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차용
창밖을 보는 기쁨으로 5월의 아침을 맞는다. 옥색저고리를 떨쳐입은 금오산이 한가득 내 작은 창문을 넘어 들어와 내 가슴에 얼굴을 비빈다. 풋풋하고 싱그럽다. 소소한 바람은 물로 씻어낸 듯 깨끗하고 짝을 찾는 비둘기의 울음소리가 오늘따라 더 애절하다. 나도 모르게 코허리가 시큰하다. 나에게 주말부부로 사는 것이 새삼스러울 것도 아닌데, 집에 가는 주말 아침이기에 더 감상적이 되는 것일까? 육십 대의 사추기 인생에겐 도무지 걸맞지 않는 설렘조차 오늘 아침은 밉지 않다.
한동안 뜸하다가 다시 추말부부로 살기 시작한 지도 벌써 6년. 이제 오히려 떨어져 사는 것이 좋을 만큼 혼자 사는 것에 익숙하다. 음식부터 빨래까지 모두 내가 해결하니 아내는 늘그막에 자유를 만끽하고 산다. 나와 같이 주말부부로 사는 40대 후반의 직원이 처음엔 주말이 되면 설레고 주말에 자신을 맞는 아내 또한 무척 기뻐했는데 이제는 격주, 아니 격월로 와도 괜찮다고 말해서 주말이 전혀 기다려지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약간 서운한 감정을 내보여 마주보고 웃은 적이 있다. 요즈음 여자들에게 최고 좋은 남편은 영식이(집에서 한 끼도 안 먹는 남편)이고, 삼식이(집에서 세끼를 다 먹는 남편)는 죽일 놈이라니. 세상이 변해도 참 많이 변했다.
오늘 아침은 자연이 주는 인상이 너무 강렬하여 가슴에 파문 같은 감상이 인다. 뒤돌아보면 참으로 우여곡절이 많은 삶이었다. 노동운동을 했다는 죄 아닌 죄로 자주 좌천되었다. 자의반 타의반 직장을 자주 옮겨 15년 직장생활에 13번 직장을 옮겼고, 그 만큼 혼자 사는 때가 많았다. 국가가 인정하는 1급 기술자격을 4개씩 소유했고 성실한 엔지니어였는데 노조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영업부로 좌천되어 신혼초기에도 별거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노동운동 전력은 노예문서처럼 나를 따라다녔다. 직장생활을 접고 자영업을 하기 전까지 우리 부부는 계속해서 2년 이상을 함께 살지 못하고 주말부부를 전전했다.
세상이 너무 야박했다. 나는 세상을 놀라게 했던 YH사건이나 원풍모방사건처럼 거창한 노동운동을 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가진 자의 옹졸한 가슴은 나에게 그렇게 추상같은 유배형을 선고해놓고 거드름을 피웠다. 생각할수록 가증스럽고 불쌍한 사람들이다. 나의 어떤 행동이 그들을 그렇게 두렵게 했는지는 지금도 모른다. 몇 백억, 몇 천억의 큰 회사를 경영하는 사람이 한 젊은이의 사심 없는 저항, 노동자의 권익을 위한 작은 주장, 사람답게 살기 위한 지극히 작은 꿈과 이를 위한 발걸음을 두려워할 만큼 새가슴이라면 그 기업의 장래와 우리나라의 미래가 암담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기에 나는 더 투쟁적이었다.
불행한 일이지만 나의 기우가 적중했다. 나를 무참히 내친 그 당시에는 장래가 촉망되던 기업이 20여년이 지난 지금 형편없이 몰락해 겨우 연명하고 있을 만큼 규모가 축소되고, 언제 부도가 날지 모를 만큼 생명이 위태위태하다. “ 아니오.”라고 말하는 사람을 멀리하고 주위에 “예스맨”만 있으면 그 기업은 결국 망하게 된다. 나라의 살림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의 경제적 상황도 그와 별로 다르지 않다. 2007년 299조원이던 국가부채가 2012년 현재 432조원으로 늘었다. 이를 발생주의 회계기준에 따라 연금충당부채를 합하면 774조원에 이르고, 이에 지방정부부채와 공공부채를 합하면 1254조원이 된다. 4대강에 예산을 쏟아 붓고 부자감세로 세수가 줄어들었기 때문에 부채가 급격히 증가했다. 2009년 4대강 예산이 8,000억 원이었는데, 2010년엔 8조 2,000억, 2011년엔 9조 3,000억으로 3년 만에 10배 증가했다. 이에 반해 일자리 창출에 투입된 예산은 2009년에 4조 7,000억에서 2012년에 2조 5,000억으로 3년 만에 반감되었다. MB정부 4년 동안 15대 재벌의 계열사가 472개에서 788개로 증가했다. 그러므로 가계부채가 계속 증가하여 900조를 넘어섰으며 가처분 소득대비 가계부채 비율이 2011년 3분기 154.9%로 포르투갈, 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보다 높고, 2007년 미국의 금융위기 전보다 9.1%나 높아 OECD의 경고를 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SSM을 증가 배치해 골목 상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동네 빵집까지 먹어치우는 재벌기업의 파렴치한 욕심 때문에 극심한 청년실업과 자영업의 붕괴로 새로운 형태의 계급투쟁으로 내몰릴 개연성이 충분하다.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가속화되고 상위 1%만을 위한 정책이 계속된다면 유럽에서 불기 시작한 청년층의 폭동이 우리나라에도 옮겨 붙지 말라는 법이 없어 걱정이 된다.
영업부 대구지사로 발령을 받던 날, 나는 그냥 맨 정신으로 들어갈 수 없어 선술집에서 무진장 소주를 마시고 만취한 상태로 돌아와 “또 유배 되었어”라고 말하며 아내의 안색을 살폈다. 아내는 하도 여러 번 당한 일이라 그런지, 놀라는 기색이 전혀 없이 약간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아내에게 미안하고 그들이 한없이 미웠다. 수없이 도리질을 하지만 내 가슴속은 불안과 배신감에서 오는 형언하기 어려운 어떤 좌절감과 무서운 복수심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부자가 천국에 가기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기보다 어렵다고 선포한 예수님의 심정도 지금의 나와 같지 않았을까? 가진 자의 오만에 가까운 언행이 심히 불쾌하고 몹시 고까웠다.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을 다하고 그에 합당한 보상을 받고 싶었을 뿐인데 내 뜻을 헤아릴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나를 짓밟으려고만 하는 사람들이 가증스러웠다. 또 하나의 노동귀족을 노리는 파행적 노동운동가로 매도하는 사장이 몹시 야속했다. 나는 이런저런 생각으로 그날 밤을 꼬박 밝혔다.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것을 내려놓고 평상심을 되찾아 본래의 나로 돌아왔다. 예전처럼 책을 읽고, 쓰고, 생각했다. 맺힌 곳을 하나하나 곱씹어 보며 스스로 마음을 달랬다. 교회도 열심히 나가고, 감사의 생활도 더 정성껏 했다. 얄팍한 월급봉투를 내밀면서도 기죽지 않았다. “이번 달에도 시간을 차용 해야겠어”라고 말하며 아내에게 홀쭉해진 월급봉투를 내밀었다. 영업부로 전보되어 생산부에서 받던 각종 기술자격수당이 모두 빠진 월급봉투는 마를 대로 말라서 건네주는 즉시 텅 비었다. 깎인 만큼 부족한 금액을 외상으로 생활하다보니 시간이 흐를수록 부족한 금액이 누적되어 월급을 받는 날부터 또다시 외상을 하기 시작할 수밖에 없었으니 아내의 고생도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시간차용, 시간보다 앞서가는 삶, 내용은 몹시 슬프지만 언어 자체로는 번득이는 해학이 담긴 멋진 표현이다. 다음 달 월급을 가불해서 사는 셈이니 미래의 시간을 차용해서 사는 것이 된다. 그렇잖아도 풍족하지 못한 월급인데 거기에 나의 교통비와 하숙비가 추가되니 가계는 늘 적자일 수밖에 없었다. 매월 상당한 금액을 차용해야 했다. 이런 금전적 차용이나 가불을 아내는 시간차용이라고 표현했다. 6월 월급으로 6월을 사는 것이 아니라 7월 월급을 미리 가불하여 혹은 외상으로 살다가 7월 월급날에 모두 상환하니 6월을 살고 있지만 실제로는 7월의 몫을 사는 셈이니 시간차용이고 시간보다 앞서가는 삶이었다.
나는 시간차용이라는 말에서 비단 금전 차용의 의미만을 생각하지는 않았다. 가진 자에게 빌붙어 그들의 악행을 모른 체하거나 스스로 악을 행하며 사는 것보다, 항상 부족하여 전전긍긍하고 어렵게 삶을 지탱하지만 선하게, 떳떳하게 사는 것은 분명히 시간보다 앞서가는 삶이고 내일을 사는 삶이다. 괴롭고 구차한 삶만이 아닌 철학적 사유가 담긴 삶일 수 있다. 현세에 연연한 삶이 아니라 어쩌면 내일을 꿈꾸며 사는 삶, 이 땅에 주님의 나라를 이루는 삶이기에 진정으로 진보적인 삶이고 소망적인 삶이라고 자위하기도 했다.
천국이란 사후에 이르는 피안이 아니다. 하느님이 내려주는 은혜도 아니다. 우리들 스스로가 이루는 평화이다. 나는 그렇게 나를 비우면서 평화를 이루려 했다. 악에 타협하는 것을 거부하고, 차라리 시간을 차용했다.
바람을 타고 오는 아카시아 향기가 아주 쇄락하다. 오늘 아침은 유달리 몸이 가볍다. 어렵게 딸아이의 교육을 다 마치고 이제 공무원과 교사로 모두 떳떳한 직장인이 되어 청년실업 100만을 상회하는 이태백의 시대에 딸아이들은 나에게 십일조를 바치니 나는 이제 걱정이 없다. 설사 내가 백수라도 문제가 없을 텐데, 환갑 진갑 다 넘기고도 아직 직장생활을 하고 있으니 더욱 두려움이 없다. 풍족하지는 않지만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니 습작을 계속하고 정진하여, 시인, 소설가, 수필가로 등단하며 평생 소원하던 작가의 꿈도 이루었다. 이제는 천년을 두고 남을 좋은 작품 하나 점지해 주십사 하느님께 기도할 뿐이다.
첫댓글 시간 차용을 하시면서도 스스로의 평화를 간직하시는 열정이 있으니 좋은 작품은 쓰시리라 생각합니다. 건필을 빕니다.
고맙습니다. 늘 평화 누리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