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제국주의 침략군인가?
미순이 효선이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한반도에서 기필코 미군을 몰아내야 하는 것인가?
미군은 도대체 한국전에서 무엇을 했기에.......
한국전쟁과 아름다운 장군들
한국을 지극히 사랑한 대장 부자의 희생
-워커 대장과 그 아들 워커 대위 -
“아버지는 그날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밀려 고전하고 있는 우리 미 24사단을 독려하고 한국정부의 영국군 27여단에 대한 부대표창을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을 대신하여 수여하는 한편, 후퇴 중 큰 전공을 인정받아 미국 정부가 저에게 수여하는 은성무공훈장을 직접 가슴에 달아 주시고자 짚 차로 달려오는 중 이었습니다.
그러나 의정부 근처에서 후퇴중인 한국군 트럭에 부딪쳐 현장에서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계속되는 추위와 끝없이 밀려오는 중공군의 대공세에 밀려 모든 전선이 계속 패주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모처럼 아군이 큰 승리를 했고 그 승리의 주인공이 아들이라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크리스마스 이틀 전인 1950년 12월 23일 이었습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며칠 전 맥아더 사령관! 은 미국정부에 아버님의 대장 진급을 상신해 놓았더군요.·····.
이렇게 해서 부자간의 영원한 이별이 시작되었습니다“
‘불 독’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던 아버지 미 8군사령관 월튼 워커 중장(대장 추서)의 우락부락한 모습과는 달리, 아들은 멋진 미 육군정장 차림에다 네 개의 별 (★★★★)이 반짝이는 바나나 모자를 쓰고 있었다.
1980년 4월 알링턴 국립묘지, 훤칠하고 잘생긴 아들 샘 워커 예비역 육군 대장은 아버지 무덤에 한참이나 거수경례를 한 뒤 눈물을 글썽이며 한국 TV방송사 6.25 30주년 다큐멘터리 제작팀과의 인터뷰를 이어갔다.
“이틀 뒤 저는 도쿄의 UN군사령관 맥아더 원수에게 불려갔습니다.
사령관이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워커 대위! 아버님의 전사를 진심으로 애도한다.
월튼 워커 대장은 정말 훌륭한 군인이었다.
그의 죽음은 우리 미군은 물론 미국의 커다란 손실이다.
귀관에게 워커 대장의 유해를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하는 임무를 맡긴다.’
이때 저는 매우 격렬하게 반대했습니다.
‘각하, 저는 일선 전투중대장입니다.
그리고 지금 저희 부대는 후퇴중입니다.
후퇴작전이 얼마나 어렵고 위험하다는 것은 각하께서도 잘 아실 것 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제 부하들은 목숨을 건 위험에 노출되어 악전고투 하고 있습니다.
지금 중대장이 바뀌면 안 됩니다.
아버님의 유해운구는 의전부대에 맡기십시오.
저는 전선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때 문을 향해 걸어 나가던 맥아더 원수가 뒤 돌아 서더니 조용히
말했습니다.
‘이것은 명령이야’·······
그리고는 방을 나가버렸습니다.
군인이 명령을 어길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버님의 유해를 가슴에 안고 이곳 알링턴까지 와서 바로 이 자리에 안장 했습니다.
예상했던 것처럼 저는 이미 워싱턴의 육군본부로 발령이 나 있었습니다.
저는 지금, 그때 맥아더 장군이 왜 그런 명령을 내렸는지 이해합니다.
사랑하는 부하와 그의 아들을 한 전선에서 한꺼번에 죽여서는 안 된다는 판단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결코 그 결정에 찬성하지 않습니다.
명령이라 어쩔 수 없이 따를 수밖에 없었지만 군인이 부하 들을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는 위험한 전장에 남겨놓고 떠나왔다는 생각이 지금도 가슴을 무겁게 합니다.“
그러나 그가 결코 한국을 완전히 떠난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인 초대 주한 미 8군사령관 고 월튼 워커 대장과 함께 미군 최초의 부자(父子)대장이자 육군사상 최연소 대장 진급자였던 전도유망한 샘 워커 장군이 젊은 나이에 예편된 것은 바로 한국을 위한 행동 때문 이었다.
1970년대 후반 카터 미 대통령이 주한 미군을 대거 철수시키려고 했을 때 주한미 8군 참모장 존 싱그러브 소장이 반대하다가 예편된 사실은 잘 알려진 일이다.
이때 미국에서는 미 육군의 엘리트 중 엘리트이며 차기 육군 참모총장이나 NATO군사령관으로 유력하던 샘 워커 대장이 카터 대통령에게 반대를 하다가 예편된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그뿐 아니라 워커 미 8군사령관의 짚 차와 부딪힌 한국군 트럭 운전병을 이승만(李承晩)대통령이 사형시키려 하자 미군 참모들이 적극 만류하여 사형을 면하도_! _! __ 해주고 대신 가벼운 징역형으로 감형케 한 감격적인 역사도 묻히어 왔다.
워커 장군이 순직한 의정부 부근 사고지점은 지난 2002년 두 여중생이 군사훈련중이던 미군 장갑차에 치어 사망한 지점과 멀지 않다.
T-34 북한탱크를 격파하라
-적지를 홀로 헤맨 딘 소장-
이보다 앞서 1950년 7월, 미 24사단장 월리암 딘 소장은 대전(大田)을 사수하라는 워커 8군사령관의 명령을 받고 적 3개 사단에 포위된 위급한 상황아래 최전선에서, 최초로 지급된 3,5인치 대전차 로켓포조를 직접 지휘, 적 T-34 탱크를 파괴시켜가며 사투를 벌렸다.
사단이 와해되자 홀로 36일 동안 적 치하인 대덕·금산·무주지방의 산과 들을 헤매다 체중이 30kg이나 줄어든 상태로 진안지역에서 주민의 신고로 북한군에게 체포되어 3년 동안 포로로 모진 고생을 하다가 겨우 생환된 사실도 잊을 수 없을 일이다.
포로생활에서 풀려나자 그의 조국 미국은 사단장이 직접 적 탱크와 맞닥트려 싸울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급박한 상황과 포로가 될 수밖에 없었던 불가피한 여건, 그리고 3년 동안의 포로생활 중 보여준 미군 장성으로서의 군인정신을 높이 평가하여 미국이 줄 수 있는 최고 훈장을 수여했다.
그러나 그는 ‘내가 한국에서 사단장으로서 한 행위는 나무(木)훈장도 받을수 없는 것이다.
적 탱크를 격파한 것은 어느 부사관이라도 할 수 있는 일 이었다’고부끄러워 하며 은둔생활을 하고자 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그를 중장으로 진급시켜 5군 부사령관에 임명했다.
그가 북에서 귀환 한 다음, 단돈 3,000원(5달러)에 자기를 밀고해서 미군 장성의 인생을 포로라는 치욕으로 도배시킨 농부가 5년형을 선고 받아 복역 중이라는 것을 알고 “무지한 농민이 살기 위해서 한 행동이니 감형해 달라”고 한국 정부에 간청하여 기어코 출옥시켰다는 사실도 기억할 일이다.
딘 소장이 포로생활 중 북한군의 집요한 심문에서 미군의 각종 작전계획에 대하여 함구 하는 등 장군다운 면모를 보인 사실은 통역을 담당했던 민간인 이규현 (李揆現)이 아군에 귀순, 진술함으로서 비로소 세상에 알려졌다.
이규현은 후에 중앙일보 사장과 문공부 장관을 지냈다.
아들을 폭격기에 태워 적지 하늘로
-밴프리트 8군 사령관-
< 사랑하는 어머니에게 >
군인의 아내인 어머니에게 이 편지를 올립니다.
눈물이 이 편지를 적시지 않았으면 합니다.
어머니, 저는 지원해서 전투비행훈련을 받았습니다.
B-26 폭격기를 조종할 것입니다.
저는 조종사이기 때문에 기수(機首)에는 폭격수, 옆에는 항법사,후미(後尾)에는 기관총 사수와 함께 있습니다.
아버님은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 없이 살 수 있는 권리를 지켜주기 위해 지금 한국에서싸우고 계십니다.
드디어 저도 미력이나마 아버님에게 힘을 보탤 시기가 다가 온 것 같습니다.
어머니! 저를 위해 기도하지 마십시오.
그 대신 미국이 위급한 상황에서 조국을 위하여 소집된 저의 승무원들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그들 중에는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아내를 둔 사람도 있고, 애인이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그것은 언제나 저의 의무입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아들 짐 올림
이것은 워커 장군?리지웨이 장군에 이어 8군사령관으로 부임한 제임스 밴프리트 장군의 아들 짐 밴프리트 공군 중위가 이제 막 그리스 해외 근무를 마쳤기 때문에 한국 전선에 투입될의무가 없었음에도 아버지를 떠라 한국전에 자진참전하여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이다.
그것이 마지막 편지였다.
1952년 4월 깊은 밤, 이 훌륭한 군인은 평안남도 순천지역을 폭격하기 위해 1시 5분 군산 비행장을 이륙, 새벽 3시 김포비행단의 레이더와 접촉을 갖고 목표를 향하여 출격한 뒤 소식이 끊겼다.
즉시 수색작전이 시작된 것은 물론이다.
아침 10시 30분 밴프리트 8군사령관은 미 제5공군사령관 제임스 에베레스트 장군으로부터 짐 밴프리트 중위가 폭격비행 중 실종 되었고 지금 수색작업이 진행 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는 묵묵히 듣고 있다가 이렇게 지시 했다.
“짐 벤프리트 중위에 대한 수색작업을 즉시 중단하라.
적지에서의 수색작전은 무모하다.”
아버지가 아들을 위한 구출작전을 무모하다고 중지시킨 것이다.
이것은 인접 한국군부대 지휘관으로서 연합군회의에 참석했던 전 주월 한국군 사령관 채명신(蔡命新) 장군의 증언이다.
며칠 뒤 부활절을 맞아 밴프리트 8군사령관은 전선에서 실종된 미군 가족들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저는 모든 부모님들이 저와 같은 심정 일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의 아들들은 나라에 대한 의무와 봉사를 다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벗을 위해서 자신의 삶을 내놓는 사람보다 더 위대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가 말한 벗이 곧 한국이요 한국인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일이다.
밴프리트 사령관은 한국을 벗이라고 생각했고 그 벗을 위해 목숨을 바친 자기 자식을 위대한 사람이라고 칭찬하였다.
아들이 포로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
이렇게 강직한 밴프리트 장군에게 뜻밖의 손님이 찾아와 놀라운 부탁을 하였다.
1952년 12월, 제2차 세계대전 노르만디 상륙작전의 영웅이자 대통령당선자인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장군(원수출신)이 한국 전선을 살피기 위해 방한하여 8군사령부를 찾았다.
8군 및 한국군 고위 장성들이 대거 참석 하고 세계 각국의 기자 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밴프리트 사령관이 전선 현황에 대해서 브리핑을 했다! ! ! .
브리핑이 끝나자 조용히 듣고 있던 아이젠하워 장군이 뜬금없는 질문을 하였다.
“사령관, 내 아들 존 아이젠하워 소령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얼마 안 있어 대통령에 취임할 당선자가 야전사령관에게 한 첫 질문 치고는 너무나 사적인 질문이기도 했지만, 상대가 아들을 잃고도 미동도 하지 않은 밴프리트 장군이었기에 모두들 무슨 일이 일어날까봐 바짝 긴장하였다.
“존 아이젠하워 소령은 전방 미 3사단 정보처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밴프리트 장군이 사무적으로 짤막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아이젠하워 장군은 그야말로 참석자 모두를 놀라게 하는 부탁을 했다.
“사령관, 내 아들을 후방 부대로 배치시켜 주시오.”
참석자들은 다시 한 번 놀라 서로들 바라보며 자신들의 귀를 의심했다.
밴프리트장군도 아이젠하워 장군을 응시하면서 의아한 표정을 보이자 그는 조용히 말했다.
“내 아들 존 아이젠하워 소령이 전투 중에 전사한다면 슬픈 일이 되겠지만 나는그것을 가문의 영예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아들이 포로가 된다면 적군은 분명히 미국 대통령의 아들을 가지고 미국과 흥정을 하려 들 것입니다.
나는 결코 그런 흥정에 응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령관이 잘 알다시피 미국 국민들은 대통령의 아들이 적군의 포로가 되어 고초를 겪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대통령의 아들?! ! ! ? 구하라’고 외치며 나와 미국정부에 적군의 요구를 들어주라고압력을 가할 것입니다.
나는 그런 사태를 원치 않습니다.
그래서 사령관은 즉시내 아들이 포로가 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 주실 것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즉각 조치하겠습니다. 각하!” 라는 밴프리트 장군의 우렁찬 목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
이 자리에 참석했던 미 2사단 72탱크대대장 페렌바하(T.R Fehrenbach) 중령이 전역후 유명한 역사물 저술가이자 칼럼니스트가 되어 쓴 This kind of war &! amp;! nbsp; (한국전쟁)이라는 책자를 통하여 전 미국에 전파된 내용이다.
UN군 사령관, 해병 사단장 아들의 희생
-클라크 대장과 해리스 소장-
한국전쟁 중 마지막 UN군사령관인 마크 클라크 대장의 아들 빌 클라크 대위도 김화(金化)지구 저격능선에서 전투중대장으로 부대를 지휘하다가 세 번에 걸친 부상을 치료하기 위하여 본국으로 후송되었으나 결국 그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미 해병1항공단장 필드 해리스 소장은 1950년 11월 함경남도 개마고원 장진호 전투 항공지원업무를 지휘했는데 아들 월리암 해리스 중령은 해병1사단 대대장으로 이 지역에서 부대를 이끌고 중공군 포위망 돌파 작전을 벌이다가 전사하였다.
한국전에 참가한 미군 장성의 아들들은 모두 142명, 그중 35명이 전사하거나 부상당했다.
미군 인명피해는 전사 3만 6,940명,부상 9만 2,134명,실종 3,737명, 포로 4,439명 등 총 13만 7,250명에 달한다.
우리의 반성
우리는 남의 나라 전쟁에 참전하여 사령관의 전사와 사단장의 포로, 자식들마저 전투에 투입시켜 수 십 명의 사상자를 낸 미국의 장군들과, 남의 나라 전쟁에 참가해서 14만 명의 인명피해를 입고도 의연한 모습을 보이는 국민을 둔 미국을 본다. 미 의회는 2009년 7월 27일 한국전 정전 56주년을 얼마 앞두고 이 날을 ‘한국전참전용사 정전 기념일’로 정했고 오바마 대통령은 전국 관공서에 조기계양을 지시했다.
우리는 모두 잊고 지내던 한국전 정전 기념일이다.
북한의 6,25 남침 60주년이 다가온다.
이 전쟁으로 인하여 우리는 국군 전사자 14만 명, 부상 45만 명,,실종 2만 5,000명,포로 8,300명 등 인명피해만 62만 명, 민간인 피해를 합쳐 모두 100만 명 이상의 인명피해를 입었다.
남북한 전체로는 400여 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끔찍한 인명피해와 전국이 초토화되는 가운데 연합군 장군들과 그의 아들들이 죽고 부상 당할 때 우리의 지도층 인사들이 국민들에게 귀감이 되는 자세를 보였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6,25 당시부터 현재까지 지도층 인사들 중 상당수가 본인은 물론 자식들까지 이런저런 이유로 병역을 기피했다.
특히, 수많은 사람들은 미군의 군사훈련 중 발생한 교통사망사고를 트집 잡아 3개월 동안 촛불시위로 온 나라를 뒤집어 놓고 혈맹관계인 미국을 크게 실망시켰다.
그 당시 정권은 아무런 해결책을 강구하지 않고 즐기는 듯 하는 자세를 보였다.
우리는 많은 것을 잃었다.
잃기는 쉬웠으나 복구는 어렵다.
복구의 지름길은, 지금부터라도 우리의 각계 지도층이 한국전쟁 때 미군 장군들이 보여준 “지도층의 무거운 도덕적 책임”, 즉 노블레스 오블리지 정신을 발휘하는 것뿐이다. |
첫댓글 큰 고생들 하셧슈, 아 큰일날번 햇잔유( 사실 낫지만유 ), 앞으론 없어야지유 ~
귀한 글 잘 읽었습니다.까맣게 잊고 살았던 일들을 상기 시켜주셔서 감사 합니다.행복한 한해 가 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