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재형 신부
바둑을 두는 사람은 ‘복기(復棋)’을 합니다. 복기하는 과정에서 잘 된 착점은 어디인지,
실수 했던 착점은 어디인지 확인합니다. 상대방은 어느 곳에서 잘 하였는지, 상대방은 어느 곳에서 실수 했는지를 확인합니다. 전체 판세의 흐름이 어디에서 변하였는지 확인합니다.
날씨는 수시로 변하지만 기후는 일정한 패턴이 있습니다. 저는 그 정도는 아니지만 고수는 전체 바둑의 흐름을 여러 방향에서 복기할 수 있습니다. 복기를 잘 하는 사람은 실수는 줄이고, 흐름을 탈 줄 알기에 실력이 향상 됩니다. 정치도 그렇습니다. 총선의 과정에서 상대방의 장점은 무엇인지, 나의 단점은 무엇인지 살펴보면 다음번 총선에 도움이 됩니다. 정치 평론가들은 총선의 결과를 놓고 냉철한 평가를 하였습니다. 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평가에 인색한 사람은 다음번 총선에서도 승리하기 어렵습니다.
코로나19로 미사가 중단 되었습니다. 한국에서는 엄격한 방역 기준을 정하고 미사를 재개하였습니다. 오늘은 부활 제6주일입니다. 주님 부활의 기쁨과 주님 부활의 기쁨이 나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살펴보려합니다. 부활의 삶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삶이 아닙니다. 부활의 삶은 행복하고 평화로운 삶도 아닙니다. 부활의 삶은 현실의 삶과 동떨어진 삶이 아닙니다. 부활의 삶은 언제가 있을 미래의 삶이 아닙니다. 사도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고, 변화되었습니다. 당당하게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표징을 보여주었습니다. 사도들은 고난과 박해를 당당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오히려 주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받는 박해를 영광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였던 식사를 재현하였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였습니다. 성체성사는 공동체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가진 것을 나누었고, 어려운 이웃을 기쁘게 도왔습니다. 이것이 부활의 삶입니다.
부활 성야의 주제는 ‘빈 무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덤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했던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부활하신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갈릴래아는 주님께서 복음을 전하신 곳입니다. 갈릴래아는 주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곳입니다. 갈릴래아는 하느님나라를 선포하신 곳입니다. 지금 내가 있는 곳에서 복음의 기쁨이 있다면 바로 그곳이 갈릴래아입니다.
부활 제2주의 주제는 ‘평화와 용서’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평화를 빌어 주셨습니다. 성령을 주셨습니다. 부활은 분노와 복수가 아닙니다. 부활은 평화와 용서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토마사도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 믿는 자는 복되다.”
토마사도는 주님께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주님의 부활은 신앙의 신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 부활을 선포하나이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적마다 주님의 죽음을 전하나이다. 십자가와 부활로 저희를 구원하신 주님, 길이 영광 받으소서.”
부활 제3주의 주제는 ‘엠마오’입니다. 엠마오는 장소가 아닙니다. 엠마오는 우리의 마음이 자괴감에서 자부심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두려움과 공포에서 열정과 희망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두려움에 숨어있던 다락방을 열고 세상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죽 음은 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 시작됨을 아는 것입니다. 빈 무덤은 텅 빈 것이 아니라 부활의 표징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에서 비록 넘어지셨지만 다시 일어나셨고, 십자가에 달려 죽음에 임박해서도 하느님께 저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으며, 죽으셨지만 죽음의 어둠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부활시기를 지내면서 그 부활의 기쁨과 부활의 영광을 우리 마음 안에 벅찬 감동으로 받아들이고, 우리 이웃에게 드러내고 증거해야합니다. 그런 삶이 바로 엠마오입니다.
부활 제4주의 주제는 ‘착한목자’입니다. 착한목자는 양들의 음성을 듣는다고 하십니다.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듣는다고 합니다. 신앙인들은 하느님의 음성을 잘 들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음성을 잘 듣기 위해서는 먼저 함께 사는 가족들의 음성을 귀담아들어야 합니다. 이웃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가난하고 병든 이들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바로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배고픈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 억울한 이들의 한을 풀어주는 것, 병든 이들을 치료해 주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죄를 당신의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 나무에 달리시어, 죄에서는 죽은 우리가 의로움을 위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분의 상처로 여러분은 병이 나았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걸어가야 할 신앙의 길, 회개의 길입니다.
부활 제5주의 주제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입니다. 길은 고속도로가 아닙니다. 전용도로도 아닙니다. 벗이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까지 함께 가주는 희생의 길입니다. 자갈과 가시밭을 정리하는 개척의 길입니다.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이 드러나는 길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길입니다. 생명은 나만을 위한 생명이 아닙니다. 타인의 생명을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존재하는 모든 생명은 하느님의 선물임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진리는 벗을 위해서 목숨까지도 바치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진리는 고통과 절망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희망입니다. 예수님의 진리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죽음을 넘어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는 신앙입니다.
부활 제6주의 주제는 ‘신앙인의 삶’입니다. 신앙은 쉽고 빠른 길을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때로는 가시밭길이고, 십자가의 길이고, 시련과 고통의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길을 가셨고, 사도들이 그 길을 걸었고, 성인들이 걸었던 길입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뜻이라면,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겪는 것이 악을 행하다가 고난을 겪는 것보다 낫습니다. 사실 그리스도께서도 죄 때문에 단 한 번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육으로는 살해 되셨지만 영으로는 다시 생명을 받으셨습니다.”
도종환 시인은 그의 시 ‘흔들리며 피는 꽃’에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비에 젖지 않고 피는 꽃은 또 어디 있으랴’ 길가에 피어나는 작은 꽃들도 다 저렇게 흔들리며, 비에 젖는다고 시인은 말합니다. 우리들의 인생 또한 때로 갈등의 바람에, 유혹의 바람에, 욕심의 바람에 흔들리기 마련입니다. 근심과 걱정의 비가 내리고, 좌절과 고통의 비가 내리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그러나 우리들 또한 충실하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면 행복의 꽃이 필 것입니다. 사랑의 꽃이 필 것입니다.
세상의 흐름에 떠밀려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은 세상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 갈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잘 지킬 것이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이제 아버지께서 보내 주실 협조자 성령께서 너희에게 이 모든 것을 다시 알려 주실 것이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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