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운산 장군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다.
어릴 때는 최명길(崔明) 장작림 군벌에 있을 땐 중국식의 최풍(崔豊)
간도 제1의 거부로서 경제활동을 할 때는 최만익(崔萬益)
무장투쟁을 할 때는 최문무(崔文武)·최빈(崔斌)·최운산(崔雲山)을 사용했고
러시아에서 무기를 밀매할 때는 최고려(崔高麗)
중국 장사꾼으로 위장해 첩보활동을 할 때 최복(崔福)을 사용했다
8개의 이름을 가졌지만 모두 한 사람이다
내가 호를 쓴다면 천운산이라 하고 싶다
며칠전지인으로부터 문자편지를받았다
●독립군 최운산 장군●
최운산장군은 우리의 독립 의지를 세계에 천명한
1920년 봉오동전투를 승리로 이끄는데
실질적인 역할을 한 숨은 영웅이다
독립전쟁의 제1회전으로 불렸던 봉오동전투의 대승에 힘입어
우리 민족은 다시 독립운동의 횃불을 높이 들수 있었다
최운산 장군은
대한북로독군부의 총사령관 최진동장군의 동생으로
당시 간도 제일의 거부였으며
3천 명에 달하는 독립군의 식량과 군복, 무기 공급 등 초기의 군자금 일체를 자비로 감당하였다
부대 운영과 전투에 필요한 무기, 식량, 피복 등의 보급은 모두 최운산의 몫이었다
그는 땅을 팔아 요즘 가치로 따지면 150억원에 이르는 5만원의 군자금을 마련했다
1차대전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일원으로 참전했다가 러시아 내전에 휘말린 체코군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무기를 팔아 귀환 자금을 마련하려고 했을때
최운산의 자금력 덕분에 독립군이 이를 사들일 수 있었다
1924년~1926년 3년간 감옥생활을 한 것을 비롯
일생동안 모두 여섯 차례 잡혀가 고문을 당하고
1939년 일본 경찰서 습격과 군자금 모집, 창씨개명거부등으로
10개월간 투옥당한 최운산장군은
해방을 한달 앞둔 1945년 7월5일 고문후유증으로 순국하였다
(끝)
최운산선생이 전재산을 바쳐 독립운동 할수 있었던것은
아버지 최우삼의
투철한 민족의식에 대한 가르침과
부인 김성녀의 통큰 내조덕분이다
첫댓글 암울한 시기 민족의 큰 어른 최운산 장군,
그의 형 최진동 장군,
부친 최우삼 옹의 투철한 민족의식,
부인 김성녀 님의 통큰 내조 등을 통한
독립운동사 거인 최운산장군의 역사를 회고할 수 있어서 고맙습니다.^^*
훌륭한 서술이 명료하고 돋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