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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통령?
한동안 SNS에 떠돌던 ‘한국의 직업별 특징’이란 한 칸짜리 만평이 있었다. 오래 회자되면서 눈길과 말길에 올랐다. 네 줄의 정의는 군더더기 없는 촌철살인이었다. ‘검사, 정의에 관심이 없음’, ‘기자, 진실에 관심이 없음’, ‘의사, 환자에 관심이 없음’ 그리고 ‘목사, 예수에 관심이 없음.’ 이들은 요즘 우리 사회에서 자주 구설수에 오르는 대표적인 직업군이어서 더욱 불편하다. 문득 궁금해진다. 지금 대통령을 정의하면 무엇일까?
내일 모레, 미국은 60번째 대통령 선거를 치룬다. 태평양 건너 미국의 대선이 초미의 관심사인 까닭은 누가 당선되느냐에 따라 우리나라에 미칠 영향과 파급 때문이다. 양대 정당의 정체성보다 더 벌어진 양극단의 대결은 단지 관전평에 머물 수 없다. 초박빙의 대결인 만큼, 전 세계의 눈길이 미 대선 전광판에 쏠린다.
당장 대선 판세를 지켜보며 한반도는 물론 전 세계 나라들은 꼼꼼히 유불리의 수지타산을 따진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전쟁을 빗대어 그 결과가 ‘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마무리될 것이냐, 베트남 전쟁으로 끝날 것이냐’라고 진단하는 배경도 결과와 무관하지 않다. 해방 후 80년 가까이 미국을 비롯한 주변 강대국들의 패권주의에 휘둘려온 우리는 운명적이기까지 하다.
이제 웬만한 사람들은 미 대선에 대해 한두 마디씩 훈수를 보탤 수 있을 정도다. 이미 8년 전에 트럼프와 힐러리의 대결을 통해, 또 직전 바이든과 트럼프의 전쟁판을 겪었기 때문이다. 박빙 상황에서도 전체 지지율은 당선에 별 영향을 주지 못한다. 국민 전체의 지지표 합계가 최종 승부와 무관하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민주국가답지 않다. 문제는 러스트 벨트라며, 7개 주의 미세한 지지율 차이에 몰린 시선은 남북전쟁 당시 백병전의 칼부림을 연상시킨다.
미국의 선거판은 유난히 입씨름과 말싸움이 극성스럽다. 말로 인기가 오르고, 말로 표가 우수수 떨어지는 것은 사실 어느 나라든 예외가 없다. 사실과 거짓의 경계를 들락날락하며 상대방을 공격하는 것은 무리수지만, 한표 한표가 다급하면 거짓 뉴스도 일단 던지고 본다. 아뭏든 선거 결과를 따질 때 단지 득표수만이 아니라 거짓말 총량제도 계량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민주주의 경연장이라 할 미국이든, 우리나라든 이미 법치주의가 무너지는 상황이니 기대난망이다.
게다가 대통령 후보의 국가경영능력과 리더십, 용기와 포용력 대신 한 인물에 대한 호불호가 지나치게 부각되고, 그런 극단적 편향성 때문에 정직성이나 도덕과 윤리, 상식적인 책임의식까지 무시된다면 선거 결과는 미국인과 세계 시민들에게 큰 해악을 끼칠 것이다. 4년마다 반복되는 양자택일의 정치 이벤트가 쓰나미처럼 두려움으로 다가오는 이유다.
독일 전 총리 헬무트 콜(1930-2017년)은 무려 16년 동안 절반은 서독에서, 절반은 통일독일에서 최고 권력자였다. 통일이란 인기 정점을 지낸 후 콜은 인기가 뚝 떨어져, 차차 사람들에게 외면당하였다. 겨우 구동독의 지지로 총리직을 유지하는 편이었다. 사람들은 미국 대통령 등과 비교하여 비아냥거렸다.
“The USA have Bill Cliton, Stevie Wonder, Bob Hope, Jonny Cash. We have Helmut Kohl, no Wonder, no Hope, no Cash.”(미국은 빌 클린턴과 스티브 원더(기적), 밥 호프(희망), 자니 캐시(현금)를 가졌다. 우리는 헬무트 콜을 가졌고, 어떠한 기적도, 희망도, 현찰도 없다.)
그는 말년에 인기가 가파르게 떨어져, 결국 불명예스럽게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그런데 잊혀진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독일은 물론 유럽과 온 세계는 그의 생애와 업적을 칭송하고 나섰다. 뒤늦게 돌아보니 그는 ‘no Wonder, no Hope, no Cash’가 아닌, 기적과 희망과 경제적 부흥을 가져온 사람이었다고들 했다. 누구보다 헬무트 콜은 좋은 그리스도인이었다. 독일의 개신교와 가톨릭 양대 교회를 존중하고, 거룩한 전통을 신뢰한 사람이다. 인기는 하루아침에도 오르내릴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한결같은 신실함과 확고한 비전이다. 대통령은 그런 존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