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3년 10월 25일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제1독서 : 로마 6,12-18
복 음 : 루카 12,39-4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9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40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41 베드로가, “주님, 이 비유를 저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하고 물었다.
42 그러자 주님께서 이르셨다. “주인이 자기 집 종들을 맡겨 제 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겠느냐?
43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44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45 그러나 만일 그 종이 마음속으로 ‘주인이 늦게 오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하인들과 하녀들을 때리고 또 먹고 마시며 술에 취하기 시작하면,
46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와서,
그를 처단하여 불충실한 자들과 같은 운명을 겪게 할 것이다.
47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48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모르고서 매 맞을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막스 플랑크 생물학적 인공 두뇌학 연구소의 과학자들은
실험 참가자들을 울창한 숲으로 데리고 가서 ‘직선으로 걸어가라’라는 간단한 지시를 했습니다.
이 숲속에는 실험 참가자들을 안내하는 어떤 표지판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방향 감각과 똑바로 걸을 수 있는 능력에만 의존해야 했습니다.
실험이 끝난 후 몇몇 참가자들은 자신이 직선 경로에서 벗어나지 않았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GPS 분석을 관찰하니, 그들은 지름 20미터 이내에서
원을 그리며 걸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실험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자신의 걷는 방향에 대한 믿을만한 단서가 없으면, 실제로 원을 그리며 걷는다.’
걷는 것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삶도 이런 모습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즉, 삶 안에서 명확한 이정표가 앞에 없으면, 인간은 말 그대로
다람쥐 쳇바퀴 돌 듯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원을 그리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 이정표가 바로 우리의 구원을 위해 큰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이십니다.
하지만 많은 이가 주님을 바라보기보다는 지금의 상황에만 계속 매여있을 뿐입니다.
주님을 바라보고 있지 않으니 주님 뜻을 제대로 따를 수가 없습니다.
세상 삶 안에서 계속 무엇인가를 하고 있지만 원을 그리며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루카 12,40)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준비는 사람의 아들을 맞이할 준비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준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언제 오실지 모를 주님이시기에 지금 당장 잘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고 하시지요.
그러나 우리는 늘 뒤로 미루고 있습니다.
주님을 보려고 하지 않고 그래서 주님의 뜻도 따르지 않으면서,
아직도 많은 시간이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지금 나 좋을 대로 살다가 주님만 맞이하면 되지 않겠냐는 생각입니다.
결과만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좋은 결과는 좋은 과정을 거쳐야 나올 수 있습니다.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좋은 결과가 나올 리가 없습니다.
문제는 주님께서 결과만 보시는 것이 아니라, 과정 역시 모두 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로 가장 빨리 직선으로 가는 방법이었습니다.
주님을 바라보지 않는다면, 또 주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면
하느님 나라는 내게 가장 먼 나라가 될 뿐입니다.
지금 자리에서 맴도는 삶이 아닌, 하느님 나라를 향해
힘차게 나아갈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당신의 삶은 기회가 아닌, 변화에 의해서 더 나아질 수 있다(짐 론).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순례 두 번째 날에는 ‘정난주(명연) 마리아 묘’와 ‘용수성지’를 순례하였습니다.
신앙 때문에 남편 황사영 알렉산델은 순교하였고,
정난주 마리아는 제주도에 관노로 유배 갔고, 2살 아들은 추자도에서 생이별하였습니다.
정난주 마리아의 생애를 묵상하면서 저의 고향도 생각났습니다.
저는 1963년 4월 15일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 안덕리 376번지에서 태어났습니다.
제가 그곳에서 태어난 이유는 5대조 할아버지께서 신앙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리고 깊은 산골로 피난 가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저는 1991년 8월 23일 사제서품을 받고 제가 태어났던 고향으로 가서 첫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교우촌에서 지내는 많은 분들이 미사에 함께 해 주었고, 저를 축하해 주었습니다.
비록 관노의 신세였지만 정난주 마리아는 신앙 안에서 충실하게 살았고,
고인이 되었을 때도 고인을 존경하던 마을 사람들이 묘소를 잘 돌보았습니다.
지금 고인의 무덤은 많은 신앙인들이 찾는 성지가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했던 것처럼 사랑하는 남편의 죽음도, 2살 아들과의 생이별도, 평생의 관노생활도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랑을 떼어놓을 수 없었습니다.
용수성지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이 탔던 배가 상해를 출발해서 제물포로 가려했는데
도중에 태풍을 만나 갖은 고초를 겪은 후에 제주도 용수포구에 도착했던 곳입니다.
김대건 신부님과 선원들은 용수포구에서 미사를 봉헌하였고,
배를 수리한 후에 다시금 출발하여 나바위 성지에 도착하여
무사히 조선에서의 사목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용수성지에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을 기념하는 기념관이 있습니다.
기념관에서는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의 생애를 볼 수 있고, 제주 교구의 역사를 볼 수 있습니다.
제주 교구에서는 고증을 고쳐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이 타고 왔던 ‘라파엘 호’를 복원하였습니다.
신부님의 생애를 묵상하면서 라파엘 호에 승선한 사람들이 직접 배를 몰고 제주 앞바다를 나갔는데
평온한 날에도 멀미 때문에 포기하고 돌아왔다고 합니다.
건장한 사람들이 하루도 못 견디는 배 위에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5개월 넘게 지냈다고 합니다.
순례에 함께한 분들 앞에도 심한 파도처럼 삶이 장애물이 있습니다.
물론 제게도 장애물이 있습니다.
순례자들과 저는 ‘라파엘 호’에 잠시 머물면서 우리가 장애물들을 이겨낼 수 있도록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전구를 청하였습니다.
요즘 우리는 제1독서에서 ‘로마서’를 읽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로마서에서 일관되게 말씀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은 율법과 기득권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며
신앙은 하느님을 믿는 의로움에서 시작되는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율법과 기득권은 필요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최종 목적지가 아니라고 말을 합니다.
우리의 최종 목적지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주인이 자기 집 종들을 맡겨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겠느냐?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오늘 나는 나에게 주어진 하루라는 하느님의 선물을 어떻게 보내는지 생각하며,
문득 예전에 어느 식당에서 읽었던 글을 생각합니다.
“생각하는 시간을 따로 떼어 놓으십시오. 그것은 힘의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읽는 시간을 따로 떼어 놓으십시오. 그것은 지혜의 샘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시간을 따로 떼어 놓으십시오. 그것은 신이 부여한 특권입니다.
웃는 시간을 따로 떼어 놓으십시오. 그것은 영혼의 음악이기 때문입니다.
주는 시간을 따로 떼어 놓으십시오. 그것은 이기적 이기엔 우리의 하루가 너무 짧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시간을 따로 떼어 놓으십시오. 그것은 지상 최대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생각하고, 읽고, 사랑하고, 웃고, 나누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갈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영적으로 깨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겠느냐?”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도 종말에 관한 비유인 앞 장면의 '주인을 기다리는 종의 비유'에 이어,
'집주인과 도적의 비유'와 '청지기의 비유'를 들려줍니다.
앞의 것은 어제 복음과 함께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 깨어있는 종들”(루카 12,37)이라는
‘깨어있는 종들’에 대한 행복 선언이라면,
뒤의 것은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들”(루카 12,43)이라는
‘깨어 일하고 있는 종들’에 대한 행복 선언입니다.
이는 ‘깨어 있는 자’는 단지 잠들지 않는 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깨어 일하는 자’임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깨어 있으려면, 먼저 ‘대체 무엇이 맡겨졌고’, ‘무슨 일이 맡겨졌는지’를
제대로 알아야 할 일입니다.
곧 청지기(집사)가 가져야 할 태도와 방식을 가르쳐주십니다.
우선 비유에서, 청지기는 주인을 대신하여 종들과 양식과 재물을 돌보는 직무를 맡은 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주인이 자기 집 종들을 맡겨 제 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겠느냐?"(루카 12,42)
이는 먼저 제자들에게 다른 어떤 일이 아니라 ‘주인의 종들이 맡겨졌고’,
‘그들에게 제 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고 돌보는 일’이 맡겨졌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바로 이 ‘사실 인식’을 제대로 해야 할 일입니다.
곧 ‘나에게 맡겨진 종은 나의 종이 아니라 그분의 종’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마구 부려 먹으라고 맡겨진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양식을 내주라고 맡겨졌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양식은 이미 정해져 주어졌고, 그것을 때에 맞추어 소홀함이 없이
잘 챙겨내어 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일을 맡을 수 있는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를 찾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충실함’은 하느님의 본성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과 계약을 맺으시며
그 약속에 ‘신실하심’(헤세드)과 ‘한결같은 사랑’을 드러내셨습니다.
곧 당신 종들을 끝까지 챙기시는 ‘충실하심’을 드러내셨습니다.
바로 당신의 이 마음을 ‘청지기’가 지녀야될 태도로 제시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일은 ‘슬기로움’으로 처리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슬기로움’이란 맡겨진 이들을 다루는 기술이나 요령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뜻에 따라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어주는”(루카 12,42) 일입니다.
잠언에서는 말합니다.
“지혜의 시작은 주님을 경외함이며, 거룩하신 분을 아는 것이 곧 예지다.”(잠언 9,10)
그렇습니다.
지혜는 주님을 알고, 두려워하고, 믿는 마음에서 옵니다.
그것은 '주인의 뜻을 아는 지혜'를 넘어, '주인의 뜻에 따라 사는 지혜'를 의미합니다.
시편 작가는 말합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원이요, 그대로 사는 사람이 슬기를 깨친 사람이다.”(시 111.10)
그렇습니다.
‘지혜를 아는 사람이 아니라 사는 사람’이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곧 주인의 뜻을 알고 그것을 충실하게 실천하는 사람이 ‘슬기로운’ 사람이요,
'깨어 있는'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을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이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 12,47-48)
<오늘의 말⋅샘 기도>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겠느냐?” (루카 12,42)
주님!
먼저 당신의 나라와 의로움을 찾게 하소서!
제가 주인이 아니라 당신께 속해 있는 자인 까닭입니다.
무엇을 하든 제 방식이 아니라 당신의 방식을 따르고,
제 뜻이 아니라 당신의 뜻을 따르는,
충실하고 슬기로운 관리인이 되게 하소서! 아멘.
충성스러운 종에 대하여
조욱현 토마스 신부
매 순간을 충실한 삶으로 준비하라는 말씀에 이어
오늘은 더욱 구체적으로 충성스러운 종과 불충한 종의 비유를 들어
항상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충실히 수행하고 준비하는 삶의 자세를 말씀하신다.
베드로는 이 비유가 사도들에게 하신 말씀인지 묻는다.
주님께서는 이 명령이 교사의 역할을 맡아
남보다 영향력 있는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더 새겨들어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43-44절)
그들은 동료 종들에게 정해진 양식을 내주라는 명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적절한 때에 각자에게 적절한 영적 양식을 넉넉하게 줄 것이다.
동료 종들에게 때맞추어 양식을 주는 일은 교회 지도자들의 몫이다.
자신의 몫을 제대로 하지 않고,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으로 남용을 하게 되면,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주인이 와서 그를 처단할 것이다.
주님을 간절히 기다리며 자기의 소임에 충실한 자들은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43절)이라고
칭찬을 듣고 많은 일을 맡게 될 것이라고 하신다.
근면하고 성실해야 할 자신의 본분을 잊어버리고,
깨어 지키는 일을 쓸모없는 일로 가벼이 여기며,
옳지 못한 길에 들어서서 자기에게 속한 사람들을 억압하고 괴롭히는 자,
만일 그가 그들에게 돌아갈 몫을 지급하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은 처단당하여 많은 매를 맞을 것이다.
주님의 영광을 가리거나 자기에게 맡겨진 양 떼를 소홀히 다루는 자는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들과 똑같이 대접받을 것이다.
지도자들은 자신들에게 맡겨진 양들이 잘못되는 것이 대부분 자신의 탓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런 경우에는 그들이 주님의 길을 지키지 않고, 구원을 위해 주어진 거룩한 명령을 어겼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이익만 탐내고, 교만으로 믿음을 소홀히 하고, 말로는 세속을 버린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움켜잡고, 자기 욕심만 차리느라 하느님의 뜻을 행하지 않았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47절) 하셨다.
주인의 뜻을 알았기 때문에 그들은 매 맞을 짓을 했고 매를 맞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들에게 선한 덕행의 모범이 되어야 할 증거자들인
우리가 어떤 매를 맞더라고 억울할 수 없다.
알고도 주님의 뜻을 거스른 자는 많이 맞을 것이고 모르고 잘못한 사람은 적게 맞는다고 하셨다.
그래서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48절)
식재료를 손질하면서 그 행위 자체를 하느님께 봉헌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알콩달콩 재미있고 기쁘게 살아가고 계시는 한 수도회 세미나 동반을 해드리고 있습니다.
또래 형제들, 저와 동종업계에 종사하시는 신부님 수사님들도 있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재미있게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저만 쌩고생하고 있는 줄 알았더니, 이 공동체 형제들 고생도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피정객들을 위한 시설 관리며 주방이며, 빨래 청소며 다들 손수 하시는 분위기였습니다.
누군가 나와 비슷한 삶을 기쁘게 살아내고 있다는 그 자체로 제게는 너무나 큰 위로요 힘이었습니다.
저희 살레시오회 안에서는 ‘일상의 영성’이란 표현을 자주 씁니다.
때로 지루해 보이고 때로 무의미해 보이는 우리들의 반복되는 일상사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심을 굳게 믿는 영성입니다.
매일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루를 보물처럼 소중히 여기는 영성입니다.
매일 우리와 만나는 이웃들을 하느님의 은총으로 받아들이는 영성입니다.
매일 되풀이 되는 소소한 일상사에도 분명히 큰 가치와 의미가 있음을 믿으며
성실히 반복해 나가는 영성입니다.
이러한 일상의 영성에 대한 충실한 실천은
오시는 주님을 잘 맞이하기 위한 가장 좋은 준비 작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요즘 계속되는 복음 주제가 깨어 있음이요, 철저한 준비입니다.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루카 12장 39~40절)
일상의 영성을 잘 실천하기로 유명한 17세기 맨발의 가르멜회 수도자가 있었는데
수도원 주방장이었던 부활의 라우렌시오 수사님입니다.
참으로 겸손했던 그는 아주 기쁜 얼굴로 동료 수도자들을 위해 음식을 만들었습니다.
식재료를 손질하면서 그 행위 자체를 하느님께 봉헌했습니다.
수프를 저으면서 동료 수도자들의 성화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행하는 하찮아 보이는 행위들을 하느님을 위한 일로 변화시켰습니다.
그는 성당에서 열심히 기도할 때도 하느님을 만났지만,
동료들의 낡은 구두를 수선할 때도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라우렌시오 수사님께서 남기신 명언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반드시 큰일만 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프라이팬으로 작은 계란 하나를 요리하더라도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뒤집습니다.”
이러한 라우렌시오 수사님이었기에 사람들은 그분을 만나면,
마치도 주님을 만난 듯한 느낌이었다고 증언했습니다.
그가 주방에서 접시를 닦을 때의 모습은 마치 경건한 사제가 거룩한 성찬례를 집전하는 듯했습니다.
그는 거룩한 사제도 아니었고 명설교자도 아니었지만,
자질구레한 일상사를 통해 주님을 만났던 것입니다.
돈 보스코 성인께서 강조하셨던 일상의 영성, 사실 특별한 것이 아니더군요.
우리가 쉽게 넘겨버리고 마는 일상의 소소한 작은 것들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영성입니다.
작은 의무들에 중요성을 두고 충실히 이행하는 영성입니다.
매일 아침이면 내 책상 앞에 놓이는 매일의 업무들, 귀찮은 일상적 소임들을
기쁜 마음으로 행하는 영성입니다.
영성 생활 안에서도 ‘특별한 그 무엇’을 추구하지 않고 매일 되풀이되는 미사나 아침저녁 기도에
구원의 보편적 진리가 담겨있음을 기억하고 ‘할 때 잘하는 영성’입니다.
우리가 매일 보내고 있는 ‘일상’은 황금보다 더 가치 있는 축복의 순간들이며,
찬란한 기적들이 수시로 반복되는 금쪽같은 시간으로 여기는 것이 일상의 영성의 골자입니다.
일상의 영성을 산다는 것은 매일 아침 복음적인 삶, 균형 잡힌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는 일입니다.
일상의 영성을 산다는 것은 그때그때 상황에 충실하다는 것,
매 순간 해야 할 바를 충실히 잘 해낸다는 것, 모든 것을 미리미리 잘 준비한다는 것입니다.
준비와 기다림에 열외는 없다.
박상대 마르코 신부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세운 계획이나, 아니면 주어진 계획에 따라 준비하고,
준비가 되면 계획을 실행에 옮긴다.
그것이 시간이 걸리는 길이라면 기다릴 줄도 안다. 사람은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살면서 예상치 못한 일들도 만나게 된다. 뜻밖의 불상사나 횡재 같은 일들 말이다.
이런 일들은 예상치 못했던 것이기에 거기에 대한 준비나 기다림은 소홀할 수밖에 없고
때로는 아예 없을 수도 있다. 이럴 때는 그냥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상치 못했기 때문에, 준비할 수 없었다고 해서 들이닥치는 일들을 피해 갈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예상치 못한 일’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하지 않았을 뿐, 계획된 일이고, 분명히 올 것이다.
그리고 올 것은 ‘어떤 무엇’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바로 주님이시다.
오늘 복음의 주제도 어제 복음의 주제와 같다.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반드시 있게 될 주님의 재림에 대한 준비와 기다림에 관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잘 준비하여 기다릴 것을 거듭 강조하신다.
도둑이 예고하고 집을 털러 오지 않듯이 사람의 아들도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시간에 오실 것이기 때문이다.(39-40절)
지금 누구를 두고 하는 말씀이냐는 베드로의 질문(41절)에
예수께서는 답을 주시기보다 또 다른 비유를 말씀하신다.
비유 속에 등장하는 종은 관리인으로 지목된다.
그는 주인에게 있어서는 종의 신분이지만, 다른 종들에 대하여는 관리인의 신분이다.
관리인은 곧 주님의 교회 안에서 하느님의 백성들을 돌보고 지도하는 이들을 말한다.
이들은 교회 지도자들로서 자기에게 맡겨진 백성들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예언직, 사제직, 왕직을 수행한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말씀과 뜻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재림’이 지연된다는 빌미로 자신의 의무를 소홀히 한다면
마지막 날에 가서는 소홀히 한 만큼의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48절)
그때엔 어떠한 핑계도 변명도 소용없다.
오늘 복음의 비유가 교회공동체를 이끌어 가는 특정 신분에 대한
경고의 말씀으로 들리기도 하겠지만, 종말의 심판에 대한 준비와 기다림에 列外는 없다.
누구나 죽음을 맞이해야 하고, 누구나 재림하시는 주님을 맞이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떤 모양으로든 많이 받은 사람은 많은 것을 돌려주어야 하며,
많이 맡은 사람은 더 많은 것을 내어놓아야 한다.(48절)
우리가 맡은 만큼 내어놓아야 하는 시기를 굳이 죽음의 순간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죽음의 순간에 모든 것을 결산해야 한다면, 종말은 우리에게 공포나 두려움으로 다가오게 된다.
예수께서 재림을 이유로 우리에게 걱정이나 겁을 주시고자 하시겠는가?
그럴 리 萬無하다.
우리가 살아가는 매일의 순간이 바로 決算의 순간이다.
‘항상 준비하라.’(40절)는 말씀이 바로 그런 뜻이다.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마태 28,20)은 매 순간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신다.
그렇다면 그분을 향한 매일의 준비와 기다림은 우리 삶의 기쁨과 즐거움이 될 것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신다.
이승화 시몬 신부
율법은 법입니다.
지키면 안정을 보장받지만,
어기게 되면 벌을 받습니다.
이는 내가 한 행동에 대한 평가와 심판으로 이어지기에
법에 담긴 의미보다는
법이 주는 대가에 더 집중하게 만듭니다.
아무리 좋은 의미로 시작한 법이라도
자칫 사람을 죽이는 방식으로 악용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법이 아닌 은총 아래에 있는 사람입니다.
하느님과 맺은 관계 안에서 행복을 체험했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심판을 받을까 걱정하는 이들이 아니라
하느님과 멀어지지 않을까 걱정하는 사람들입니다.
벌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하느님을 등지게 될까 살피는 이들이기에
우리는 주인과 종의 관계이면서도
아버지와 자녀라는 가족의 관계가 더 우선 됩니다.
이는 세상을 살아가는 신앙인들에게 길을 제시합니다.
교회의 규정을 살필 때 먼저 그 의미를 알고자 하고
언제 어디서나 함께 하시는 하느님의 뜻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매를 맞을까 두려워 주인을 멀리 두는
어리석은 자녀가 될 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기에 사랑을 받기보다
우리 자체로 사랑받고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참된 행복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기억하며
오늘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고
주님 안에 머물며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하는
그런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출처 : ‘시몬 신부의 신앙 이야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