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우동이란 여인이 있다. 잘 알려진 사람이다(‘왕조실록’에는 ‘어을우동’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어우동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도 있고 영화도 있다. 조선시대 최대의 성적 스캔들을 일으킨 여인으로, 이 여인의 거침없는 남성편력, 성적 욕망의 표출은 자못 현대인의 관심을 끌었다. 어우동을 테마로 소설을 쓰거나 영화를 만든 작가들은 아마 이렇게 생각했으리라. ‘성적 억압이 강고했던 중세사회에서 한 여인이 성적 자유를 구가했다면 근대화의 단초가 되는 행동이 아닌가’라고. 이건 그럴 법한 생각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어우동을 돌출적인 존재로 보고 있다. 뒤집어보면 어우동과 관계를 맺은 남성들이 없다면 어우동 역시 없다. 조선시대 지배층인 양반들은 성리학이란 도덕철학으로 무장한 도덕적인 인간으로 알려져 있다. 어우동의 존재는 양반에 대한 이러한 이미지에 오류가 있음을 암시한다.
조선시대는 축첩제가 공인되었으나 여성의 투기는 칠거지악으로 금기시되었다. 축첩제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것은 남성의 성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제도였다. 그런가 하면 기생제도도 존재했다. 조선시대 남성에게 성적 스캔들은 제도화, 일상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여성의 경우에는 축첩제는 커녕 남편 아닌 자와 성관계를 맺으면 철저하게 응징되었다. 불균형이었다.
어우동에 앞서 어우동과 비슷한 길을 걸었던 사람이 있다. 유감동(兪甘同)이다. 이 인물의 일화도 1988년 ‘깜동’이란 제목으로 영화화된 바 있다. 유감동은 세종 때의 실존인물이다. 감동의 아버지는 검한성(檢漢城·일종의 벼슬 이름) 유귀수(兪龜壽), 남편은 평강현감 최중기(崔仲基)였다. 말하자면 감동은 당당한 사족(士族), 즉 양반이었다. 만약 양반이 아니었다면, 감동의 남성편력은 사건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사건이 처음 보고된 세종 9년 8월17일의 ‘실록’ 자료에 의하면, 남편 최중기는 무안군수로 부임할 때 감동을 데리고 갔다. 그러나 감동이 병을 핑계로 도로 서울로 올라와 방종하게 굴자 최중기가 버렸다고 한다. 여기서 방종이라 함은 아마도 성적 방종을 의미할 것이다. ‘실록’은 감동의 사건을 처음 보고하면서, 그가 관계했던 남자로 이승(李升)·황치신(黃致身)·전수생(田穗生)·김여달(金如達)·이돈(李敦) 등 6명의 이름을 밝혔다. 그 외 이름을 숨긴 간통자 역시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라고 했다.
이 사건은 세종 9년 9월16일 최종 종결될 때까지 거의 두 달을 끌었다. ‘실록’ 자료를 정리하여 간통자의 이름을 모아보면, 거의 40명에 가깝다. 그 중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하는 것은 당연히 양반들이다. 총제 정효문(鄭孝文), 상호군 이효량(李孝良), 해주 판관(海州判官) 오안로(吳安老), 전 도사(都事) 이곡(李谷) 등이 제법 고관들이었고 장연 첨절제사(長淵 僉節制使)·사직(司直)·부사직·판관·찰방·현감 등의 벼슬도 보인다. 그런가 하면 수공업 기술자인 공장(工匠)으로 수정장(水精匠)· 안자장(鞍子匠)·은장(銀匠)도 있었으니 감동은 신분에 상관없이 애정행각을 벌였던 듯하다.
아래 더많은 자료가 있지만 너무 길어 짤랐슴
첫댓글 잘 봤습니다~
즐거운 한주 되세요...^*^
쉐모아님이
댓글을 달아주셔서 넘 고맙습니다.
이글이 별로 흥미가 없으셨나 보네요
이번 한주도 유익하시기 바랍니다,.
축첩제와 어우동 이야기 잘 읽었어요^^
또 올려 주세요^^*
유익했어요><ㅎㅎ
낮에는 현모양처 밤에는 요조숙녀가 되라는 말이 맞나여?~!......
밖에서는 요조숙녀
집에서는 현모양처가 맞는거 아닌가요?~~ㅎㅎㅎ
아니면
밤에는 현모양처 밤에는 요부가 돠라는게 맞던지~~ㅎㅎㅎ
네에~~~^*^ㄱ슈ㅠ,,,,,,,,,,,
잘보았습니다~~
미모에 사모님 모습이 활달하시고 명랑해 보이고
부부동반 산행을 하시는 모습이 부럽기만 합니다
작년에 올려 놓았던 저의 사진 기억 하시나요?
30927번째 끝말을 잡았던 글이요~~ㅎㅎㅎ
왜?지웠어요?
그냥 놓아 두시지~~~
나암자님만 보셨으면 됐지요^^
다른분들은 질리도록 보셨어요...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