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1:16~34)
17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사람 낚는 어부!
요즘 전도의 개념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한다.
타자의 생각과 마음을 배려하는 전도.
친절하고 타자의 선택권을 존중하는 전도.
말로서가 아니라 행동과 실천으로 감동을 전하는 과정을 중시하는 전도.
타자의 선택권을 존중한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을 거부해도 어쩔 수 없다는 체념의 발로가 아니라
각자의 선택권이 각자에게 있다는 거부할 수 없는 사실을
직시하자는 것이다.
직시함으로써 우리의 전도 전략과 스탠스를 제대로 바꾸자는 것이다.
타자를 위해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들이
나에게는 영어 단어로 잘 숙지된다.
urge, facilitate, inspire, support, encourage 등.
사실 엄청난 일들이다. 타자를 돕고, 고무시키며,
영감을 불어넣어주고, 격려 또는 배려하는 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으로 내가 원하는 것을 주입시키듯
억지로 끼어 넣을 수는 없다.
그러니, 억지로 끼어 넣듯이 강압하고 화를 내며
받아들이지 않으면 부정적 감정을 드러내는 방법은 옳지 않다.
더욱이 폭력적인 언사는 행동으로는 더더욱 안 된다.
(하나님이 진리라는 당위성만 고려해서,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는 것이나
사찰을 무단 침입하여 둘레를 도는 행위 등)
그러한 방법들은 urge, facilitate, inspire, support, encourage를 통해
타자 자신의 마음에 격랑을 일으켜
스스로 선택권을 하나님께로 가져가는 일과는 거의 반대편에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거부감의 소용돌이를 만들어 더욱 하나님 진리에 대항한
견고한 방어막을 구축하게 할 가능성이 높다.
만약 그것을 야기시키는 일을 우리가 하였다면
복음 전파의 상을 받을 일이 아니라
복음 방해의 벌을 받을 일이 아닌가?
모든 일은 역사적 배경과 현재의 상황과 결부해서 결정해야 하는 것은 마땅하다.
그래서 전쟁 직후,
가장 원초적인 생리적 욕구 단계에 처해 있는 한국민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 거처할 곳 등
생존에 관계된 것을 제공하면
폭력이든 독재이든, 인격이든, 뭐든... 상관 없던 시절에
강압하고 다소 거칠며 인격과 설득을 고려하지 않아도 되던 시절에
사용하던 방법이 현실적에서 유효했다.
그러나 지금은 결코 그렇지 않다.
사람의 기준이 높아지고 알량해져서가 아니라
그 시절이 비정상이고 지금이 정상에 가까워지는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상식적이고 정상적인 방법으로 복음을 사람들에게 접근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람 낚는 어부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말하는 것이 당위성이라면
이제 사람의 본질과, 지금 사람의 상태를 고려, 배려하는 어부의 행동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당위성을 가졌다면 방법에 있어서도 타자를 배려하는 행동이 바로 사랑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당위성만을 앞장 세우면서 수 많은 사람을 살해한 사건이 수도 없이 많다.
당위성과 타자를 배려한 방법이 균형적이어야 비로소
하나님의 뜻에 가까워진다고 나는 생각한다.
사람 낚는 어부!!!