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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사극 근초고왕에서 고증된 고구려의 백라관.
대체로 안악 3호분의 묘주도를 참고하였다.
1.
고구려 국왕의 복식에 대하여 중국에서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전하고 있습니다.
왕(王)은 5채(采)로 된 옷을 입고 흰 비단[白羅]로써 만든 관[冠]을 쓴다. 가죽띠에는 모두 금테를 두른다.
王服五采, 以白羅製冠, 革帶皆金釦
- 신당서 고려전
이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의 왕은 5색의 옷에 흰 비단으로 만든 관, 즉 백라관(百羅冠)을 착용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최근 한국 고대사를 다룬 사극이 몇차례 방영된 바 있었는데, 나름대로 고증에 신경쓰는 측면에서 고구려의 왕이 백라관을 착용하고 등장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과거의 엉터리 고증에 비하면 확실히 진일보한 수준이라고 할 만 하지만, 아쉬운 점은 과연 이러한 백라관의 고증이 얼마나 올바른 점인가 하는 것에 있습니다.
사실 기록에 전하는 백라관에 대해서는 남아 있는 기록이나 관련 유물이 거의 없다시피하여 그 형태를 파악하기가 무척 힘든 편입니다. 그저 신당서의 기록을 참고하여 흰 비단[白羅]으로 만든 관[冠]이라고 추측할 뿐 그 이상으로는 더 나아갈 수 없는 것이 실상입니다. 오늘날에 백라관의 형태를 조금이라도 파악하기 위해 참고하고 있는 것이 다름아닌 고구려 안악 3호분 묘주의 초상입니다.
안악 3호분의 묘주(墓主)의 모습을 그린 벽화.
일명 묘주도(墓主圖)라고도 한다.
KBS 사극 대왕의 꿈에서 고증된 백라관
근초고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안악 3호분의 벽화를 참고한 모습을 볼 수 있다.
2.
이 안악 3호분의 묘주가 누구인지에 대한 문제는 꽤 오랜 세월 동안 논란이 이어져 왔는데, 고구려의 왕(고국원왕)이었다는 의견과 안악 3호분 묵서명에 이름이 남겨진 동수(冬壽)의 묘였다는 의견이 팽팽히 맞서고 있습니다. 북한 측에서는 대체로 전자를, 남한 측에서는 후자를 지지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런데 사극 제작자들은 안악 3호분의 묘주가 고구려의 왕이었다는 주장을 수용해서 당시 안악 3호분의 묘주가 쓰고 있는 흰 색의 관이 신당서의 기록에 등장하는 고구려 국왕이 쓰던 관, 즉 백라관으로 추정하여 묘주도를 근거로 하여 백라관을 고증하게 된 듯 합니다. 특히 여러 사극에 이러한 고증이 반영되어, 작중 묘사된 백라관들은 대체로 안악 3호분의 묘주도에 그려진 흰색 관모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고증에는 조금 무리한 점이 없잖아 있다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안악 3호분의 묘주가 실제 고구려왕인지, 혹은 동수인지 확실한 결론이 난 것도 아닐 뿐더러, 묘주가 쓰고 있는 흰색의 관은 반드시 왕이 착용했을법한 그런 관모라고 보기는 힘들기 때문입니다.
덕흥리 고분의 묘주(墓主) 진(鎭)의 모습을 그린 벽화.
그는 분명 고구려의 왕이 아니었으나, 안악 3호분에 묘사된 흰색 관과 동일한 형태의 관을 쓰고 있다.
3.
덕흥리 고분의 벽화에서도 묘주인 진(鎭)의 생전 모습을 묘사한 묘주도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묘사된 진의 복장과 의상, 심지어 한 손에 부채를 든 포즈까지 안악 3호분의 묘주와 빼닮아 있습니다. 더욱이 머리에 쓰고 있는 흰색의 관의 경우에는 동일한 복색이라고 할 만 합니다. 안악 3호분의 피장자가 정말로 고구려의 왕이며, 그가 쓰고 있는 관이 정말로 고구려왕이 착용했다는 백라관이 맞다면 어째서 한낱 신료에 불과했던 진이 벽화에서 백라관을 쓰고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흰색 관을 착용한 묘주의 모습을 묘사한 광경을 고구려 고분 뿐 아니라 중국의 고분벽화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는 점에 있습니다.
(좌) 중국 요녕 조양원대자고분 앞방 오른벽 벽화 묘주도
(우) 중국 하북 안평 녹가장후한묘 중실남이실 남벽 벽화 묘주도
전호태, 『고구려 고분벽화의 세계』中
이 중국의 고분 벽화를 보더라도, 중국 고분의 묘주들도 안악 3호분에 묘사된 묘주도와 대단히 흡사한 형태를 지니고 있습니다. 특히 그 구성을 볼 때, 묘주가 정좌를 한채 앉아 있는 포즈나 옷차림 등은 대단히 흡사하며, 특히 왼쪽에 보이는 중국 요녕성 조양시의 원대자고분의 묘주가 쓰고 있는 흰색 관은 안악 3호분과 덕흥리 고분의 묘주가 쓰고 있는 흰색 관과 거의 동일한 형태를 지니고 있습니다. 즉 앞에서 소개한 4세기 중엽의 안악 3호분이나 5세기 초의 덕흥리 고분 등은 대체로 중국 고분 벽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으로 여겨지며, 묘주가 쓰고 있는 흰 관모도 실상은 고구려 고유의 백라관과 같은 것이라기 보다는 중국의 관모였던 것이 고구려에 전해졌거나 혹은 그 구성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함께 그려진 것으로 여겨집니다.
특히 이에 대해서는 중국 무관(武冠)과 그 형태가 동일하여 안악 3호분의 관모를 통해서는 백라관의 모습을 유추할 수 없다는 이른바 '무관설'이 대두된바 있습니다. 한때 안악 3호분의 묘주가 쓴 관모를 백라관을 비정하였던 '백라관설'과 팽팽히 대립하였으나 최근 남한 학계에서 안악 3호분을 동수묘로 단정짓는 견해가 늘어남에 따라 무관설이 보다 힘을 얻고 있는 추세입니다.
4.
더욱이 한가지 더 문제점이 있다면, 안악 3호분에 묘사된 흰색 관모는 신당서에서 전하고 있는 기록과 비교해 볼 때 그 시기의 차이가 적지 않게 난다는 점에 있습니다. 안악 3호분에 남겨진 묵서명에 따르면 그 제작연대는 영화십삼년(永和十三年)라고 합니다. 이는 곧 중국 동진(東晉)의 연호로서 서기 357년에 해당됩니다. 즉 안악 3호분은 4세기 중엽에 제작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당서에서 전하고 있는 고구려의 정세는 고구려 말기인 7세기 경의 일로, 그 시기차이가 300여 년에 가깝게 차이가 납니다. 설령 안악 3호분의 피장자가 쓰고 있는 흰색 관이 당시에는 국왕이 착용하던 관이 아니었다가 훗날 고구려왕이 착용하던 백라관이 되었다 해도 그 것이 고구려 말기의 백라관과 그 모습이 얼마나 같을지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이런 문제점을 보더라도 안악 3호분의 고분 벽화를 토대로 하여 백라관의 모습을 유추해낸다는 것은 그리 올바른 복색 고증이라고 보기 힘들다고 사료됩니다.
5.
그렇다면 과연 백라관의 형태는 어떤 모습이었을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이를 밝혀줄만한 특별한 단서가 전해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신당서에서 언급된 7세기 말, 고구려 국왕이 착용하였다던 백라관의 모습은 안악 3호분에 묘사된 한나라의 영향을 받은 관모와는 달리, 고구려 고유의 형태를 지니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됩니다.
첫댓글 이번 글엔 제 입장과 반대되는 게 몇 있군요. 우선 안악 3호분 묘주의 관과 덕흥리고분 묘주의 관은 서로 다릅니다. 겉으로 보기엔 같아 보이지만 선명한 사진을 확대해서 보면 전자의 라는 하양색에 그물이 없는 고운 재질이며 후자의 라는 파랑색에 그물이 보이는 성긴 재질입니다. 따라서 전자는 백라관, 후자는 고위 관료들이 썼다는 청라관으로 추정됩니다. 아울러 안악3호분의 영화 13년을 동진의 연호로 단정 짓기 어렵습니다. 동진의 영화 연호는 12년까지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두 고분 간 묘주관의 차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김용만 선생님이 쓰신 본 게시판 5484번 글을 참조해주십시오.
좋은 지적감사드립니다.
1. 사실 김용만 선생께서 올려주신 사진은 이전에도 본 일이 있는데, 사실 덕흥리고분과 안악 3호분의 묘주도의 관 부분에 훼손된 부분이 다소 있어, 그것이 분명 어떤 색인지는 단정짓기는 조금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관 뿐만 아니라 복식과 포즈에서도 큰 차이점을 찾아보기 어려운 일면이 있습니다. 더욱이 당대의 중국 고분 벽화를 보건데 해당 관모와 너무 흡사하게 생긴 관이 다수 보이고 있어 안악 3호분의 피장자 문제와는 별개로, 그것이 과연 신당서에 전하는 고구려의 백라관인지는 의문의 여지는 남는다고 생각합니다. 연대의 차이도 무시하기는 힘든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2. 영화 연호의 문제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어서 송구스러우나, 당시에 전연의 침공 등 어지러운 상황으로 인해 어떤 혼란이 있었기에 연도의 표기에 오류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좋은 지적을 드린 점에 대해 거듭 감사드립니다. 이에 대해서는 저도 아는 바가 많지 않아서 확실히 답하기는 어려운 문제로군요. 모자란 글을 읽고 지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원한의 거리 중국 요녕 조양원대자고분 앞방 오른벽 벽화 묘주도와 하북 안평 녹가장후한묘 중실남이실 남벽 벽화 묘주도는 오히려고구려벽화의 영향으로 그려진 것이거나 묘주가 고구려유민이거나 당시 그 지역까지가 고구려의 강한 영향력아래 놓였다고 볼 수는 없는지요?
@大欽茂 딱히 그렇게 볼 근거는 없습니다. 일단 시기적으로 볼 때, 동아시아에서 고분벽화를 비롯한 장의미술은 중국에서 처음 보이기 시작하며, 이후의 고분벽화들도 그 영향을 어느정도 받았는데, 고구려의 고분벽화는 단순한 모방에서 그치지 않고 고급의 장의미술을 소화해내는 수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고구려의 고분벽화 중에 가장 이른 편인 4세기 경의 고분벽화들도 앞선 시기의 중국 고분벽화의 영향을 상당수 받았습니다. 고구려 특유의 고분벽화 문화가 본격적으로 발전해나가는 시기는 광개토왕 대에 요동을 온전히 점유한 5세기 이후의 일입니다. 특히 6세기 이후에는 미의 극치에 도달합니다.
@大欽茂 고구려 고분벽화의 형성과 역사를 잘 설명한 책으로는 전호태 쌤의 "고구려 고분벽화의 세계" 등이 있는데, 관심이 있으시다면 한번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원한의 거리 벽화의 훼손 상태가 상당한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이 때문에 논의를 진전시킬 수 없을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고화질 사진으로 보면 얼핏 봤을 때 드러나지 않은 양자 간 급의 차이가 분명히 드러납니다. 안악3호분의 관은 금테를 두르고 있지만 덕흥리고분의 그것은 그렇지 않으며, 안악3호분의 주인공이 걸고 있는 목걸이가 덕흥리고분에서는 찾기 어렵다는 점, 또 전체적인 두 고분의 규모 차이도 안악3호분이 압도적이라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습니다. 또 벽화의 훼손 때문에 양자 간 비교가 어렵다면, 중국 고분벽화와의 비교도 마찬가지로 어렵게 됩니다.
@원한의 거리 박선희 교수는 안악3호분 묘주의 관과 중국 고분벽화 묘주들의 관은 재질상 차이가 있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중국의 것은 주로 성근 재질이지만 안악3호분은 고운 재질이라는 것이지요. 다만 박선희 교수가 예시로 든 것과 원한의 거리 님께서 예시로 든 벽화가 같은 것이 아니기에 조양원대자고분과 녹가장후한묘 벽화에 대한 자세한 자료를 얻어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조수아 그런가요? 사실 저는 고화질 사진으로 봐도 딱히 어느 부분에서 청라관과 백라관으로 나뉠 수 있는지 이해가 어려웠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워낙 미세한 차이라 육안으로 봐서는 잘 구분이 되지 않는군요. 안악 3호분이 스케일 면에서 거대한 것은 분명하지만, 위에서 예시로 제시한 안악 3호분과 덕흥리 고분, 그리고 더불어 소개한 중국 고분을 비교해볼 때 묘주도의 구도나 복장, 정좌에 한쪽 손은 무릎 위에 받치고 한쪽 손으로는 부채를 든 포즈 등 대략적인 부분에서 워낙 흡사한 면이 있어서 어려운 문제같네요. 아직 배움이 짧아 아는 것이 모자랐는데, 친절하게 많이 알려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많이 배우고 갑니다.
@원한의 거리 흔히 안악 3호분과 비교되는 부분은 덕흥리고분 앞칸 북벽에 그려진 초상인데, 주인공의 초상화는 앞칸 북벽 말고도 널방 북벽에도 있습니다. 앞칸은 13군 태수로부터 유주자사 진이 업무를 보고 받는 벽화가 주제이지만 널방은 주인공의 생전 생활이 주제입니다. 널방에 그려진 주인공의 관모에는 성근 재질이 분명히 확인됩니다.
@조수아 흥미롭군요. 언젠가 관련해서 자료를 찾아다 봐야겠습니다.ㅎㅎ 상세히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원한의 거리 저도 많이 배우고 생각하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 설 잘 보내세요.
@원한의 거리 조양시 원대자고분과 하북성 안평 녹가장 후한묘의 관모는 안악 3호분의 백라관과 다르게 금테가 없고 그리고 금테 뿐만 아니라 관끈에서도 차이가 나서 안악 3호분의 백라관의 끈은 길이가 긴 반면 중국 관모의 끈은 짧은 정도로 관끈 부분에서 고구려의 백라관은 중국의 관모와 차이가 나지요 근거로 제시한 원대자 고분 묘주 벽화와 녹가장 고분 묘주 벽화에서는 관끈이 표시되어 있지 않아 고구려 백라관의 중국 유래설을 주장하는 근거로 삼기에 부족하지요
@원한의 거리 묘주의 자세는 지엽적으로 국적을 구분하기 어려운 부분이라 자세만 가지고 묘주 복식의 동일성을 강조하는 기준으로 삼기에 미흡하고 중요한건 복장인데 신당서에서는 고구려 왕의 복식이 오채색을 띠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고 안악 3호분의 묘주 복식을 보면 신당서의 기록같이 다섯 종류의 오채색을 띠고 있고 그리고 옷깃에 금제 장신구를 장착한게 특징인 반면 중국 원태자 묘주와 녹가장 묘주의 복식은 홍색 위주이고 안악 3호분의 묘주의 옷깃 같이 금제 장신구를 달지도 않았지요 안악 3호분의 복식이 원태자 녹가장 두 묘주 복식과 동일하다고 보기가 어려운게 이런 색의 종류와 금제 장식물의 유무 같은 특징적 요소들이지요
@원한의 거리
동진의 5대 황제 목제가 제정한 연호인 영화는 345년부터 제정되어 쓰기 시작한 연호라 고구려는 영화 연호를 제정되기 2년전인 342년에 전연의 침공을 받아 수도가 함락된 터라 안악 3호분에 기록된 영화 13년의 표기는 전연의 침공과 관련성이 적지요 13년의 영화가 동진의 연호라면 전연의 침공 이후에 혼란이 수습되어 가는 상황이라 동진으로부터 연호받을때 정확성이 떨어지게 받을 가능성이 희박하지요 게다가 동진은 바다 멀리 떨어져 있는 국가라 고구려와 교역량이 작아서 고구려가 외교 교류가 적은 동진의 연호를 쓸리가 만무하지요 부친의 유해를 틀어쥔 전연의 연호도 안쓰는데 전연보다 약한 동진의 연호를 쓰겠습니까?
고구려왕이 백라관을 착용했다는 것은 고구려왕이야 말로 진짜 황제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한자로 황(皇)자가 白+王의 조합으로 형성된 것이니 "흰모자를 쓴 왕"은 황제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따라서 덕흥리 고분 벽화에 백라관을 쓴 인물은 진의 초상이 아니라 진이 섬겼던 고구려국왕을 그렸다고 보는 것이 상식에 부합 될 것입니다.
글쎄요. 한자의 등장 시기는 안악3호분이나 고구려 건국보다 수세기 앞의 일입니다. 황제란 용어를 사실상 창조해 낸 진시황의 재위 기간과 고구려 건국 시기는 한참 떨어져 있지요. 게다가 고구려가 진정한 황제를 위해 백라관을 썼다고 볼 근거는 전혀 없습니다. 임금 황 자가 하얀 관을 쓴 임금이라면 왜 진작 중국의 황제들은 하얀 관을 쓰지 않은 걸까요? 그리고 한자의 기원은 대부분 모르는 것이 많습니다. 또 덕흥리 고분 묘주의 관은 백라관이 아닌 청라관이므로 덕흥리 고분의 초상은 고구려 왕이 아니라 유주자사 진의 초상이며, 5세기 고분 벽화에서 일반적으로 주인공이 아닌 다른 사람을 주인 자리에 그려놓는 예는 없습니다.
@조수아 북한에서는 고구원왕의 무덤으로 주장하더군요.
@大欽茂 북한이 고국원왕의 능으로 추정하는 건 안악 3호분이지 덕흥리 고분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