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보면 불행을 맞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당하는 사람은 자기가 맞은 불행이 세상에서 가장 크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세상에 똑같은 경우란 없습니다. 사건은 비슷하다 할지라도 당하는 사람의 입장은 매우 다릅니다. 그러므로 그 감정을 헤아리기는 어렵습니다. 때문에 함부로 이렇다 저렇다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그냥 그 사람이 느끼는 대로 이해해주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야 서로 마음을 열고 대화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대화의 상대로 인정해주지도 않을 것입니다. 행여 원수지간이 될 수도 있습니다. 말 한 마디가 천 냥 빚을 갚게도 하지만 평생의 원수도 만들 수 있습니다.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은 비판은 그런 결과를 초래하기 십상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그런 실수를 범하며 삽니다.
동생 ‘영인’이는 누나 ‘영주’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누나의 마음을 할퀴는 말을 합니다. 누나라고 그러자고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가해자의 환경 속에 들어가자 생각이 바뀔 수밖에 없었습니다. 동생은 그 환경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자기감정대로 쏟아 붓습니다. 영주의 마음이 아플 수밖에 없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합니다. 홀로 새벽길로 나옵니다. 그리고 한강 다리로 나와 걷습니다. 걸으면서도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당장 답은 나오지 않습니다. 서늘한 새벽 공기도 느끼지 못하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서서 다리 난간을 붙잡습니다. 한발을 올립니다. 또 한발. 다리 아래를 내려다봅니다. 나도 이렇게 갈까?
자기 환경을 이겨나가는 방법도 사람마다 다릅니다. 너는 왜 그 모양이니? 라고 우리는 쉽게 평가할 수 있습니다. 예, 참 쉬운 평가지요. 그 말이 상대방의 마음을 갈기 발기 찢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니 생각할 줄 모를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 사람을 이해시키려 노력할 수 있을까요? 할 수는 있겠지만 시간이 꽤나 걸릴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결과를 보장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든 말든 그냥 살지, 성자라면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상처를 안고 버텨야 합니다. 자칫 분노가 되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힐 수 있습니다. 아니면 자기 자신을 해할 수도 있습니다. 몸의 병으로 나타날 수도 있지요.
어느 날 교통사고를 당해 부모를 잃었습니다. 영주와 영인이가 졸지에 고아가 된 셈입니다. 가해자는 나름 정상이 참작되어 큰 형벌을 면한 듯합니다. 더구나 피해보상도 크지 않았습니다. 고모가 보호자로 나서서 사건을 해결(?)하였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으리라 짐작합니다. 어느 날 영주는 사건 판결문을 다시 뒤져봅니다. 가해자의 주소가 나와 있습니다. 영인이가 사고 쳐서 합의금이 당장 필요합니다. 직업도 없고 모아둔 돈도 없습니다. 그저 막막하지요. 이 모든 게 그 때 그 사고 때문입니다. 어떻게든 보상을 더 받아야 합니다. 아니면 복수라도 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힘들게 버티며 사는데 얼마나 잘 사는지 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찾아갑니다.
인기척이 없어서 담 넘어 집안을 살펴보다가 마침 집에서 안주인 같은 아주머니가 나옵니다. 뒤따라갑니다. 가까운 시장으로 들어서더니 한 가게로 들어갑니다. 그러더니 일하던 남자에게 싸들고 온 점심을 펼쳐줍니다. 함께 점심을 먹는데 남자의 몸이 온전하지는 않은 듯합니다. 가게 앞으로 다가갑니다. 언뜻 아르바이트생을 구하는 광고지 붙은 것을 봅니다. 얼떨결에 취업을 합니다. 그리고 가까이서 보는 두 부부는 여느 사람들보다 친절합니다. 특히 아주머니가 영주를 딸처럼 살뜰하게 챙겨줍니다. 어느 날 그 집에까지 가보게 됩니다. 그런데 아주머니는 인사불성 전신마비 아들을 보살피고 있는 것입니다.
미리 챙겨준 아주머니의 아량으로 동생은 유치장에서 나옵니다. 하루는 친절한 주인아저씨의 봉고트럭에 모두 동승합니다. 심사가 뒤틀려있는 영인이는 모든 것이 짜증의 대상입니다. 그런데 이 아저씨 어디서 본 듯 낯이 익습니다. 옛날 판결문을 뒤져봅니다. 거기에 가해자의 사고 때의 모습이 사진으로 첨부되어 있습니다. 바로 그 아저씨입니다. 누나에게 대듭니다. “어떻게 그 사람들 얼굴을 맨날 볼 수 있어?” 누구인지나 알고 있던 거야? 물론 알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복수하려고 찾아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집 상황을 보니 이해할 만했던 것입니다. 더구나 두 부부가 얼마나 자기를 잘 보살펴주는지 고마울 따름입니다. 어쩌면 부모가 살아있어도 그만큼 챙겨줄 수 있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자기네 아들 때문에 충분히 보상해줄 수도 없었던 사람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여태 죄책감에 아파하며 살아온 것입니다. 하지만 동생이 이런 모든 일을 다 이해해줄 수 있을까요? 한번 세상을 비뚤게 보면 돌이키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영주는 그렇게 만들어 주리라 믿고 싶습니다. 또한 요즘도 이런 이웃 아저씨 아주머니들이 어디엔가는 있으리라 믿고 싶습니다. 아프고 힘든 세상이지만 조금이라도 살맛나게 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만도 가지고 싶은 희망입니다. 영화 ‘영주’를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