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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병태의 노동일기 2 | |||||||||
- 건설 일용직 한 달의 경험을 담은 7개의 단상과 소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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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일부터 일했으니 만 한 달 조금 넘었습니다. 그 사이 날은 더워졌고, 장마가 있었고, 이제 폭염입니다. 방진복을 입고 실내 작업을 할 때, 물에 한 번 담근 듯 흠뻑 젖는 옷도 익숙해졌고, 실외 작업에서의 땡볕과 중장비의 굉음 소리도 이젠 일상이 되었습니다. 한 줄에 25~28개씩 하루 30줄 이상의 금속판을 열었다가 덮는 작업도 처음에는 허리가 아프고 힘들더니, 이제는 할 만 합니다. 그리고 무거운 물건 운반할 때 사용하는 핸드카를 능숙하게 몰게 되었고, 볼트의 결 한 부분에 흠집이 나서 너트가 잘 돌아가지 않을 때 어떻게 하면 잘 돌아가게 할 수 있는지, 개구부나 고소 작업을 할 때 꼭 필요한 안전 줄을 맬 때 주로 사용하는, 절대 풀어지지 않고 당기면 당길수록 조이는 ‘홀치기’ 매듭을 어떻게 묶는지 등등 일에 필요한 기능들도 조금씩 늘고 있습니다. 지난 달에 일요일 한 번을 포함해서 결근을 4일 했습니다. 그런데, 1.5공수를 주는 일요일을 3번 출근했고, 지난 달 중순을 넘기면서 12번의 연장 또는 야간 작업을 연속으로 하고, 손가락을 다쳤던 마지막 날에는 2공수의 일을 해서 총 34.5 공수를 찍었습니다. (참고로 1공수는 하루 낮 노동을 지칭하는 것으로 흔히 ‘한 대가리’라고 하며 일당의 기준입니다. 연장 근무란 저녁 밥을 안 먹고 8시를 넘겨 일하는 것을 말하고, ‘야간’이란 저녁 밥 먹고 아홉시 30분까지 일하는 것입니다. 둘 다 0.5공수를 추가해 줍니다. 그리고 일요일에는 기본이 1.5공수입니다.) 제가 1공수에 7만원이니 이번 달 15일에 받는 6월달 제 월급 액수를 지금 알 수 있습니다. 30일 기준으로 하루도 안 빠지고 매일 일하고, 한 달에 20일 정도는 연장 작업을 해야 40공수를 찍을 수 있으니, 35공수도 찍기가 만만치 않습니다. 그리고 지난 달 중순부터는 파주시 00면 00리에 있는 콘테이너 가건물 노동자 합숙소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한 방에 3명이 씁니다. 그런데, 제 방 동료 둘은 술도 잘 안 마시고, 일하고 들어와서 일찍 잠들기에, 제가 유일하게 시간이 나는 밤에도 노트북 자판을 치는 것은 공동생활의 예의가 아닙니다. 이번 두 번째 일기부터는 제가 현장 생활과 숙소 생활에서 경험하고 생각한 것을 종합적으로 정리하고, 정책 대안 등등을 포함해서 제대로 한 번 써 보려고 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참고 자료도 좀 봐야 되고, 그게 아니더라도 최소한 인터넷으로 검색은 편하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노트북을 갖고 왔지만, 여기는 무선 인터넷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도 그런 방식의 체계적인 글쓰기는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대신 스마트 폰을 이용해서 매일 조금씩 일기나 간략한 칼럼 형식으로 글을 쓰고 그거 저장해 놓거나, 페이스북의 제 홈에 올려 놓는 것이 최선일 것 같습니다, 1. 비정규직의 정규직화가 아닌, 비정규직의 일반화 (110703) 내가 일하는 건설 현장의 발주처는 ‘00 디스플레이’다. 그리고 공사를 총책임지는 원청은 00건설과 요즘 영세 업체의 사업 영역마저도 잠식해 들어가서 말도 많고 탈도 많은 '000'이다. 내 안전모에도 두 회사의 이름이 다 들어가 있다. 000은 여기 공사 현장에서 많이 쓰는 산업용 랩이나 누진 비닐 등의 소모품부터 작은 볼트에서 공구류까지 거의 모든 물품을 공급하는 역할을 하는 것 같은데, 자세한 사정은 몰라서 다음에 쓰기로 하고, 이번에는 00건설과 하청 관계를 통해 생각해 본 점만 쓰기로 한다. 이 공사현장은 디스플레이 생산 장비를 설치하기 위한 공장 건물을 짓는 곳이다. 그래서 주적(主敵)이 먼지다. 건물 외부는 어느 건설 현장과 다름없이 굉음과 먼지가 가득하지만, 실내에선 먼지와의 전쟁이다. 실내로 들어가려면 상의와 하의가 일체로 된 방진복을 입어야 한다. 방진복으로 갈아입는 ‘스막룸’에 들어가려면 업체의 간부가 인원수를 파악해서 싸인을 해야 한다. 입구에 그 현황판이 있는데, 내가 주로 들어가는 스막룸에만 업체가 15개가 넘는다. 이런 스막룸이 두 개가 있으니 실내 작업을 하는 업체만 30개가 넘는 셈이다. 계단이나 건물 외벽 그리고 통유리 등등의 외장 작업을 담당하는 업체와 크레인이나 덤프 트럭, 지게차 같은 중장비를 운전 기사와 함께 보내는 업체도 아주 많다. 모두 다 00건설과 계약을 맺은 하청이다. 내가 소속된 00CRS 외에 내가 자주 접하는 업체는 똑같은 일을 하는 경쟁 업체인 해광 그리고 실내 청소를 전담하는 청조, 계단이나 엘리베이터 같은 곳을 작업 하는 엑사, 실내에서 천장 작업을 하는 신성, 페인트를 담당하는 ABC상사, 방수 처리 업무를 주로 담당하는 영평 코킹, 전기를 담당하는 두리, 전자 쪽 일을 담당하는 동방전자 등이다. ‘00’이라는 업체가 있다. 이 업체는 건물 골조 공사 후 쓰레기로 배출되는 철근이나 목재를 처리하는 일을 한다. 공사 초기에는 그런 일이 많이 있기에, 몇 달 전까지 이 업체는 수백 명의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공사가 진척되어서 그런 일의 규모가 줄어들었고, 00은 이제 수십 명 수준으로 쪼그라들었다. 그 00 사람들이 우리 업체에 여러 명 와 있다. 다른 업체로도 많이 갔다. 내가 일하는 한성은 지금이 한창이다. A/F 즉 ‘악세스 플로어’라 불리는 바닥 판 전문 회사인데, 장비가 들어오기 전까지 바닥 판을 깔고, 그 판을 지탱하는 하부의 빔 설치와 장비가 설치될 곳의 콘크리트 타설 등도 담당한다. 일본의 대지진의 영향으로 스토카, 노관기 같은 일제 장비가 늦게 들어오게 되면서, 내가 들어간 6월 초에는 연장이나 야간 작업이 거의 없었는데, 그 장비들이 설치 대기 중인 지금은 매일 밤 10시를 넘어야 퇴근한다. 그런데 우리 업체도 한 달 여 정도 지나면 핵심 인원 몇 명만 남기고 나머지 인원들은 다 정리한다고 한다. 건물 전체 공정에서 우리 업체의 역할이 마무리되기 때문이다. 이제 슬슬 ‘0 엔지니어링’ 같은 장비 설치 전문 업체가 들어오고 있다. 우리 업체 사람들 중에서도 0 엔지니어링 들어오면 거기로 옮긴다는 사람이 있고, 벌써 몇 명은 그 쪽과 접촉하고 있다. 건설 하청 업체는 일거리가 많을 때는 인력을 왕창 채용했다가, 일이 없으면 정리한다. 그런데, 내가 아는 지방의 한 기초자치단체는 최근 십 수 년 사이에 인구가 절반 이상 감소했는데, 공무원 숫자는 오히려 늘었다고 한다. 비교된다. 그리고 공무원 노조 소속 공무원들과 달리 여기 건설 현장 노동자들은 ‘해고’가 되어도 그리 저항도 하지 않고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같은 현장 내의 다른 업체로 가거나, 다른 공사판으로 간다. 해고되기 전에 좋은 조건을 찾아서 스스로 떠나는 경우도 많다. 의문을 가져본다. 내가 지금 접하고 있는 인력 이동 방식이 건설 현장 같은 특수한 상황에만 적용될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사회의 다른 영역에는 적용될 수 있고, 또 적용되어야 하는 방식인지? 20세기 후반, 일본을 중심으로 “죽을 때 까지 한 직장”이라는 슬로건이 칭송받아온 세월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영향은 지금도 강력해서 비록 저임금이라도 안정성을 보장해주는 공무원 계통에 인재들이 몰리고 있다. 9급 공무원 시험, 심지어 준공무원인 환경미화원에도 석사 박사 학위를 소지한 사람들이 몰리고 있다. 비정상적이다. 세상은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다. 그만큼 산업의 부침도 심하다. 기존 직업이 없어지기도 하고 새로 생기기도 한다. 굳이 ‘노가다’ 같은 단순 노동 현장이 아니더라도, 인력이 필요한 곳에는 교육이나 재교육 등을 통해 신속하게 공급하고, 그렇지 않은 곳에서는 정리할 수 있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그 직업의 공백 기간에 기본적인 생활이 가능하도록 실업급여가 충분히 주어져야 한다. 최고액이 한 달에 고작 100만원 넘고, 그것도 몇 달만 주는 현재의 실업 급여로는 어림없다. 그리고 네일 아트나 미장원, 컴퓨터 CAD나 중장비 등에만 머무르지 않는 다양한 재교육 프로그램이 마련되어야 한다. 그리고 평생 학습을 할 수 있는 기반과 시스템이 마련되어야 한다. 우리 사회처럼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격차가 격심할 때, (물론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이를 줄여나가는 것이 정답이겠지만) 다른 방식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막스 베스식 어법의) 이념형적 대안’은 둘이다. 하나는 다수의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반대로 대부분의 정규직을 비정규직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무엇이 바람직할까? 아니 무엇이 실현가능하며, 미래 사회의 트렌드에 맞는 방식일까? 현대 사회의 새로운 ‘신분’으로 등장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이를 극복할 수 있는 근본적인 대안을 모색해 보아야 할 시점이다. 2. 안전과 환경 - 까다로운 규제와 자의성 (110703) 우리 현장 동료들이 '안전' 그리고 '환경'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 안전은 주황색 옷을 입고 다니는 안전 요원들이고, 환경은 00칼텍스 주유소 색깔인 짙은 초록색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이다. 안전요원들은 규정대로 복장 착용을 하고 다니는지 (특히 요즘 같은 여름에는 반팔 입은 사람이 토시를 착용했는지), 핸드폰을 소지하고 있는지, 작업을 할 때 하부 통제원을 배치하고 작업하는지, 개구부 처리 등등의 안전 수칙을 지키고 작업 하는지 등등을 감시한다. 환경 요원들은 주로 작업장 및 도구들의 청결 상태를 점검한다. 먼지가 주적(主敵)인 이 사업장의 특징상, 먼지가 나지 않도록 감시하고 먼지를 제거하도록 지시한다. 그리고 면제품이나 방진지가 아닌 종이 등등 실내에 가지고 들어오지 못하는 물건들이 반입되었는지도 감시한다. 작업 후 누진 비닐 등을 덮는지 등등의 뒤처리를 점검하는 것도 이들의 역할이다. 그런데 이 사람들 권한이 막강하다. 아무리 말단 안전, 환경 요원이라도 규정 위반한 것을 발견하면, 해당 사람의 출입 카드를 회수하고 하루 또는 영구 퇴출시킬 수 있고, 해당 업체 전체의 작업을 중단시키고 30분 정도 관련 교육(=잔소리)을 시킬 수 있다. 실내 작업을 할 때는 일체형으로 된 방진복을 입는데, 신발장에 신발을 넣고, 옷걸이에 조끼를 걸어두고 ‘스막룸’이라 부르는 통제실로 들어가서 방진복을 입고 방진화를 신는다. 그런데 스막룸 안에서는 안전모를 꼭 착용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 밖에서 신발을 벗고 조끼를 벗어놓을 때, 안전모까지 무의식적으로 벗는 사람들이 있는데, 우리 업체의 반장 한 명이 그런 상태로 스막룸에 들어갔다가 입구의 안전 요원에게 걸렸다. 강압적으로 안전모 쓰라고 지시하는 요원에게 뭐라고 한 마디 불쾌한 반응을 보인 모양이다. 실내에서 작업하고 있던 우리 쪽 직원들 모두 작업 중지하고 스막룸으로 모여서 일장 연설을 들은 후 작업을 재개했고 원인을 제공한 반장은 하루 퇴출당했다. 그런데 이런 것은 짜증나도 ‘이해’라도 할 수 있지만, 누구도 지키지 못할 아주 까다로운 규정이 있다. 출입 카드를 찍고 들어오는 정문 안 즉 공사 현장에는 핸드폰을 갖고 들어올 수가 없다. 곳곳에 그런 경고문이 붙어 있다. 그런데 대다수가 핸드폰을 들고 들어온다. 부주의한 사람은 핸드폰을 꺼놓거나 진동으로 하지 않아서 벨소리가 나는 경우가 있고, 안전 요원이 곁에 있으면 그 즉시 카드 압수되고 하루 퇴출이다. 우리 업체도 그런 경우가 몇 번 있다. 아파트의 테라스처럼 생긴 공사 현장의 고층 반입구에서 양중 작업(=장비나 부품을 크레인을 이용해서 반입하고 반출하는 작업)을 할 때, 반입구 주변에 물건들이 어지럽게 쌓여 있으면 양중을 하지 못한다는 규정이 있다. 그런데 바로 전에 작업 했던 업체가 연락 체계 등이 작동하지 않아서 올려놓은 물품을 반입구 측면에 쌓아 놓을 뿐, 실내에 들여 놓을 인력이 없을 때가 있다. 그러면 그거 일단 다 치울 때 까지 안전 요원이 양중을 중지 시킬 수 있다. 반입 공간이 모자라는 것은 아니고 우리 쪽에서는 실내요원들이 도착해서 양중된 물건을 실내로 옮길 수 있는 상황이어도 그렇다. 작업 계속하게 할 것인지, 아니면 중지시킬 것인지는 안전요원 마음에 달렸다. 그런데, 크레인이라는 고가의 장비는 몇 대 되지 않는데 업체 수는 많아서 업체당 크레인 사용 시간이 한정되어 있다. 안전요원이 작업 중지 지시를 했을 때, 우리 쪽 간부 직원이 시간 내에 양중을 마치기 위해서 안전 요원에게 하는 ‘아부’와 ‘통사정’은 보기에도 딱하다. 그런 거 하기 싫어서 완장을 차지 않고 그냥 잡부로 일 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다. ‘환경’도 예외가 아니다. 무거운 물건을 이동하는데 쓰이는 핸드카의 바퀴에 먼지가 없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 그런데 아무리 실내라 할지라도 몇 번 물건 나르다 보면 그 바퀴에 먼지가 없을 수가 없다. '환경' 이 그거 지적하면 그 자리에서 멈추고 물건을 내린 후 핸드카를 뒤집어서 바퀴를 닦은 후에 운반을 재개해야 한다. 번거롭다. 환경 요원들도 먼지가 없을 수가 없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래서 어떨 때는 지적하고 어떨 때는 아무 말도 안 한다. 환경 요원 마음대로다. 모든 법이나 규정이 다 그렇듯 작업장에서도 개개의 구체적인 상황에 딱 맞는 규정을 만들어 놓을 수는 없다. 그러다 보니 어떨 때는 규정이 애매모호하고 어떨 때는 규정이 지나치게 까다로와서, 계속 규정을 어기고 작업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거 봐 주느냐 안 봐 주느냐는 감독하는 사람의 자의에 맡겨진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 규제 당국의 기업이나 자영업자 규제가 그렇지 않나? 아주 까다로운 규정을 만들어 놓고, 그거 봐 주느냐 안 주느냐가 공무원의 재량에 맡겨져 있는 경우가 많다. 마치 양중 하는 곳의 간부처럼, 기업이나 업자들이 담당 공무원에게 잘 보이려고 ‘기름칠’을 부지런히 해 놓는 것이다. 일상적으로는 사문화되었으나 문제가 되었을 때 위력을 발휘하는 대표적인 규정이 자동차 안전거리다. 시속 1Km당 1m로 알고 있다. 즉 시속 50km일 때의 안전 거리는 50m, 100km 일 때의 안전 거리는 100m다. 도로에서 늘 확인할 수 있듯이, 우리나라 운전자의 99%는 지키지 않는 규정이다. 그런데 빗길에서 앞서 가던 택시가 갑자기 섰을 때도 미처 피하지 못하고 뒤에서 추돌한 운전자가 무조건 100% 과실 책임을 진다. 안전 거리 미준수 때문이다. 내가 그 경험자다. 사문화된 규정이 위력을 발휘하는 순간이다. 건설현장에서의 불합리하거나 미흡한 규정에 대해서는 내가 일하면서 대안을 생각해 볼 생각이다. 특히 ‘안전’들이 작업의 현실과 맞지 않는 새로운 방식의 작업을 요구할 때가 있고, 그래서 팀장과 언쟁을 벌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것에 관해서는 나중에 쓰기로 하고, 우리나라 정책 당국도 규정이 너무 까다로와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키지 못하는 해 놓고선, 그 규정의 수범자에게 적용할 것인지 말 것인지는 해당 공무원의 재량에 맡겨 두는 그런 규정이 없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3. ‘기름칠’ (110703) 내 신분증을 발급하는 내가 정식으로 소속된 업체는 00CRS다. 그런 00에 인력을 공급하는 업체가 둘 있는데 PW와 SU다. 나는 PW 소속인데, 매일 70명 정도가 00 소속으로 아침 조회를 하면, PW는 45~50명, SU는 25에서 30명이다. 그런데 PW나 SU나 맡은 일의 양은 그리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래서 긴급한 경우는 우리 업체인 PW 사람들이 SU 일마저도 할 때가 있다. 콘트리트 타설이 잘 되었는지, 그리고 깨끗하게 뒷처리가 되었는지를 검수하러 나온 00 본사 직원은 SU가 잘 못 해 놓아도 한성 전체에게 책임을 묻는다. PW 소속인 우리도 검수를 받지 못하면 그 다음 공사를 진행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나도 SU가 해 놓은 일의 뒷처리를 도와준 적이 있다.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다른 업체 일을 하는 PW 직원들은 불만이 많다. 그리고 한성 본사 직원들이 유독 SU쪽 팀장보다는 우리 쪽 팀장이나 작업 책임자를 더 심하게 다그친다는 인상을 나도 받고 있다. 00 건설 측에서 하청 업체에게 공사 대금을 주는 방식이 ‘인부’를 얼마 채용했다고 그 인원수에 따라서 주지를 않는다. 액세스 플로어 판 하나 까는데 6,000원, 스틸판 하나 당 2만원, 제진대 설치 하나에 200만원 등등 일의 성과에 따라 지급한다. 한성 내에서 SU가 우리보다 일감이 조금 적어보이지만, 그리 현격하게 차이가 나지는 않는데, 왜 우리 업체인 PW보다 인력을 적게 운영하는지를 정확하게는 모른다. 물론 인력을 적게 쓰면서 많은 일을 하면 그만큼 그 업체는 이익이 많아진다. SU 사장이 3명 몫의 일을 솔선수범 하면서, 소수 정예를 거느리고 있어서 그렇다는 말도 있다. 나도 SU 사장이 적어도 4명 정도가 한 나절을 일해야 하는 더러워진 반입구 앞 청소를 직원 한 명과 대동하고 먼지 뒤집어 써 가면서 깨끗하게 해 놓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런데, 동료들이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SU 사장이 ‘기름칠’을 잘 한다고 한다. SU 사장은 나이가 많아 봤자 40대 초반인 남자고, 우리 쪽 PW는 50대 중 후반의 여사장이다. 전원이 남자인 상급 회사의 젊은 직원들과 술을 먹거나, 시간을 보낼 때 SU 사장이 유리해 보인다. 그리고 또 동료들의 말을 들어보면 PW 사장은 아주 높은 ‘윗대가리’들한테는 ‘봉투’도 건네곤 하는데, 현장에서 일하는 주임이나 대리급들에게는 안 한다고 한다. 그 피해를 자기보다 한창 어린 한성의 말단 대리에게도 반말로 잔소리를 들어야 하는 우리 팀장이 보고 있고, 또 우리가 보고 있다. 내 동료들은 우리 쪽에서 피해를 본다는 것 말고는, 별다른 평가 없이 그런 사실(=설?)을 전한다. 오히려 우리 사장도 한성의 주임이나 대리 같은 사람들에게 기름칠을 잘 해야 우리가 편하다는 의견을 덧붙인다. 텔레비전에서 공무원이 몇 억을 먹었다는 뉴스가 나올 때, 내 동료들이 어떤 생각을 할 지 난 궁금하다. 건설 현장에서는 내가 지금 전하는 것과 같은 방식의 ‘기름칠’이 일반화되어 있는 모양인데, 텔레비에 나오는 공무원은 먹은 돈의 액수가 커서 분노할까? 아니면 우리 사회 대부분의 영역이 그렇다고 짐작하고선 으레 그러려니 하고 있을까? 그런 주제의 얘기는 내가 가급적 안 하려고 하고, 동료들도 TV를 보더라도 스포츠나 드라마 같은 것만 보기에, 화제 자체가 되지 않고 있지만, 작은 기름칠 또는 자기 영역의 기름칠에는 둔감하거나 호의적인 사람들이 큰 기름칠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할지가 궁금하다. ‘기름칠’ 관행이 우리 사회에 어느 정도로 퍼져 있는지....또 그것이 완전 근절의 대상인지, 우리네 일상 속에서 완전 뿌리 뽑을 수는 없되, 도를 지나친 부분만 때때로 엄벌해야 하는 것인지 생각하게 된다. 앞으로도 ‘완전하게 뿌리 뽑자’는 말을 공적(公的)으로는 해야 할 테지만, ‘현실’ 차원에서 말이다. 4. ‘노가다’ 성공 비법 - 전문 영역과 인간관계 능력 (110703) 58세 되시는 숙소 큰 형님과의 대화를 통해 우리 업체 노동자들의 일당을 정확하게 알게 되었다. 신참 7만원, 고참 9만원, 반장 11만원, 팀장 13만원이다. 난 물론 7만원이다. 고참이란 이 현장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노가다를 오래 해서 일을 잘 한다는 느낌을 주는 사람들인데, 전문가가 면접 하면서 몇 마디 나눠보면 대체로는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5명 정도의 전문 노가다 팀을 구성해서 단체로 일당 협상하는 사람들이 대체로 그 정도를 받는다. 반장은 적게는 2명, 많게는 5명 정도를 책임지면서 특정한 작업을 주도하는 사람들이다. 그 중에는 핸드폰 사용이 허가되는 완장을 찬 사람들이 많다. 팀장은 50명 정도를 총괄하면서 작업 배분을 하는 사람이다. (‘노가다’라는 용어가 일본식이라는 것은 알고 있으나, 현장에서는 일반화되어 있어서 문맥상 필요할 때는 막노동이랄지 건설일용직 노동 같은 표현을 쓰지 않고 ‘노가다’라고 씁니다.) 노가다에서 '성공'하려면 사회의 다른 부분과 마찬가지로 우선 자신만의 전문 영역이 있어야 한다. 오늘은 이 일 했다가, 내일은 저 일을 했다가 하면 안 된다.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해서, 전체 작업 과정에서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반장들이 대체로 그런 사람들이다. 어떤 사람은 동선 보강 전문, 어떤 사람은 천공 전문, 어떤 사람은 양중 전문 등등. 그런 사람들은 그 분야의 기술도 기술이려니와 전체 작업에서 오늘 작업하는 것이 차지하는 위치와 내일 해야 할 일을 위해 어떤 준비가 필요한지를 알고 있다. 그리고 해당 분야와 관계된 상급 업체의 사원들이나 발주처 사람들도 잘 알고 있고, 그 작업 환경과 주변 상황에 익숙하기에 급한 일이 닥쳤을 때 임기응변을 할 수 있다. 양중을 오래 한 사람은 양중에서 갑자기 받침목이 필요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어디에 가면 그것을 가장 빨리 구할 수 있는지를 안다. 그리고 또 다른 성공 요인은 인맥이다. 쉬는 시간이나 퇴근 후 등의 시간에 자신에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사람과 일상의 대화를 자주 나누어야 한다. 일 얘기뿐만 아니라, 시시껄렁한 농담 같은 것도 하면서, 인간적으로 친해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9만원의 숙련공은 될 수 있어도, 11만원을 받는 반장은 결코 될 수 없다. 내가 본 사람 중에서 일을 가장 잘 하는 SG는 그 어떤 일을 맡겨도 해당 분야 반장들보다 잘 한다. 원래 오랜 기간 설비 일을 했었고, 다른 현장에서도 오래 일했었다. 이 현장의 다른 업체에서 일한 경험도 있다. 그래서 맨날 여기저기로 불려 다닌다. 콘크리트 타설이나, 제진대 설치 등등의 가장 어려운 일을 주도적으로 한다. 그러나 사교성이 없고, 말을 잘 못한다. 이런 사람들은 이런 저런 일을 맡으면서 혹사를 당하면서도, 9만원짜리 숙련공으로 머무른다. 결국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이 일은 SG보다 못하는 것이 분명한데, 팀장과 친하고 같은 지역 출신이라는 이유로 반장으로 승진한 후, SG는 이 업체에서 나갔다. 전문성과 인간관계 풀어내는 능력이 중요하다는 것, 이건 다른 곳에서 뿐만 아니라 노가다 현장에서도 적용되고 있었다.
영화 "식객"에는 라면을 제일 맛있게 먹는 비법이 나온다. 바로 배고플 때, 특히 군대에서 훈련을 받든, 작업을 하든 고생하고 배 고플 때 먹는 라면, 꿀맛이다. 나도 유경험자다. 건설 현장 일을 하면 옴 몸이 땀과 먼지 범벅이 된다. 속옷은 헝건히 젖고, 머리는 하루 종일 안전모에 눌려 떡져 있고, 손은 끈적거린다. 이럴 때, 집이나 숙소로 돌아와서 하는 샤워.... 이것 또한 꿀맛이다. 하루 동안 제일 기쁜 시간이 샤워하는 시간이다. 이 일 하기 전에는 안 그랬다. 사실 저녁에는 샤워를 잘 하지도 않았다. 발과 얼굴만 대충 씻고 잤었다. 그러나 요즘은 안 하면 안 된다. 그리고 그 샤워의 느낌과 기분이 전(前)과는 아주 많이 다르다. 배 고플 때의 라면과 땀과 먼지로 범벅이 되었을 때의 샤워... 나는 2000년 2월, S 대학신문사 재직 시절 '세미나 여행'이란 이름으로 중국을 다녀온 것이 해외 여행 경험의 전부다. 그래서 프라하도 가고 싶고, 콜카타도 가고 싶고, 남미의 리우도 가고 싶다. 그리고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의 여정을 따라 순례도 하고 싶다. 그런데, 업무로 또는 시간 경제적 여유가 많아서 해외여행을 자주 가는 사람은 나만큼 해외 여행이 설레고 행복하지는 않을 거다. 아무리 좋은 옷을 입고, 옷을 것을 먹고, 좋은 것을 보더라도 그것이 '일상' 되어버리면, 그 기쁨은 줄어들 것이다. 나는 그런 면에서 부족한 것이 많기에 앞으로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고, 그런 기대와 설레임 때문에 지금 행복한 사람이다. 돈이 없기에, 돈을 벌고 또 그 돈을 모을 때 행복할 것이고, 집이 없기에 몇 년 또는 십여년 후, 집을 가졌을 때 행복할 것이고, '나만의 여인'이 없기에, 그 사람이 누굴까 기대하며 설레고 행복하다. 그리고.... 고단한 하루 일을 끝낸 후 집에 돌아와서, 샤워하고, 속옷만 입고, 선풍기 튼 채로, 페이스북 '친구'들의 댓글에 답변을 다는 지금, 나는 행복하다.
내 아버님은 경상북도 안동의 빈농 출신이다. 남자만 4형제인데,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셋째인 아버지가 집안 일을 담당했다. 다른 형제들은 초등학교라도 나왔는데, 아버지는 동네 친구들이 학교 가는 모습을 들에서 일을 하거나, 쇠꼴을 베면서 지켜보셨다. (이 때의 한(恨)이 가슴 속에 사무쳐 있고, 내 어린 시절 술 드시면 터져나왔다.) 어머님과 결혼하고 나보다 2살 어린 내 동생이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한창 개발 중인 울산으로 오셨다. 울산 석유화학 공단 근처의 부두 노동자촌에 살면서 막노동을 하셨다. 첫번째로 일 나간 곳이 울산대학교 건설현장이었다고 한다. 집에서 거리가 꽤 되는데 걸어서 출퇴근 하셨다고.... 어머님도 내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미역캐기, 떡장사 같은 것을 하셨고,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현재 LG화학의 전신인 '주식회사 럭키'의 생산직 노동자 생활을 하셨다. 두 분 다 한 달에 한 번 채 쉴까 말까 열심히 일하셔서 동생들과 나는 어린 시절 엄마 아빠와 같이 놀아 본 기억이 전무하다.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그 당시 돈 430만원으로 이웃 마을에 집을 사서 셋방살이를 면하기 이전까지, 내가 살던 부두 노동자 촌에서는 겨울에 술에 취해서 길모퉁이에서 얼어 죽은 사람도 있었다. 그 당시 여느 부두노동자 촌과 다름 없이 하루가 멀다하고 동네에서는 부부싸움이 났고, 우리 집도 예외가 아니었다. 어릴 때는 아버지가 싫었다. 초등 4학년 때, 집에 텔레비가 생겼는데, 일일연속극이나 주말드라마에 나오는 서울의 다른 아버지는 다정다감하기도 하고, 용돈 같은 것도 주고 그러는데, 아버지는 큰 소리만 지르고 용돈은 꿈도 못 꾸고, 어머님과 부부 싸움을 할 때, 비오는 날 동생들과 남의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다가 잠잠해진 다음에 들어간 적도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술을 먹고 들어와서 집안을 뒤집어 놓고, 난리를 쳐도 새벽 5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막노동을 나가셨다. 다쳐서 일을 못 나갈 때 말고는 40년 세월동안 한 번도 예외가 없었다. 단 한 번도... 대학 들어가서 '민중', '노동자가 주인 되는...' 같은 말에 익숙해지면서 아버지의 삶을 이해하고, 그 이후로 아버지와 친해지고, 같이 긴 시간 둘이서 술 마신 적도 많지만, 그건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었고, 건설현장 노동자 생활을 하고 있는 요즘에야 '몸'으로 아버지의 삶을 느끼고 이해하고 있다. 아버지가 일을 하면서 얼마나 몸이 힘드셨는지... 되지도 않는 어린 놈들에게 무시당하고 이런저런 지적을 받을 때, 그걸 얼마나 참고 일하셨는지.... 그래서 '못난' 행동이지만 술을 먹고 집에서 그걸 풀 수 밖에는 없으셨는지....그리고 왜 그렇게 자식들과 살갑게 놀면서 보내는 시간보다 일하면서 보내셨는지... 하루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몸이 파김치가 된다. 내가 있는 숙소에선 대부분의 방이 밤 10시가 되지 않아서 불이 꺼지듯, 예전의 우리 집도 부모님 방의 불은 일찍 꺼졌다. 내 아버지처럼 나도 아침 5시 50분이면 어김없이 숙소에서 일터로 간다. 오전에 일하면서 누적된 피로 때문에 조퇴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다가도, 오후에 몇 시간만 더 일하면 3만5천원을 더 벌 수 있다는 생각에 점심 먹고 또 일을 하고, 저녁에 연장이나 야간 작업이 있으면 또 조금만 더 일하면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해 야간까지 일한다. 내가 조금만 더 일하면 돈이 더 생길 테고, 그걸로 아이 엄마에게 양육비도 부칠 수 있고, 딸의 핸드폰을 스마트폰으로 바꿔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마 내 아버지가 비슷한 마음이셨을거다. 그런데 나는 또 내 아버지와 다르다. 업체 글씨가 선명한 조끼를 입고 안전모에 눌려 ‘떡진’ 머리 그대로 당당하게 파주 프로방스 마을의 근사한 카페에서 책을 보기도 하고, 헤이리 예술인 마을도 다녀온다. 숙소의 내 동료들 중에서 이러는 사람은 나 말고는 없다. 아버지는 평생 영화관을 두 번 다녀오셨다. 첫번째는 2006년, 내가 이혼 후 국회를 다니고 아버지가 서울에 올라오셔서 아이들을 돌봐주고 있을 때, 내 손에 이끌려서 '웰컴 투 동막골'을 같이 봤고, 두번째는 2009년 어머님과 같이 보여드린 '워낭소리'다. 한 번은 커피숍에 아버님을 모시고 갔는데, 어색해 하시던 기억이 지금도 난다. 우리 사회에 지금도 상당수 있는, 그리 많이 못 배웠지만 몸을 쓰면서 성실하게 일하는 분들이 저녁 시간이면 아이들과 놀이공원도 가고, 주말에는 가까운 곳으로 여행도 가고, 쉬는 날 내 아버지처럼 집안에 시멘트를 바르거나 뭘 고치는 것만이 아니라, 책도 보고 혼자 영화관도 가는 그런 세상을 만들 수는 없을까? 내가 숙소에서 몇 군데 방을 가 봤지만 책이 없다. 일과 후에는 술을 마시거나 드물게나마 ‘여자 나오는 곳’에 가서 목돈을 쓰고 온다. 다른 여가 활동에는 익숙하지 않아서 그럴 거다. 그런 거 말고는 "습관"처럼 해 본 일이 없어서 그럴 거다. 나는 막노동하기 전에 학교도 오래 다녔고, 전시회도 자주 가고 음악회도 자주 가고 해서 그것이 익숙해져 있다. 그런데, 한 두 번 남의 손에 이끌려 음악회를 가고, 미술 전시회를 간다고 하더라도 그거 익숙해지지 않으면 혼자서는 하지 않는다. 아무리 텔레비전에서 무료 전시회가 있다고 광고를 해도 그게 익숙하지 않으면 귀에 들어오지도 않을 거다. 나는 일요일에 전체 휴무를 하고, 숙소 노동자들과 축구를 했으면 좋겠다. 그런데 불가능하다. 여든 넘은 중풍 걸린 아버지를 모시고 있어서 장가도 가지 못한 S형은 한 달에 한 번 쉴까말까 한다. 그런 분들은 '강제로' 쉬게 하지 않으면 일요일에도 일을 나간다. 내가 지난 달에 결근을 며칠 하지 않고 일요일 포함 10여일 연속으로 연장과 야간 작업을 해도 받는 돈은 200만원을 조금 넘기 때문이다. 내 아버지 같은 분들이 주말에는 쉴 수 있는 경제적 조건을 갖추어주고, 또 '강제로' 쉬게 하고, 또 사회적 분위기나 시스템의 어떤 부분에서 막노동 하는 분들도 우리 사회가 달성해 놓은 문화적 성취를 향유할 수 있는 "습관"을 만들어 줄 수 있어야 한다. 건설 '일용직' 노동자들은, 요즘 국민들은 안중에도 없는 검사 집단이나, 약사 협회처럼 자기들 이익을 대변해 줄 집단도 없다. 그게 대기업 강성노조든 전경련이든 강력한 이익집단의 구성원들은 그들이 사회에 기여한 노동의 질과 양보다 더 많은 것을 챙긴다. 진보정당들도 조직노동자들의 이해에 기반 해 있지, 일당 7만원 일용직 노동자들의 삶에는 주목하지 못하고 있다. 아버지는 내가 딸과 아들에게 살갑게 대하고, 애틋하게 대하는 것을 보고 영향을 받으셨는지 요즘은 "사랑한다" 같은 말도 어색하게나마 하신다. 그리고 평생 노동하면서 성실하게 살아온 분의 지혜를 갖고 계셔서 대화를 나누면 내가 얻는 것이 많이 있다. 그래도 나는 다른 누군가가 내 아버지처럼 우리 사회가 도달한 평균적 문화적 향수를 누리지 못하고 한 평생을 뼈 빠지게 일하면서 보낸 후에 지혜를 갖추고 그러는 거, 바라지 않는다. 어제 통화할 때 들어보니, 아버지는 다리를 다치셔서 일을 못 나간다고 하신다. 아들인 나는 지금 손가락을 다쳤다. 아버지는 집에 누워계시고, 나는 지금 병원을 다녀온 후 혼자만의 1박 2일 ‘충전’ 여행을 다녀오려고 한다. 닮았으면서 또 다른 아버지와 아들이다. 7. 늦잠으로 출근하지 못한 아침의 단상 - 담백하게 현재의 생활에 집중하자. (110704) 한 달 전 건설 현장 생활을 시작할 때는 '경험' 차원으로 생각했었다. 몸 쓰는 일을 해 보지 않아서 이 경험이 내 생각을 풍부하게 해 주고, 내가 보고 느낀 것을 사회에 전달하는 것에 의미를 찾으려 했었다. 그리고 1년여 짧은 기간에 몇 가지 분야를 집중적으로 경험하고, 떠나기 전의 내 영역으로 복귀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그런 마음이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 즉 외부인의 자세일지로 모른다는 우려를 해 본다. 내 현장 생활이 '체험 삶의 현장'의 조금 긴 버전에 불과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대부분의 내 동료들과는 다른 학력과 인적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다. 이 둘을 지워야 한다는 생각을 해 본다. 이 둘을 지우면 나는 내 동료들과 다를 것 하나 없는 그냥 일용직 노동자다. 21세기 지식사회, 정보화 사회는 몸 쓰면서
그러나, 집안이 애초부터 어려워 기회를 충분히 가지지 못했건, 인생을 살다가 공적으로 심한 실패를 했건, 아니면 나처럼 사적인 실패의 영향으로 공백을 가져서 사회생활이 단절이 되었건, 자신의 '전문' 영역을 갖추지 못하고 몸 하나에 의지해서 사는 분들은 세상이 끝나는 순간까지 존재할 것이다. 그들이 대다수는 아니고, 세상을 이끄는 견인차가 아닐지라도 늘 우리 사회의 상당수는 그런 분들 일거다. 신체가 애초부처 불편하거나, 지력 등에서 유전적 결함을 갖고 태어난 분들은 원초적인 복지의 대상이라서 논외로 한다면, 자기 몸뚱이 하나로 먹고 살고 자기 몸뚱이 하나로 노동하며 누군가를 책임져야 하는 사람들은 우리 사회의 가장 '하층'을 구성할 것이다. 신라시대에도 그러했듯이 지금도 그러하고, 앞으로도 계속……. 쉬는 날 가끔이나마 만나는 분들, 그리고 연락되는 분들이 내게 '전문영역'을 가지라는 말을 많이 한다. 어제 만난 분들도 디자인 분야 십 수 년, 문화계 십 수 년의 외국 박사, 인쇄업 사반세기 이상, 학원 20년 이상 등등 다들 한 분야에 전문가들이다. 각자의 고유한 분야에서 일을 하고 돈을 벌고 누군가를 책임지고 또 사회에 이바지 하는 분들이다. 나도 지금까지 살면서 해 왔던 분야, 아니면 나의 자질을 보고 제안이 들어온 몇 가지 분야에서 지금 뛰어들어 열심히 하면,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다시 학계로 돌아가든, 선거 및 정책 전문가가 되든, 학원 논술 강사가 되건, 아니면 내 외향적 성격에 맞는 중견 기업 영업직이 되건……. 그러나... 퇴로를 생각하고 전투에 뛰어들면 달아날 궁리만 하듯, 돌아갈 곳을 염두에 두고 '현장'에 있으면 일에 임하는 자세가 신실하지 못하게 된다. 인생을 예측할 수도 없고, 지금의 '단상'을 끝까지 지켜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나의 학력과 인적인 네트워크와 그동안 (유형적인 것은 없기에) 무형적으로 쌓아둔 모든 것을 접어두고, 퇴로를 차단한 채, 마흔네 살의 가진 것 없는 몸 쓰는 사람으로서 세상과 맞딱뜨려보고 싶다. 일 년 정도 이 생활을 하고 다시 연구소나 선거 캠프나 대학으로 돌아가서 경험을 자산으로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그것보다는 몇 배 긴, 아니면 노년 또는 초로의 단계까지 하는 것이 어떤지 생각해 보고 있다. 어떤 선입견이나 편견 없이, 또 누구의 편도 들지 않고, 있는 그대로 내가 접한 바닥 또는 하층의 삶을 경험하고 전하는 역할을 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외부 관찰자가 아니라, 스스로 그 일부가 되어야 한다. 바닥이자 하층이 되어야 한다. 물론 내 스스로 나의 과거 축적물들을 내 전문 영역을 가지기 위해 지금부터 활용하지는 않더라도, 대부분의 내 현장 동료들에게서는 발견할 수 없는 '구조적 인식'이랄지 '정책적 고민' 이랄지 그걸 '표현하는 능력' 같은 것들은 지울래야 지울 수도 없고, 지우고 싶지도 않다. 생각을 계속하고 표현을 계속할 것이다. 그리고 틈만 나면 책을 보고, 쉬는 날 전문인이 된 (또는 되어가는) 지인들을 만나서 토론하고, 온라인으로 '친구'들과 교류하고 하는 것도 멈추지는 않을 것이다. 그게 내가 지우려고 하는 부분과 양립 불가능한 것은 아닐 게다. 세상은 변화하고 막노동 현장, 길거리 좌판의 현실도 1년 후가 다르고, 또 5년 후에는 훌쩍 달라질 수도 있다. 그러면 달라진 모습 그대로 전하면 된다. 쌍끌이 저인망 어선을 타든, 택시 기사가 되든 직업 간의 공백 기간에는 다시 단순 노동의 대표적 직종인 건설 현장으로 며칠이나마 복귀할 생각을 해 본다. 페이스북도 같은 개인 홈페이지도 좋은 통로가 되지만, 내게는 고맙게도 연구소라는 좋은 창구가 있다. 연구소 그 자체 내에서 입지를 확보하려면 그 곳으로 출근하고, 거기서 계획되었든 우연이든 만나는 사람들과의 인맥을 쌓아야 '전문가'가 될 수 있다. 객원연구원이라는 신분을 갖고 있지만, 나는 이제 외부인이 되어 버렸다. 연구소의 일상을 모르고, 실무에 도움도 못 주고 있다. 그래도 내가 전하는 현장 소식을 우리 사회에 가장 유용하게 활용해 줄 수 있는 좋은 인연을 갖고 있다는 것은 내겐 축복이다. 뭐든 새롭게 시작할 때는 설렘이 있고, 그 새로움으로 인해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한다. 그리고 나는 뭐든 처음에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임하는 터라, 지난 한 달은 몸은 힘들고 작은 상처도 많이 났지만, 행복한 한 달이었다. 손가락에 상처가 나서 며칠 쉬는 동안 으레 그렇듯, "내가 왜 이걸 하고 있지?" 같은 생각도 밀려오고, 첫 출근의 들뜸이 사라진 자리엔 일용직 노동자로서의 일상이 내게 남아 있다. 오래 가기 위해서는 새롭게 의지를 다져야 한다. 사회도 그렇듯 개인도 늘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런 다짐과 맥락이 닿지 않는, 좀 뜬금없는 얘기인지도 모르지만, 내 감성과 생각을 많이 차지하는 영역인 '외로움'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제 3번의 만남에서 4분을 뵈었는데, 처음 만난 분은 미혼 여성분이었다. 밝게 인사하고, 대화는 주욱 이어졌고, 밝게 헤어졌지만, 내가 일말의 기대를 안고 갔던 것은 스스로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고 왔다. 나는 과거가 있고, 무일푼이며, 앞으로의 인생도 대부분의 여성들이 좋아하는 그런 삶을 보장해 주지는 못한다. 상대편이 그런 면에 신경 쓰지 않더라도, 내 스스로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이 문제고 그 기반이 되는 현실은 상당기간 변함없다. '외로움'을 지워버리고, '평생을 같이 할 단 한 사람'을 지금 당장 만나고 싶은 욕구를 지워야 한다. 아니, 욕구는 가슴 저편에 갖고 있더라도 내가 시간을 내서 노력하는 것은 멈춰야 한다. 그저, 운명처럼 언젠가는 '나의 복잡함, 나의 다양한 관심사, 나의 (어쩌면) 큰 꿈, 나의 과거, 무능력이든 선택이든 결과적인 가난' 이 모든 것을 이해해주는 사람이 나타날지도 모른다. 서두르지 말고, 그냥 현실을 견디자. 밥을 혼자 먹는 것도 서러워말고, 단추 떨어진 것도 스스로 즐겁게 꿰매고, 술 먹고 늦게 들어온 날의 사무치는 외로움도 견디자. 그러다 그런 분을 평생 만나지 못하면 그 또한 어떠하리. 그 부분을 채우기 위해 쓰는 노력을 다른 곳으로 돌려 더 의미 있는 일을 하면 될 것이다. 담배..... 요걸 생각해 본다. 끊겠다고 지금 당장 말하지는 못하지만,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다. 몸이 축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부모님과 아이들.... 내가 경제적 영역에선 포기했다고 하지만 월급을 타면 작은 돈이라도 부칠 것이고, 정(情)으로 마음으로 잘 해 드리고 싶다. 동생들에게도 마찬가지다. 갑자기 목돈이 드는 큰 사고나 질병 등등을 미리 염두에 두고 지금부터 그걸 준비하기 위해 돈만을 위해 어떤 일을 하는 것은 하고 싶지 않다. 만에 하나 그런 상황이 닥치면 또 그 때 현실에 맞게 행동하면 된다. 이 부분도 이렇게 정리하자. 문재인의 "운명"을 읽으면서, 정치인이나 정책결정자로서의 문재인이 얼마나 유능한 사람인지는 판단이 서지 않지만, 인간적으로는 훌륭한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담백하다. 잔수를 쓰지 않고 우직하다. 배우자. 어젯밤 서울나들이를 갔다 와서 책 "한국경제의 미필적 고의"를 읽다가 잠이 들었는데, 일어난 시각이 6시 10분이다. 적어도 5시 30분에 차에 올라야지 오늘 현장 일을 할 수 있었다. 알람을 듣지 못할 정도로 깊이 잠이 든 것이다. 6월 하순부터의 10여일 이어진 연속된 연장과 야간작업의 여파가 이렇게 며칠을 가리라곤 예상을 못했다. 난 아직 멀었다. 몸 쓰면서 일하리라 마음먹은 놈이 내 아버지는 40년 동안 한 번도 어기지 않는 출근을 나는 한 달 만에 늦잠으로 날려버렸다. 내게 지금 부족한 것은 '나만의 한 사람'도, 현실에 맞는 정책 비전 고민도 아닌, 이 생활을 계속 해 나갈 수 있는 단련된 몸과 의지다. 담백하자. 잔 가지들을 쳐 버리자. 거기에 집중하자. [사회디자인연구소에서 옮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