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늙은 툇마루 법당으로 유명한 고즈넉한
산사
마니산 정수사(淨水寺)
▲ 겨울에 잠긴 정수사 길(해안남로1258번길) ① |
정수사입구에서 정수사까지는 야트막한 오르막길을 따라 15~20분 정도 올라가야 된다. 차들이
마음 놓고 바퀴를 굴리게끔 작은 포장길이 닦여져 있는데, 길 좌우로 겨울에 몽땅 털린 나무
들이 초췌한 몰골로 나그네를 맞이한다. 눈이 내린 지 벌써 여러 날 되었지만, 길가에는 새하
얀
눈이 조금씩 남아 아직까지 겨울 제국(帝國)의 치하임을 강하게 일깨운다. |
▲ 겨울에 잠긴 정수사 길(해안남로1258번길) ②
▲ 겨울에 잠긴 정수사 길(해안남로1258번길) ③
▲ 정수사 직전 'S'라인 고갯길
저 고갯길의 끝에 툇마루 법당으로 유명한 아담한 산사, 정수사가 고색의
숨결을 물씬 풍기며 중생들을 맞이한다. |
천하의 성산(聖山)으로 오랫동안 추앙을 받는 마니산<摩尼山, 마리산, 해밯 469m> 동쪽 자락
에는 3칸짜리 툇마루 법당으로 유명한 정수사가 포근히 안겨져 있다.
정수사는 639년에 회정선사(懷政禪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그는 마니산 참성단(塹星壇)을
참배하고 동쪽으로 내려가다가 앞이 확 트인 괜찮은 곳을 발견하고는 불제자들이 선정삼매(禪
定三昧)를 정수<精修, 정세하게 학문을 닦음>할 곳이라 격찬하며 그곳에 절을 지어 정수사(精
修寺)라 했다고 한다. (이름은 같지만 한자는 틀림)
허나 아쉽게도 이를 입증할 기록과 유물은 전혀 없는 실정이며 '정수사 산령각 중건기(重建記
,
1903년)'와 '강도지(江都誌)'에도 창건시기를 알 수 없다고 나와있어 639년 창건설에 크게
회의감을 들게 한다. 하여 절이 우후죽순 들어섰던 고려 전기나 몽골(원나라)과의 전쟁으로
강화도가 임시 국도(國都)가 되었던 13세기에 창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1423년에 법당을 새로 지었고, 1426년 함허기화(涵虛己和, 함허대사)가 절을 중창했는데, 법
당
서쪽에서 깨끗한 물이 나오는 것을 발견하고 맑은 물을 뜻하는 정수사(淨水寺)로 이름을
갈았다. (이름은 그대로 두고 한자와 뜻만 갈아치움)
1688년 절을 중수하여 상량문(上樑文)을 남겼으며<1957년에 발견됨> 1848년 비구니 법진(法眞
)과 만흥(萬興) 등이 화주(化主)가 되어 법당을 중수했다. 이때 부화주(副化主) 승려 20여 명
,
목수 165명, 지역 주민 305명이 자원하여 중창불사에 참여했다.
1878년 비구니 계흔(戒欣)이 제자 성수 등과 불상을 개금(改金)하고 후불탱과 칠성탱, 독성탱
,
산신도 등을 새로 그려 봉안했는데, 금어<金魚, 그림을 그리는 승려> 용계 서익(龍係 瑞翌)
과
대허 체훈(大虛 體訓) 등이 탱화를 조성했으며 1883년 화주 근훈(根訓)이 절을 수리했다.
1888년 비구니 정일(淨一)이 수좌 연오(演梧)와 함께 시주금을 모아 관세음보살상 1위와 후불
탱
1점을 만들어 봉안했다. 정일은 여러 절과 마을을 꾸준히 돌면서 돈을 모아 1903년 산령각
을
중건하고 1905년에 법당을 수리했으며 1916년에는 불상을 개금하고 여러 불화를 봉안했다.
그 시절 정수사에 머물며 그의 불사를 목격했던 이건승(李健昇) 거사는
'뜻을 한가지로 한다면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 있겠는가. 이 절의 스님을 보니 남자가 여자에
미치지 못하고 사대부가 여승에 미치지 못하고 국가가 사찰에 미치지 못함을 깨달았다!'
감탄을 금치 못하며 그의 공덕을 기리는 글을 쓰기도 했다.
1937년 주지 김선영이 본산<전등사(傳燈寺)> 주지 김정섭과 상의해 대웅전(법당)을 나라의 보
호 건물로 추천했으며, 1942년에 쓰여진 '전등본말사지'에는 대웅전(12칸) 외에 산신각(2칸),
대방(14칸), 노전(6칸), 요사(16칸) 등이 있어 지금보다 건물이 더 풍요로웠음을 알려준다.
6.25 때는 다행히 별 피해는 없었으나 건물들이 고된 세월에 체해 나날이 퇴락하자
1957년에
법당을 중수했으며, 1974년에 소실된 삼성각을 다시 지었다. 이후 여러 건물을 짓거나
새로
손질하여 지금에 이른다.
조촐한 경내에는 법당(대웅전)을 비롯해 삼성각과 오백나한전, 요사, 종무소 등 7~8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으로는 국가 보물로 지정된 법당과 향토유적인 함허대사 승탑을
가지고 있다. 그 외에 19세기에 조성된 탱화들이 여럿 있고 오백나한전에는 고려 때 것으로
전하는
건칠지장보살상이 있다.
또한 절 주변에는 상사화(相思花, 꽃무릇)가 자라고 있는데 보통 붉은 상사화를 생각하기 쉬
우나 이곳은 특이하게도 노란색 상사화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노란 상사화는 이 땅에서도 매
우
희귀한 존재로 8월 중순에서 9월 초 사이에 10여 일 정도 반짝 꽃잎을 펼쳐 보인다.
정수사는 함허동천(涵虛洞天)과 함께 마니산(마리산)의 동쪽 기점으로 바로 북쪽 능선을 넘으
면 함허동천이다. 참성단까지는 40~50분 정도 걸리며 중간에 벼랑처럼 이어진 아찔한 바위 능
선을 지나야 된다. 비록 길이 괜찮게 닦여져 사고의 위험은 예전보다 덜하지만 그래도 조심은
해야된다.
* 정수사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 467-3 (해안남로1258번길 142 ☎ 032-
937-3611)
* 정수사 홈페이지는 ☞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 정수사 법당(法堂) - 보물 161호 |
경내 중심에 자리한 법당(대웅보전)은 정수사의 얼굴이자 상징으로 1423년에 지어졌다. 이 땅
의 늙은 법당 중 유일하게 툇마루를 지닌 개성파 법당이자 이 땅에 별로 남지 않은 조선 초기
사찰 건축물로 그 가치가 백두산 꼭대기만큼이나 높다. (법당 덕분에 정수사의 이름값이 크게
올라갔음)
이 법당은 정면 3칸, 측면 4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원래는 측면이 3칸이었다. 그러다가 나중에
툇마루를 덧붙이면서 측면이 조금 넓어졌는데 1688년 절을 중수했을 때 닦여진 것으로 여겨진
다. (1688~1689년 법당을 중수하면서 중수 관련 기록을 법당 안에 넣어둠)
절이 한참 어려웠던 시절에는 가운데 칸은 법당으로, 좌우 칸은 승려들 거처로 사용했다고 하
며,
육중한 지붕을 지탱하고자 기둥 꼭대기에 공포를 단 주심포(柱心包) 양식으로 앞/뒷면이
다르게 나타나고 있으니 이는 후대에 툇마루(퇴칸)를 설치하면서 생긴 현상이다. (후면 공포
는 조선 초기 양식임)
건물 천정은 사주(四周)의 귀를 약간씩 접은 우물천정이며 여러 번의 중수를 겪으면서 건물이
조금 변형되긴 했으나 대체로 조선 초기 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다. 불단(佛壇)에는 아미타3존
상이 봉안되어 있고 그 주위로 아미타후불탱, 칠성탱, 지장시왕도 등의 탱화들이 가득 널려있
다.
|
▲ 옆에서 바라본 정수사 법당
▲ 위에서 바라본 법당과 그의 풍만한 맞배지붕 |
정수사의 존재감을 크게 올려준 법당은 툇마루
앞과 옆구리에 놓인 섬돌에 신발을 벗어두고
들어가면 된다. 가운데(어칸) 문과 좌우 칸 문에는 창살이 곱게 입혀져 있는데 가운데 칸
문
에는
꽃과 꽃병이 묘사되어 있어 화사함을 더해준다. |
▲ 법당 가운데 문짝에 피어난 꽃창살
아름다운 꽃들이 마치 화석처럼 굳어져 문짝에 달려있는 것 같다.
▲ 법당을 크게 돋보이게 만든 툇마루 (옆에서 바라본 모습)
▲ 법당 아미타3존상과 지장보살, 관세음보살상
아미타3존상 뒤로 1878년에 제작된 아미타후불탱이 든든히 자리해 있고 3존상
좌우로
근래 덧붙인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이 엷은 미소를 머금으며
3존상의 옆구리를 가득 채워준다.
▲ 법당 칠성탱(七星幀)
1878년에 조성된 것으로 치성광여래 등의 7여래와 일광보살 등 칠성(七星)의
주요 식구들이 빼곡히 담겨져 있다.
▲ 법당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 지장탱) |
칠성탱과 더불어 1878년에 조성된 것으로 지장보살과 시왕 등 명부(冥府, 저승)의 식구들이
담겨져 있다. 지장보살 두광(頭光) 좌우에 자리한 식구들은 특이하게도 동물 얼굴을 하고 있
는데, 지장보살 앞쪽에 선 왼쪽 동자는 등에 함을 지고 있고, 그 오른쪽 동자는 지장보살이
들어야 될 석장(錫杖)을
대신 들고 있는 점이 이색적이다. 이런 식의 지장탱화는 거의 이곳이
유일하다. |
▲ 무려 1,000원을 구석에 머금은 법당 현왕탱(現王幀) |
현왕탱은 관련 화기(畵記)가 없어 정확한 조성시기는 알 수 없으나 대략 1851년 정도로 여겨
진다. 그러니 법당을 수식하고 있는 탱화 중 가장 늙은 존재가 된다.
현왕(現王)이란 죽은 사람을 심판하는 존재로 죽은 지 3일 뒤에 심판을 진행한다고 하며 그의
판결 여부에 따라 극락이나 지옥행이 결정된다고 한다. 그는 착하게 산 사람을 좋아한다고 하
니 가급적 선하게 살아야 좋은 점수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음.
내가 아직 명부(저승)를 가본 적이 없으니;;> |
▲ 오백나한전(五百羅漢殿) |
법당 뜨락 좌측에는 시원스런 팔작지붕을 지닌 오백나한전이 서쪽을 바라보고 있다. 이름 그
대로 500명의 나한(羅漢)을 머금은 건물로 근래 지어진 것인데 나한 외에 고려 때 것으로 여
겨지는 건칠(乾漆)지장보살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이 보살상은 바다 건너 개성 땅에서 왔다고 하며 나는 법당만 생각했지 그의 존재를 알지 못
해 지나치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아무래도 다음에 또 오라는 정수사의 뜻인 모양이다. 하지
만 이곳은 이미 3번이나 인연을 지었고 아직도 지우지 못한 미답처가 천하에 수두룩해 일부러
또 찾을 생각은 별로 없다. |
▲ 겨울 휴업에 들어간 법당 옆 샘터
정수사의 뜻(맑은 물이 나오는 절)과 한자를 바꾸게 만든 샘터로 하얀 피부의
거북상을 짓고 그 주위를 기와돌담으로 둘러 애지중지하고 있다. 허나
겨울 제국이 물을 꽁꽁 앗아가면서 그 맑다는 샘물은
구경도 하지 못했다.
▲ 삼성각(三聖閣) |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삼성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산신과 독
성, 칠성 외에
용왕(龍王)까지 봉안되어 있어 사성각(四聖閣)이란 이름이 더
어울려 보인다.
불에 타서 쓰러진 것을 1974년에 다시 세웠으며, 내부에 담긴 산신과 독성, 칠성, 용왕탱은
그
이후에 조성된 것이다. |
▲ 정수사에서 바라본 천하
마니산의 벌어진 동쪽 틈 사이로 서해바다와 동검도(東檢島)가 진하게 바라보이고
그들 너머로 강화도를 거느린 인천(仁川) 본토가 흐릿하게 시야에 닿는다. |
경내 서쪽에는 가건물로 이루어진 매점 겸 종무소(宗務所)가 있다. 10여 년 전 겨울에 왔을
때는 부엌을 갖춘 셀프식 찻집으로 있었는데, 절 신도와 답사꾼, 산꾼까지 누구든 들어와 차
1잔의 여유를 누릴 수 있도록 찻잔과 전통차 티백, 주전자, 물이 갖추어져 있었다. 이용료는
없었으며 대신 직접 물을 끓여서 차를 타 마시고 사용했던 찻잔은 씽크대에서 씻으면 된다.
그때 같이 왔던 사람과 일다경(一茶頃)의 여유를 누리며 1시간 정도 머물렀던 기억이 정말 엊
그제 같은데 그 추억은 흩어진 나날의 일부가 되었고 찻집 또한 성격이 변해 더 이상 중생들
에게 무료로 차 1잔의 여유를 주지 않는다. (대신 차와 커피를 팔고 있음)
정수사의 다소 야박해진 인심과 왕년의 추억을 같이 되새기며 더 볼거리가 없나 두리번거리니
그때다 싶어 '함허대사 승탑'을 알리는 이정표가 나타나 나의 허전한 마음을 건드린다.
'정수사에 그런 존재가 있었나?'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이정표의 지시에 따라 오백나한전 뒤쪽
으로 가니 눈과 진흙으로 얼룩진 산길이 나오고 그 길을 조금 오르니 언덕배기에 조촐하게 생
긴 부도탑이 나를 맞이한다. 그가 바로 마니산 동쪽 자락에 진하게 흔적을 남겼던 함허대사의
승탑(부도)이다. |
▲ 함허대사 승탑(涵虛大師 僧塔) - 강화군 향토유적
19호 |
승탑의 주인인 함허대사(1376~1433)는 조선 초기 승려로 고려 때 아주 잘나갔던 충주유씨 집
안이다. (충주 출신임) 전객시사(典客寺事)를 지냈던 유청(劉聽)의 아들로 어머니는 방씨이며
법호는 득통(得通), 무준(無準), 법명(法名)은 기화(己和), 당호는 함허이다.
1396년 관악산 의상암(義湘庵, 어딘지 모름)에서 출가를 했으며 1397년 양주 회암사(檜巖寺)
에서 무학대사(無學大師)에게 법요(法要)를 듣고 여러 곳을 다니다가 1404년 회암사로 돌아와
수도에 정진했다.
1406년 공덕산 대승사(大乘寺)에서 4년 동안 '반야경(般若經)'을 설법했고, 1410년 개성 천마
산 관음굴에서 선을 크게 진작시켰다. 1411년 절을 중수해 승속(僧俗)들을 지도했으며, 1414
년 황해도 평산(平山)의 자모산 연봉사(烟峯寺)로 자리를 옮겨 작은 방을 함허당(涵虛堂)이라
이름 짓고 '금강경오가 해설의(金剛經五家 解說誼)'를 가르쳤다.
1420년 오대산(五臺山)에 들어가 그곳 사찰에 봉안된 옛 고승과 불상, 보살상에게 공양을 하
며
지내던 중, 영감암(靈鑑庵)에 있는 나옹(懶翁)의 진영(眞影)에 제사를 지내고 깜박 잠이
들었다. 그때 꿈에서 어느 신승(神僧)이 나타나 '기화'란 이름과 '득통'이란 호를 지어주었는
데 그
이름이 마음에 들어서 자신의 법명과 법호(法號)로 삼았다.
1421년 세종(世宗)의 청으로 개성 대자사(大慈寺)에 머물면서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의 명
복을 빌어주었고, 1424년 길상산(吉祥山)과 운악산(雲岳山), 공덕산(功德山)
등을
돌아다니며
설법과 수도에 힘썼다. 그리고 1426년 정수사를 중수해 머물렀으며, 1431년
문경 봉암사(鳳巖
寺)를 중수하여 머물다가 1433년 입적하니 나이는 57세였다.
그의 사리는 그와 인연이 깊은 가평 현등사(懸燈寺), 문경 봉암사, 황해도 현봉사, 인봉사(어
딘지 모름), 정수사에 분배되었는데 정수사는 경내 뒤쪽에 그의 승탑을 만들어 두고두고 중창
자를 기리고 있다.
함허는 무학대사의 법을 이은 선가(禪家)이지만 교종(敎宗)에 대해서도 많은 저술을 남겼으며
교학적인 경향도 크게 지니고 있다. 그의 현정론(顯正論)을 통해 그의 선사상(禪思想)에는 현
실생활과 일상적인 생활을 수용하고 포용하는 특징이 있는데 이는 유학자들이 불교 배척을 주
창하면서 '허무적멸지도(虛無寂滅之道)'라고 비판한 것을 반박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그의 유,불,도 삼교일치론은 송나라 계숭(契嵩)이 지은 '보교편(輔敎編)'과 비슷한 점이
있지만 불교가 배척당하던 시대적 배경 속에서 주장되었다는 점에 그 차이가 있다.
그의 열성 제자로는 문수(文秀), 학미(學眉), 달명(達明), 지생(智生), 해수(海修), 도연(道
然), 윤오(允悟) 등이 있으며, '원각경소(圓覺經疏)' 3권, '금강경오가해설의' 2권 1책, '윤
관(綸貫)' 1권, '함허화상어록(涵虛和尙語錄)' 1권 등의 저서가 있다. (그 외에 반야참문 1권
도
있으나 전하지 않음)
함허의 넋이 담긴 승탑은 조선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넓게 바닥돌을 깔고 그 한복판에 기단(
基壇)을 다진 다음 탑과 머리장식을 올렸다. 옥개석(屋蓋石)은 6각형이지만 신라 후기~고려
초기
승탑의 기본 형태였던 팔각원당형(八角圓堂型)의 구조를 취하고 있으며 탑의 높이는 156
cm, 바닥돌까지 포함하면 164cm 정도이다. 기단부에는 연꽃 장식이 새겨져 있으며 탑은 작지
만 나름
단단하고 균형 잡힌 모습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