셔져 있었습니다.
제게 감동은 준 것은 순교자의 무덤도 있지만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 복자의 이야기였습니다.
김기량은 제주도 첫 번째 신자이고, 제주도의 첫 번째 순교자이고, 제주도의 첫 번째 복자입니다.
그는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다가 2번이나 난파되었습니다.
한번은 40일에 걸쳐 홍콩까지 갔습니다.
죽음 직전까지 갔던 그는 영국의 상선에 의해 발견되었고, 홍콩으로 인도되었습니다.
그곳에서 한국의 신학생을 만나 교리를 배우고 신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세례명은 행운의 사나이라는 의미의 펠릭스와
제주도의 사도가 되라는 의미의 베드로가 되었습니다.
제주도의 사도가 된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는 가족들과 이웃들을 선교하여 세례를 받게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다시, 난파가 되었는데 이번에는 일본 나가사키까지 흘러갔습니다.
그곳에서도 교회의 도움을 받아 다시 제주도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김기량의 삶에 2번의 난파가 있었지만 모두 하느님의 도움으로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는 제주도의 교우들이 세례를 받을 수 있도록
육지로 나갔다가 이번에는 포졸들에게 잡혔습니다.
포졸들은 배교하면 살려준다고 하였지만 그는 기꺼이 순교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의 삶에 3번째 난파가 있었습니다.
그는 포졸들에게 죽으면 다시, 부활할 것이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포졸들은 그를 곤장으로 때려서 죽은 것 같았는데 보통은 그 정도 맞으면 죽었습니다.
그런데 김기량은 다시 살아났습니다.
포졸들은 김기량이 말한 대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포졸들은 곤장을 때리는 대신에 목을 매달아 죽였고,
다시 살아나지 못하도록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 복자는 3번의 난파 끝에
하느님의 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성지 안내를 해 주시는 형제님은
교구장이셨던 김창렬 바오로 주교님께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고 합니다.
“내가 바티칸 교황청에 가서 교황님께 자랑했지.
한국에서 개신교회 신자보다 천주교회 신자가 많은 곳은 제주교구밖에 없습니다.”
형제님은 주교님께 그 이야기를 직접 들었다고 하였습니다.
지금도 초등학교 동창들을 만나는데 천주교 신자가 개신교 신자보다 많다고 합니다.
이렇게 제주도에 천주교 신자들이 많을 수 있었던 것은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와 같은 순교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제주도에 천주교 신자들이 많을 수 있었던 것은
제주도 사람보다 제주도를 더욱 사랑하였던 임피제 신부님 같은 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순교와 열정으로 깨어 있는 분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로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되어 생명을 받습니다.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이가 의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놓고 있어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가을이 저물어 갑니다.
오늘 <복음>은 종말의 준비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놓고 있어라.”(루카 12,35)
여기에서, 깨어있음의 표시는 두 가지입니다.
‘허리에 띠를 매고 있는 것’과 ‘등불을 켜놓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탈출기>에서 하느님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파스카 음식에 대해 하신 말씀,
곧 “그것을 먹을 때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발에는 신을 신고 손에는 지팡이를 쥐고,
서둘러 먹어야 한다.”(탈출 12,11)는 말씀을 떠올려 줍니다.
“허리에 띠를 매고 있어라”는 것은 육체노동을 하는 이들이 허리에 띠를 매듯이
일할 수 있는 자세를 갖추고 경계하고 있는 것(알렉산드리아의 치릴루스),
혹은 사나운 욕망을 억제하기 위해 허리에 띠를 매고 있는 것(아우구스티누스)을 말해줍니다.
곧 임을 맞아들여 시중들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도둑이 몇 시에 올지”(루카 12,39) 모르듯,
“생각하지도 않을 때 사람의 아들이 올 것”(루카 12,40)이기 때문입니다.
“등불을 켜놓고 있어라”는 것은
마음과 지성에 등불을 밝히고 기운차게 깨어 있으라는 것(알렉산드리아의 치릴루스),
혹은 ‘선의 행실’로 등불을 밝힘(아우구스티누스)을 의미합니다.
곧 임이 잘 찾아올 수 있도록 불을 밝혀두고, “빛 속에 있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빛으로 준비하고 있는 것, 빛 속에 있는 것이 “깨어있음”이라는 말씀입니다.
무엇보다도 <시편>에서 “말씀은 발의 등불”(시 119,105)이라 말하고 있듯,
‘말씀의 등불’을 밝히고 있어야 할 일입니다.
계속해서, 예수님께서는 ‘주인을 기다리는 종의 비유’를 통해 “깨어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루카 12,37)
여기서 ‘깨어 있음’은 단지 잠들어 있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을 기다리고” 있음을 말합니다.
잠들지 않고 있다고 해서 모두가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주인이 돌아오면 문을 “곧바로 열어 주려고” 뜨거운 열망으로 기다리는 것,
곧 사랑의 열망으로 임을 그리워하는 것, 희망하는 것이 깨어 있음입니다.
정리해 보면, ‘깨어 있음’은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놓고 주인이 오기를 그리워하고 기다리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기다림은 이미 축복입니다. 그 안에 이미 임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곧 기다리는 이 안에서 임이 이미 빛을 밝히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깨어 기다리는 이는 이미 빛 속에 있는 이요, 이미 등불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곧 우리가 “깨어 있을 수 있음”은 이미 품고 있는 임으로 말미암아 것,
곧 깨어 계시는 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시편> 말씀처럼 “당신 빛으로 당신을 보는”(시 36,10 참조)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의 주인은 참으로 묘하신 분이십니다.
주인이 돌아오면 종이 주인의 시중을 드는 일이 당연하거늘, 오히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루카 12,37)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주인님은 그러신 분이십니다.
우리보다 먼저 우리를 섬기시는 분이십니다.
그리하여, 우리를 복된 사람으로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이 미사를 통해, 몸소 당신 몸과 피로 성찬을 차려주시고
우리의 양식이 되어 섬기시니, 그저 주님 사랑에 감사드릴 뿐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놓고 있어라.”(루카 12,35)
주님!
허리에 띠를 매고 임을 반겨 섬길 수 있게 하소서!
시중 들 수 있게 등불을 밝히고 빛 속에 있게 하소서!
빛 속에 있는 일도, 깨어 있는 일도.
깨어날 수 있음도, 깨어있을 수 있음도,
오직 깨어 계시는 임께서 함께 계신 까닭이오니, 주님 찬미 받으소서. 아멘.
깨어 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종들은 행복하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놓고 있어라.”(35절)
이는 깨어 있으라는 말씀이다.
베드로 사도도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1베드 5,8)라 하였다.
주님의 뜻에 대해 깨어 있는 것이다.
절제로 허리띠를 매고 선행으로 등불을 밝히는 것이
언제 오실지 알지 못하는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우리가 꼭 해야 하는 일이다.
이것은 정의와 연관된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왜 그래야 하는지 일러 주신다.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36절)
주님께서 오시면 사랑의 명령에 순종한 사람들에게 합당한 상을 주실 것이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우리의 등불을 꺼뜨리지 말고 허리에 띠를 동이고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마태 24,42)이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38절)
주님께서 어느 때 오시든지 허리를 동이고 깨어 있다가 주인을 맞는 사람은 복된 사람이다.
그분께서 오셔서 그렇게 사는 우리를 보신다면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37절)
그분은 우리가 수고한 만큼 풍성하게 갚아주실 것이다.
오늘 말씀은 죽음에 대한 대비를 잘하라는 말씀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주님을 만날 수 있으므로
주님께서 우리의 곁을 그냥 지나치시지 않도록
우리가 깨어 있어 그분을 알아보고 맞이할 수 있도록 하라는 말씀이다.
주님은 나의 이웃을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사랑받으시기를 원하신다.
이웃을 통해서 그분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하느님께 대하여 깨어 있지 못한 것이다.
이웃을 통해서 우리가 주님을 만나지 못하면 우리는 영원히 하느님을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리스도인의 특징은 무엇인가?
주님께서 예기치 않을 때 오실 줄 알고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며 항상 깨어 있는 것이다.
참으로 행복하다는 것은 깨어 있는 삶을 통하여
우리에게 언제나 오시는 그분을 만나는 것이며 이를 통해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다.
언제나 주님을 만나 뵙고 사랑해 드릴 수 있는 삶이 바로 종말론적 삶이며,
이 삶을 통하여 우리는 언제나 주님 앞에 올바로 서 있는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 피정, 어느 젊은 사제의 영적 유언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존경하는 광주대교구 강기남 요셉 신부님께서
정성껏 번역하신 파블로 도밍게스 프리에토(1966-2009) 신부님의
‘마지막 피정’(성바오로 출판사)을 행복한 마음으로 읽고 있습니다.
주님을 향한 강한 열정과 겸손의 덕을 겸비한 사제,
따뜻한 인간미와 유머 감각을 갖춘 사제,
깊은 성체 신심과 성모 신심의 소유자였던 젊은 사제 파블로 신부님은
스페인 사라고사에 위치한 시토회 봉쇄 수녀원 수녀님들의 영신 수련 피정을 동반해 드리러 갔습니다.
그리 길지도 않은 피정이었습니다.
2009년 2월 11일부터 15일까지이니, 불과 닷새 동안의 피정이었습니다.
그러나 파블로 신부님의 피정 강의가 얼마나 재미있고 심오했던지,
수녀님들은 짧지만, 지상천국을 맛본 듯했습니다.
그리되기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닐텐 데,
파블로 신부님의 피정 강의는 수녀님들의 마음속에 주님을 향한 열정이 되살아나게 했고,
믿음에 확신을 갖게 했으며, 다시 한번 주님께로 돌아서도록 용기를 북돋아 주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일이 발생했습니다.
파블로 신부님은 암벽 등반 전문가였는데, 닷새간의 피정 동반을 마친 신부님은
수녀원에서 올려다보이는 몬카요 산을 등반하고 내려오는 길에 실족사하게 됩니다.
겨우 43세였습니다.
책 내용은 말 마디 그대로 파블로 신부님 생애에 있어서 ‘마지막 피정’ 강의록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신부님의 마지막 피정은 마지막이 아니었습니다.
흥미진진하면서도 깊은 영성으로 가득한 신부님의 피정 강의는
이제 한국어로 잘 번역되고, 멋진 책으로 출간되어 한국 땅에서도 계속 울려 퍼지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피정’을 읽으면서 너무나 은혜로웠습니다.
마치 파블로 신부님이 강사석에 앉으셔서 영성 강의를 펼치시고 저는 연피정에 참석한 느낌입니다.
딱딱하고 지루한 강의가 아니라 너무나 편안하고 따뜻한 강의였습니다.
마지막 장을 탁 덮는 순간, 8박 9일간의 은혜로운 연피정을 끝낸 기분이었습니다.
이게 웬 횡재냐, 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저도 연피정 강의를 좀 더 정성껏 준비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피정 강의안에는 여러 감동적인 스토리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성체성사의 사람, 구엔 반 투안 추기경님 이야기,
디하우 나치 포로 수용소 안에서 사제로 서품된 카를 라이스너 신부님 이야기,
32살에 직장암 진단을 받는 볼리비아 선교사 헤수스 신부님의 신앙 간증...
파블로 신부님 자신을 비롯해서 신부께서 강의 중에 소개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허리에 띠를 꽁꽁 동여매고 손에는 환한 등불을 켜 든 사람들이었습니다.
혹독한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끝까지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마지막 순간까지 하느님과 동료 인간을 사랑했던 분들이었습니다.
죽음과 관련된 파블로 신부님의 말씀은
허리에 띠를 매고 손에 등불을 켠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잘 소개하고 있습니다.
“죽음이란 신랑이신 그리스도와의 영원한 포옹이요, 사랑하는 그분과의 만남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는 전능하신 하느님 아버지만이 아시는 그날과 그 시간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 자신에게 묻습니다.
하느님과 만나는 그 죽음의 날, 우리가 맞이할 그 은총의 시간을
한결같은 열정으로 열망하고 경외하며 기다려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죽음의 결정적인 마지막 순간에 갖게 될 그 마음과 시선으로
지금, 이 순간의 삶을 바라볼 수 있도록 성령께 간청합니다.
죽음의 순간에 중요한 것이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진정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죽음의 그 순간 부차적인 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부차적입니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오직 그리스도, 그분만이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그것만이 중요합니다.” (마지막 피정, 성 바오로)
준비와 기다림
박상대 마르코 신부
준비와 기다림. 이 둘은 형제지간쯤 된다.
준비는 미리 마련하여 갖추는 것이고, 기다림은 오거나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따라서 필요한 것을 미리 마련하여 잘 갖추고 있으면서
무엇이 오거나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면 안성맞춤이다.
다가오는 수능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기대한다면 수험생들은 사전에 그만한 준비를 하여야 할 것이고,
내일 단풍놀이를 가기로 했다면 계획에 따른 사전 준비를 꼼꼼히 해야 할 것이다.
준비를 소홀히 하거나 게을리했다가 낭패를 보는 일이 어디 한두 번인가.
그럴 리 없겠지만 만약 내일이 세상의 종말이라 치자.
그렇다면 종말을 앞두고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종말을 잘 맞이할 것인가?
오늘 복음이 마침 준비와 기다림에 관한 내용을 들려준다.
복음은 우선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 놓고 준비하고 있어라.”(35절)는
예수님의 명령을 보도하고, 이어 ‘주인을 기다리는 종의 비유’를 들려준다.
이와 비슷한 내용은 다른 복음서에서도 발견된다.(마태 24,43-51; 마르 13,34-36)
여기서 준비와 기다림이란 다시 오실 주님에 대한 것이 분명하다.
복음서가 집필되기 전에 모든 복음공동체에 확실하게 퍼져있었던 두 가지 사실이 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심판자와 하느님 나라의 왕으로 오실 것과,
다른 하나는 그 오심의 시각이 임박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시급하게 닥쳐와야 할 재림사건이 자꾸 지체하자
초기 교회공동체 안에 초조함과 혼란이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주님의 재림에 대한 적절한 입장표명이 4복음서 저자 모두의 숙제가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직접적인 발설과 原典을 토대로
제각기 예수님의 공생활 마지막 시기에 맞추어 세상의 종말과 재림사건을 보도하고 있다.
(마태 24,1-44; 마르 13,1-37; 루카 21,5-36; 요한 14,1-3; 16,1)6
루카가 집필한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들이 승천을 앞둔 예수님께
“주님, 주님께서 이스라엘 왕국을 다시 세워 주실 때가 바로 지금입니까?”(1,6)하고 묻자,
“그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권능으로 결정하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다.”(1,7)하고
대답하신다. 따라서 분명한 것은, 예수께서 왕국 창건과 세상 심판을 위해 다시 오실 것인데,
그날과 그 시각은 한밤중이 될지 새벽녘이 될지(38절)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재림의 날과 시각이 아니라, 분명히 다시 오신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다시 오심에 대한 믿는 이의 태도는 준비와 기다림뿐이다.
교회는 그동안 2000년의 긴 세월을 준비하고 기다려 왔고,
최종적인 그날과 그 시각을 향하여 더 기다려야 한다.
그러나 교회는 지난 세월 동안 사라져간 사람들 안에서 그날과 그 시각을 보았다.
이 말은 한 인간의 죽음이 바로 그날과 그 시각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언제 죽을지 모를 뿐, 반드시 죽는다는 것은 다 안다.
그러므로 알 수 없는 죽음의 시점에 이르기까지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 놓고’ 살아가는 것이다.
허리에 띠를 띠고 산다는 비유의 뜻은
항상 근면하게 일하고 남에게 봉사하는 자세를 말한다.
등불을 켜놓고 산다는 비유는
자신 안에 죄악의 어두움을 몰아내고 밝게 살아가는 마음 자세를 뜻한다.
이러한 자세로 살아가는 사람은 그가 生을 마감할 때, 즉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주님께서 그를 기쁨과 평화의 식탁에 초대하여 도리어 그에게 봉사해 주실 것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이승화 시몬 신부
아담과 하와가 지은 죄로,
인류에게는 자유와 책임이 따라왔습니다.
무엇이 선하고 악한지를 스스로 정하면서,
서로 불목하고 갈등을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참 행복이 함께 했지만, 행복을 알아보지 못하고
자신이 만들어 낸 허상에 빠져버려
하느님으로부터 스스로 멀어져 버렸습니다.
죽음이 우리를 지배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 우리의 나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자비로이 기다려 주십니다.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시어,
우리에게 의로움의 길을 보여주셨고,
주님 안에 머무는 거룩함으로 초대해 주셨습니다.
은총과 의로움의 선물을 받게 되었습니다.
물론 모두 받은 선물이지만, 모두가 그 선물을 열어보지는 않았습니다.
죄로 가득해진 세상에서 살아가기에,
눈이 가려져 선물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마치 한밤의 어두움 속에 있는 듯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에 심어져 있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목마름은, 우리가 주님을 기다리도록 이끕니다.
주인이 오실 때 깨어 있는 종처럼,
주님이 주신 선물을 가슴에 품고 그분을 맞이할 준비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허리에 띠를 매는 것은,
스스로 절제와 성실한 자세를 가지라는 뜻이며,
등불을 켜 놓고 있으라는 것은,
우리 마음 안에 사랑의 불꽃을 간직하라는 뜻입니다.
그런 이들만이 주님의 오심을 맞이할 수 있고,
죽음으로 가득한 세상에 사랑의 빛을 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기도합시다.
주님이 언제 오시듯 준비 되어 있는 종이 되어
세상에 더 많은 은총과 생명을 전해주는 그런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출처 : ‘시몬 신부의 신앙 이야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