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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회 이야기 1
‘비교성장론’ 뒤에 나의 마음은 영국 선생님과 한국 선생님들 이야기로 흘러갔습니다. 요즘 여러 일 관계로 런던에 있는 친구 Jim Hoare와 연락이 잦아 영국 소식을 자주 듣게 되고, 집에서는 Classica, Mezzo, Arte 등 음악채널을 틀어두면서 일을 하는데, 또 최근엔 외우(畏友) 김동현군의 사위 김광훈씨의 바이올린 독주회를 예술의 전당으로 보러가게 되고.... 이 모든 것이 겹쳐 나의 마음은 유학시절에 경험했던 음악관련 편린들로 흘러갑니다.
1973년 유학 간 후 처음으로 본 것은 뮤지컬 <왕과 나>이었습니다. 영화에서는 율 브리너(Yul Brynner)와 데보라 커(Deborah Kerr)가 주연으로 나오지만 뮤지컬에서는 데보라 커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런던 아델피 극장(Adelphi Theatre)이었죠. 태국 왕비 역으로 한국인 배우가 나온다고 한국 대사관에서 표를 주더군요. 한국인 연주가가 오면 한국 홍보에 열을 올리던 대사관이 좋은 좌석을 구입하여 나누어 주곤 했습니다. 학생인 나로서는 황감(?)했지요. 율 브리너에 대해서는 건국대 신복룡 교수님이 글방에 올린 글이 있습니다. 할머니가 몽골계라 브리너는 아시아적 골상을 보이지요. 율 브리너의 할아버지가 이르쿠츠크의 원주민인 부리야트(Buryat) 족 처녀와 결혼했습니다. 구한말 외세의 침탈 중 러시아가 차지한 압록강, 두만강 유역, 그리고 울릉도 채벌권을 그의 할아버지가 갖게 되었고 아버지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목재 수출을 했다는 것, 그래서 율 브리너는 한국에서 번 돈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공부를 했으니 한국장학금을 받은 셈이라는 이야기 등입니다. 지금 블라디보스토크 그의 생가에는 ‘왕과 나’에서 보여주는 율 브리너 특유의 거만한 모습을 한 동상과 플라크가 남아 있습니다.
<왕과 나>에서는 태국 왕 율 브리너와 가정교사 역이 압도적이라 왕비의 역할은 별로 눈에 띄지 않습니다. 하렘의 우두머리 정도입니다. 아무리 찾아 보다도 1973-74 <왕과 나> 혹은 율 브리너의 런던 공연과 관련하여 한국인 가수에 관한 정보가 없군요. 위키에서 왕비가 아니라 버마에서 잡혀 온 첩실 툽틴(Tuptim) 역로 네덜란드 태생 한국인 전나영(Na-Young Jeon)을 언급하고 있는데 연배로 보아 한참 후인 것 같습니다. 이 뮤지컬을 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대사관에서 또 표를 보내왔습니다. 왕비 역을 맡은 이 분이 템스 강변에 있는 로열 페스티발 홀의 엘리자베스 홀에서 리사이틀을 한다는 겁니다. 로열 페스티발 홀이 서울의 세종문화 회관이라면 엘리자베스 홀은 객석이 200여석 정도인 소공연장에 해당합니다. 이 가수가 잘 알려진 분인지 아니면 대사관의 노력 덕분인지는 객석은 가득 찼습니다. 율 브리너도 나타나더군요. 그리곤 중앙 제일 앞좌석이 앉는 겁니다. 겨울이라 대부분이 우중충한 옷을 입었는데 그는 새하얀 슈트 차림이었으니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었지요.
그런데 영국관객은 아무도 그에게 눈길을 주지 않는 겁니다. <왕과 나> 공연 극장에서는 관객들이 그에게 마친 듯이 박수를 보내고 앙코르를 외쳤는데 여기서는 모두 무심히 대하더군요. 가까이 가서 아는 척 하거나 사인을 받으려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노래가 하나 끝나면 다른 관객들은 그냥 평범하게 박수를 치는데 브리너는 ‘브라보’를 외치며 박수를 유도하더군요. 공연 막간(Intermission) 커피를 마시기 위해 줄을 서 있는데 브리너도 뒤에서 차례를 기다리더군요. 이때도 영국관객들은 그에게 무관심했습니다. 공연을 마치자 그는 벌떡 일어나서 ‘브라보’, ‘앙코르’를 외치지만 ‘너나 잘 해봐라’는 반응이었습니다. 이게 뭘까요? 율 브리너를 몰라서 일까요? 그가 미워서 일까요? 아닐 겁니다. 그가 주인공으로 무대에서 공연할 때는 열렬한 반응을 보이지만 오늘은 당신도 우리와 같은 관객의 하나로 여기 온 것이고, 우리는 당신의 사생활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가까운 영국 친구가 길가에서 마주쳤는데 내가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고 있으니 눈만으로 아는 척하고 그냥 지나가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게 50년 전 이야기인데 지금은 변했을까요? 스타가 나타나면 시도 때도 없이 몰려가 둘러싸고, 아침부터 집 앞에서 기다리면서 사인을 받으려는 지금 한국의 세태와는 분명히 다르죠. 아니면 록페스티벌과 같은 대중공연에서는 다르게 반응할까요? 하여튼 공연문화에서 받은 첫 충격이었습니다.
그 다음은 ‘정 트리오’로 알려진 정명화, 정경화, 정명훈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명화가 맏이고 경화, 명훈 순이죠. 경화씨는 영국인 사업가와 결혼하여 런던에서 잘 살고 있다는 줄 알고 있었는데 이혼한 것 같군요. 우리는 정경화씨 연주회에 몇 번 갔습니다. 무대에 서는 여자 배우나 연주가는 결혼 여부에 관계없이 프랑스에서는 Madame, 영국에서는 Miss로 부른다고 한 여자 피아니스트가 일러주더군요. 우리말로 번역하면 Madame은 기혼녀이고 Miss는 미혼녀인 ‘양(孃)’인데 이런 게 무시되는 것도 문화적 전통이겠지요. 최근에는 이런 호칭이 성차별이고 여성의 결혼여부 등 신상정보를 노출시킨다고 해서 그 사용에 반대하는 여성들이 늘어난다고 합니다. Miss 대신 Mz로 쓰는 것도 유사합니다. 정경화 연주회는 여러 번 갔지만 우리는 직접 표를 사지는 않았습니다. 그의 연주를 낮게 평가해서가 아닙니다. 이곳이 아니면 볼 수 없는 연주가 얼마나 많은데, 그리고 한국인 연주는 앞으로 서울에서도 볼 기회가 충분히 있을 것인데 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그렇지 않았지요. 서울에 오니 외국에서 이름을 날린 한국인 연주가들의 표 값이 엄청나게 비싸서 갈 엄두를 내지 못하겠더군요. 런던에서는 학생신분으로도 충분히 살 수 있는 표가 서울에서는 수십만 원씩 하니 어떻게 가겠습니까? 그것도 S석이나 A석이 아니고는 현기증이 날 정도로 높아서 올라가기도 힘들고 보기도 힘들지요.
이야기가 엉뚱한 곳으로 흘렀습니다. 정경화씨의 연주를 로열 콘서트에서 보았습니다. 이것도 대사관에서 보내 준 표였습니다. 로열 콘서트는 영국 왕실 인사가 참석하여 2층 중앙 로열박스(royal box)에 앉아 관람하지요. 대부분이 자선공연이기 때문에 가격이 일반 공연에 비해 싼 편입니다. 그러나 오해는 마십시오. 자선공연이나 학생을 위한 공연(지원금을 받아서 표 값은 싸지요.)에는 최고의 가수나 연주가들이 참여합니다. 1층 스톨(stall)은 당시로서는 엄청난 가격인 20파운드 정도했습니다. 여기 좌석들을 모두 들어내고 청바지 차림을 한 학생들이 맨바닥에 앉아 보는 건 1 파운드 받지요. 이런 공연에도 한 역에 두 사람이 하는 double casting의 경우 상대적으로 더 잘 알려진 배우나 가수가 나옵니다. 정경화씨가 로열 콘서트에서 연주한다는 건 그만큼 유명세를 타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날 밤 정경화는 아마도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한 것 같습니다. 대학 때 엄청 좋아했던 곡이죠.
연주장은 로열 페스티발 홀이고 이날 밤 지휘는 Bernard Haitink였습니다. 1970년대를 이끈 유명한 지휘자입니다. 왕실에서 온 로열 게스트는 마가레트 공주였습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바로 아래 동생이죠. 여왕보다 예쁘게 생겼으나 워낙 염문을 뿌리고 제멋대로여서 책무에 충실하여 존경받는 언니에 비해 눈총을 받았습니다. 여왕도 아닌데 좀 자유분방하게 놀아난다고 해서 뭐 어떤가요? 지휘자는 물론이고 연주가들은 연주를 시작하기 전과 연주 후 로열박스 쪽을 향해 경의를 표합니다. 목례를 하는 것이죠. 그런데 정경화는 로열박스 쪽을 처다 보지 않고 연주를 시작하더니 연주 후에도 관중들의 박수와 앙코르에 답례한 뒤 그대로 퇴장해 버리는 겁니다. 조금 섬뜩했습니다. 마가레트 공주를 싫어하나? 주최 측에서 뭐라 하지는 않았겠지요? 영국인도 아닌데.... 정경화는 이후 영국인과 결혼하여 영국 시민권을 얻는데 이 후로도 이렇게 했을까요? 아니면 그 뒤로는 로열 콘서트에 초청받지 못했을까요? 대단한 한국인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그 다음도 정 트리오 막내인 정명훈씨에 관한 겁니다. 좀 씁쓸한 기분을 지울 수 없습니다. 1960년대 우리의 젊은 연주가들이 해외 대회에서 입상하여 국민에게 큰 희망을 주었습니다. 1962년 케네디 대통령의 초청으로 백악관에서 연주하고 1965년 레벤트리트 국제 콩쿠르 우승으로 한국인 최초로 국제대회 입상자가 된 한동일씨는 국위선양의 공으로 국민훈장모란장 받았지요. 정 트리오는 첼로, 바이올린, 피아노를 전공하는 훌륭한 연주가들입니다. 나의 기억으로는 명화씨는 모스크바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 한국 국적 문제로 참여하지 못한 뒤 좀 시들해졌고 동생 경화씨는 1967년에 레벤트리트 콩쿠르에서 동문인 핀커스 주커만과 공동 우승하여 승승장구합니다. 정 트리오가 연주한 베토벤 3중 협주곡, 혹은 자매가 연주한 브람스 더블(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협주곡은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각 나라마다 유명한 콩쿠르가 있지만 세계적으로 유명한 것으로는 모스크바의 차이콥스키 콩쿠르와 벨기에의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가 있지요. 1957년 소련이 스푸트니크 위성을 쏘아 올려 미국이 기가 죽어 있던 시절 밴 클라이번(Van Cliburn)이 다음 해(1958)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우승하여 미국인들이 열광한 것을 기억합니다. 그의 업적을 기려 1962년부터 밴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콩쿠르가 미국 텍사스 주 포트워스 시에서 4년마다 열립니다.
영국에서는 3년마다 열리는 리즈 피아노 콩쿠르(Leeds International Piano Competition)가 유명합니다. 찾아보니 한국인 입상자로는 정명훈, 서주희, 백혜선 등이 있고 김선욱은 2006년 만 18세 최연소이자 아시아 최초의 우승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입상자’란 최종 경연에 참여한 것을 말합니다. 보통 6명 내외지요. 정명훈씨는 1974년 미국 국적으로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 참가해 피아노 부문 공동 2위에 입상했습니다. 이 탓인지 다음 해에 열린 리즈 콩쿠르에서는 가장 유력한 우승자로 꼽혔지요. <The Guardian> 등 영국신문들은 리즈 음악회 선전을 겸해 예상 기사에서 정명훈을 계속 띄우더군요. 당시 한국일보 장기영 사주는 정 트리오 어머니와의 친분으로 이들 3남매가 한국에 오면 연주회를 주최하고 보도에 열을 올렸습니다.
장 사주는 파리에 있는 김성우 특파원에게 리즈 음악회 취재명령을 내렸습니다. 나도 동행했지요. 우리는 런던에서 약 200마일(320Km) 떨어진 영국 중부에 있는 리즈에 기차로 갔습니다. 당시 Pullman이란 고속특급열차 값이 엄청 비쌌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김 특파원이 파리에서 와서 바로 출발했는데 음악회가 열린 극장에 도착하니 날은 어둡더군요. 이런 음악회 표는 수개월 전에 구입해야 되는 것이라 우리는 입석을 사서 제일 뒷줄 난간을 잡고 들었습니다. 6명의 입상자 중 절반은 전날에 연주하고 이날은 나머지 3명의 연주와 시상식이 진행되었습니다. 지금도 잊히질 않습니다.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을 한 자리에서 3번이나 들은 겁니다. 대학시절 학림다방에 조지 셀(George Szell)이 지휘한 클리블랜드(Cleveland) 오케스트라 연주 (피아니스트는 Leon Fleisher?)에서 바이올린 현의 비수 같은 음색은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클리블랜드는 당시 미국 5대 심포니 중 하나로 유명했습니다. 지금도 유명하구요. 내가 경연자의 연주를 평가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고, 그러나 익숙한 곡이어서 서서 들어도 피로한 줄 몰랐습니다.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정명훈은 공동 4위(?)를 한 것 같습니다. 꼴지가 5위였으니 끝에서 두 번째인 셈이죠. 순위를 발표하는 무대에 올라가 봤는데 콩쿠르 위원장은 당시 인기 몰이를 하던 자유당 당수 Jeremy Thorpe와 결혼한 Marion Stein 이었습니다. 둘 다 재혼이었지요. 이 여자를 기억하는 건 키와 몸집이 엄청난데 모두가 정장차림을 했으나 학교 다닐 때 입던 어수룩한 차림으로 무대에 나타나 이상한 질문을 한 동양인인 나를 내려다보는 경멸적인 눈빛을 잊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콩쿠르에 대해 사전 지식이 없어 아마도 그 연혁을 설명해 달라고 했던 것 같습니다. 시상식으로 기분이 고조되었는데 극동에서 온 한 인간이 뭐 이렇게 무식한 질문을 하느냐는 표정이었지요. 백작부인(Countess)이란 귀족 칭호를 쓴 것은 아마도 전 남편인 백작의 호칭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우리는 실망이 컸지만 취재를 하려 왔으니 정명훈을 만나지 않고 떠날 수는 없었지요.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보이질 않더군요. 직원에게 물어 보니 벌써 극장을 떠났다는 겁니다. 이럴 때 그냥 가면 신문기자가 아니겠죠? 택시로 정명훈이 묵고 있는 호텔을 찾아갔습니다. 김성우 특파원이 프런트에서 방으로 전화를 걸어 서울 한국일보에서 당신을 취재하려 여기까지 왔다면서 꼬시고 달래더군요. 그러나 정명훈은 로비로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물러날 김 특파원이 아니죠. 방으로 올라가 문을 두드렸습니다. 나에게는 로비에서 정명훈이 어디로 빠져나가는지 지키라고 하시구요. 얼마 지나지 않아 호텔 직원이 올라가서 김 특파원을 데리고 내려왔습니다. 정명훈은 방문을 두드리고 호텔에서 소란을 피우면 경찰을 부르라고 했다는 겁니다. 소란을 피운 게 아니라고 항의했으나 투숙자가 그렇게 말한다는 겁니다. 우리는 할 수 없이 철수하여 밤기차로 런던으로 돌아왔습니다. 기사가 어떻게 나갔는지 모르겠군요.
정명훈씨는 이후 지휘자로 변신하여 엄청난 성공을 거두고 있습니다. 서울 시립교향악단의 지휘자를 역임하는 등 모두가 잘 아는 그 뒤 이야기는 쓸 필요가 없겠지요. 나는 그가 지휘한 베르디의 <오텔로>를 Classica에서 몇 번 보았습니다. 이탈리아 여행 중 몇 번 가본 베네치아의 성 마르코 광장과 씁쓸한 옛 기억이 겹쳐 떠오르더군요. 그러나 인간은 방황하면서 성장한다는 괴테의 말과 같이 45년 전 20대의 초반 한 젊은이의 좌절의 이야기는 하나의 에피소드나 피아스코(fiasco)이겠지만 그의 성장에 밑거름이 되었을 겁니다. 1953년생이니 이 때 22살이었군요.(2020.1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