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조석문(曹錫文)이 졸(卒)하니, 조회(朝會)를 철폐하고 부의(賻儀)를 내리고, 조제(弔祭)와 예장(禮葬)하기를 예(例)와 같이 하였다. 조석문의 자(字)는 순보(順甫)이고, 창녕(昌寧) 사람인데, 관찰사(觀察使) 조항(曹沆)의 아들이었다. 어려서 힘써 배워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선덕(宣德) 갑인년에 세종(世宗)이 성균관에 거동하여 선비를 책문(策問)하는 데 뽑히어 제2등이 되고, 세자 좌정자(世子左正字)에 제수되었다. 집현전 부수찬(集賢殿副修撰)과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이조(吏曹)ㆍ형조(刑曹)ㆍ예조(禮曹)의 정랑(正郞)을 역임하고, 얼마 안되어 어머니가 늙어서 사직하고 장단(長湍)에서 살았다. 조정에서 그 재주를 아끼어 기복(起復)시켜 안산 군사(安山郡事)를 삼으니, 치적이 한 도(道)에서 가장 우수하였다. 세조(世祖)가 이것을 듣고 홍주목(洪州牧)에 보냈으며, 특별히 명하여 옮겨서 제수할 때에, 제도(諸道)의 감사(監司)에게, ‘특이하게 정사를 한 자를 천거하라.’고 명하니, 감사가, ‘조석문이 공정(公正)하고 염간(廉簡)하여, 관리가 두려워하고 백성이 사모하여 따른다.’고 천거하니, 특별히 상호군(上護軍) 지형조사(知刑曹事)로 올렸으며, 얼마 후에 탁용되어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었다. 세조(世祖)가 즉위하자, 훈공(勳功)을 기록하고 추충 좌익 공신(推忠佐翼功臣)의 호(號)을 내리고, 벼슬을 옮기어 도승지(都承旨)에 이르렀다. 천순(天順) 기묘년에, 〈중국〉 황제(皇帝)가 우리 나라에서 사사로이 야인(野人)에게 벼슬을 준다고 하여 사신을 보내어서 책유(責諭)하니, 세조(世祖)가 사신으로 갈 만한 자를 뽑을 때, 조석문에게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제수하고 창녕군(昌寧君)을 봉하여 주문사(奏聞使)로 세워, 사신을 따라가서 회주(回奏)하게 하고, 돌아와서는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제수하였는데, 곧 승급하여 판서(判書)가 되었다. 병술년에 의정부 우찬성 겸 판호조(議政府右贊成兼判戶曹)를 제수하고 서대(犀帶)를 하사하였으며, 또 부진헌(浮塵軒)의 소전(小篆)을 주어서 총애함을 보였다. 정해년에 길주(吉州) 사람 이시애(李施愛)가 모반하니, 세조(世祖)가 명하여 귀성군(龜城君) 준(浚)을 병마 도총사(兵馬都摠使)로 삼고, 조석문을 부사(副使)로 삼아, 제도(諸道)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게 하니, 모든 군사가 진군하여 홍원(洪原)에 머물고, 조석문은 정졸(精卒)을 뽑아서 스스로 지키며 함흥(咸興)에 머물러 발병하지 않고, 하나도 지휘함이 없었다. 군관(軍官) 남이(南怡) 등이 분연히 이르기를,
“조정에서 장사(壯士)를 기른 것은 바로 오늘을 위함인데, 여기에 머물러서 무엇을 하겠는가? 우리가 먼저 나아갈 것을 청한다.”
하여, 조석문이 부득이하여 보냈고, 진북 장군(鎭北將軍) 강순(康純)이 무리에게 이르기를,
“도총사(都摠使)는 나이가 어리고, 부총사(副摠使)도 또한 선비로서 전진(戰陣)을 익히지 않아, 두려워하고 겁만 먹으니, 이와 같이 하고서야 어찌 대사를 이루겠는가? 우리들 제장(諸將)이 다른 주장(主將)을 계청(啓請)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혹은 말하기를,
“전진(戰陣)에 임하여 장수를 바꾸는 것은 병가(兵家)에서 꺼리는 것이니, 어찌 그렇게 할 수 있는가?”
하였다. 돌아올 때 미쳐서는 승진하여 좌의정(左議政)을 배수하고 정충 출기 포의 적개 공신(精忠出氣布義敵愾功臣)의 호를 주었다. 당시에 군공(軍功)의 높고 낮은 것이 모두 조석문에게서 나왔으므로, 장사(將士)들이 그 불공평함을 분히 여기고 상서(上書)하여 진소(陳訴)하는 자가 매우 많았었는데, 세조(世祖)께서는 조석문이 새로 큰 공을 세웠다 하여 모두 묻지 않았다. 군관(軍官) 박식(朴埴)은 조석문의 족속(族屬)으로서 병을 칭탁하고 함흥(咸興)에 누워 있었는데, 마침내 공신의 반열에 참여하였으므로, 어떤 사람이 시(詩)를 지어 조롱하기를,
“함양(咸陽)의 꽃 아래에서 잠에 취하였던 손이, 조패(曹霸)가 단청(丹靑)하여 제1등 공신이 되었네[咸陽花下醉眠客 曹霸丹靑第一功].”
하였다. 얼마 뒤에 영의정(領議政)에 오르고, 예종(睿宗)이 즉위하자, 남이(南怡)가 모역하여 복주(伏誅)되고, 정난 익대 공신(定難翼戴功臣)의 호(號)를 내리고, 성종(成宗)이 즉위함에 미쳐서 순성 명량 경제 홍화 좌리 공신(純誠明亮經濟弘化佐理功臣)의 호를 주었다. 병신년 여름에 다시 좌의정(左議政)을 배수하고, 가을에 병으로 사면하니, 창녕 부원군(昌寧府院君)을 봉하였으며, 정유년 봄에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옮겼다가,
이때에 이르러 졸(卒)하니, 나이는 65세이다. 시호(諡號)가 충간(忠簡)이니, 몸이 위태로우면서 임금을 받든 것을 ‘충(忠)’이라 하고, 평이(平易)하고 게으르지 않은 것을 ‘간(簡)’이라 하였다. 조석문은 성품이 자세히 살피고 재물을 잘 다스리었으므로, 세조께서 호조(戶曹)의 일을 위임하니, 모든 세금을 받는 이로움과 저축[畜積]의 귀(貴)한 것은 그가 건의[建白]한 것이 많았다. 세조가 일찍이 조석문에게 이르기를,
“호조(戶曹)의 계차(啓箚)는 다만 경의 이름만 있으면 내가 다시 살펴보지 않겠다.”
하였다. 조석문의 어머니가 늙어서, 특별히 잔치를 그 집에 내리고, 종친(宗親)과 대신(大臣)에게 명하여 잔치에 참여하게 하여서 영화롭게 하였으나, 조석문은 아첨하여 남의 마음에 들도록 잘 하고, 임금의 뜻을 잘 맞추어서, 사람들이 이를 기롱하였다.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조석문은 천성이 사특(邪慝)하여 말솜씨로써 발라맞추고, 항상 자제들에게 가르치기를, ‘남아(男兒)가 임금의 뜻을 얻어 높은 지위를 취하려면 꾀가 없어서는 안된다.’고 하고, 항상 집 뒤에 단(壇)을 쌓고 하늘에 절하면서 수복(壽福)을 빌었으니, 그 요사[妖惑]함이 이와 같았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