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째 아침 우리는 어지간히 시차에 적응을 마쳤지만 여행의 일정이 워낙 빡빡해서 저녁 늦게 잠자리에 들고 아침 일찍 일어나느라 여간 피곤하지 않았다.
전날 가이드는 6시 모닝콜, 7시 식사, 7시40분 출발이라는 일정표를 발표했고, 목사님들은 시간을 철저하게 지키기 위해서 지각하는 사람에게는 10유로(만오천원)의 벌금을 부과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과연 누가 벌금을 거둘 것인가? 참 곤란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 이천휘 목사님이 악역(?)을 담당하시기로 했다.
이목사님이 아니면 누가 할 수 있겠는가? 결국 이 벌금들은 너무나 아름다운 일로 쓰여졌다(나중에 밝힙니다).
폼페이는 나폴리에서 약23km 떨어진 남서쪽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의 일정은 자연스럽게 폼페이와 가까운 소렌토, 그리고 세계 3대 미항(호주의 시드니, 아르헨티나의 리오데자네이로) 의 하나라고 말해지는 나폴리로 정해졌다.
버스로 오랜 시간을 이동해야 했기 때문에 우리는 가이드로부터 이탈리아라는 나라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들을 수 있었다.
17년이나 이곳에 거주하며 살았던 가이드는 각 분야에 대한 내용들을 아주 재미있게 전해주어서 지겨울뻔한 버스여행에 재미를 주었다. 소렌토로 이동하는 이날에는 오래전에 학교에서 배웠던 이탈리아 가곡까지 노래까지까지 불러주어서 우리를 감동하게 했다.
나중에 이탈리아에 다시 갈때는 이태리 가곡을 꼭 외워 가야지...
우선 그는 우리에게 이탈리아의 교육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3-4세가 되면 유치원에 다니는데 유치원은 아침 7시50분에 열어서 오후4시30분이면 문을 닫는다고 했다. 이 시간이면 부모가 퇴근할 시간과 거의 맞는 것 같다. 이탈리아의 공무원들은 오후 1시30분까지만 근무를 한다고 한다. 5-9세가 되면 우리 식의 초등학교가 시작되는데 한 반에 20명으로 인원을 제한한다고 한다. 그리고 담임교사 3명이 5년동안 동일하게 아이들을 지도하는데, 이것은 5년동안의 자세한 살핌을 통해서 아이들의 적성을 찾아주는데 아주 효율적이라고 한다.
그리고 시험은 모두 구두로 치르기 때문에 우리처럼 외우느라고 정신이 없는 시험이 아니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우리도 그렇게 바꿀 수 없을까?
이래서 철학을 교과목에 넣어야 한다니까(어느 철학과 졸업생의 외침)
초등학교를 마친 아이들이 10-12세가 되면 우리의 중학생 시절로서 오전수업만을 한다고 한다. 나머지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는가? 우리 아이들 같으면 보나마나 학원 아니겠는가? 그들은 자율적인 공부와 활동을 위해서 사용한다고 했다.
그리고 13-17세까지의 고교 5년과정이 있다. 이 과정을 마치면 전공 학사를 인정하고 대학을 진학 할 사람과 직장으로 취업할 사람으로 나뉘어진다. 고교 과정이 대학을 진할 하는 사람에게는 일반교양이고, 취업할 사람들에게는 직업학교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일반교양과정을 마치고 대학에 진학하면 6년을 마치고 박사학위를 수여한다고 한다.
대학까지의 학비는 무료이다. 그래서 이탈리아 유학을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학비 대신 생활비가 말 그대로 장난이 아니다. 이탈리아의 대학들의 특징은 기숙사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생활비가 무척 들 수 밖에 없다. 유럽 통합이 되고 난후, 물가가 거의 2배 정도 오른 것 같다는 것이 가이드의 설명이었다.
이탈리아에서는 직장인의 임금 격차가 그렇게 많이 나지 않는다. 가장 많은 연봉을 받는 사람들이 은행장들인데 이들의 연봉이 연 58,000유로이고, 환경미화원이 연 38,000유로를 받는다고 했다. 약 8천만원과 5천만원인데 우리나라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취업을 해서 직장을 다니게 되면 곧 바로 연금을 위하여 세금을 낸다고 한다. 그런데 그 세금이 무려 수입의 40%에 달한다고 한다. 그래도 이탈리아 사람들이 데모를 하지 않는 것은 한 직장에서 30년을 근속하게 되면 마지막 그가 받는 봉급의 70%를 죽을때까지 받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노후의 생활이 완전히 보장된다는 점에서 장점을 갖고 있지만 또 일찍 은퇴하고 노는 사람들이 많은 것도 이탈리아의 고민이라고 한다.
하긴 18세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30년 48세가 되고 은퇴한다고 생각하면 아직은 경제활동을 할 나이가 아닌가 생각이 든다. 그래서 최근에 연금해당 년수를 5년 늘리는 일을 시도하고 있지만 반대에 부딪치고 있다고 한다.
벌써부터 연금을 받느니 받을 수 없느니 하는 우리나라도 이런 문제를 예측하고 연금제도를 보완하고 준비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탈리아는 모두 20개주, 95개시, 8,900개의 군으로 구성이 되어 있다. 내각첵임제를 하고 있으며, 대통령이 있기는 한데 대통령은 국회의 다수당 당수를 수상으로 지명하고, 국회해산권(내가 알기론 수상의 제청이 있을 경우)을 갖고 있을 뿐이라고 한다.
이탈리아는 지방의회가 활발하기 때문에 중앙정부의 불필요한 간섭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교육정책 만큼은 중앙정부가 국가의 통일성을 위해서 펼친다고 했다. 이탈리아는 상하 양원으로 구성되는 데 상원은 330명, 하원은 630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현재 수상은 실비오 베를루스코니(66세)로서 최대 민영방송인 ‘메디아세트’(텔레비전 채널 4,5,6번)를 소유하고 있으며, 프로 축구팀인 AC밀란의 구단주라고 했다.
92년에도 수상으로 재임했었지만 당시에 이탈리아를 휩쓸던 ‘마니풀리테’에 맞서다가 물러난 적이 있다고 했다. 당시‘마니풀리테(깨끗한 손)’ 운동을 이끌었던 사람은‘안토니오디피에트로’라는 검사로서 이탈리아 정치 개혁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안대희씨가 그런 일 좀 하려나? 글쎄....
아무튼 한번의 고배를 마셨지만 그는 다시 수상이 되었고, 정경유착이라는 곱지 않은 시선에도 불구하고 국가를 위해 열심히 자기 돈을 사용해 가면서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
이동하는 곳곳에 수상의 정치적인 업적을 선전하는 많은 광고판을 볼 수 있었다. 실업자를 얼마나 줄였는지, 일자리를 얼마나 많이 만들었는지, 그 모두가 그의 업적으로 광고되고 있었다. 최근에는 AC밀란 구단주 외에 모든 기업 경영에서 손을 뗏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많은 이야기 끝에 우리는 오래도록 버스를 타고 드디어 폼페이에 도착했습니다.
전형적인 관광지가 되어진 폼페이는 입구에서부터 늘어선 노점상들과 각종 식당의 호객행위(점심 먹으러 오라고)까지 왜 그렇게 우리나라를 닮아 있는지, 웬지 친숙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차에서 내려 표를 사고, 여기서도 현지 가이드가 있었다.
그리고 들어선 폼페이는 AD79년 화산 폭발로 완전히 매몰된 도시로서 우리는 2천년전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가는 것과 같다고 가이드는 설명했다. 2천년전 만들어진 도시는 어떤 모습일까? 물론 나는 폼페이가 극도로 쾌락과 향락을 추구했던 도시로서 알고 있었지 그 규모와 형태가 어떤 것이었는지는 자세히 알지 못했었다.
우리는 Porta Marina를 통하여 폼페이로 들어섰다. 내가 이곳을 돌면서 깨달은 한가지 단어에 a가 붙으면 어김없이 여성명사라는 것이다. 우리가 들어간 입구는 ‘바다의 문’이라는 뜻인데, 예전에는 배를 타고 항구에 내려 들어오는 입구였기에 이런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도시 내부로 들어가면서 우리는 저 아래 편에서 아직도 유적을 발굴하고 있는 현장을 볼 수 있었다. 폼페이 유적은 지금도 발굴되고 있다고 했다. 얼핏 보았는데 2천년전에 지어진 집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견고하고 반듯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는데 2천년전에 이미 그들은 인도와 차도(마차)를 구분하고 있었고, 길 바닥을 돌(4각으로 잘라낸)로 깔아 견고하게 만들었다.
도시의 광장에 들어가기 전에 가이드는 술집이라면서 선술집으로 쓰였던 곳을 보여주었다. 안에는 술을 담았던 큰 항아리가 보였고, 창문을 통해서 안에서 술을 잔에 담아 내어주면 밖에서 받아 마시고, 혹은 안에 들어가 의자에 앉아 마시는 그림이 그려졌다.
우리는 광장(foro)에서 가이드로부터 자세한 설명을 들었다. 많은 사람들 -그들 가운데는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 다른 나라에서 단체로 관광을 온 관광객이 있었다-이 찾아왔기 때문에 아주 복잡했다. 마치 당시의 번성했던 도시를 생각하게 하는 모습이었다.
광장은 시민들의 종교와 경제 생활의 중심지로서 역할을 했는데 2층의 원형 기둥이 있는 현관에 둘러싸인 4각형의 지역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폼페이는 방벽으로 둘러 싸여 있는 도시로서 중앙을 관통하는 스타비아나가도(via stabiana) 와 두개의 주요한 간선도로인 델라아본단자가도(via Dell"abbondanza)와 디놀라(via dinola)가도로 구성되어 있다. 이 세도로가 주도로가 되어서 좌우로 마치 세밀한 도시계획을 통해서 지어진 것처럼 도시가 자리잡고 있었다.
2천년전에 그들은 도로와 상하수도 시설을 생각하면서 도시를 설계했던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2천년전에 묻어 놓은 납으로 된 관을 볼 수 있었다. 가이드는 로마의 수도관은 납관을 사용했는데 아마도 로마 황제의 단명은 납중독이 아니었겠는가? 라는 상당히 설득력있는 설명을 덧붙였다.
우리나라 공무원들 꼭 폼페이에 가야한다고 생각했다. 본다고 다 배우는 건 아니지만, 어떻게 된게 10년도 못 내다보고 도시를 만들어대니 참...씁쓸했다.
우리는 아폴로 신전이 있는 곳과 베수비오 화산을 더 멀리에 두고 제사를 드렸다는 지오베(Di Giove)신전을 보면서 사진을 촬영했다. 이 신전은 로마의 3대신인 쥬피터,주노,미네르바에게 제사를 드려서 화산의 진노로부터 보호해달라는 제사를 드렸다고 한다.
거봐! 하나님께 예배했으면 혹시 니느웨처럼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왜 엉뚱한 신을 섬겨서...이런 생각을 할때마다 내가 목사라는 생각을 확인하게 된다.
우리는 바실리카로 들어가서 아직도 남아 있는 전면의 벽과 원주로 된 기둥들을 살펴보았다. 이 기둥은 처음에는 대리석 기둥으로 보였지만 가만히 살펴보니 안에는 벽돌로 되어 있고 밖으로는 대리석을 갈아(녹여?) 붙여서 대리석 기둥으로 보인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벽들도 벽돌로 세워져 있었다. 2천년전에 이미 폼페이인들은 미적 감각을 소중하게 여기는 인테리어에 탁월했던 것이다. 이 바실리카는 건축학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자료라고 가이드는 설명했다. 몇가지 양식이 복합되어 있다고 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도리아 식이라고 했다.
그리고 우리가 찾아간 곳은 반원형 극장은 Teatro grande였다. 이곳도 한쪽은 보수공사 중이어서 내려가지 못하고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고 말았다. 객석이 제법 많았는데 아래서 말을 하면 윗 좌석까지 빠짐없이 소리가 들리도록 설계를 했다고 했다.
그리고 가이드는 완전한 원형경기장이 더 아래쪽에 있다고 말했지만 시간 관계상 우리는 그곳에 가지 못했다.
그리고 길거리를 다니면서 여러 장소를 소개하기 시작했다. 가이드를 쫓아다니고, 글을 받아 적고 제법 바빠지기 시작했다. 도로에는 마차의 질주를 막기 위해서 중간 중간 마차 바퀴가 빠져나갈 수 있는 공간을 남겨두고 작은 기둥을 세워 두었다. 여기서도 과속은 금물이었던 것이다. 길가 중간마다 물을 마실 수 있는 샘도 볼 수 있었다.
우리는 이 도시 안에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많은 시설들이 있었다는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상점, 약국, 빵집, 극장, 신전, 체육훈련장, 욕장(목욕탕), 시의회...
거의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잇는 세상에 필요한 것들은 다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길가에서 보이는 집들의 구조는 대문안으로 정원과 주택이 자리하고 있는 모습이었고, 어떤 집은 아주 큰 대문과 정원을 보유한 저택이기도 했다. casa Del Faumo의 집은 2개의 아트리움(중앙홀)과 4개의 트리클리니아(식당)을 갖고 있고, 둥근기둥으로 둘러싸인 큰 안뜰을 갖고 있었다. 뭐하는 사람인지 듣지 못한게 아쉽네...
그리고 우리는 베티의 집이라는 당시 최고의 상인의 집을 찾아갔다. 중간에 빵집을 지나쳤는데 당시에 이미 방앗간과 반죽기계 그리고 오븐이 있었다고 했다.
실제로 발굴된 유적 가운데는 빵이 들어있는 오븐도 있다고 했다. 2천년전에...참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들른 곳은 말하자면 사창가였다. 왜 이건 오늘날에도 없어지지 않는 건지.
2층으로 된 건물의 1층에는 작은 방들이 있었다. 한가지 특징은 방이 생각보다 작았다는 것이다. 폼페이 사람들은 결코 체구가 큰 사람들이 아니었다. 각 방마다 벽에는 남녀간의 성행위를 묘사한 체위가 그려져 있었는데 자기가 원하는 체위를 찾아갔다고 한다.
정말 기가막히네 그려! 그 그림보다 훨씬 야한 그림들이 있는 곳도 있다고 했다.
가이드는 우리가 목회자들이기 때문에 시험에 들지 않도록 덜 야한 곳으로 인도한 것 같다. 나중에 오면 거기 가 봐야지^^*
그리고 우리가 찾아간 casa Dei Vetti의 집은 보수공사에 들어갔는데 공사가 무려 10년이 걸린다고 했다. 더구나 그 집 앞에는 한그룹이 모여 설명을 듣고 있어서 우리는 집을 찾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돌아섰다. 왜 베티의 집이 유명한지 가이드는 그가 상술에 아주 뛰어난 재능이 있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항구에서 상인이 들어오면 자기 집으로 초대하면서 현관에 들어서자 마자 맞은 편에 남성의 성기 그림과 금은보화 그림을 두고 상인의 눈이 어디로 가는가에 따라서 대접을 달리했다고 한다.
그의 집은 분수와 청동 대리석 조각들로 만들어진 아름다운 정원과 훌륭한 그림들, 우아한 가구들로 가득한 부유한 상인의 생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이곳을 둘러보면서 나는 이탈리아 말을 몇가지 더 배웠다. casa는 집이고, via는 길, 남성명사는 o로 끝난다는 것, 그리고 오후인사가‘보나세라’라는 것도 배웠다.
그리고 유적지를 빠져 나오면서 당시의 큰 술집(오늘날의 )목욕탕으로 쓰여진 건물과 당시의 발굴된 유적을 모아놓은 창고 같은 곳을 지나왔다. 화산재로 뒤덮여 있는 석고상 같은 모습들을 볼 수 있었다. 인구2만 정도(유동인구까지 5만정도) 되었다는 이 도시는 79년 8월 베수비오 화산의 대폭발로 2-3센티 정도의 화산재로 뒤덮였고 그대로 굳고 말았다고 한다. 베수비오 화산은 높이가 1,218미터인 산으로서 이탈리아 유일의 아니 유럽 유일의 활화산이라고 한다. 산정상에는 지름 500미터, 깊이 250미터의 화구가 있다고 한다. 1631년에도 폭발하여 8천여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가장 최근에는 1979년에도 화산의 폭발이 있었다고 한다. 가이드는 산위에 있는 화산관측소에서는 곧 이 화산이 다시 폭발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고 가이드는 소개해 주었다.
발굴된 유적 가운데는 반쯤 구워진 빵, 어머니들은 숨이 막히기 전에 힘껏 아기를 끌어안고 있는 모습으로, 어떤 이는 금붙이를 손에 움켜쥐고 있는 모습으로, 그리고 어떤 곳에서는 장례식을 치루고 있는 문상객들이 빙 둘러앉은 모습 그대로, 누워서 잠이 든 채로, 피해서 급히 일어서는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마치 그들은 그날(최후의 날이)이 영원히 오지 않을 것처럼 살았을 것이다. 오직 그들이 누리고 있는 부와 향락에 빠져서 말이다. 그런데 그날은 도적과도 같이 오고 말았다. 언젠가 우리도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 서지 않겠는가? 나는 화산재에 덮여 죽어 있는 사람들, 짐승들(개,고양이로 보이는 작은 짐승의 모양도 있었다.)을 보면서 나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죽음을 맞을 것인가? 고민해 보았다.
“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계16:15)
현지 가이드와 헤어진 뒤 우리는 발걸음을 재촉해서 입구를 향해 나아가 기념촬영을 했다. 그리고 가이드는 우리를 식당으로 인도했고, 스파게티와 오징어, 새우 튀김, 야채 그리고 아이스크림으로 이어진 점심을 먹었다. 종류를 늘어놓으니 굉장히 많이 먹은 것 같지만 이것이 한끼 식사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식사 후에 입구에 있는 노점에서 사진을 구입했는데 알고보니 바가지를 쓰고 말았다.
2유로면 될 것을 4유로를 준 것이다. ‘아 속쓰려!’ 여러분! 이탈리아에 가면 관광지에서는 물건 값을 50%를 깍으십시요. 우리는 다시 버스에 올라 소렌토로 이동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