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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표교. 원래는 청계천에 있었으나 현재는 장충단공원에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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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근 |
| 청계천에는 유서 깊은 다리가 많이 있었다. 태종 이방원과 신덕왕후 강씨의 애증이 서려 있는 광통교. 세종대왕이 하천의 수량을 측정하기 위하여 세웠으나 훗날 숙종 임금과 장희빈의 로맨스가 더 진하게 전해지는 수표교. 조선시대 최대의 토목사업을 벌였던 영조대왕의 체취가 서려있는 오간수교. 그리고 하류에 있는 영도교다.
이 중에서 우리의 가슴을 아리게 하는 다리가 바로 영도교다. 조선 제6대 왕 단종과 정순왕후 송씨가 마지막 이별을 나누었던 곳이다. 세종대왕의 왕세손으로 태어나 열한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지만 야심 많은 숙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영월로 유배 가 죽음을 당한 비운의 왕이 단종이다.
계유정난(癸酉靖難)에 성공한 수양대군은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등하여 대궐에 연금하고 왕비 정순왕후는 서민으로 강등하여 성 밖으로 내쳤다. 대궐에서 쫓겨난 정순왕후 송씨가 거처하던 곳이 흥인문 밖 정업원이다. 낙산을 타고 내려온 산줄기의 북쪽에는 비구니들만의 가람 '탑골승방'이 있고 남쪽에는 정업원이 있었다.
정순왕후 송씨의 정업원 생활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보고 싶은 지아비를 볼 수 없는 생이별이었다. 생활도 궁핍했지만 무엇보다도 정순왕후 송씨를 잠 못 이루게 한 것은 지아비 단종의 안위였다. 권력에 눈이 먼 수양대군 무리들이 단종을 어떻게 할까봐 피를 말리는 나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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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인지문. 동대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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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근 |
| 이 때였다. 폐왕(廢王)을 대궐에 두는 것을 불안하게 생각한 수양대군이 단종을 멀리 영월로 유배 보낸다는 소식이 날아들어 왔다. 정순왕후 송씨는 정업원에서부터 버선발로 뛰었다. 귀양 떠나는 지아비 단종의 얼굴이라도 한번 보고 싶어서이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멈출 수 없었다. 놓치면 두번 다시 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유배 행렬이 창덕궁을 떠나 흥인문을 통과했다. 이제 성 밖으로 나온 것이다. 유배 행렬은 동묘를 지나 청계천을 건너는 다리에서 잠시 지체했다. 청계천 하류에 있는 이 다리는 광진나루와 송파나루를 건너 한양으로 입성하는 길목으로 백성들의 통행이 많았다.
유배 행렬을 호종하는 금군(禁軍)들이 일반 백성들의 통행을 차단하고 단종이 다리 중간쯤 이르렀을 때 정순왕후 송씨가 도착했다. 군졸들의 호종을 받으며 다리를 건너는 이는 분명 단종이었다. 오매불망(寤寐不忘) 그리던 지아비였다.
사랑하는 사람이 그리워 잠 못 드는 애틋한 사랑을 묘사한 공자의 관저(關雎)는 정순왕후 송씨를 두고 읊어 놓은 시 같았다. 단종을 발견한 정순왕후 송씨의 몸은 그 자리에 그대로 돌처럼 굳었다. 팔딱거리며 뛰던 가슴이 잦아들며 숨이 멎어오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흐르는 것은 눈물이었다.
"전하! 전하!! 상감마마!!"
불러보았지만 말이 입 밖에 나오지 않고 입속에서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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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원된 영도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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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근 |
| 유배 떠나는 단종 역시 가슴이 아팠다. 부인을 한양에 남겨두고 영월로 떠나는 몸, 언제 다시 한양에 돌아와 사랑하는 부인을 만나게 될지 기약이 없었다. 흥인문 밖에 거처를 마련했다는 소식은 들었던 터라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고개를 돌렸다.
그 때였다. 그 자리에 사랑하는 아내 정순왕후가 있지 않은가. 믿어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 자리에 망부석(望夫石)처럼 서있는 사람은 분명 사랑하는 부인이었다. 두 사람의 시선은 마주쳤다. 눈동자가 불꽃을 튀겼다. 불꽃은 재가 되어 이슬처럼 흘러내렸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과 함께 단종은 멀어져 갔다.
이렇게 떠나가고 떠나보낸 두 사람은 영영 다시 만날 수 없었다. 이것이 마지막 이별이었다. 이 때 이들의 나이 단종 열다섯, 정순왕후 열여섯 살이었다. 이때부터 백성들은 이 다리 원래의 이름 왕심평대교(旺尋坪大橋)를 버리고 영도교(永渡橋)라 부르기 시작했다.
영도교는 영영 건넌 다리, 영 이별다리, 영이별교라는 뜻을 담아 단종과 정순왕후의 애틋한 이별을 가슴에 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