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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 연중 제19주일
▥ 열왕기 상권의 말씀입니다.19,9ㄱ.11-13ㄱ
그 무렵 엘리야가 하느님의 산 호렙에 9 있는 동굴에 이르러
그곳에서 밤을 지내는데, 주님의 말씀이 그에게 내렸다.
주님께서 11 말씀하셨다.
“나와서 산 위, 주님 앞에 서라.”
바로 그때에 주님께서 지나가시는데,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할퀴고 주님 앞에 있는 바위를 부수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바람 가운데에 계시지 않았다.
바람이 지나간 뒤에 지진이 일어났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지진 가운데에도 계시지 않았다.
12 지진이 지나간 뒤에 불이 일어났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불 속에도 계시지 않았다.
불이 지나간 뒤에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13 엘리야는 그 소리를 듣고 겉옷 자락으로 얼굴을 가린 채,
동굴 어귀로 나와 섰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9,1-5
형제 여러분, 1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진실을 말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나의 양심도 성령 안에서 증언해 줍니다.
2 그것은 커다란 슬픔과 끊임없는 아픔이 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3 사실 육으로는 내 혈족인 동포들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가기라도 했으면 하는 심정입니다.
4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 영광,
여러 계약, 율법, 예배, 여러 약속이 그들에게 주어졌습니다.
5 그들은 저 조상들의 후손이며,
그리스도께서도 육으로는 바로 그들에게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계시는 하느님으로서 영원히 찬미받으실 분이십니다. 아멘.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4,22-33
군중이 배불리 먹은 다음, 22 예수님께서는 곧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먼저 가게 하시고,
그동안에 당신께서는 군중을 돌려보내셨다.
23 군중을 돌려보내신 뒤, 예수님께서는 따로 기도하시려고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저녁때가 되었는데도 혼자 거기에 계셨다.
24 배는 이미 뭍에서 여러 스타디온 떨어져 있었는데,
마침 맞바람이 불어 파도에 시달리고 있었다.
25 예수님께서는 새벽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다.
26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 “유령이다!” 하며 두려워 소리를 질러 댔다.
27 예수님께서는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28 그러자 베드로가 말하였다.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29 예수님께서 “오너라.” 하시자,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 갔다.
30 그러나 거센 바람을 보고서는 그만 두려워졌다.
그래서 물에 빠져 들기 시작하자,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하고 소리를 질렀다.
31 예수님께서 곧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고,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32 그러고 나서 그들이 배에 오르자 바람이 그쳤다.
33 그러자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그분께 엎드려 절하며,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오늘의 묵상
성경에는 자연 현상이나 소리로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표현이 여러 번 나옵니다. 우렛소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십계명을 받을 때 시나이산에서 주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상징이었고(탈출 19,19 참조), 지진은 하느님께서 가까이 계심을 드러내는 표지였습니다(시편 18[17],8 참조). 불은 모세가 하느님을 뵈었던 불타는 떨기나무를(탈출 3,4 참조) 떠올리게 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 나오는 크고 강한 바람과 지진, 그리고 불길 등의 표현은 힘 있는 하느님의 표징입니다. 엘리야는 이 신비스러운 자연 현상을 통해서 믿음의 시험을 치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강력한 자연 현상 그 어디에도 주님께서는 계시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것이 지나가고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1열왕 19,12)가 들려왔을 때, 엘리야는 주님의 현존을 느끼고 주님 앞에 섭니다. 이 장면은 사람이 되어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이 바라보는 가운데 화려하게 나타나시지 않고 조용히 오셨습니다. 지금도 조용하고 부드러운 말씀으로, 성체 성혈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는 우리 어려움을 해결해 주시는 강하고 힘이 센 주님을 찾고는 합니다. 그러나 우리 삶에서 그런 체험을 할 기회는 흔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천둥 번개 치듯 나타나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소리 없이’ 나타나시는 하느님과 ‘조용하고 부드러운 사랑’이 무엇보다 큰 힘이신 외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소리 없이’ 그러나 우리를 통하여 활동하시는 ‘조용하시고 부드러우신’ 하느님을 묵상하는 뜻깊은 한 주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유청 안셀모 신부)
●‘후유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행을 다녀오면 ‘시차’라는 후유증이 있기도 합니다. 밤을 새워 놀았으면 다음 날 ‘피곤’이라는 후유증도 있습니다. 포트워스 신부님과 산타페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12시간 운전하는 여행이었고, ‘어도비’라는 독특한 양식의 건물을 보았습니다. 신부님과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습니다. 아이스박스에 음식과 술을 가져가서 경비도 절약하였습니다. 전체 경비가 600불 정도 나왔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후유증이 있었습니다. 가는 날과 오는 날 경찰에게 ‘티켓’을 받았습니다. 저는 기쁜 마음으로 범칙금의 반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백지장도 맞들면 가볍다고 하니, 나누어 내면 좋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2주 후에 신부님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범칙금 고지서가 나왔다고 했습니다. 반을 주기로 해서 고맙다는 문자였습니다. 그런데 벌금의 액수가 생각보다 많았습니다. 여행 경비의 3배인 1,800불이 나왔습니다. 그래도 사이좋게 반씩 나누어서 냈습니다. 생각보다 큰 후유증이었습니다.
21년 전의 일입니다. 저는 당시 사목국에서 교육 담당 업무를 맡고 있었습니다. 대방동 성당에서 구역장, 반장 교육이 있었습니다. 제 강의 시간은 오후 4시였지만, 미리 가서 인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2시에 강의하러 오실 신부님을 소개해 드렸습니다. 저는 몸이 피곤해서 잠시 불가마 사우나에 가서 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우나에서 방송이 나왔습니다. “손님 중에 조재형 씨 계시면 나와 주십시오.”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제가 사우나에 있는 것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사연을 알게 되었습니다. 2시에 오기로 한 신부님이 길이 막혀서 늦는다고 연락하셨습니다. 봉사자는 제가 성당에 와 있는 것을 알고, 그러면 제가 먼저 강의하면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성모상 앞에도 제가 없고, 성체 조배실에도 없고, 사제관에도 없었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불가마 사우나에 연락했고, 저는 정말 그곳에 있었습니다. 저는 급히 옷을 갈아입고 성당으로 돌아와 먼저 강의 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를 생각하면 웃음이 나지만,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깨어 있다는 것은 늘 긴장하고 불안하게 산다는 뜻이 아닙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내가 있어야 할 자리를 알고, 내가 해야 할 일을 기억하며, 부르심이 있을 때 응답할 준비를 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날 저는 잠시 쉬고 있었지만, 불러 주는 소리를 듣고 다시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신앙인도 그렇습니다. 세상 속에서 살아가지만, 하느님께서 부르시면 다시 복음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이사야 예언서를 읽으셨습니다. “주님의 영이 나에게 내리셨다. 가난한 이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묶인 이를 풀어주며, 눈먼 이를 다시 보게 하고, 억눌린 이를 자유롭게 하라고 나를 보내셨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예수님께서는 말씀만 하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말씀을 삶으로 이루신 분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고, 마귀 들린 이를 해방해 주셨고, 병든 이를 고쳐 주셨으며, 죄인에게 용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생명의 물을 주셨습니다. 베짜타 못가에서 38년 동안 기다리던 사람에게 일어나 걸어가라고 하셨습니다. 돌에 맞아 죽을 위기에 있던 여인에게 새 삶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셨고, 중풍 병자를 일으켜 세우셨으며, 눈먼 사람에게 빛을 보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화려한 궁전에 머물지 않으셨습니다. 권력과 명예를 가진 사람들 곁에 머물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 아픈 이, 외로운 이, 죄인, 마귀 들린 이들과 함께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믿음이었고, 이것이 예수님의 길이었습니다. 함석헌 선생님은 믿음에 대한 아름다운 글을 남겼습니다. “만 리 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도 ‘저 맘이야.’ 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이 글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나는 그런 사람을 가졌는가? 그리고 더 깊이 묻습니다. 나는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 주고 있는가? 믿음은 말로만 하는 고백이 아닙니다. 믿음은 누군가가 나에게 마음을 맡길 수 있는 삶입니다. 믿음은 어려운 순간에도 끝까지 지켜주는 마음입니다. 믿음은 세상의 유혹 앞에서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게 해 주는 내면의 힘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들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길을 떠났습니다. 그는 눈에 보이는 확실한 보장을 붙잡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약속을 붙잡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릅니다. 성모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모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이해하셨기 때문에 “예”라고 대답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성모님의 믿음은 하느님의 말씀에 자신을 맡기는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겟세마니 동산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예수님의 믿음은 하느님께서 보고 계시기 때문에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느님께서 나를 믿고 맡겨 주셨기 때문에 기쁘게 응답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돌보는 것도 믿음입니다. 봉사자가 공동체를 섬기는 것도 믿음입니다. 사제가 말씀을 준비하고 미사를 봉헌하는 것도 믿음입니다. 신자가 아픈 이웃을 찾아가고, 외로운 이를 위로하고, 어려운 이에게 손을 내미는 것도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오 복음 25장에서 영원한 생명의 길을 분명하게 알려 주셨습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믿음은 가난한 이에게 빵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은 외로운 이에게 위로가 되어야 합니다. 믿음은 병든 이에게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믿음은 용서받지 못한 이에게 자비가 되어야 합니다. 믿음은 성당 안에서만 피어나는 꽃이 아닙니다. 믿음은 가정에서, 일터에서, 병원에서, 길 위에서,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 안에서 피어나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좋겠습니다. 지금 내 믿음의 꽃은 피어있습니까? 내 믿음은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하고 있습니까? 내 믿음은 누군가에게 희망이 되고 있습니까? 아니면 나의 게으름과 욕심과 이기심 때문에 시들어 있지는 않습니까?
산타페, 곧 거룩한 믿음이라는 말처럼, 우리의 삶도 거룩한 믿음의 길이 되면 좋겠습니다. 믿음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내가 맡은 일을 성실하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만나는 사람에게 따뜻한 말을 건네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부르실 때,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하고 응답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조재형신부)
●조명연신부 강론
아이들은 자기 부모를 ‘내 편’으로 알고 있습니다. 부모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모에게 버릇없어 보이는 어리광도 부립니다. 그러나 ‘내 편’이라는 믿음이 없으면 거리를 둘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본당 아이들은 저를 보면 달려와 껴안기도 하면서 반가움을 표시합니다. 물론 간식달라는 이유이기도 하지만, 아마 자기 편이라는 믿음이 있어서일 것입니다. 그런데 오랜만에 조카 손주를 만났습니다. 반가워서 다가가니 울음을 터뜨립니다. 낯을 가리는 나이이기도 하지만, 아마 낯설어서 ‘자기편’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서로가 상대방을 ‘내 편’이라는 생각이 들어야 사랑으로 연결됩니다. 상대가 알아서 먼저 사랑으로 다가오면 모르겠지만, 쉽지가 않습니다. 따라서 내 편을 만들기 위해 내가 먼저 사랑으로 상대에게 다가가는 방법이 훨씬 쉽습니다.
세상은 과연 내 편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어떤 사람은 세상을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해 세상에 계속 선물한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면, 쓰레기를 주우면서 ‘세상아! 나는 네 편이야. 널 사랑해.’라고 말한답니다. 이처럼 자기가 사랑해서 먼저 선물을 주어야, 상대도 자기편으로 인정해서 선물을 자기에게 준다는 것입니다.
이제 주님과 ‘내 편’의 관계인지를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주님과 거리를 두고, 그 어떤 주님의 일도 하지 않는다면 과연 같은 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주님께서 산에서 기도하고 계실 때, 제자들을 태운 배가 거센 파도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과연 주님께서 제자들의 풍랑 속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음을 몰랐을까요? 기도하시는 주님의 시선과 마음은 늘 제자들을 향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얼마나 급했으면 물 위를 걸어오셨겠습니까? 더구나 “유령이다!” 하며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4,27)라고 안심의 말씀까지 해주십니다. ‘내 편’에 서시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고대 근동에서 바다와 거센 물결은 인간을 위협하는 혼돈과 죽음의 세력을 상징했습니다. 따라서 물 위를 밟고 오신다는 것은, 주님께서 혼돈과 죽음을 지배하시는 하느님의 권능을 지니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제 베드로가 자기에게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마태 14,28)라고 말합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향해 물 위로 발을 내딛는 놀라운 용기를 보여줍니다. 주님 말씀에 온전히 의탁했다는 것이지요. 주님을 ‘내 편’으로 굳게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물에 빠지고 맙니다. 그의 시선이 예수님에게서 ‘거센 바람’으로 옮겨졌기 때문입니다. 곧바로 주님께서 붙잡아 주시면서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마태 14,31)라고 말씀하십니다. 의심하는 순간, ‘내 편’의 관계는 깨어지기 때문입니다.
현실의 거센 바람 앞에 허우적거리며 빠져드는 우리입니다. 그때 과연 주님을 ‘내 편’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는지를 묵상해야 합니다. ‘내 편’이신 주님께서는 우리를 절대로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오늘의 명언: 기도는 하느님의 이름이 우리 삶 안에서 거룩히 빛나시기를 청하는 것입니다(성 치프리아노).
●전삼용신부 강론
“제가 평생 열심히 노력해서 살아왔는데, 결과는 비참합니다.”
이런 한탄을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런데 노력은 좋은 것일까요?
분명 대부분 좋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노력해서 되나요?
노력했더니 원하는 것을 얻었나요?
노력했더니 원하는 관계가 맺어졌나요? 노력했더니 인생에서 성공했나요?
오히려 노력하는데도 안 되는 것이 많지 않았습니까?
자녀에게 노력하는데 자녀는 그 마음을 알아줍니까?
배우자는 나의 노력을 알아주나요?
직장에서 노력하는데도 오히려 인정은 다른 사람이 받지 않습니까?
노력하면 성공한다는 말은 세상이 우리를 속이기 위해 만들어 놓은 일종의 덫이고 함정입니다. 노력해서는 절대 성공한 인생을 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 덫에서 빠져나오려면 왜 지금 우리가 하는 노력이 헛된 것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우선 우리가 왜 그렇게 열심히 노력하는지, 그 목적이 무엇인지부터 확실히 해야 합니다.
우리는 왜 공부하고 왜 일하고 왜 자녀를 키우나요?
사실 우리는 ‘두려움’과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나를 행복하게 해 줄 것을 갖지 못하게 될까 봐 두려운 것입니다.
저 사람이 나를 버리고 떠날까봐 두려워 노력하고, 직장에서 인정받지 못할까 노력하며,
자녀들에게 자신들을 왜 그렇게 키웠느냐는 원망을 받을까 봐 노력합니다.
이렇게 두렵지 않으려는 근저에는 ‘행복’이란 생각이 깔려있습니다.
우리는 두렵지 않아야 행복할 것이라 믿습니다. 두려움을 극도로 싫어합니다.
그런데 그 행복이라고 믿는 것을 노력해서 갖게 되었다면 두렵지 않나요?
이젠 그것을 잃게 될까 봐 두려워합니다.
저 사람과 결혼하지 못할까 봐 두려워했는데, 이젠 그 사람이 바람피울까 봐 두려워합니다.
일단 인간은 노력만으로는 그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두려움은 욕구에서 나오는데, 그 욕구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은 욕구라는 컵에 담긴 물과 같습니다.
우리는 그 물을 마시기 위해 욕구까지 들어 올리게 됩니다.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싶은 욕구가 생겼을 때 그것을 먹지 못하게 될까 두려워하는 마음도
동시에 생겼습니다.
사실 욕구가 사라지면 두려움도 사라집니다.
두려움을 없애려면 욕구부터 없애야 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추구하는 욕구의 최종목적지는 무엇일까요?
인간의 모든 욕구는 생존을 넘어서서 ‘인정받고 싶어 하는 마음’으로 귀결됩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습니다.
내가 쓸모없는 존재로 여겨지는 것이 가장 두렵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그렇게 여겨주지 않으니 스스로의 노력으로 인정받으려고 합니다.
돈을 많이 벌어, 좋은 배우자와 결혼하여, 좋은 직장에 취직하여 인정받으려 합니다.
결국, 사람은 사랑받기 위해 사는 것입니다.
워런 버핏은 인생의 성공이 무엇이냐 물을 때,
“나를 사랑해주었으면 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해주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돈을 가장 많이 번 사람도 결국은 사랑받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랑받기 위해 노력하는 것 자체가 자신은 사랑받을 가치가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심리상담사, ‘고코로야 진노스케’의 『너무 노력하지 말아요』란 책이 있습니다.
고코로야가 심리상담사로 처음 일을 시작하게 되었을 때 우선 강연을 통해 사람을 모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홈페이지를 개설하고 지금 참가 신청을 하면 최신 사은품을 준다고 하고, “이 강연에 참여하면 내일부터 당신을 다른 사람!” 이런 문구도 빼놓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열심히 홍보해도 강연장은 텅텅 빌 때가 많았습니다.
고코로야는 계속 자신의 문제점을 찾아내어 바꿔보려 했습니다.
‘홍보를 잘 못 했나?’, ‘수강료를 좀 더 싸게 했으면 잘되지 않았을까?’
그러나 바뀌는 것이 없었습니다.
결국, 그가 내린 결론은 이것이었습니다.
‘아! 내가 내 강의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구나!’
자기 스스로 자신의 강연이 ‘더 싸고 좋은 혜택이 있어야지만 관심을 가질만하다.’ 라는 전제로 강연의 가치가 낮다고 스스로 평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파는 사람이 가치 없다고 여기는 것을 사는 사람이 어떻게 가치 있다고 여길 수 있겠습니까?
이후 그는 ‘내 강연은 수강료가 비싸도, 사은품이 없어도 들을만한 가치가 있는 강연이다.’ 라고 전제를 바꾸고, 원래는 도쿄까지 올라가서 하던 강연을 사은품도 없애고 자신의 고향인 교토에서 그냥 열었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강연장에 사람이 꽉 찼다고 합니다.
노력은 인정받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인정을 받았다고 믿으면 그 노력은 멈추게 됩니다.
그리고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이 근원적 두려움을 극복하려는 두 가지 다른 태도가 나옵니다.
한 부류는 두려움의 바다와 맞서 끊임없이 노를 젓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나아가지는 않습니다.
인정받으려고 평생 자기의 힘으로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보고는 이런 반응을 보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 ‘유령이다!’ 하며 두려워 소리를 질러 댔다.”
그들에게 두려움은 오직 노력으로만 극복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노력하지 않고 두려움을 극복한 사람을 보는 것은 유령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두려움을 이미 극복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극도로 두려워합니다.
현실이 아니라 유령처럼 바라봅니다.
저런 방식으로는 절대 자신들이 느끼는 불안과 두려움을 극복할 수 없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여전히 자신의 힘으로 자기 존재가치를 증명하려 노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당신께로 초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베드로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접근합니다. 믿음으로 두려움을 극복하려 하는 것입니다.
두려움의 바다를 예수님처럼 걸어보는 것입니다.
모든 두려움이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하려 하는 것이라면, 이미 우리가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하느님의 자녀임을 믿는 것으로 그 바다를 넘어보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외칩니다.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그리고 물 위를 걷습니다.
물론 그 믿음이 완전하지 못하여 다시금 두려움에 빠지기도 하지만 베드로가 느끼는 두려움은 이미 배 위에서만 머무는 제자들이 느끼는 두려움과는
질적으로 다른 두려움입니다.
배 위에서 스스로의 노력으로 두려움을 극복하려는 사람들은 끝나지 않는 두려움으로 살겠지만, 베드로는 언젠가는 두려움을 극복하고 물 위를 자유롭게 걷게 됩니다.
고아로 남의 집 식모살이만 하시며 자라신 저희 어머니가 자살을 생각하실 때 물 위를 걸어오시던 예수님은 나병 환자 있는 곳으로 방향을 바꾸시며
“저런 사람도 사는데 너는 왜 못 사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삶이 힘든 것은 열심히 노력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인정 받기 위해 너무 열심히 노력해서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노력하지 말고 믿으라고 하십니다.
노력하지 않아도 당신께서 목숨을 내어줄 수 있는 소중한 존재임을 믿어야만 모든 두려움에서 해방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그리고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모든 두려움에서 자유로워졌을 때 이런 신앙고백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